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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전 11장 1-8절
설교제목 : 2025년 투자전략
권력의 최후
좋으신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2025년을 시작하는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새로운 해가 밝았습니다. 지난주 무안공항의 참사로 인하여 충격과 안타까움에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세상을 달리한 이들을 하나님께서 품어주시고, 슬픔을 당한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함께하기를 빕니다.
그런데 극우성향의 일부 유튜버들은 이런 항공기 사고를 좌파의 소행이라고 선동하였습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이들이 교회에 상당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어리석은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는지가 더 가슴 아프게 합니다. 이는 맹목적 신념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분이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자신과 잘 알고 지내던 분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사회적 활동을 잘하고 있는 분인데도, 그런 날조된 이야기를 맹신하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학력과 지위와 상관없습니다. 지적능력이나 사회적 페르조나는 좋은 것과도 상관없습니다. 이는 인격의 발전이 제대로 이루지 못한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한 국회의원이 대통령 관저 앞에서 탄핵소추가 중국의 영향이라고 하면서 선동하는 장면은 한국사회의 정치수준의 밑바닥을 반증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사고가 객관적이라는 판단은 상당한 오류가 있습니다. 인간은 주관적 판단과 감정에 따라서 선과 악,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객관적 판단근거를 위해서는 나의 밖에 아르키메데스 점인 절대점을 두고 나의 오류와 실수를 항상 염두해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선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이순영 옮김, 문예출판사)이 생각납니다. 이 단편소설은 ‘이반 일리치’라는 출세한 판사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과 삶의 문제에 대해 독자들에게 물음을 던집니다. 판사 이반 일리치는 성공과 명예, 돈을 위해 높이 올라가고자 했습니다. 이윽고 그는 연봉이 5천 루블을 더 받으면서 승진합니다. 이제 승진하여 집을 새로 구입합니다. 그런데 새 집을 꾸미기 위해 사다리로 올라갔다가 떨어지면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여기에서 톨스토이가 사용하는 오브제는 사다리입니다. 사다리는 하늘과 땅을 잇는 연결 수단이자 하늘에 오르려는 인간의 의지를 표상합니다. 여기에서 사다리는 오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대변합니다.
사다리에서의 추락은 인간에게 절정의 때는 가장 위험한 추락의 순간임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 오름에 매달린 자는 반드시 내려와야 하고, 권력과 명예에 사라잡힌 자는 미끄러저 떨어져 언제나 비극적 최후를 맞이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름에 매혹되거나 매달리게 되면 인간은 위태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어느 누구도 권력에 매달린 자는 반드시 내려와야 하고 떨어져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권력을 탐하는 자들은 대문호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새겨야할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 모두가 건강한 사다리타기를 했으면 합니다. 오름과 내림, 하늘과 내 안의 무의식과 건강하게 소통할 수 있는 2025년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오늘을 살기
전도서의 핵심단어는 “헛되다”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장 첫 절은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이다”로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일침을 놓습니다. 전도서는 히브리어로 ‘코헬렛’, 즉 ‘설교자’, 또는 ‘교사’입니다(관주 참고). 언뜻 보면, 이런 구절들은 의욕을 꺾거나 어떤 삶의 결정론으로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래서 전도서를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를 전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전도서는 솔로몬이 인생의 황혼기인 노년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볼 것 다 해보고, 누릴 것 다 누려 봤는데, 이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도, 명예도, 권력도, 열정도, 옳고 그름조차도 부질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봤자 다 헛될 뿐이니 그리 애써 살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서가 가르치려는 지혜자의 지혜는 세상의 허망함이나 가치의 상대주의,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집착하며 그토록 매달리는 모든 것들이 한계가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붙잡으려 애써도 허무하게 모든 것이 반드시 떠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삶의 가능성을 귀히 여기며 오늘이란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화려함이나 누추함을 뒤돌아 봐서도 안됩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서도 안됩니다. 어떤 분의 꿈에서 자신이 대단한 운동실력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분은 아직 미련이 남아서 이런 꿈을 꾸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꿈은 자신의 여러 실패로 스스로를 저평가하고 자신의 무능하다고 여기며 자포자기를 하는 것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꿈은 그를 높이고 있으며, 그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음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는 오늘을 살기 위한 반추의 거울이 되어 자신을 발전하는 원동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미래는 불확실함 속에서도 나의 때가 아닌 그분의 때를 신뢰할 수 있을 때 불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불확실함, 알 수 없음이란 이 엄연한 삶의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오늘을 살아내야 합니다. 올 해는 인생의 한계상황이 우리에게 닥칠 때가 반드시 찾아옴을 알고, 지금 여기에서 오늘을 힘있게 살아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투자전략
전도서 11장 1절은 인생살이의 적극적인 처방을 제시합니다.
“돈이 있으면 무역에 투자하여라. 여러 날 뒤에 너는 이윤을 남길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네가 무슨 재난을 만날지 모르니 투자할 때에는 일곱이나 여덟로 나누어하여라”
이는 투자를 장려하고 투자의 방법으로 분산투자를 하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이미 2500년 전에 투자의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유대인들이 세계 경제에서 영향력을 펼치는 이유가 있을 듯 합니다. 이 본문의 개역개정 번역을 보면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전통적으로 이 구절의 해석을 계산하지 말고 너그럽게 구제하고 봉사하라는 뜻으로 새겼습니다. 떡은 삶의 필수적인 양식이기에 그 떡을 누군가를 돕기 위해 던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두 구절에서 공통 분모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돈은 정신적 에너지입니다. 정신적 에너지를 바다의 무역처럼 무언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사들이고 파는 행위을 할 때 그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의식의 내용들이 확장되고, 자아의 자원이 더욱 확보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떡 또한 내 안의 정신적 자양분이자 에너지원이 될 수 있는 매일의 양식으로 그것을 무의식에, 혹은 세월의 흐름 속에 던지면, 그것은 여러 날이 지나서 다른 가치로 돌아올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정신적 에너지를 가지고 낯선 영역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들이고 그것을 다른 영역에 팔거나 전달하면 우리는 풍요로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미지의 영역, 세월의 강에 자신의 것을 던지는 행위가 때로 어처구니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낯선 미래와 아직 의식화되지 않은 곳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불확실한 미래지만 내 손을 펴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을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주저하고 머뭇거리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4절에서 한가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한다.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가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늘 알맞은 날씨를 기다리거나 온갖 유리한 조건을 기다리는 사람은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완벽한 조건과 상태를 저울질하다가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정 정도의 손해, 아픔, 실패를 각오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비록 적지만 나에게 있는 것을 던질 수 있습니다. 2025년 실패나 어떤 조건을 따지기보다, “떡을 강물 위에 던집시오”, “바다에서의 무역에 돈을 투자하십시오” 여러 날 뒤에 뒤에 도로 찾고, 이윤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투자하라
전도자는 계속 그의 지혜를 전합니다.
“바람이 다니는 길을 네가 모르듯, 이 임신한 여인의 태에서 아이의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네가 알 수 없듯이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너는 알지 못한다.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부지런히 일하여라, 어떤 것이 잘될지, 이것이 잘될지, 저것이 잘될지, 아니면 둘 다 잘 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5-6)
전도자는 자연의 신비, 생명의 신비에 대하여 “알 수 없음”이라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알지 못함”이란 신비 속에서 있음을 밝힙니다. 오늘날 인간은 인과론적 세계관으로 모든 현상을 낱낱이 파헤치며 원인을 합리적 방식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현대과학은 유전자 조작과 생명복제 기술을 가지고 과거의 신의 영역까지 도달하고 있습니다. 물부족을 위해 인공 강우를 만들고,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슈퍼 유전자 식물을 생산하고, 우주로 새로운 관광시대를 열기 위해 로켓을 쏟아 올리며 인간이 넘지 못할 것은 없다는 식으로 과학의 진보를 자랑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인공지능과 양자 컴퓨터가 보편화되면, 수많은 실험을 얻을 수 있는 결과치가 이제는 아주 간단하게 처리되어 빠른 속도로 획기적인 진보가 이루어질 것이라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런 진보가 인간 정신의 복잡한 감정과 정서까지 확실하게 해명할 수 없는 법입니다. 진보의 기술과 혁신 뒤에 인간사회는 무감정과 무감동의 냉혹한 인간군상들이 판을 치고, 자신의 우울과 외로움 속에 갇힌 자들이 더욱 많아지고, 정보과 권력의 독점이 더욱 차별을 부축이는 세상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세상이 혁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것을 더 그리워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진보가 어떤 미래가 끌고 갈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전도서기자는 “알 수 없음”에 집착하기보다 씨를 뿌리라 일러줍니다. 그 씨가 바람에 날려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고, 그것이 잘 자랄지, 안 자랄지 모르지만, 아직 발화되지 않은 잠재력과 가능성의 씨앗을 뿌려야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야말로 삶을 대하는 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이는 내게 주어진 인생을 실험하는 삶입니다. C.G. 융은 삶을 살기 위해 그리스도가 한 것처럼 삶의 실험을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한 것처럼 해야 합니다(예루살렘의 입성과 십자가의 실험). 우리는 우리의 실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실수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삶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살려면 실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실수를 피한다면 여러분은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삶은 실수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기에 말입니다. ... 삶이 실수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여러분이 최선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은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종종 실수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처럼 여러분의 실험을 충분히 하게 될 것입니다.”[C.G. Jung, Speaking, p108-109.]
사랑하는 여러분! 알맞고 유리한 조건을 셈하면서 머뭇거리며 나의 에너지를 투자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025년 한 해동안 내 삶을 실험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오늘이란 삶의 시공간에서 투자하고 뿌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실험이 그리스도가 그러하셨듯 자신의 소명을 살아내고,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