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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무명은 밝지 못함, 진리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는 뜻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어리석음의 주체를 바로 "나"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불교에서는 무명이 나라는 착각을 불어와서 결국 생로병사가 나타났다고 가르치는데 오히려 나라는 주체가 있어야 무명이라는 어리석음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 무명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는 불경이 있나요?
2. 있다면 무명에서 어리석음의 주체는 무엇으로 설명하고 있나요?
답변입니다.
1번 질문에 대해 답하겠습니다.
‘무명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는 불경’에 대해 물으셨는데, 불전 도처에서 무명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 있지만, 초기불전 가운데 <잡아함경>에서 12연기의 지분 각각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경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경문 전체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쿠루수의 조우 부락에 계시었다.(如是我聞:一時,佛住拘留搜調牛聚落)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지금 연기법의, 법의 말과 뜻의 말을 설명하리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희들을 위하여 설명하리라. (爾時 世尊告諸比丘:「我今當說緣起法法說、義說。諦聽, 善思, 當為汝說)
어떤 것이 연기법의 말인가.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즉 무명을 인연하여 지어감이 있고 ···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인다. 이것을 연기법의 법의 말이라 하느니라.(「云何緣起法法說?謂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謂緣無明行,乃至純大苦聚集,是名緣起法法說)
어떤 것이 뜻의 말인가. 이른바 무명을 인연하여 지어감이 있다면 그 어떤 것을 무명이라 하는가. 만일 과거를 알지 못하고 미래를 알지 못하며 과거와 미래를 알지 못하고, 안을 알지 못하고 밖을 알지 못하며 안팎을 알지 못하고, 업을 알지 못하고 갚음을 알지 못하며 업과 갚음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을 알지 못하며 법을 알지 못하며 승가를 알지 못하고,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모임을 알지 못하며 멸함을 알지 못하고 길을 알지 못하며, 인을 알지 못하고 인을 일으키는 법을 알지 못하며, 착하고 착하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 죄가 있고 죄가 없음과 익히고 익히지 않음과, 혹은 못하고 혹은 나음과 더럽고 깨끗함과 분별과 연기를 모두 알지 못하며, 여섯 감관을 참다이 깨달아 알지 못하며, 이러저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며, 참다운 지혜가 없어 어리석고 컴컴하니, 밝음이 없고 크게 어두우면 이것을 무명이라 하느니라.(「云何義說?謂緣無明行者。彼云何無明?若不知前際、不知後際、不知前後際,不知於內、不知於外、不知內外,不知業、不知報、不知業報,不知佛、不知法、不知僧,不知苦、不知集、不知滅、不知道,不知因、不知因所起法,不知善不善、有罪無罪、習不習、若劣若勝、染污清淨,分別緣起,皆悉不知;於六觸入處,不如實覺知,於彼彼不知、不見、無無間等、癡闇、無明、大冥,是名無明)
무명을 인연하여 지어감이 있다면 어떤 것을 지어감이라 하는가. 지어감에는 3종이 있으니 몸의 지어감, 입의 지어감, 뜻의 지어감이니라. 지어감을 인연하여 의식이 있다면 어떤 것을 의식이라 하는가. 이른바 여섯 식신이니 눈의 식신·귀의 식신·코의 식신·혀의 식신·몸의 식신·뜻의 식신이니라. 의식을 인연하여 정신과 물질이 있다면 어떤 것을 정신이라 하는가. 이른바 네가지 형상없는 쌓임이니, 즉 느낌의 쌓임·생각·지어감·의식의 쌓임이니라. 어떤 것을 물질이라 하는가. 이른바 4대(大)와 4대(大)로 된 물질로써 이 물질과 앞에서 말한 정신이니 이것을 정신과 물질이라 하느니라. 정신과 물질을 인연하여 여섯 감관(六入處)이 있다면, 어떤 것을 여섯 감관이라 하는가. 이른바 여섯 가지 안의 감관이니 눈의 감관·귀·코·혀·몸·뜻의 감관이니라.(「緣無明行者,云何為行?行有三種——身行、口行、意行。緣行識者,云何為識?謂六識身——眼識身、耳識身、鼻識身、舌識身、身識身、意識身。緣識名色者,云何名?謂四無色陰——受陰、想陰、行陰、識陰。云何色?謂四大、四大所造色,是名為色。此色及前所說名,是為名色。緣名色六入處者,云何為六入處?謂六內入處——眼入處、耳入處、鼻入處、舌入處、身入處、意入處)
여섯 감관을 인연하여 닿임이 있다면 어떤 것을 닿임이라 하는가. 이른바 6 촉신이니 눈의 촉신·귀의 촉신·코의 촉신·혀의 촉신·몸의 촉신·뜻의 촉신이니라. 닿임을 인연하여 느낌이 있다면 어떤 것을 느낌이라 하는가. 이른바 3수(受)이니 괴로움의 느낌·즐거움의 느낌·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니라. 느낌을 인연하여 욕망이 있다면 어떤 것을 욕망이라 하는가. 이른바 3애(愛)이니 욕심의 욕망·빛깔의 욕망·빛깔이 없는 욕망이니라. 욕망을 인연하여 잡음이 있다면 어떤 것을 잡음이라 하는가. 4취(取)이니 욕심의 잡음·소견의 잡음·계의 잡음·나의 잡음이니라. 잡음을 인연하여 존재가 있다면 어떤 것을 존재라 하는가. 세가지 존재인 욕심의 존재·빛깔의 존재·빛깔이 없는 존재이니라.(緣六入處觸者,云何為觸?謂六觸身——眼觸身、耳觸身、鼻觸身、舌觸身、身觸身、意觸身。緣觸受者,云何為受?謂三受——苦受、樂受、不苦不樂受。緣受愛者,彼云何為愛?謂三愛——欲愛、色愛、無色愛。緣愛取者,云何為取?四取——欲取、見取、戒取、我取。緣取有者,云何為有?三有——欲有、色有、無色有)
존재를 인연하여 남이 있다면 어떤 것을 남이라 하는가. 만일 이러저러한 중생이 이러저러한 몸의 종류와 한 번 생기면 뛰어넘고 화합하고 태어나서 쌓임을 얻고 계를 얻고, 입처를 얻고 명근을 얻나니 이것을 남이라 하느니라. 남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면 어떤 것을 늙음이라 하는가. 만일 털은 희고 정수리는 드러나며, 가죽은 늘어지고 기관은 무르익으며, 사지는 약하고 등은 굽으며, 머리를 떨어뜨리고 끙끙 앓으며, 숨길은 짧고 숨을 헐덕이고 앞으로 쏠리어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몸은 검누르고 저승꽃이 피며, 정신은 희미하고 행동하기도 어려워서 쇠약해 빠지면 이것을 늙음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죽음이라 하는가. 이러저러한 중생이 이러저러한 종류로 사라지고 옮기되, 몸이 무너지고 수가 다하며 더운 기운이 떠나고 목숨이 멸하여 쌓임을 버릴 때가 이르면 이것을 죽음이라 하나니, 이 죽음과 앞에서 말한 늙음을 늙음과 죽음이라 한다. 이것을 연기의 뜻의 말이라 하느니라.”(緣有生者,云何為生?若彼彼眾生,彼彼身種類一生,超越和合出生,得陰、得界、得入處、得命根,是名為生。緣生老死者,云何為老?若髮白露頂,皮緩根熟,支弱背僂,垂頭呻吟,短氣前輸,柱杖而行,身體黧黑,四體班駮,闇鈍垂熟,造行艱難羸劣,是名為老。云何為死?彼彼眾生,彼彼種類沒、遷移、身壞、壽盡、火離、命滅,捨陰時到,是名為死。此死及前說老,是名老死。是名緣起義說。」)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이상은 <전자아함경>에 실린 번역문과 한문으로 <전자아함경> 파일은 아래와 같습니다. 다운로드 하여 압축을 푼 후 폴더를 열면 보이는 ‘경판 모습의 아이콘’을 클릭하면 아함경 전체의 경문과 우리말 번역문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
위의 <잡아함경> 인용문에서 무명의 의미를 설명하는 경문에 밑줄을 그어놓았습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번 질문에 대해서 답하겠습니다.
무명을 거론하는 대표적인 교리가 위에 인용한 12연기설(緣起說)입니다. “무명(無明)이 있기에 행(行)이 있고, 행이 있기에 식(識)이 있으며 … 애(愛)가 있기에 취(取)가 있고 취가 있기에 유(有)가 있으며, 유가 있기에 생(生)이 있고, 생이 있기에 노사(老死) 및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있다.” 또는 “무명이 있으면 행이 있고 … 생이 있으면 노사 및 우비고뇌가 있다.”라고 가르칩니다. 12연기설은 탄생과 생존과 죽음을 무한히 되풀이하는 모든 생명체의 윤회 과정의 공통점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불전에서는, 인간이든 짐승(축생)이든 천신이든 귀신(아귀)이든 모든 생명체(중생)는 12연기의 방식으로 삶과 죽음을 되풀이한다고 가르칩니다.
無明 → 行 → 識 ↔ 名色 → 六入 → 觸 → 受 → 愛 → 取 → 有 → 生 → 老死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
질문2에서 “어리석음의 주체는 무엇으로 설명하고 있나요?”라고 물으셨는데, 무명에서 시작하여 노사에서 끝나는 12연기설의 취지는 ‘주체 없이 이어지는 생존과 윤회’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어리석음의 주체’가 있는 게 아니라, ‘어리석음(무명)’ 때문에 ‘행 →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로 이어지는 생존과 윤회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12연기의 각 지분 어떤 것도 주체가 아니지만, 우리의 삶과 죽음은 12연기의 원리에 따라서 이어집니다. 우리 인간만 그런 게 아니라, 소나 돼지와 같은 짐승이나 바퀴벌레나 매미와 같은 곤충, 하늘나라에 산다는 천신,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 등 모든 생명체의 윤회는 12연기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본 <불교문답게시판>에 올린 답글 가운데 2021년 6월 23일자 답글에서 12연기의 의미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 적이 있는데 첨삭하면서 이를 다시 인용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십이연기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⑴분위(分位)연기 - 12가지 지분이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적으로 일어나는 것
⑵찰나(刹那)연기 - 12가지 지분들이 모두 한 찰나에 중첩되어 있는 것
⑶원속(遠續)연기 - 12연기의 인과관계가 전후의 인접한 생이 아니라 먼 전생이나 먼 내생과 관계하는 것
⑷연박(連縛)연기 - 12연기의 지분 각각이 1찰나에 걸쳐 발생하는 것
이들 네 가지 해석은 서로 배척하는 이설(異說)이 아니라, 십이연기에 대한 네 방향의 통찰입니다. 이 가운데 분위(分位)연기를 인간에 적용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삶과 죽음, 생명과 세계의 진상에 대해 무지몽매하여[①무명] 나는 갖가지 업[②행]을 지으며 살아간다. 내가 평생 지은 일거수일투족의 업을 항상 목격한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나다. 따라서 내가 평생 지은 업은 그때, 그때 씨앗과 같이 영글어서 나의 마음 밭[③식]에 저장된다. 이렇게 살아가다가 사망하게 되면 이렇게 평생 지은 업의 씨앗을 간직한 나의 마음이, 내생에 어미가 될 여성의 자궁 속 수정란과 결합하여 태아[④명색]로서 자라난다. 그 후 5주 정도 지나면 이목구비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다. 아직은 기능하지 못하는 안이비설신의의 여섯 가지 지각기관[⑤육입]이다. 그리고 자궁 속에서 열 달을 채우면 드디어 어미의 자궁 밖으로 나온다. 소위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는다. 3-5일 정도 지나면서 감관이 서서히 열리면서 외부의 대상과 감각적으로 접촉[⑥촉]하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내가 체험하는 갖가지 대상에서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⑦수]. 이렇게 어린아이로서 자라나다가 13-15세가 되어 그 몸이 성적으로 발달하는 사춘기가 되면 욕망과 분노가 강열해진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나를 지키며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동물적인 감성이다[⑧애]. 그러나 이를 그대로 발휘할 수 없기에 사회에서 용인하는 제도[⑨취]에 편승하여 욕망을 실현하며 살아간다[⑩유].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다시 사망하여, 내가 지었던 업의 씨앗을 간직한 채 다른 태에 들어가서 탄생하고[⑪생] 살아가다가 다시 사망하는[⑫사] 윤회를 되풀이한다.
- <화엄경을 머금은 법성게의 보배구슬>에서 -
(십이연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 카페 게시판 https://cafe.daum.net/buddhology/TjB9/196 등의 설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카페 상단 우측의 검색창에 '십이연기' 또는 '12연기'를 입력하면 여러 문답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 https://cafe.daum.net/buddhology/TjB9/306 및 https://cafe.daum.net/buddhology/TjB9/9 등 참조)
위의 설명문 가운데 “… 나는 갖가지 업[②행]을 지으며 살아간다. 내가 평생 지은 일거수일투족의 업을 …” 등에서 사용한 ‘나’라는 용어가, 2번 질문에서 말씀하신 “무명에서 어리석음의 주체”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부처님의 ‘무아설(無我說)’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남기신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하라."는 가르침에서 보듯이, 또 재물을 갖고 달아난 기녀(技女)를 찾는 청년들에게 자아를 찾으라고 하셨던 가르침에서 보듯이 부처님께서는 불전 도처에서 '자아(나)'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자아', '상식적인 자아', '진속이제(眞俗二諦) 가운데 속제(俗諦)로서의 자아'까지 부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무아'가 불교사상의 특징이긴 하지만, ‘영원하고 변치 않는 실체로서의 나’가 없다는 의미에서 ‘무아’인 것이고, ‘종교적 희망 사항으로서의 나(아뜨만)’란 없으니, '아뜨만을 찾아 안주하려는 헛된 희망'을 갖지 말라는 의미에서 ‘무아’인 것입니다.
마른 억새 풀이 가득한 가을 들판 한구석에 붙은 불이 이동하는 것을 예로 들 때 ‘주체 없음을 의미하는 무아의 가르침’과 ‘주체 있는 자아의 가르침'이 상충하지 않는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억새 풀이 가득한 들판의 동쪽 한구석에 불을 붙이면, 그 불길이 서쪽으로 이동합니다. 그 때 우리는 “불길이 동에서 서로 간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보면 동쪽 한구석에 붙은 불길은 절대로 서쪽으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타올랐다가 그 자리에서 꺼질 뿐입니다. 그 불길이 옆의 억새 풀에 옮겨붙고, 다시 꺼지면서 그 옆의 억새 풀에 옮겨붙기에 마치 불길이 이동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날 뿐입니다. 억새 풀밭에 붙은 불길을 바라볼 때 “불길이 이동한다.”라고 보는 것도 하나의 사실이고, “불길이 매 순간 타오르다가 꺼진다.”라고 통찰하는 것도 하나의 사실입니다. 앞의 모습은 일반인들의 눈에 비친 사실이고, 뒤의 통찰은 엄밀한 분석으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진속이제(眞俗二諦)로 설명하면, 앞의 모습은 속제(俗諦, 세속의 진리), 뒤의 통찰은 진제(眞諦, 참된 진리)에 해당합니다. 두 가지 모두 엄연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억새 풀밭 여기저기에 불이 붙어서 "여러 불길이 이동한다."고 말할 때(속제), 동쪽에서 붙어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불길(불길A)이든, 북쪽에서 붙어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불길(불길B)이든 엄밀히 보면 실체가 이동하는 게 아닙니다(진제). 즉 불길A든, 불길B든 계속 꺼지면서 옮겨붙기에 무상한 것이고, 변치 않는 실체가 없기에 무아(無我)인 것입니다(진제). 그러나 불길A와 불길B는 엄연히 구별됩니다. 불길A와 B에 실체가 없다고 해서 불길A와 B가 아예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상하기에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의미에서 무아인 것입니다.
우리가 인무아(人無我)의 가르침을 이해할 때도 이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아뜨만(ātman)과 같은 자아가 없다는 의미에서 무아(無我)인 것이지, 찰나생멸하면서 상속(相續)하는 오온(五蘊)의 흐름조차 없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후대의 불교 교학에서는 무아설을 위배하지 않으면서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 ‘자상속(自相續)’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찰나 생멸하며 상속하는 이쪽의 흐름’이라는 뜻입니다. 타인을 지칭할 때에는 ‘타상속(他相續)’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저쪽(타)에서 일어나는 오온의 흐름(상속)’이라는 뜻입니다. '찰나생멸하는 내 오온의 흐름'과 '찰나생멸하는 남의 오온의 흐름'은 엄연히 다릅니다. 즉 '무명의 주체로서의 자상속'과 '무명의 주체로서의 타상속'은 서로 다른 사람입니다.
요컨대, 질문에서 “어리석음의 주체는 무엇으로 설명하고 있나요?”라고 물으셨는데, 궁극적으로 그런 주체는 없기에 그에 대해서 설명하는 경문도 없습니다. 다만 ‘불길 이동의 예’에서 보듯이 ‘어리석음(무명)’의 불길이 계속 타고 있는 '자상속(自相續)의 흐름(나)'이나 '타상속의 흐름(남)'은 있습니다. 억새 밭에서 ‘동에서 서로 가는 불길’과 ‘북에서 남으로 가는 불길’이 서로 다른 것이듯이, 이런 상속의 흐름은 모든 생명체마다 다릅니다. 개개의 생명체가 지은 업과 그로 인해 받는 과보의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에서 말씀하신 '어리석음의 주체', '무명의 주체'는 이런 상속의 흐름을 개체화 한 후, 그것에 덧붙인 생각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마치 매 순간 명멸하는 불길에 대해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불길'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듯이 ...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무아와 윤회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상이하고 거대한 담론의 한 분야인것 같습니다. 무명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해서 무명이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무명의 주체가 없다면 무명을 일으킨 작용은 오온의 취합으로 생긴 가아 (假我)일까요? 또 어떤 분은 무아는 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제법무아 즉 오온의 작용이 실체성이 없고 연기적 작용이므로 실체가 없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상에서 보기 때문에 무아(無我) 이고 윤회가 없지만, 중생들은 나라는 집착이 강하므로 유아(有我) 이고 윤회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커멘트 감사합니다. "무명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라는 의문에 대해 본 게시판에서 답변을 단 적이 있습니다. 답글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cafe.daum.net/buddhology/TjB9/58
교수님의 친절하고 상세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있어서 추가로 여쭙니다
영국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우리가 "나" 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 지각들의 다발 또는 묶음에 불과하다' 라고 하여 불교의 오온과 상당히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온은 훗설이 현상학에서 이야기 하는 '경험적 자아' 라는 개념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훗설은 경험적 자아 이전에 경험적 자아를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자아'가 있다 라고 합니다.
선험적 자아는 선험적이기 때문에 경험될 수 없지만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인식주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무아는 경험적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분명한데 선험적 자아 또는 인식주관 자체를 부정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명이라는 어리석음의 주체, 오온을 나로 착각하는 자, 차를 타고 있을때 타인은 볼수 없는 차안의 풍경을 보고있는 자
이런 인식주관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모든 논의가 불가능해 지는 것 아닌가요?
어리석음이란 어떤 중생이 가진 속성이지 인식주관 없이 텅빈 우주공간이 무명이라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봅니다.
(이어서) " 선험적 자아(인식주관)은 경험할 수 없는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라고 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나는 항상 나의 관점에서 세상을 인식하지 공동의 관점이나 너의 관점이나 그의 관점으로는 세상을 볼수 없기때문입니다
"나의 관점" 이라는 것이 바로 인식주관이고 선험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진제의 입장에서도 인식주관이 없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깨달은 후에는 나의 관점이 아닌 모든 중생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건가요?
불길의 비유에서 불길의 실체가 없는 것이지(진제) 이쪽에서 저쪽으로 불길이 이동하는 자체는 있는 것이다(속제)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오온, 경험적 자아 에 대한 비유로는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만 선험적 자아 또는 인식주관은 살아있는 동안 변화없이 고정적으로 항상하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