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200여 년 전후가 지난 인도에는 아소카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는 인도 마가다국의 제3왕조인 마우리아 국의 왕이 된 후 인도를 거의 다 정복하다시피 했던 대왕으로서, 가장 위대한 왕 중의 왕이라는 뜻인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 인도를 통일하는 과정에 수많은 적을 죽이면서 아군들을 죽게 하거나 도시와 촌락과 사람들은 물론 자연까지도 파괴하게 했던 자기 자신의 악업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 그리고 삶의 덧없음에 대한 허무와 절망감으로 마음과 몸이 나날이 쇠약해졌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그는 당시의 브라만교에 의지하고자 했었으나, 브라만교의 교리가 터무니없이 거짓된 미신임을 깨닫는 데 더하여, 브라만교 사제들이 탐욕과 거짓으로 선량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것을 보고, 더더욱 더 심한 방황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던 중 국민을 위하고자 성 안팎을 살피다가, 열두 살 전후의 한 수행승이 위엄이 있되 겸손을 잃지 않은 청정하면서도 고귀한 자세로 탁발하며, 사람들을 위해 자상하고도 또렷한 가르침을 베푸는 모습에 감탄하며 그에게 질문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그렇듯 맑고 건강하며 고귀하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위할 수 있는가?’
“욕심을 버려 항상 즐겁고 편안하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살아있되 죽은 이와 같은 사람으로서 영원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이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위와 같은 수행승의 나지막하고 겸손하고 당당하되 또렷한 대답에 뒤이은 수행승의 자상한 가르침을 이해한 아소카 대왕은 불교 교단에 귀의한 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삿된 욕심을 부리는 범죄는 엄격하게 다스리고, 국민의 성품을 끌어올리게 하여 서로를 위하게 하면서 왕국의 안정과 번영을 이룬 결과, 나라 안은 물론 정복한 모든 나라의 사람들로부터도 ‘악랄한 전쟁광이자 살인마 아소카’라고 불리던 악명에서 벗어나 ‘어질고 자비롭되 엄격한 아소카 대왕’이라는 칭송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모두가 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한 결과였으므로, 부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던 아소카 대왕은 나라 곳곳에 사원, 즉 절들을 세우고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게 했으며, 더 나아가 인도의 모든 지역은 물론 지금의 스리랑카와 태국, 시리아, 이집트, 그리스 등에 불교를 전파하여 많은 나라와 사람들을 위하게 했는데, 역사학자이자 저술가인 윌 듀랜트(1885-1885)는 아소카 대왕이 불교를 모든 지역의 사람들에게 전파함으로써, 불교가 기독교적인 윤리학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확인했고, 또한 역사학자이자 저술가인 케네스 스콧 라터렛(1884-1968)에 따르면 예수가 태어난 시기에 ‘불교는 이미 인도, 스리랑카, 유럽, 중앙아시아, 중국 등의 나라에 널리 퍼져있었다.’라고 했으며, 기독교학자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역사학자이자 저술가들은 예수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토마스 복음서와 나그함마디 텍스트가 불교의 판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은 가장 대표적인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아소카 대왕은 불교 교단에 많은 지원을 했었는데, 지원을 받기 시작함으로 게으르고 어리석어진 불교 수행자들의 탐욕과, 삿된 이익을 얻기 위해 불교 수행자로 가장한 사악한 자들이 불교 교단 안에 들끓기 시작하자 불교 교단은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불교 교단의 타락을 보고 한탄하던 바른 불교 수행자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사원을 떠나 숲으로 향하기 시작하자, 불교 교단에는 대부분이 삿되고 악한 불교 수행자들만 남게 되었고, 그러함의 심각성을 깨달은 아소카 대왕은 당시 마가다국의 파탈리푸트라로 바른 불교 수행자들을 초청하여 교단을 정리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재정립하게 하였는데, 그 집회는 부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신 후 300여 년 전후에 시행된 세 번째 결집이었으며, 그와 때를 같이 하여 아소카 대왕은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동산을 찾아낸 후, 그곳에 큰 바위로 조각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왕인 나는 즉위 20년째에, 이곳 룸비니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곳임을 확인하였으므로,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이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곳 지역민들의 세금을 다른 지역민들에 비하여 8분의 1만을 부과하기로 한다.”
기념비에는, ‘이곳 룸비니는 석가족의 성자이신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곳.’이라는 기록을 지금도 확인할 수 있어, 룸비니가 부처님의 탄생지임을 확실히 하여 사실이었던 부처님의 역사를 확실히 증명하고 있으며, 그 후 아소카왕은 인도 내의 모든 도시 안팎의 거리에 불교적인 탑이나 이정표를 세워, 국가나 도시를 오가는 나그네들을 위하면서 삶의 길잡이 역할을 하게 했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았던 아소카 대왕은 귀하게 여기던 왕비를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자기 자신과 국민을 잘 다스렸던 사람으로서, 불교 수행 역시 꾸준히 하여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성불, 즉 부처님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런 아소카 대왕이 세웠던 부처님의 탄생 기념비는 정글에 묻힌 채 사람들에게 잊혔다가, 1896년 고고학박사이자 저술가인 알로이스 퓨러(1853-1930)가 발견한 후 지금까지 관리 보존해 오고 있습니다.
.......
항상 맑고 건강하소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