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초인 발달장애인 성악공연단인 미라클보이스앙상블단원들의 공연현장 (사진: 앙상블공연단)
미라클보이스앙상블 공연단의 공연모습. (사진: 미라클공연단) 윤혁진교수와 함께 미라클보이스앙상블 공연단체의 산파역할을 한 정연재단장의 어머니 이은형씨.(사진:대한사회복지신문) 기적의 씨앗은 긍정이라는 올곧은 신념으로 기적을 이룬 이은형씨.(사진: 대한사회복지신문) 열창중인 정연재단장(오른쪽) 사진: 앙상블공연단 행복한 표정의 짓는 이은형실장 (사진: 대한사회복지신문)
우공이산(愚公移山)을 이룩한 “미라클보이스앙상블” *9명의 발달장애인이 사건을 만들다. *국내는 물론, 세계최초의 발달장애인 성악공연단. *금년10월 31일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서다.
사각테( 그린칼러)를 둘러야.
“같은 또래에 비하여 신체적, 또는, 정신적인 발달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 이는,발달장애인의 사전적 의미이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행정용어를 겸한 보통명사로 간단히 가름 된다. 용어 그대로, 지적, 신체적 발달이 더딘 자녀를 둔 부모나 그 가정내의 숨은 사연들은 오롯이 그들만의 절대몫으로 남겨두거나 짐을 지운채로, 세상 사람들은 각자의 주어진 삶에만 혼신을 다하며 여념없이 살아가고 있다. 여기까지가 비장애인들이 갖는 일반적인 관념이다. 장애인, 비장애인을 차치하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써의 의무감을 기대하는 일은 어불성설이며 이들에게 있어서 오히려 반칙이다. 이는,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의 장애인을 대하는 엄연한 현실이다. 물론, 이에 대한 나름의 발달장애인 지원법이 엄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발달장애인 권리 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2014년에 제정되었고 이듬해인 2015년에 시행되었다. 한 걸음 다가가 보면, 장애 당사자 생애주기를 고려한 복지 욕구에 적합한 지원과 권리 옹호를 위한 보호법들이 체계적으로 촘촘하게 제정되어 있긴 하다. 다소 원론적이긴 하지만, 그나마 선진국 대열에 다가가려는 정부의 노력 흔적은 엿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원법이 발달장애 아동을 가진 부모와 가족 구성원들이 겪어 내야 하는 처절한 애환들을 어루만지기에는 질량을 따져서 턱없이 부족한 제도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여, 앞서 적시된, 지원법 운용이나 시행은 국가가 맡아서 할 몫이다. 하지만,나머지 모든 상황들은 부모와 가족 구성원들의 중한 책무인 것이다. 그 가운데 부모의 역할이야말로, 신의 경지에 다다를 만큼 절대적이어야 하며 헌, 혼신을 요구한다고 하겠다. 일반인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의 고통과 눈물을 동반자 삼아야 할 만큼 괴롭고, 절망스럽고, 고독한 시간들을, 희망과 즐거움으로 치환시켜야 하는 내공 깊은 철학자가 되어야 했고. 가끔씩은 성직을 수행하는 자세로 살아야만 했다는 말이다. 이쯤에서,“미라클보이스앙상블”이라는 발달장애인 초유의 남,여,또는,여,남 혼성 성악공연단을 이끌고 있는 정연재 단장의 어머니 이은형(61세)씨를 자랑의 무대에 소개해 보려고 한다. 미라클보이스앙상블이란, 윤혁진 예술감독(계명대학교 음대, 동 대학원 졸업)과 김은정(계명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졸업) 음악감독의 지도 아래 정연재 단장을 필두로 아홉명의 발달장애를 가진 성악가로 꾸며진 공연단을 이르는 이름이다. 이름 그대로 기적의 성악 앙상블 공연팀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경이로운 공연단이다. 실제, 2017부터 2023년까지 수십여 회, 크고 작은 순회공연을 가질 만큼 화려한 공연 이력의 이면에는 숨은 주역 이은형 씨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현재, 이처럼 안정감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 공연단 산모이신 이은형 씨를 모시고 발달장애인을 자녀로 둔 부모와 그 가족들의 희노애락이 점철된 숨은 사연들을 알아보기로 한다.
여기까지 테를 두를 것.
대담:본지 발행인 고영남.
묵묵히 산을 옮긴“우공이산”의 주인공 이은형씨.
고영남 기자~먼저, 직장 일과 공연단 업무만 해도 분망하실텐데도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주시어 본지와의 대담에 응해주신 점, 사(社)를 대표해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번 기획물에 대한 본보 편집 방향은, 미라클보이스앙상블의 성공담이 우선이 아니라,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부모의 열정적인 교육관에 의해 얼마든지 사회공동체 주체로써 설 수 있다는 경이로운 현상을 본지 독자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장애인을 특수블록에 거(居)하는 대상쯤으로 여기면서, 국가가 베푸는 수혜들이 곧 장애인 복지형태의 한 가닥 정도로 인식된 사회적 분위기에 인식 전환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최소한의 시도라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물론, 그동안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미라클보이스앙상블"의 궤적들은, "기적"이라는 명사에 걸맞는 경이로운 일들을 해낸 것입니다. 진정, 존경스럽고, 이에 찬사의 박수를 아낌없이 보내드립니다. 안그래도 바쁘실테니까 몇가지 간추려서 여쭈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보스톤치과 실장으로 되어 있는 직함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은형 실장~먼저, 답변을 하기전에. 멀리가려면 함께 가야한다는 말이 있듯이, 미라클의 탄생배경이나 취자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말씀을 전제하고 질문에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하신 직함을 밝히자니 다소 쑥스럽습니다만, 굳이 물어봐 주시니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보스톤치과 실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게 된 이유는, 사실 보스톤치과는, 구리시 롯데 백화점 옆 동원빌딩 7층에 있는, 저희 아이들 아빠인 정성화 원장이 대표원장으로 있는 치과 병원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원 환자들에게, 진료나 치료, 또는, 시술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하는 직무를 맡아 하는 자리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무어, 병원과 환자 간에 소통 창구라고나 할까요?
기자~제가 알기로는,보스톤 치과에서는 장애인 환자들에게 치료비 할인 혜택을 주고 있다고 하던데요 사실인가요?
실장~모든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구요, 발달장애인에 국한해서 비보험 20%를 적용해드리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발달장애인분이 지인의 소개로 저희 치과에 내원하셨는데 그동안 치아가 빠졌는데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치아를 휴지에 싸서 들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발달장애아를 둔 엄마의 입장에서 이 사실을 전해들은 저는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우리 연재는 머리 한번 자르려고 해도 두 사람씩 붙들고 야단법석을 치루는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내용을 치과 가족들에게 전했습니다. 이런 사연들을 충분히 알고 있던 치과가족들은 세차례 내원하여 임플란트 시술을 마칠 때까지 정성을 다해서 돌보아 드렸습니다. 후일, 그 가족분께서 이 사연을 블로그에 게재하여 저희 보스톤 치과의 친절함에 대해서 소개해주셨더라구요. 이후, 봉사의 유형중에 우리 치과에서도 충분히 봉사가 가능하다는 의견을 모아 그 이후부터 장애인에 대해서 20% 특별혜택을 드리는 새로운 버전의 봉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기자~발달장애인을 특정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신지?
실장~앞서 질문의 답변 중에 언급했다시피 사실은, 저희 둘째 아이인 연재가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동병상련이라고 할까요? 발달장애아를 두신 부모님들의 애로와 노고를 너무 잘 아는 저희로써 그분들에게 다소나마 도움을 드린다는 의미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물로, 서울장애인부모연대 광진지회, 광진발달장애인가족지원센터, 구리시 장애인종합복지관, 구리시발달장애인평생교육센터 등과 양해각서(MOU)를 교환하고 현재, 치료현장에 반영하고 있는 중입니다.
기자~발달장애아 자녀를 두신 부모님들의 삶이 그리 녹녹치 않으실텐데요.
실장~처음, 우리 연재가 발달장애아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저희 부부는 맨붕 그 자체였습니다. 하늘이 내려앉는 느낌이었고 세상 모든 것이 다 싫어졌습니다. 급기야는 우울 증상이 발현 되기까지 했었지요. 적지 않은 기간, 그렇게 무망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서서히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어쩌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내가 무너지면 우리 연재는, 또, 우리 가족은 어찌되는가? 라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지요. 우선, 우리 연재가 발달장애를가진 이유가, 세상 어느 누구의 탓이거나 잘못도 아니라는 자각이 왔습니다. 또한,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이고, 또, 어디에 있을까 라는 자문자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중복장애를 가졌던 헬렌켈러의 전기를 찾아 읽게 되었고,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묘지에서 시장으로 시장에서 서당 부근으로 세번씩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에 관한 서적, 기호학파 태두인 율곡의 모친인 신사임당 일대기까지 섭렵하면서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도, 전, 이수성 총리의 모친이신 강금복 여사님에 관한 자료를 보면서 이분들이 보여준 자녀교육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에 비하면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하는 자기반성을 하게 됩니다. 조금 다른 얘기인데요, 우리 연재가 생후 15개월부터 한글과 영어는 물론이고, 숫자와 카드까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전 천재를 낳았구나 하고 그만 하늘을 날 듯이 기뻐했고 감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특할 것만 같던 아이가 28개월이 되어도 말을 하지 않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등,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어느 날, 음식점에 갔을 때인데, 음식점 앞에서 안들어 오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아이에게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냐“ 며 흔들었는데 아이가 그것을 뿌리치다가 길바닥 작은 돌부리에 넘어져서 머리를 다쳐서 그 상처에 두 바늘을 꿰맨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 아이가 자폐성 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당시로서는, 그 사실들이 저나 가족들에게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지요. 천재가 태어났다고 그리 좋아하던 가족들에게는 우리 연재가 자폐성장애아라는 사실자체가 쉽게 수긍되거나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희 가정에는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모두 암울한 표정의 말이 없어진 ”조용한 가족“ 그 자체였습니다. 자폐성 장애아를 둔 가정생활. 잠시라도 관심에서 벗어나게 되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돌발행동으로 인해 가족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병증이 곧, 자폐성 장애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엄마인 저 외에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24시간을 아이의 교육과 인내심으로 버티고 버티디가 아이가 6살 때 쯤 되던 어느날, 불현 듯 ‘아, 이대로라면 죽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장애아를 둔 엄마는 죽거나 사라지는 것도 마음대로 할수가 없는 고약한 자리인가 봅니다. 당시, 우연히 차창 밖을 보니 2월이라 한기가 남아 있는 겨울인데도 길가에 시멘트 바닦을 뚫고 나온 초록빛 잎사귀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이, 아니, 명색이 이은형이가 한겨울, 저 강한 시멘트 사이를 뚫고서 생명의 잎을 틔운 길가의 풀잎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라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열 달이나 고생해서 낳은 소중한 아이의 병증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해왔던 엄마라는 내 자신을 되돌아보고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신께서 살아내라고 주신 귀한 생명인 우리 연재를 위해서 저의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기로 굳게 다짐도 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지치고 힘든 상황을, 기쁘고 희망이 넘치는 상황으로 관념치환(觀念置換)해 버리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긋지긋한 불행의 끈이 아직, 저와 우리 가족을 붙들고 놓아 주질 않고 있었습니다. 연재 10세 때에는, 희귀난치병으로 알려진 크론병이 새롭게 우리 아이에게 왔고 그로 인해서 불과 2주 만에 10kg이 빠졌습니다, 자폐를 앓고 있는 우리 연재로서는, 약이 뭔지, 왜 먹어야 하는지, 자신이 왜 이런 처치를 받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어디가 아프다고 표현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콧줄을 끼우다 안되면 대신, 수면제를 먹인 상태에서 인턴 선생님들이 여린 아이의 사지를 흰 광목천으로 묶고서, 한 사람은 아이 배 위를 누르고, 두 사람은 아이 사지를 묶어가면서 억지로 콧줄을 끼우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어야 하는 엄마인 저로서는 정말 감당하기에 너무나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서울대학 병원에 2개월간 입원하여 염증을 가라앉힌 후, 지금은 2개월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주사를 맞으며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폐와 희귀난치성인 크론병 등, 자신에게 무슨 병이 왔는지도 분별도 못하는 연재가 너무나 불쌍해서 크론병을 진단받은 날, 대학병원 계단에서 하나님께 ”저에게 더 고통을 주시려거든 얼마든지 더 줘보시라“ 고 독백을 하면서 턱없는 오기도 부려보고 원망을 하며 통곡을 하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한비야 작가의 “벼랑 끝에 있는 나를 미셨지만,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라는 글 내용이 머릿속에 번뜩하고 스치는 겁니다. 순간, 전신에 전율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여태까지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절망의 시기에 저에게는 기적이나 같은 경험의 순간이었습니다.
연재씨! 음악대학에 입학하다
기자~말씀만 들어도 그간의 여러 상황들이 그려집니다. .발달장애 청년이 대학진학을 하여, 음악 학과를 졸업하고, 편입하여 사회복지학까지 이수했다는 것은 일반인으로서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초유의 결과가 있기까지는 어머니이신 실장님의 노고가 9할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실장~우리 정 단장에 관한 모든 사연을 얘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발달장애 아동들은 럭비공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믿거니 하고 있다간 무슨 일이 어떻게 발생할지 모릅니다. 때론, 폭력적이거나 갑자기 도로 가운데로 뛰어드는 등 돌발적인 행동을 보이기 때문에 보호자는 매시간 잔뜩 긴장을 하고 있어야 하는 정도입니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자폐증세까지 보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학업을 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단, 교육현장에서의 통제가 어렵다보니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솔직히,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도, 한없이 천진한 아이의 눈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각오를 다졌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그런 일들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괴롭고 힘들다는 생각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계기가 되는 일들이 하나둘씩 느끼거나 시선으로 보이기 시작했으니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연재의 학습 진도나, 행동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암튼, 좁은 도자기 가게에서, 좌충우돌하는 것처럼 늘, 불안감을 느끼게 했던 우리 연재의 행동들에서, 무언가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연재는, 여러 문제 행동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연재가 잘하는 것은 그림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 그리기로 상을 제법 타오더군요. 집에서 방문을 닫고 가장 좋아하는 디즈니 비디오를 보고 즐기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제법 생동감 있게 그려내더군요. 그러나, 점점 혼자 방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것마저도 제한을 하게 되면, 엄마인 저는 단 한 시간의 여유도 없어 너무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연재가 비디오를 보고 있을 때가 저의 유일한 자유시간이기도 해서 좋은데, 연재는 우리가 떠난 훗날에 험한 세상살이를 해 나가려면 세상 사람들과 부대끼며 웃고, 울면서 사회생활에서 생기는 희노애락들을 몸소 체험해가며 삶을 배워야 하는데 라는 생각에 들어서 연재가 사용하던 미술도구를 다 치우고 교회 찬양대에 세웠더니 입만 뻥긋거리며 부르는 시늉만 했습니다. 연재는 자폐아가 보이는 서번트증후군의 증상이 없는 아이입니다. 제가 연재에게 성악을 가르켜 보려고 했던 것은, 연재의 사회성을 키워보겠다는 일념에서입니다. 그리고 늘 하는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 큰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저희 연재가 꾸준히 노래하며 많은 대중을 만나고, 그러면서 감동을 받고, 또한, 그 안에서 사회를 배우게 하소서’ 가 천편일률적이며 한결같은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그만큼 절박했습니다. 그리고, 연재 엄마로 살면서 딱 한가지 잘 한 것이 있다면, 나홀로 방에서 비디오만 보고 그림만 그리며 사람들과 눈도 못 마주치던 아이를 방에서 이끌어낸 것. 그리고 연재 자신을 표현하는 ‘노래’를 만나게 도와준 것이 그나마 가장 큰 공적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현재의 우리 연재 단장님은요, 사회성이 점점 진화되어 이제는 결혼해서 독립하겠다고 인터넷으로 신혼집을 살펴보고 있답니다. 대한민국 아파트 시장조사는 혼자 다 한 것 처럼요 (웃음) 이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연재에게서 가능성과 작은 희망의 불꽃이 보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확신에 찬 그 어떤 것은 아닐지 몰라도 아득하게나마 긴 암흑의 터널 저 끝에 빛이 보이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걸 깨닫고 나서부터는 지치고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남편조차도 “그간, 늘상 지쳐 보였던 당신 눈빛이 번쩍번쩍 총기가 생기고 확 달라졌다”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지치고 힘들었던 몸과 마음에 서서히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매일이 기쁘고 좋았습니다. 그동안 천근만근으로 느껴지던 마음의 짐들조차도 솜털처럼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다소 과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마치, 시지푸스의 바위를 절벽 위에 올려놓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병증들은 헬렌켈러에게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헬렌도 19개월 전에는 정상아로 태어났는데 이후, 뇌척수수막염에 의해서 시력, 청력, 언어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도, 6세 이전에는 폭력적이고 상대를 할퀴고 자신의 살을 잡아 뜯는 등 이상행동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부모님의 노력으로 농, 맹아학교에 입교하여 앤 설리반 선생을 만나게 되었고 이분을 통해서 점차 학습 진도나 거칠었던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고 합니다. 이후, 상급학교 교과 과정을 마치고 후일에는 작가, 교육가, 사회운동가(장애인 인권운동)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연재 단장님, “하루라도 빨리 장가가서 예쁜 아내와 귀요미 아가들을 낳아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 고 하십니다.
기자~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실장님이 크게 보이는군요. 앞서, 실장님께서 말씀 주신대로, 정연재 단장과 연관된 숨은 사연을 모두 알아보려면 장편소설 연재를 통해서나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잔가지는 쳐내고, 직진으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정연재 단장이, 사회복지학을 부전공한 일이나, 이와 관련한 장애인단체 센터장을 역임한 일, 나아가서 “미라클보이스앙상블” 단장까지 맡는 등, 여러 가지 주요 보직을 수임하게 되었는지 정말로 궁금합니다.
실장~ (웃음)비장애인인 일반인들의 생각은, 현재, 우리 연재의 역할과 기능들이 기적처럼 보이거나, 선택된 계층의 특별한 경우가 아닐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두(冒頭)에 기자님께서 언급하신 그대로, 이 인터뷰의 본래 취지가, 지적발달이 더딘 장애아동이라 할지라도, 국가사회나 가정에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교육을 한다면, 현대 사회의 주류로써 손색없이 건재할 수 있다는 본보기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현재, 우리 연재의 성장한 모습들이 목표의 최후 종착이 아니고, 새로운 도전에 대한 첫 삽을 뜬다는 시발(始發)의 시그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실제, 기자님께서 물어 주신대로, 비록 부족하긴 해도 저는 발달장애아를 둔 엄마로써의 제 본분을 나름 다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엄마인 저로서는, 자폐를 앓고 있는 아들 연재와 세상 끝날 때까지 어려움 속에서 걱정하면서 살기는 싫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오늘 하루만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하면 내일이 또 오더군요. 그럼 내일도 하루만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저에게는 내일이라는 설레임이 없어진지 오래였습니다. 기다림이란 막연한 기대감일텐데도, 당시의 저에게는 기다림보다는, 당면한 지금의 숙제들을 해결하기에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물론, 그로 인한 효과나 결과와는 무관한 일이지만, 아무튼 비록 작지만, 제게 주어진 달란트나 에너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모두 모두 쏟아 부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여력이 있는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 아직까지는 저희들을 굽어 살피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웃음) 우리 연재가 삼육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일도 기적에 가까운 일일 수 있겠습니다. 이는, 모두 해당학과 지도 교수님들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교육지도 덕분입니다. 장애인 전형으로 간신히 들어갔지만, 또, 장학금 혜택까지 주신 학교 측의 배려가 있어서 6년간의 학업을 마칠 수가 있었고, 학위까지 받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실로, 넘치게 감사한 일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그간, 우리 연재의 학업을 위해 애쓰셨던 학습 도우미 친구들이나, 30%의 등록금을 지원해주시는 등의, 지속적인 도움을 주신 학교 당국에 우리 가족 모두의 마음을 모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덕분에 저도, 연재의 학교 교육 총20년 동안 통학을 항상 같이했기에 졸업도 같이했네요. 미라클보이스앙상블 공연단 탄생은 기적(奇跡) 그 자체. “남여 9명의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성악공연단” 그간, 국내 굴지의 공연만 수십 여 차례. 장애인의 위상 드높여 정연재단장, 장애인센터 센터장도. . .
기자~실장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사연에 푹 빠져드는 느낌이 듭니다. 그만큼,사연 곳곳이 감동적이고, 또한, 어머니의 위대한 존재감이 드러나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질문드립니다. 발달장애인 정연재 씨의 장애인단체 센터장이라는 직함과, 미라클보이스앙상블이라는 성악공연단 단장이라는 직함이 어딘지 모르게 연결고리가 어색하거나 생소한 느낌이 드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실장~질문의 함의를 이미 파악했습니다. 질문의 요지는, 발달장애인의 신분으로서, 장애인복지 관련 단체장과 성악공연단 단장이라는 직무를 수행해 낼 수 있느냐라는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주신 질문 충분히 이해합니다. 먼저, 지난 2019년 7월, 발달장애인의 자립 생활을 위해, 광진발달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설립되었고, 맞물려서 센터장 모집이 함께 있었습니다. 모집 요강에, 사회복지사 자격을 가진 자로 제한된 자격요건이 사회복지사인 연재의 조건과 부합되어 센터장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센터는 비장애인 조력자와 발달장애인 당사자 센터장과 활동가들이 지역사회와 소통하며 발달장애인의 자립과 인권보장을 위해 서로 존중하며 일하는 곳입니다. 이는, 발달장애인은 공동체 주류로 편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지금까지의 사회적 우려나 고정관념을 일거에 기우로 만들어버린 매우 유의미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미라클보이스앙상블공연단 단장의 직함은, 윤혁진 교수님을 따로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앙상블에 관해서 그분의 역할이 99%라면 정연재 단장은 1% 정도로 미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라클보이스앙상블 공연팀이 구성된 배경에는 교수님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또한, 배우자이신 김은정 성악가님의 조력까지 보태어져 오늘의 정연재가 존재하고, 미라클 보이스성악앙상블 이라는 단체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 두분들의 공로야 말로, 절대적이라고 감히 평하고 싶습니다. 후일담입니다만, 2015년 연재에게 성악을 배우게 하고 싶어서 지도선생님을 찾던 중 남편과의 인연으로 이탈리아 유학을 막 마치시고 대학에 몸을 담고 계시던 윤 교수님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가슴이 떨리는 것은, 당시 교수님께서는 단숨도 참지 않으시고,“ 가능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매우 단호하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간, 연재의 작은 꿈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무렵 저와 남편은, 윤 교수님의 자신있는 한마디에 백만 원군을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연재의 음악 학습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단순 암기력은 뛰어나지만, 이해력이 부족한 연재에게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처럼, 연재를 교육시키는 전 과정들이 너무나 어려우셨을 거에요. 제가, 교수님께 발달장애인과 함께 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인내가 필요하고, 지치실 거다 라고 걱정하면 교수님께서는 오히려,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하는 그날까지 하겠다고 저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본인이 주업으로 하시는, 뮤지컬/오페라에도 앙상블 단원들을 세워주시고, 늘 비장애인의 연주 무대에 설 기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발달장애인들은 당사자들이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우므로, 지도하시는 분들과 부모들 간의 소통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더 교육의 효율이 나타나는듯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는 어엿한, 세계최초, 대한민국최초, 발달장애인 성악가들로 구성된 미라클보이스앙상블 이라는 명실공한 예술단체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미라클보이스앙상블은, * 세계최초, 대한민국최초 초유의 성악예술단체. * 금년 10월 31일, 미국카네기홀 무대에 설 예정. * LG 산전 직원으로 자립생활 기반 마련. * 대한민국 장애인의 긍지 세계만방에 알려.
더욱 소중한 일은, 이들은 어느새 자립 준비의 일환으로, 노래하며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2년차 예술근로자입니다. LS산전의 직원으로 활동하며 외부로는 장애인 인식 강사로, 각종 연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워딩 그대로, 자립생활에 돌입한 것이죠. 그동안,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쳐온 목적이, 우리가 없어져도 연재 스스로 자립생활이 가능했으면 하는 바램이었는데 그게 실현되었잖아요. 모두, 윤 교수님 내외 분의 은덕입니다.. 그간, 국내에서 정기연주회 등, 수십 여 차례, 크고 작은 공연을 마쳤고 금년 10월31일에는 미국뉴욕카네기홀 무대에서 그들의 기량을 맘껏 펼치고 최초 발달장애인 성악 앙상블로서의 역할을 잘 하고 오자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공연단 이름 그대로 기적을 일으킨 단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자~아무튼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이를 통칭 인간승리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놀랍습니다. 이는 결국, 발달장애인을 둔 부모의 혼신과 헌신이 만들어 낸 역대급 휴먼 다큐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미라클이라는 음악 단체도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서, 묵묵히 진한 모성을 보여오신 이은형 실장님의 공로가 팔 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개의 장애인이라면 선입견 부터 갖는 우리나라 현실 정서에서, 어둠을 빛으로 승화시켜낸 모정이야말로, 신사임당, 맹모삼천의 주인공, 헬렌켈러의 부모님과 비교하여도 전혀 손색없는 행적이었고, 성과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결이 다른 질문입니다만, 정연재단장의 증조부께서는 3.1운동 당시에 탑골공원에서 기미선언문을 직접 낭독하신 정재용선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하나, 큰 증조부께선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내셨을 만큼 당시로서 쟁쟁한 가문이 틀림없다고 보여집니다.; 오늘날, 정연재단장이 기적을 이룬 단체인 "미라클보이스앙상블"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배경에는 독립운동가이신 훌륭한 조상님으로부터 물려받은 DNA의 작용도 있을법한데요. 어떠신가요. 포함하여, 그간의 소회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실장~잠시 돌이켜 생각해봅니다. 우리 연재가 고등학교 때 급우들에게 두둘겨 맞고 들어 온 일이며, 집안의 55인치 티비를 끌어내려 부숴 버린 일, 길가는 사람들에게 침을 뱉어 버리던 일, 화가 난다고 8차선 도로로 뛰어들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이후, 청년기에 들어서도 그리 녹녹치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소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연재엄마로 살고 있음에 너무 행복합니다. 기자님 아세요? "조심스러운 행복을요". 모르긴해도,아마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님들의 한결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더하여, 조상님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웃는 시간이 팔할 이상이래요(웃음) 생각해보세요, 사람하고 눈도 못 맞추던 우리 연재 씨가 그 유명한 카네기홀 무대에 선대요, 얼마나 좋아요? (끝내 울음)
여기도 사각테(블랙)
(대담을 마치며)~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성악 단체가 세계적인 카네기홀 무대에 선다는 것은 사건에 준하는 경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환경이 될 때까지 살신성인의 헌신을 하신 부모님들의 공로야말로 노벨상감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고 싶다. 본 기획물의 의도는 성공한 성악 단체도 단체이지만 그보다는 그런 결과를 있게 한 모정에 대해서 장애 당사자나, 그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정연재단장의 어머니 이은형실장은 현재, 스트레스성 당뇨로 인해서 하루4차례씩 인슐린을 맞고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불가능을 가능토록 한 기적의 산물 “미라클보이스앙상블” 정연재 단장의 어머니 이은형씨에게 이글을 바친다.
밑에 글도, 우측 상단에 테를 만들어서 넣을 것.
발달장애의 의미
발달장애(developmental disability)는 유아와 어린이, 청소년기 즉, 사람이 성장하는 기간 동안에 나타나는 정신적, 신체적 장애를 모두 일컫는 말이다 정신적 신체적 모든 증상을 말하기 때문에, 발달장애인에는 지적장애, 뇌성마비, 다운증후군, 자폐, ADHD 등의 세부적인 장애가 모두 포함되는 단어이다. 신체적인 장애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태어날 때 알아챌 수 있지만, 정신적인 장애는 아이가 성장해 가면서 나타나거나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