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난 캐시어스 클레이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간판을 그리는 화가였고 어머니는 전형적인 가정주부였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1950년대 미국 남부 특유의 인종차별 그늘 속에 있었다.
12살이 되던 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60달러짜리 자전거를 도둑맞는 사건이 벌어진다.
클레이는 경찰관 조 마틴을 찾아가 그놈을 때려주겠다고 말했다.
마틴은 먼저 싸우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며 그를 콜롬비아 체육관으로 이끌었다.
바로 그 순간이 20세기 최고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 전설의 시작이었다.
처음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친 그날 그는 자신이 걸어갈 길을 직감했다.
소년은 매일같이 체육관을 찾았고 단 6주 만에 첫 아마추어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는 천부적
재능을 보인다.
선천적 재능과 함께 지독한 훈련은 그를 더 한층 발전시켰다.
1960년 불과 18세의 나이에 그는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며 세계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귀국 직후 루이빌의 한 식당에서 흑인은 받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입장을 거절당하는
인종차별을 당한다.
이 경험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그 무렵 그는 말콤X를 통해 전통 이슬람 요소와 흑인 민족주의 사상이 결합된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접했다.
“백인의 기독교는 흑인을 억압해왔습니다. 진정한 흑인의 종교를 찾아야 합니다.“
말콤의 설교에 영향 받아 그는 이슬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64년 클레이는 소니 리스턴을 꺾고 세계 챔피언에 올랐고 이름을 무하마드 알리로 바꿨다.
무하마드는 찬양받을 자, 알리는 고귀한 자를 뜻한다.
그의 새 이름은 단순한 개명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과 신념을 명확히 드러내는 선언이었다.
대중과 언론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는 단호했다.
“내 이름은 무하마드 알리입니다. 부디 존중해주길 바랍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1967년 베트남 전쟁이 터지자 “베트콩은 나를 니거(검둥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며 참전을 거부했다.
이 결정으로 복싱 라이선스를 박탈당하고 전성기 3년을 잃었지만 그 선택은 그를 스포츠 스타를
넘어 사회적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선 감옥에 갈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함께 지독한 훈련은 그가 무수한 도전자를 물리칠 수 있었던 원천이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무거운 부츠를 신고 15킬로미터를 달리며 가벼운 복싱화를 신었을 때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훈련했다.
물 속에서 섀도우 복싱을 하며 저항을 이용해 근력과 지구력을 동시에 길렀고 하루 2,000번의 잽,
1,000번의 시트업, 수중에서 3라운드씩 섀도우 복싱을 반복했다.
로프를 타고 오르내리며 다리 근력을 기르고 테니스공을 벽에 던져 반사신경을 단련했으며 자동차와
경주를 하며 체력을 시험했다.
유명한 그의 ‘알리 셔플’은 수천 번 반복한 끝에 완성된 예술적 움직임이었다.
신체적 능력만큼이나 그의 정신력 또한 탁월했다.
거울 앞에서 ‘나는 가장 위대하다’는 말을 수백 번 되뇌며 잠재의식에 승리 의지를 각인시켰고 상대의
심리를 흔드는 전략도 탁월했다.
조 프레이저와의 경기 전 상대를 고릴라라고 부르며 압박을 가했고 이런 심리전은 실제로 경기에서
큰 효과를 발휘했다.
무하마드 알리는 단지 위대한 복서가 아니었다.
자기 분야를 끊임없이 재창조하며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인물이었다.
링 안에서는 승리하는 법을 알았고 링 밖에서는 더 크고 묵직한 싸움을 마주했다.
그는 말했다.
“인생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로 측정됩니다.”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이 지금도 기억되는 이유는 그가 단지 싸운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를 끝까지 보여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받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