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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갑과 바아나의 처신 / 사무엘하 4:1-12
사람이 인간관계를 맺고 사는 모습을 보면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듭을 풀고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매였던 것을 풀어보려고 합니다. 용서를 빌고, 관계를 회복하고, 껄끄러움을 지우려고 합니다. 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매듭을 맺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좋았다가 나중에 보면 매듭을 맺고 인간관계를 끝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너 밖에 사람이 없는 줄 아느냐?” 라는 식으로 왕래를 끊습니다. 이 사람하고 매듭을 맺고, 저 사람하고 매듭을 맺고, 위로 매듭을 맺고, 아래로 매듭을 맺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고독하고 외롭게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8: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러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풀리려면 매면서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풀면서 살아야 할까요? 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심지어 ‘한이 맺혔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땅에서 그렇게 단단히 매고 사는데, 어떻게 하늘에서 풀리겠습니까?
사람은 어떤 위치에 있던지 자기의 위치에 어울리는 일을 하려고 고민하고 노력합니다. 대통령이 된 사람은, 대통령 재직시에 무언가 업적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마음의 부담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리한 경제정책을 강행하거나, 외교정책으로 인하여 국제사회에서 충돌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독도문제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두환대통령 시절에는 ‘독도는 우리땅’이는 노래를 방송금지 하였고, 독도를 지키던 의용수비대장을 잡아다가 안기부에서 고문하는 등 지금의 정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드러난 외교문서를 통하여 왜 당시 정권이 그러한 일을 했는지 이유가 알려졌는데, 어이없게도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얻는 과정에서, 일본정부가 독도문제를 언급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수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어떤 자리에 있을 때 뭔가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에 유혹을 받는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곧 무엇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그렇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는 어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들었습니다. ‘사람이면 사람이냐, 사람이라야 사람이지’ 그 말이 그 말 같은데 깊이 생각해보면, 사람의 됨됨이 곧 존재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가 어떠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했느냐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됨됨이를 보고 평가하는 기준, 곧 본질적인 부분을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경우입니다. 마르다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을 만드는데 분주하지만, 마리아는 주님 앞에서 말씀을 듣는 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분주함에 지친 마르다가 마리아 뿐 아니라 주님께도 짜증을 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좋지만, 와서 나를 좀 도와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놀랍게도 ‘마리아가 훨씬 좋은 편을 선택했다’며 무엇을 했느냐보다는 됨됨이에 더 높은 점수를 주셨습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아부를 하려고 할 때에도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아야, 그가 기뻐하는 것을 선물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거면 좋아할 것이다’라고 제멋대로 생각하여 행동했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알지도 못한 채, 다윗의 환심을 사려고 하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하는, 레갑과 바아나라는 두 형제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는 틈을 이용하여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목을 베어서 다윗에게로 가져갑니다. 삼하 1장에 보면, 다윗에게 자신이 사울을 죽였노라고 말한 아말렉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 다윗에게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말한 이유나, 오늘 본문의 두 사람이 실제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사실을 다윗에게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유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환심을 사서 자신들의 안락을 꾀하자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들의 결말은 죽음으로 끝난다는 사실도 우리가 주지해야 할 부분입니다.
8절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사울을 죽였다고 말한 아말렉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때문에 그는 단지 사울을 죽였다고 말하면 다윗이 좋아할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레갑과 바아나는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을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원수를 갚으시기 위하여, 자신들로 하여금 이스보셋을 죽이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레갑과 바아나가 자기들의 왕인 이스보셋을 죽인 것은, 이스라엘에 희망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아브넬이 요압에게 죽은 상태입니다. 1절을 보면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스보셋은 손맥이 풀렸다고 말합니다. 팔에 힘이 빠진 것입니다. 또 온 이스라엘도 놀랐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아브넬은 이스라엘에게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있는 중심인물이 살해를 당하니,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레갑과 바아나는 이스보셋을 죽이고, 다윗에게로 가면 환대를 받고, 그곳에서 편히 살 수 지낼 수 있을 것으로 계획하고 이스보셋을 죽인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자신들의 행위가 다윗으로부터 환대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원수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죽였으니, 다윗도 기뻐하면서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다윗의 분노와 죽음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 가에 대한 무지의 결과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레갑과 바아나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윗이 누구인가를 몰랐고, 다윗이 통치하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몰랐다는 것에 있습니다. 다윗이 비록 사울에 의해 쫓겨 다니면서 많은 고생을 하였지만, 사울을 미워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여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두 번씩이나 살려준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통치하는 나라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죽였다고 말한 아말렉 사람을 죽인 것이고, 이스보셋을 죽인 레갑과 바아나를 죽인 것입니다. 다윗과 그의 나라가 무엇을 용납하지 않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레갑과 바아나가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자기들 방식으로 다윗을 기쁘게 하려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많은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레갑과 바아나처럼 예수님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다만 우리들 방식을 고집하는 것일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 내에서도 ‘이것이 주의 일이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주님께 충성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들 있지만, 그것이 레갑과 바아나처럼 우리들 방식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다고 설치는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주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모르고, 교회의 영광스러움이 무엇인가를 모를 때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많은 교회가 말하는 대로, 예배당을 짓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니, 예배당을 지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한다면, 먼저 생각할 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예배당을 지어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고 기뻐하시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예배당을 지어 바치는 것인데,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겠느냐?’라고 한다면, 그것이 곧 우리들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고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당 짓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필요하면 지을 수 있는 문제이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는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예배당 짓는 일에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하나님을 파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교회와 연관된 일이라고 해서, 아무것이나 하나님의 뜻 인양 빙자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분노를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의 목을 들고 다윗에게로 간 것은, 세상의 인간들이 어떤 마음과 어떤 목적으로 예수를 찾아 나오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빈손으로 다윗에게 올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앞날을 위해 다윗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입장이었었기 때문에, 다윗이 좋아할 만한 것을 들고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보셋의 목입니다. 사울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의 왕이니, 이스보셋을 죽이는 것은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주는 것이고, 사울에 대한 원수 갚음도 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올 때 무엇을 들고 옵니까? 예수님의 마음에 들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기뻐할만한 것을 들고 가면, 그에 대한 보답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를 찾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레갑과 바아나가 생각하는 다윗과,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이 전혀 달랐던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나의 생각과 다른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기존의 나의 생각이 깨어져야, 참된 복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식을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를 면밀히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 유대인식이라면 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섬김의 방식은, 예수님에 의해 철저히 부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행함에 열심이었습니다. 금식하고, 기도하고 율법을 지키면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 그들을 예수님은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선포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둘도 없는 이단자로 낙인찍히지 않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신앙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행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부정해 버리니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노가 오늘 우리들에게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을 신앙이 좋다고 여깁니까? 모든 것을 교회와 연관하여 판단하지 않습니까? 교회 일에 열심이면 신앙이 좋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유대인 시각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라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만큼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고 애쓴 민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열심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의 열심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고, 내 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열심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열심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예, 좋습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십시오. 하지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열심의 대가를 마음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되 그 열심조차 아무것도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열심이 오히려 여러분을 삼켜 버리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열심은 오직 주님을 향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이 되시는 주님에 대한 열망이 곧 열심입니다. 열심을 가지고 내것을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 말고, 주님만을 드러내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자기 열심을 가지고 다윗에게 나아간 사람입니다. 빈손으로 가면 다윗에게 환대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것을 가지고 가야겠다는 이것이야 말로, 인간의 공로를 버리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발상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공로는 인간의 종교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정성을 가지고 신에게 나아가면, 신이 나의 정성에 감동해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적 사고방식이 있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단지 종교의 힘을 빌어서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단체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열심도 정성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빈손으로 나아가도 환영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는 행한 자, 행하지 못한 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것을 교회 아닌 교회가 행함을 공로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실 때, 예수님께 나아왔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자랑할만한 공로가 있는 사람들입니까? 하나같이 병든 자,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분명 레갑과 바아나와 같은 무리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 역시 그러한 사고방식의 사람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은혜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는 우리의 공로로 나아갈 수 없음을 생각하십시오. 잘 아십니까? 그러면 아시는 바대로 행하십시오. 어떤 일에 대해서도 그것을 여러분의 공로로 삼지 마십시오. 다 잊어버리시고, 다만 예수님이 여러분께 행하신 것만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되어지는 것임을 한순간도 잊지 마십시오. 인간은 안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내 속에는 나를 부인하지 못하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나의 행위에서 의로움을 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해 무너져야 합니다. 그럴 때 성도다운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가 모인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교회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일은 하나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높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욕심을 다 버리고, 다만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으로 감사하며 살기를 소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것도 못한다고 해서 구원에 지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은혜는 크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이야 말로,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러한 축복 앞에서 뭘 자랑하겠습니까? 무엇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능함과 죄인 됨을 알고 주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오직 하나만을 바라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입니다. 그 공로를 의지하며 내게 주님이 계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머리를 가지고 다윗에게로 갔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하면 상을 받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왜나햐면 이스보셋은 다윗의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다윗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그러나 다윗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다윗은 이들에게 상을 주기는 커녕 그들을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름부음받은 이스보셋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들의 죄를 악인이 의인을 죽인 죄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전에 아브넬의 음모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요압이 아브넬을 죽임으로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다윗은 이때 자신이 일을 계획할지라도, 일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다윗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 편에서 일을 처리했습니다. 잠언 16: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지혜로 우리의 미래를 계획할지라도, 그 계획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인간적인 지혜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여호와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주인이심을 믿습니다.
예레미야 29:11-13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주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위해서 가장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희망적인 미래를 계획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계획을 따라 우리 각 사람을 인도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획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이러한 어려운 상황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임을 믿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안에 있음을 믿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인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모든 계획이 다 풀어지길 기도합니다. 선한 뜻대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우리 인생의 주권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