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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령은 이미 말씀하셨다.
히브리서에서 성령은 이미 오늘날에 있을 일과 그의 음성을 들으면 거역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말하고 있다. 성령이 언제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 했을까? 사실 히브리서 말씀은 시편 95편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다윗이 쓴 시편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다. 이처럼 성령은 말씀과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말씀이 곧 여호와시고 여호와의 영이 곧 성령이시다. 구약과 신약은 동일한 영으로 쓰여진 한권의 책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말씀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에게 역사하는 영이 성령인지 악령인지 분별하는 방법은 한가지이다. 말씀을 순종하게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히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3:7,8)
2 그날과 오늘을 비교한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슈아를 천사들과 비교하여 천사들과 같이 신성(하나님)을 가지고 있지만 맏아들로서 그들보다 훨씬 뛰어남을 이야기 했다(히1:4-9). 또한 예슈아를 모세와도 비교했다. 모세는 교회의 지체로서 충성했지만, 예슈아께서는 교회의 머리시며 하늘 성전의 유일한 대제사장으로서 여호와께 충성했으므로 모세의 영광보다 훨씬 더 큰 영광을 가지고 계심을 나누었다(히3:2,3). 예슈아께서는 하나님으로서 다른 신들과 비교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예슈아께서는 사람으로서 모세와 비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분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시기 때문이다(신18:15-18). 즉 예슈아의 사명중 하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었다. 시내산에서 회중이 말씀을 대언하는 자를 구했기 때문에 모세가 그 일을 감당했고 후에 예슈아께서 대언자로서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모세를 통해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고 또한 예슈아를 통해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므로 두 날을 비교하는 것이다. 모세가 대언했던 그날과 예슈아께서 오신 오늘을 비교하여 그날에는 완악함으로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오늘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예슈아가 전하는 여호와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이다(히3:7,8). 여기서 우린 여호와의 대언자로서 오신 예슈아의 직분과 사명을 볼 수 있다.
3 히브리서는 시편 95편을 인용하고 있다.
예슈아의 오심은 작정되었고 모세가 온 목적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기 위해서였다면, 예슈아께서 오신 목적은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우리는 인도하는 것이다. 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누가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는가? 이 구원의 문제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르지 않다. 즉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이 유업을 얻는다. 예슈아께서 오신 목적은 구원의 방법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 성전의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희생 제물이 되어 하늘의 유월절을 이루기 위해, 부활의 첫 열매가 되기 위해 그리고 많은 목적들이 있다. 다시 말해 예슈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그분도 말씀에 순종하여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해야 할 모든 사명을 성취하셨고 영원한 승리를 이루셨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시95:6-11)
4 므리바에서 여호와를 시험했다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았지만 물이 없었다. 그러자 모세에게 왜 자신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 여기서 죽게하느냐며 당장이라도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할 정도로 모세를 대적하고 원망했다. 그러나 그들이 원망한 것은 모세를 향한 것이 아니라 사실 여호와를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호와를 시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가 여호와의 종인지 아닌지 의심했기 때문이다.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왔지만 여호와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믿을 수 없었다. 이들이 여호와께서 동행하고 계심을 의심하고 모세가 여호와의 종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회중은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면 물이 없는 일이 있을 수 없으며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애굽의 신은 더욱 풍요롭고 여러가지 면에서 윤택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말하는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를 돌로쳐 죽으고자 한 것이다. 전적으로 삶의 풍요로움 정도로 신을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공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거룩함이 풍요로움보다 중요하기에 거룩함과 진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는 결코 공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단이 조금만 고난을 주어도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쉽게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여호와의 말씀과 다른 말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애굽의 신들처럼 원하는 말을 해준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므리바에서 백성이 자신을 시험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로 여호와의 일하심이 마음에 들지 않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출17:2-7).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출17:2-4,7)
5 시험은 우리가 받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회중을 위해 광야에서 쓴물을 단물로 바꾸실 때 그들을 위해 법도와 율례를 주시며 지키는지 여부를 시험하셨다. 왜냐하면 하늘의 법도와 율례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물과 같기에 물로 진정한 생명수인 여호와의 법도를 지키는지 시험하신 것이다. 즉 우리가 물을 마시지 못하면 죽은 것과 같이 여호와의 율례를 지키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이다(출15:25). 또한 광야에서 회중을 위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다. 6일째 날은 만나를 두배로 그러나 샤밧에는 만나를 주지 않으셨다. 만나를 통해 이스라엘이 율법을 준행하는지 여부를 시험하셨다. 즉 우리는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가르치기 원하셨다(마4:4). 우리가 살기 위해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여호와께서는 영생을 위해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시험하신 것이다(출16:4). 이처럼 우리가 여호와를 시험할 것이 아니라 시험은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16:4)
6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마라
여호와와 다투었던 므리바 사건이 한가지 더 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또 다시 물이 없어 모세를 원망하였다. 이때 모세는 회중에게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말하며 반석을 두번 쳤고 물이 나와 모두 마시게 되었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회중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을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나타냄으로써 여호와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세와 아론이 어떻게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말인가? 반석을 두번쳐서 일까? 화를 내서일까? 반석을 친 것이 문제라면 이전에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화를 낸 것이 문제라면 첫번째 받은 돌판을 던진 모세는 그때 죽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반석을 치거나 화를 낸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여호와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것이었다. '거룩하다'의 원어는 '카도쉬'로 '구별하다'의 의미이다. 즉 여호와를 그들과 구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모세와 아론은 회중에게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라고 말했고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그들과 구별하지 않음을 책망하신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그들과 구별되셨다. 모세와 아론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심으로 스스로를 그들과 구별하신 것이다. 우린 때로 사역을 하다보면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 교만해질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별하라고 하신다. 우리가 여호와를 구별하는 믿음을 그분은 찾으신다. 만약 모세와 아론이 이렇게 말하면 달랐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반석에서 물을 주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은 반드시 경계해야 하는 교훈이다. 그것이 회중앞에 그분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민20:10-1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그들과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긍휼이셨다. 왜냐하면 모세와 아론이 들어갔다면 이스라엘은 그들을 우상화 했을 것이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민20:10-13)
7 구별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더럽혀졌음을 탄식하고있다. 이유는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았고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하지 않았고 안식일과 평일을 구별하지 않음으로 여호와를 더럽혔다고 말씀하고 있다. '구별하다'는 영어로 'difference' 로 차이를 두는 것을 말한다. 또한 히브리어로는 '바달'로서 나누다, 분리하다, 구별하다, 선택하다, 완전히 절단하다' 등으로 완전한 선을 긋고 차이를 두는 것을 말한다. 앞서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와 자신들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음으로 여호와께서 스스로를 그들과 구별하셨다. 우리는 부정하며 죄인이다. 마땅히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차이를 두고 구별하는 것은 거룩한 믿음이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 차이를 두어야 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에 차이를 두어야 한다. 똑같이 취급하고 구별하지 않고 먹거나 평일과 안식일에 차이가 없다면 그것 만으로 우린 여호와를 더럽히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여호와께 구별하는 믿음을 드려야 한다(겔22:26).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이 구별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눈을 가리어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겔22:26)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깃발 제작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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