여호와를 알자
호 6:1-6
호세아서 전체가 그러하듯이 본문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회복을 촉구하는 내용을 반복하여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회복은 경제적인 회복이나 건강의 회복 이상으로 시급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호세아서 6장 6절 말씀은 예수님께서도 두 번(마9:13, 12:7)이나 반복하여 인용하실 정도로 구약 성경의 말씀 중에서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9장 9절 이하에 보면, 한 번은 예수께서 지나가시던 길에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하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마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예수를 따르기 시작하였고, 예수는 마태의 집에 가셔서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의 곁에 찾아 와서 예수와 제자들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시비조로 말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듣도록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It is not the healthy who need a doctor, but the sick.)(마9:12)
이 말씀에 이어서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 호세아서 6장 6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여기 ‘긍휼’(矜恤)이란 말씀을 마태복음 12장 7절에서는 ‘자비’(慈悲)라고 하셨고 호세아서의 본문에서는 ‘인애’(仁愛)라고 하셨다.
그 히브리어는 'dseje''’(hesed)라고 해서 ‘인애, 긍휼, 자비, 동정, 관용, 충성, 헌신’ 등의 여러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마음 상태를 일컫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6장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서 돌아가자’ 라든지 혹은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말씀은 모두가 다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랑, 이웃과의 사랑을 회복한 삶을 살아가자는 촉구의 말씀을 반복하여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태어난 삼남매의 이름을 통해서도 이스라엘의 장래를 경고하는 심판의 내용을 담게 하셨습니다.
큰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이 흩으신다’는 뜻의 ‘이스르엘’이라고 지었고, 둘째로 딸을 낳았는데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내용의 ‘로루하마’라고 지었으며, 셋째로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로암미’라고 지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런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과 남 왕국 유다의 백성들을 향해서 계속하여 회개를 촉구하신 말씀 중의 일부가 본문입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앞장서서 백성들에게 촉구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첫째 ; 하나님을 잃어버린 백성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4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 사랑하며 섬기며 경배하며 살기를 원하시건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사랑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버렸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disappear'즉 사라져 버렸다는 말이다. 그 상태를 아시는 이스라엘에게 장가드신 하나님이 안타깝게 아내와 같이 대하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으로 읽어 보면 “그러나 에브라임아,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너희 사랑은 아침 안개 같구나.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 같구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에브라임과 유다 즉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과 남 왕국유다 백성들 모두의 실상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식어 버린 지 오래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며 살아보시려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과 남 유다의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부터 아침 안개나 이슬이 아침 햇볕을 받아서 사라지듯이 사라졌다는 안타까운 호소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사랑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호 2:19,20)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장가든다는 우리 식 표현을 원어나 영어 성경으로 보면, ‘betroth’ 즉 ‘약혼한 사이’라는 말씀입니다.
신랑이신 하나님의 결혼 선물은 ‘공의, 정의, 은총, 긍휼’과 같은 품목들입니다. 신부를 향한 신랑의 이와 같은 결혼 선물은 신부의 손가락과 손목과 목과 귀에 끼어 주고 걸어 주는 다이아몬드와 금은 패물과 진주와 각종 화려하고 값진 보석들보다 천배 만 배 소중한 결혼 선물입니다.
그런데 신부된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이 저들에게 약혼하고 저들에게 장가든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버리고 떠난 것입니다. 신부가 신랑의 사랑을 배반하고 떠났단 것입니다.
둘째 : 하나님의 심판과 사랑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5절)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참고 또 참다못하신 남편 하나님이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심판의 말씀이 바로 이구절입니다.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통하고 저들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치시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입의 말씀으로 저들을 죽이셨으나 저들 이스라엘 남북 왕조의 백성들이 받아들이지를 않았단 말씀입니다.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는 말씀은 아침에 떠오르는 해의 빛을 가릴 수 있는 어둠의 힘이 불가능한 것처럼 하나님이 책망과 심판을 시작하시면 막을 수 없는 빛이 급하게 천지를 덮듯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심판을 ‘빛’으로 비유하셨는가 하면 심판의 빛 앞에서 숨길 수 있는 어둠의 악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과 여전히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 누구도 못 말리는 사랑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악 되고 그렇게 못되고 그렇게 타락한 인간을 아주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친히 달려 죽으시기 까지 사랑하시는 그 십자가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날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한 몸에 다 짊어지신 고난의 십자가요 용서의 십자가요 죄 사함의 십자가요 부활의 십자가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극치는 무엇입니까? 사랑에 대한 이런 저런 설명이 많지만 사랑에 대한 가장 큰 설명은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나의 귀하고 값진 것을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주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고 하였다.
사울 임금의 아들 요나단은 자기의 아버지 왕이 그렇게 미워하고 죽여 없애려고 하는 다윗을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고 아끼고 위해 주었습니까?
그러므로 사랑에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우리의 하나님 사랑을 회복하기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오리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1절),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3절)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찢으시던 하나님이 왜 우리를 도로 낫게 하시겠다고 하시며, 우리를 치시던 하나님이 왜 우리를 다시 싸매어 주시겠다고 하시냐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2절)
‘이틀 날에’ 혹은 ‘셋째 날에’라는 말씀은 바벨론 포로 생활의 고난의 때가 끝날 것을 ‘이틀’이라 했고, ‘셋째 날에’는 장차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 지낸바 되었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말씀으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는 말씀은 우상 숭배로 버림 받고 앗수르의 심판과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겪고 다시 해방되고 약속에 땅에 돌아오는 회복도 크지만 주를 믿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장차 영원한 부활과 영생의 주인공으로 영생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말씀은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가자는 촉구의 선언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말씀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제대로 체험하여 깨닫고 알고 믿고 따르며 섬기자는 강력한 초청이며 권면입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이며, 진리의 발견,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이처럼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아는 ‘knowing about God’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몸소 체험하여 아는 ‘knowing God’의 경험에 바탕을 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삼년 동안이나 부르셔서 제자 삼으시고 함께 지내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 대하여 혹은 하나님께 대하여 그 관계가 분명하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하루는 제자 중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제자 빌립에게 하나님을 더 잘 알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14:9-10)
그리고 이어서 해 주신 말씀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14:11)
그러면 예수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사랑의 하나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