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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유토론 원문보기 글쓴이: 정병태
民族 反逆者 金活蘭의 親日 行跡!!!!!
(민족 반역자 김활난의 친일 행적)
김활난 : 金活蘭 天城活蘭 1899-1970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 1899년 1월 18일 경기 인천 출신
왜구로 부터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선현들이 풍찬노숙(風饌路宿)을 하시면서 왜적들과
목숨을 걸고 싸울때. 김활난은 왜구의 두목과 마주앉아 일본의 전쟁승리를 빌었고
젊은이들을 "일본놈들 쟁놀음에 총알받이"로 나가라고 우리 민족에게 강권을 가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의 원흉 놀음을 했다,
나는 "이화여대 동문들의 우상인 김활난의 친일행적을 "친일인명사전"을 인용하여
알게 되었고. 그 더러움의 행적을. 알리고자 이글을 쓴다.
김활난은 1936년 말부터 교육과 여성계몽 분야에서 친일 활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1936년 12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가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육화 운동의 촉진'을
목적으로 주최한 사회교화진흥간담회에 참석했고, 이어 1937년 1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 주최의 방송교화선전협의회의부인강좌반 강사로 참여 했다. 같은해
7월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다음달인 8월에 전쟁협력을 위해 조직된 애국금차회의
발기인과 간사를 맡았다. 애국금차회는 귀족, 고위관료 부인들과 여류명사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위해 금비녀를 뽑아버리자고 조직한 단체로서
황군의 환송영, 총후가정(銃後家庭)의 위문과 조문(弔問), 일반 가정부인의 시국인식강화
철저와 국방헌금, 위문금품 헌납 등의 활동을 벌렸다.
같은 달 조선신궁을 중심으로 일본정신을 발양하여 국운의 융창을 도모하는 한편 국가안태 무운장구
(國家安泰 武運長久) 기원제를 거행하고자 조선인 유지 26명이 발기해 조직한 기원제 거행 준비회의
발기인 겸 위원으로 활동했다. 10월에는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출정군인가족간담회에 참석했고
12월에는 "남경함락 전첩봉고제"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8년 3월 "황국여성으로서의 국민 도덕과
부덕(婦德)을 갖춘 현모양처의 양성"등을 목적으로 한 3차 조선교육령이 개정 공포 되자 그해 6월
"총후조국을 내조한다"는 취지로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 학생 400여명으로 이화애국자녀단을
결성하고 단장을 맡았다.
전략" 기독교 여성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위해 일본여자기독청년연합회에 가맹할 것을 결의했다,
이때 개회사를 통해 "비상시국에 기독교여자청년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 모이지 아니하면
안 되겠으므로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의 활동을 기약하는 의미에서 이러한
선택을 하였다"고 발표했다. 이 결의안은 10월 5일 제12회 정기대회에서 정식 통과 되었고,
조선여자기독청년회연합회는 일본여자기독청년회 조선연합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1939년 4월
기독교 학교의 교장을 조선인으로 교체하려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의교장에 취임했다. 같은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겸
참사를 맡았고 7월에는 조선일보사 강당에서 비상시국 생활합리화에 대한 시국강연을 했다.
이 즈음에 총독 미나미(南次郞)와 잦은 회합을 하였는데, 총독 관저를 방문하여 개인적인 교분을
쌓기도 했다. 당시 조선총독을 "솔직하고 검소한 인물, 믿음직스런 성격, 한 집안 아저씨 같다"고 묘사했다.
1940년 11월 열린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같은달 더욱 강력한 전시 통제를 위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확대 개편 한 국력총력조선연맹의 사무국 훈련부 참사를 맡았다.
1941년 2월 조선의 청년들은 국방의 전위전사(前衛戰士)로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청년단(朝鮮靑年團)의 참여(參與)로 활동했으며 4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겸 평의원을 맡았다.
같은 8월 임전대책협의회(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 위원을 맡았고 9월에 임전대책협의회와
흥아보국단을 통합한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경성)으로 참여했고 10월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될때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같은해 9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주최한 부인궐기촉구대회에 강사로 참여했다.
10월에는 전위여성 격려대 강연위원으로 평안남도 평양, 진남포 안주, 평안북도 신의주, 선천, 정주에
파견되어 "일본여성의 갈 길"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11월에는 국력총력조선연맹의 유일한 여성 이사로서
전선(全鮮) 중앙지방여성회 개최에 앞서 "황국의 여성으로서 미래 지원병, 황군용사 어머니로서 심신
모두가 건전한 여성을 창조하도록 노력"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같은해 12월 여성들을 전쟁에 보다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조선임전보국단 산하 기관으로 부인대가
결성되었을 때 지도위원을 맡았으며 같은 달 조선임전보국단이 애국 반원과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회원들을 대상으로 주최한 결전부인대회의 강연회 연사로 참석했다. 1942년 5월에 국민총력조선
연맹 이사 겸 평의원에 다시 선출되었고 훈련부 이사도 겸했다. 8월에는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담화를
발표 했으며 1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 임시특별지원병에 관한 좌담회에 참석했다, 같은달 조선
교화단체연합회에서 특별지원병제의 취지 고취와 지원병 참여 권유를 위해 전국 각지에 파견한
전위여성격려대(前衛女性激勵隊)에 참여 해 평안북도 신의주, 정주, 선천 지역에서 강연했다,
1944년 1월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이화여자전문학교 여자청년 연성소 지도양성과를 발족하는
자리에서 "황국의 미증유의 전시에 처하여 황국반도의 미 교육 여성의 지도" 양성기관으로
새 출발을 하게됨은 뜻깊은 일이다.
여러분은 입영을 한 기분으로 열심히 연성을 하여주기 바란다."라고 훈시했다. 같은 달 9월
내선부인의 총궐기를 결의하는 좌담회에 참가했다. 같은달 결전하(決戰下)전의 앙양과 근로동원에
관한 주지(주旨) 의 보급철저를 목적으로 조직된 국민동원전시회의 이사를 맡았다.
1945년 6월 조선총독부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주도로 언론인들을 총력전(總力戰)의 사상전사(思想戰士)로
이용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언론보국회의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7월 조선국민의용대 참여위원을 맡았다.
친일단체 활동뿐 아니라 여러차례의 강연, 좌담, 논설 기고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황민화정책을 선전했다. 1938년 1월 1일 신년을 맞아 '매일신보'에 기고한 '조선인의 진로와 각오'에서
지나사변은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이 분기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변이
있은후 학생층은 물론이려니와 일반적으로 내선일체의 사상이 철저하여진 것 같이 보입니다.....
국가 대방침하에 당국에서 지시하는 것을 충실히 실행하는 것이 조선인으로서 현하 시국에 대한 국민의무.....
내선일체가 된 동시에 국민의 의무도 실천되어야 될 것입니다."라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전쟁협력을 독려했다.
1939년 6월 '동양직광'에 실린 부인동지의 애정과 이해 - 내선부인의 애국적협력을 위하여
(夫人同志의 愛情과 理解-內鮮婦人의 愛國的協力)이라는 글에서는 "부인문제로 내선일체?
"라는 구호를 내 세우며 남성들의 활동에 비해 여성들의 내선일체가 부진한 점을 반성하고
조선의 부인문제를 내선일체라는 입장에서 해결하는 부인운동의 필요성을 강조 했다.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에서 주최한 임전보국단결전부인대회에서 "여성의 무장"
('조광' 1942년 2월호 게재)이라는 제목으로 '총후반도여성'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남성들의
정신적 방파제 역할을 해서 제일선의 장병들을 보조하여 동아시아로부터 미국과 영국을 격퇴
하자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1942년 2월 일제의 싱가포르 공략 대 강연에서 "대동아건설과 우리의 준비"라는 강연을 했고
('매일신보' 1942년 15일자 게재) 같은해 5월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겠다는 발표가 나오자
('신시대' 1942년 12월호에) "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를 발표해 징병제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커다란 감격"이라고 했다. 이밖에 "애국정신에 빛나는 총후의 각오"
('매일신보'1941년 7월 5일) "시국과 도회여성"(충동원 1939년 7월호) "아교의 여학생 군사
교련안 - 불요불굴의 정신함양"('삼천리'1942년 1월호) "대미영전(對美英戰)과 우리의 각오
('조광' 1942년 1월호) "반도지도층 부인의 결전보국의 대사자후-여성의 무장"('대동아' 1942년 3월호)
"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년12월호) "남자에 지지 않게 - 학도전시동원체제 확립 관계"
('매일신보'1943년 6월 27일) "적 격멸에 일로매진" ('매일신보' 1943년 8월7일)등의 논설을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내선일체와 화민화 정책을 선전하였으며, 일반 여성과 여학생들에게
어머니,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 학병 동원에 대해 헌신할 것을 주장했다.
나아가 여학생들이 직접적으로 전쟁 동원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특히
친일논설은 주로 여성이 봉건적 인습의 탈피와 여권신장을 위해 사회적참여를 해야 한다는
여성운동의 관점과 논리를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참여하고 동참하는 여성 역할론에
대입하므로서 여성과 가정의 전쟁동원을 합리화했다. "남자에 지지않게 황국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매일신보' 1943년 12월 26일)에서는 "아시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날을 위한 마음의 준비는 이미 벌써부터 되었습니다,....이번 반도학도들에게 알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1전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총후에서도 굳은 각오만 있으면
제1선 부럽지않은 활약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을것입니다."고 하면서 남자에게 뒤지지 않는 여성들의
사회적 각성과 참여를 전쟁을 통해 발휘할 것을 선동 했다.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년 12월호)에서는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戰場)으로 내보내는 내지(內地)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막연하게 부러워도 했다, 장하다고 칭찬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반도 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아내가 된 것이다,
우리에게 얼마나 그 각오와 준비가 있는 것인가? 실제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나라에 바쳐보지
못한 우리에게는 대단히 막연한 일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웃음으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전장으로 보낼 각오를 가져야 한다,"라며 전쟁에 임하는 부인들의 자세와 각오를 강조 했다.
이 밖에 "시국과 도회여성"(時局과 都會女性) ('총동원' 1939년 7월호) "지원병 모자(母姉)에
송(送)하는 서(書)" ('삼천리' 1940년 7월호) "일천만 여성의 익찬-애국정신에 빛나는
총후의 각오" ('매일신보' 1941년 7월 5일) "선전(宣戰)의 날에듣는다-최대노력"
('동양지광' 1942년 1월호) "필승 태세 하의 반도국민에게-위대한 세대의 인도자"
('반도의 빛'(半島의光) 1942년 2월호) "열혈남아거든 이때를 놓치지 말라"
('매일신보' 1943년 11월 18일) "학병진훈(學兵進訓) - 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년 12월호)
"감격과 가중한 책임 그처럼 우리를기대했던가" ('매일신보' 1944년 1월 4일) "군인의 가족에게-이웃
사촌의 정신을 바치자"('매일신보' 1944년 4월 28일)등 여성계의 총동원체제 구축을 뒷 밭임하는
다수의 친일 글을 기고 했다.
해방후 김활난은 해방된지 한달도 못된 1945년 9월 4일부터 (친일행적의
잉크가 마르기 전에)1970년 사망할때 까지!!
1945년 9월 미 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에 임명, 10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복구
교장을 맡음. 12월 독립촉성중앙부인회를 조직, 반탁운동전개, 대한여자기독청년회연합회
(YMCA)를 재건, 재단 이사장, 1946년 4월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 초대 총장을 1961년 까지 재임,
1946년 11월, 1957년 10월, 1958년 10월, 1959년 9월, 1965년 12월 등 다섯 차례에 걸쳐
국제연합총연합회 한국대표,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 서울서대문구에 출마 낙선,
1950년 4월 중앙교육위원회 위원에 위촉, 8월부터 11월 까지 제1공화국 전시내각 공보처장,
1952년 "코리아타임즈(The korea Times) 사장, 1955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1959년 12월
부터 1970년 2월 까지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1959년 한국 아시아반공연맹 부이사장과
한국여학사협회 회장, 1961년 11월~1964년 11월, 1966년 11월에 열린 12차,13차,14차
유네스코 총회 한국수석대표 및 대표로 참석, 1963년 8월 교육부문의 대한민국장을 받음,
막사이사이상의 공익부문 상과 미국 감리교회에서 주는 다락방상 수상,
1970년 2월 10일 뇌출혈로 사망. 사망후 대한민국 1등수교훈장이 추서 되었다,
김활난을 존견경하는 이화여대 동문 여러분!
그리고 평소 김활난을 존경하던 여성 여러분! 내가 쓴 이 글이 어떻게 보면
김활난의 화려한 업적을 소개했다면 좋았겠지만 님들이 그렇게 존경하던
김활난의 친일반역 행위의 행적이였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세상에 김활난의 친일행적이 소개 됐을때 여러분들은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존경하는 스승님께서 "친일행위를 했다고요? 그럴리가 없어?"
하면서 민족문제연구소를 오히려 반역자들이라고 몰아부쳤습니다.
이화여대 동문여러분!
만주벌판, 시베라아벌판에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모진 눈, 비바람을 맞으며
풍찬노숙을 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바라고 또 바라면서
왜놈들과 투쟁할때 "친일반역자 김활난"은 일생동안 호의호식과 거창하고도
더러운 명예를 짊어지고. 우리 선현들과는 너무나 대비된 삶을 살았으며
또 "친일반역자 김활난"은 가증스럽게도 미나미 총독의 관저를 무상으로 출입한면서
"주"인명사전 1권 711페이지에. "이 즈음에 총독 미나미(南次郞)와 잦은 회합을
하였는데, 총독 관저를 방문하여 개인적인 교분을 쌓기도 했다. 당시 조선총독을
솔직하고 검소한 인물, 믿음직스런 성격, 한 집안 아저씨 같다"고 묘사했다,
총독과 노닥거리면서 내 민족을 일본 주구들에게 팔아먹은 김활난! "이런데도 당신들"은
김활난을 영원한 스승, 애국지사로 묘사 하시겠습니까?
당신님들께 권고합니다.
이화여대에 모셔져 있는 김활난. 친일 반역자의 동상을 당장 철거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일제 주구들로부터 하사받은 각종 벼슬과 직함, 그리고 훈장.
또 해방후 독재권력으로부터 하사받은 각종 벼슬과 직함 그리고 훈장...............
그것을 다 합치면 사해보다 더 넓고 태산보다 더 무거울텐데 그 큰
보따리를 그가 죽을때 지옥에까지 지고이고 갔을까요? 아닙니다,
남은 것은 더러운 명예와 탐욕 그 것을 여러분들에게 물려주고(지워주고)
갔을 뿐입니다.
다시한번 권고합니다.
김활난의 모든 흔적을 지우십시요, 불살라 버리십시요,(불에 타져서 흔적이 없어질까요?)
그러나 "김활난은 친일 민족반역자"라고 외치는것이 그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아닐까요?
2010년 4월 16일
광주 광역시 서구 유촌동 상무주공 버들1단지 104동 602호
정 병 태
첫댓글 공과는 분명하지만 반면교사삼아 좋은점은 닮고
못된점은 고처가야 개인과 민족에 발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허허
그옜날 일제시대에 그런분이 한두분이 아니지요 그러나 민족을 팔아 고통을 준 위인들은 벌을 받아야 되지만
오히려 공과를 따지면서 민족의 지도자로 삼는것은 ~~~쫌쫌쫌~~민비를 윤간하고 살해한 자의 후손이 민족지도자로 김활란 박사가 존경받는 세상은 쫌 쫌 쫌
우리나라 사람은 색상을 흑백 밖에 모릅니다 바보도 아니고
그시대 일본의 협조 없이 할수 있는것은 독립운동 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죠 국가를 부정하며 할수 있는것 빨갱이밖에 더 있습니까
일본에 아부 하지않고 어떻게 이화 학당이 가능 합니까
그들의 목적의 주체를 먼저 평가해야 할것입니다
신사참배를 복종하며 살아남은 선교자가 순교자보다 복음을 더많이 전파 했습니다
역사의 판단은 그런 사람을 매국노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