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곰팡이 쓴 누거에서 유토피아로, 양달석(1908 ~ 1984)의 그림
김해선암, 1970
목동, 1960년대
목가,1950년
농부들, 1958
농가, 1957
관상 보는 사람들, 1963
목가,1950년
목동,1954
농가
양달석. 서양화가. 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여산(黎山). 경상남도 거제도에서 한의사 집안에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인척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때에 고학을 결심하고 통영(統營)의 사립청년학원을 거쳐 진주농업학교에 진학하여 그림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수채화가 입선한 뒤 동경(東京)에 건너가 데이고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에서 한때 수학하며 어렵게 화가의 길을 개척하였다.
그 사이 조선미술전 입선도 수차 거듭하고, 동경의 여러 공모전에도 출품하다가 돌아와 부산에 정착하여 작품생활에만 전념하였다. 작풍은 자신의 외롭고 불우하였던 소년시절을 동심적으로 미화하려고 한 듯이 시골의 자연환경과 농촌생활의 서정을 동화처럼 정겹고 평화롭게 전개시키는 독특한 세계로 일관하였다.
화면에는 소년·소녀·아낙네와 풀밭·소 등이 등장하며 표현기법이 매우 동심적이어서 ‘동심의 화가’로 불렸다. 1963년 경남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74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 추천작가·초대작가로 출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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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32> 화가 양달석
소년은 풀밭언덕에서 잠이 들었다. 고단한 소년의 잠결에 꽃이 피고 나비가 날고 멀리 자신도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불현듯 잠을 깨고 주위를 살핀다. 서산엔 구름이 붉게 물들어 황혼을 알리고 있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가 보이지 않는다. 사방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찾아 봤으나 허사였다. 어느덧 소년의 눈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소를 잃어버린 소년은 집에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달이 없는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은 피곤하여 잠시 무릎맞춤으로 졸고 있었다. 그때 소년은 잠에서 깨어났다. 별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고 무서움조차 잊고 있었다. 커다란 눈을 껌벅이면서 소가 소년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이 자라면서 소와 목동을 주제로 한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렸던가. 소년시절의 삽화 한토막이 적어도 이 화가에겐 생의 운명을 좌우하는 모티프가 된 것이다.
우리는 자주 여산(黎山) 양달석의 캔버스에서 비가 쏟아지는 들녘에서 소의 품안으로 안겨드는 소년들을 본다. 그의 유화뿐 아니라 평판이 높은 수채화도 그 화풍으로 봐 동서양화를 아우르는 양식이다. 단청을 주색조로 조성하는 것은 불교적인 색채를 상징하며 반점으로 쌓아 올린 질감 조성은 여산만의 기법이란 게 정평이다.
물론 여산 자신은 그러한 한정된 기법이나 소재에서 한층 넓고 다양한 세계로 지향한다는 소망을 늘 털어 놓았다. 자신의 한계에 대한 반발은 누구나 갖는 자기탈피의 수단이 아니겠는가.
양달석은 1908년 경남 거제시 사등면 성포리 성내마을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으로 큰집에서 머슴살이를 지냈다. 유년시절은 고달팠으나 그 특유의 끈기와 인내심으로 버티어 냈다. 일본 도쿄 제국 미술학교를 수료한 채 고향인 거제군 사등면 면서기로 일할 때였다.
1938년 조선 미술전람회 출품 준비를 앞둔 무렵이었다. 셋째아이가 뇌염에 걸려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다. 입원비를 감당하려면 그림은 포기해야 할 마당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아이는 아이대로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법이라면서 마음먹은 그림 출품 준비를 서둘게 했다. 아내의 격려가 눈물겨웠다. 부산에서 화구를 구해오는 등 한 달 동안의 준비가 다 되어 그림이 이뤄진 날, 셋째는 숨을 거둔다.
여산은 같은 날, 손수 아이의 관을 짜고 그림액자를 만들었다. 그림은 서울로 보내고 아이의 관은 공동묘지로 보낸 뒤 며칠을 하염없이 울며 지새웠다. 38년에 이어 39년에도 작품이 입선되었다.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화불단행이란 말이 떠오른다.
1943년 부산 좌천동에 단칸방을 마련, 정착할 때였다. 비좁은 방 한 모서리에서 그림에 열중하던 중 발을 헛디뎌 생후 몇 달밖에 안된 잠든 넷째 아이 위에 넘어졌다. 아이가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뒀다. 그는 평소에 그림 때문에 자식 둘을 죽였다고 평생의 한으로 삼았다.
여산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전업 작가로 그림에만 매달렸다. 일제 치하 면서기 4년에, 해방 직후 미술교사 2년 남짓을 빼면 평생을 화업에만 바쳤다.
그가 경남공립상업학교 미술반 교사로 있을 때 이런 일화도 있었다. 해방 직후 주위 사람들에 떼밀리어 조선미술동맹 위원장을 역임했던 이력 때문에 경찰에 불려가 고문을 당했다. 억울하지만 색깔 문제로 핍박을 받던 시절이었다.
"오른팔은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왼팔을 두 배로 때려 달라"고까지 간청했다. 그런가 하면 말년에 협심증과 중풍으로 투병하면서 붓을 잡을 수 없게 되자 손에 붓을 묶은 뒤 그림을 그렸으니, 그 집념과 열정이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헤아리게 한다. 물론 그 나이 또래로서 그림 한 가지로 생애를 꾸려가고 아이를 둘씩이나 유학 보내었던 것도 흔한 일이 아니다.
그림 자체로써 미술 애호가들로부터 갈채를 받기도 했지만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어머니의 작품 소화에 대한 열정은 널리 알려질 정도로 지극했다. 1039년에 김남배, 서성찬, 우신출 등과 최초의 미술 동인 '춘광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가 초대 한국미술협회 부산지부장을 맡기도 했으나 문하에 제자를 두지도 않았고 제자를 특별히 양성하려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은 만일 부인의 적극적인 내조가 없었더라면 그만한 업적을 이뤄내기 어려웠으리라 말한다.
1984년 작고하기까지 동화의 세계를 이상향으로 그렸던 행복해 보이는 그림들, 그의 독특한 화풍과 함께 혼신의 힘으로 캔버스에 매달린 화가로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그의 화비가 거제시 사등면 사곡리 삼거리 소공원에 세워져 있다. (국제신문 2006년 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