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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부자
제목 : 들으라 부한 자들아
성경 : 약 5:1-6
찬송 : 176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40310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약 5: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약 5: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약 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약 5: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약 5: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약 5:6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부에 대한 요한 웨슬레의 유명한 설교가 있습니다.
첫째, 열심히 돈을 벌어라.
둘째, 허비하지 말고 많이 저축하라.
셋째, 선한 일에 아낌없이 써라.
부자가 되는 것이 결코 잘못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보면 믿음의 조상들은 다 부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였고, 다윗이 부자였고, 바나바 같은 사람도 부자였습니다. 오늘날 예수 잘 믿는 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부자입니까? 부자가 되는 자체를 성경은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부자가 된 경우에 큰 위험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경고해 줍니다. 예수님도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부자가 범하기 쉬운 죄가 무엇인가를 경고해 줍니다. 이 경고를 무시할 때 부자에게 임할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이렇게 말한다.
√눈 먼 땅 부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한 자들은 세상과 짝한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두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한 마음으로, 전심으로 세상을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의 모습에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이러 저리 흔들리는 갈등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세속적이고 불의한 일에 대한 양심의 갈등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도, 그분의 뜻을 고려하고 있다는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렇듯 전심으로 세상과 짝한 이들의 파국적인 결말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세속적이고 불의한 자들은 자신들 위에 떨어질 임박한 종말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강력한 경고가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잔뜩 마음을 뺏긴 교회가 침을 흘리면서 우러러 보는 그런 세속적인 부의 결국을 명확하게 보고 깨닫기를 야고보는 간절히 바라면서 편지를 썼습니다.
√약 5: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들으라’라는 말은 ‘아게’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자! 이봐 come! Come now!'을 뜻합니다. 야고보서에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4:13,5:1).
√“이제, 잘 들으십시오, 부자들이여! 울부짖으며 우십시오! 여러분한테 닥쳐오는 괴로움을 생각해서요.”(새한글성경)
오늘 본문은 부한 자들에게 주시는 엄청난 경고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부한 자들은 자신들에게 임할 고통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부, 하나님을 잊은 부의 특징이 뭡니까? 그들은 종말과 가난한 이웃을 잊고 사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고 살았기 때문에 종말의 심판도 잊고 살며, 더 나아가 가난한 이웃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은 웃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그들이 지금 통곡하고 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란 종말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고 오늘의 선택을 만드는 태도입니다.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앞날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베짱이와 같이 됩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오늘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경고를 받는 부한 자들은 그들을 구원할 지혜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종말을 생각하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종말을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그들의 생각과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만합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의 뿌리입니다. 교만한 자는 결국 통곡하게 됩니다. 지금 그들의 사업과 그들이 부를 쌓고 그것을 사용한 일에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는 자들은 장차 심판의 날에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들은 무엇을 부러워할까요? 예수 믿어서 어떻게 되라고 가르치며, 예수 믿고 어떻게 되는 것이 가장 잘 되는 것이라고 가르칠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고 해도, 그것은 항상 하나님이 나를 성공시켜야 하는 것을 조건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실, 과연 어떻게 복을 받고 어떻게 성공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단 하나님을 힘입어 성공하고, 거기서 조금 하나님의 일을 위해 떼어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핵심은 나도 세상의 부자처럼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세속적 복음, ‘두 마음’을 조장하는 복음의 허를 찌릅니다. 그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이 전혀 부러워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은 교만에 근거한 부, 종말과 이웃을 잊은 부는, 곧 통곡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속적이고 불의한 부자들은, 이런 경고에도 꿈쩍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부자와 그런 부를 향해 침을 흘리는 ‘나뉜 마음’의 성도들에게는 아직도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야고보가 계속해서 그들에게 임할 뜻밖의 결말을 알리고자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 종말은 너무나도 분명해서 현재에도 뚜렷한 사실이나 진배없습니다.
√약 5: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여기에 나오는 ‘재물(플루토스)’에는 ‘곡식’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곡식은 썩기 쉽습니다. 하지만 야고보가 여기에서 썩었다고 표현한 것은, 종말의 관점에서, 도덕적인 의로움의 관점에서, 그리고 지혜와 믿음의 관점에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 믿는 성도들도 잔뜩 부러워하는, 그리고 그들에게서 남다른 대접을 받아낼 수 있는 그런 화려한 옷(2:2)을 입고 다니지만, 그런 옷도 이미 좀이 먹어 헤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여름에 장롱 안에 보관하는 옷 가운데 모직 같은 옷은 좀먹기 쉽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세상적인 복을 받는 것이 신앙의 전부일까요? 아직도 두 마음을 품고 세상을 갖는 것이 목적입니까? 기름통을 들고 불 속을 지나려고 합니까?
야고보는 그 결망을 더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약 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그들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금과 은이 녹이 슬까요? 금이나 은은 가장 변하지 않는 귀금속이 아닙니까? 영원할 것 같았던 그 재물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 자체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끝이 옵니다. 그리고 그 뜻에는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이 있습니다. 하지만 금과 은이 ‘녹이 슨다.’는 말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재물, 이렇게 쌓아두라!
놀랍게도 그들의 재물은 녹슬었고, 그 녹은 곧 독이 됩니다. 여기서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인 ‘독’(이오스)에는 ‘녹’의 의미도 있습니다. 녹이 곧 독이 됩니다. 그리고 그 녹, 그 독은 피할 수 없는 어떤 증거로 남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그 녹, 곧 그 독이 불과 같이 그들의 살을 먹어 버립니다. 종말에 그런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장면입니다. 불은 물론 심판의 상징이요 도구입니다. 하지만 야고보가 ‘불’을 종종 지옥에 대한 은유로 사용하는 것처럼(3:5), 이들은 마치 지옥 불이 그 살에 붙어 지글지글 타는 형상을 떠오르게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부를 추구하는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단지 부를 추구했기 때문에 이렇게 될까요?
야고보는 그 분명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약 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그들이 말세에 재물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치명적인 잘못입니다. 하필이면 말세에, 이 땅에서 재물을 쌓았다는 말입니까! 그런 의미입니다. ‘쌓은 것’이 무슨 잘못일까요? 저축도 죄가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쌓았다’는 말에는 두 가지 함축된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한 가지 의미입니다.
먼저 이들은 그들의 재물을 이를테면 ‘땅에 쌓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늘에’ 쌓지 않고 땅에 쌓은 것입니다. 야고보가 중요시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사람이 자신을 위하여 재물을 땅에 쌓아 두는 일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그렇게 하는 사람은 ‘눈이 밝아’ 온몸이 성한 사람입니다.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사람의 눈이 밝다는 유대적인 표현은 그 사람이 재물에 대하여 관대하다는 뜻입니다. 그가 이웃을 돕는 자선에 너그럽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재물을 하늘에 쌓는다는 것은, 그 재물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너그럽게 사용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재물을 땅에 쌓는 일은 그래서 어리석은 일, 화를 부르는 일이 됩니다.
야고보서의 다음 구절들은 이런 의미를 더욱 명확히 드러내줍니다.
√약 5: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약 5: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그들의 밭에서 땀을 흘리고 수고한 일꾼들의 삯을 탈취했다고 고발합니다. 그들은 재물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정당하게 긁어모으지도 않았습니다. 남의 것을 도적질해서 쌓아 놓은 재물입니다. 그러니 녹이 슬고 독이 되어 그들을 살라버리는 불이 된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자들의 입을 틀어막아도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부한 자들은 자신들을 위해 일한 일꾼들의 마땅한 삯을 온갖 불의한 방법을 통해 탈취하고, 그것을 자신들을 위해 대대로 쌓아 놓은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땅에서 사치하고 방탕한 삶을 삽니다. 불의하게 모은 재물을 정당화하는 셈입니다. 그 재물을 자신을 위해 자신의 뜻대로 사치와 방탕을 위하여 사용해도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은, 그 재물이 정당한 자신들의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그렇게 부당하게 빼앗아 땅에 쌓아 놓은 재물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종말의 관점에서 지혜로운 판단 하에, 이웃을 위해, 공의롭고 자비롭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모으고 쌓는 단계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재물을 모으는 일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 재물을 사용하는 일에서도 하나님과 이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재물을 ‘쌓았다’는 의미는 그래서, 그들이 재물을 잘못 사용하였다는 의미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물을 모으는 과정뿐 아니라, 그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모았으니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법칙은 없습니다. 거기에도 ‘주의 뜻’이 들어가야 합니다(4:15절 참고). 이 세속적인 부자들은 불의하게 돈을 모았을 뿐 아니라, 그렇게 모든 재물을 잘못 사용했기 때문에도 심판을 받게 됩니다.
√살육의 날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살육의 날에 무엇을 죽입니까? 부자들이 잔치를 위해 날마다 잡는 동물일까요? 그들이 탈취하고 짓밟는 가난한 자들일까요? 아니면, 도리어 그 세속적인 부유한 자들 자신일까요? 답은 5절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그 살육의 날을 위하여, 자신들의 마음을 살찌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살찌게 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둔해졌다면 다가오는 심판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이웃의 고통에 대해 더욱 더 둔감해져서, 하나님의 경고도 이웃의 아픔도 다가오는 심판의 경고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구약에서 ‘도살의 날’에 도살되는 것들은, 그 종말의 심판의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의 식탁에 오르게 됩니다(겔 39:8~21). 이것이 종말에 있을 메시아의 잔치, 곧 ‘하늘의 큰 잔치’입니다(계19:11~18). 하나님을 대적하던 열방의 왕들과 군대들이 만군의 하나님의 살육의 날에 심판 받고 하나님의 이름을 짊어지고 그분의 뜻을 따라 인내하던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들의 원통함이 풀어지는 신원의 날입니다. 야고보의 표현에 따르면, 지금 하나님을 잊은 불의하고 세속적인 부자들은 바로 그날 도륙되어 하나님의 메시아와 그분의 백성들의 잔칫상에 오르기 위해서 열심히 자신을 살찌우고 있는 돼지들인 셈입니다.
여러분!
그러니 교회가 어찌 이들을 부러워할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는 그렇게 부르짖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이 하나님을 잊은 불의하고 세속적인 부자들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약 5:6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은 불의한 부를 정당화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의인들을 죽여 없애 버리기에 이릅니다. 악은 결코 멈추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불의한 재물로 사치하고 방탕한 것은 정당하며 순전히 자신들의 권리에 속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그런 어두움과 교만과 부패를 지적하는 자들을 없애야 합니다. 불의는 의를 참지 못합니다. 악은 악으로 남기 위해 선을 죽여야 합니다. 어둠은 어둠이기 위해서 빛을 거부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어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대항하지 않는 인내
놀랍게도, 야고보는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6절 하)라는 표현으로 이 문단을 마무리합니다. 다시 하나님의 무서운 보복과 심판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 모두 맡겼기 때문입니다. 공의로 심판하시고, 억울한 사정을 신원하시는 심판주 하나님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시고, 세상의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야고보는 이런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의 불의하고 무법한 부자들에 의해 야기되는 고통과 억울한 상황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를 시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야고보가 처음부터 제시했던 해결책이기도 합니다(1:1-4).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그들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들은 어떤 이유로든, 그들과 더불어 세상 욕심을 다투는 싸움에 휘말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유업을 받은 자들이요,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난 자들이요, 영영히 서는 생명의 말씀이 그 심령에 심겨 있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도, 영영히 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영원히 설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에서 예수 믿고 복 받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두 마음’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있어, 세상에서 불의한 부자가 심판을 받고 공정한 경제 정의가 실현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심령이 결코 둘로 나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얻고 잃는 것보다,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선물을 기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는 그것을 얻는 방식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쓰는 일에도 주의해야 합니다. 종말에 부자는 자신이 쌓아 놓은 재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재물을 어디에 쌓아 두어야 할까요?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합니다. 하늘에 재물을 쌓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며 불쌍한 이웃들을 돌보는 일을 위해 물질을 아낌없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물질을 맡은 자들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뜻에 따라 물질을 불려야 하고 그 물질을 주인의 기뻐하는 뜻대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청지기로 칭찬받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