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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훈 목사
아무리 능력이 있고 인격이 좋은 아버지가 있어도 그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아니면 그분의 인격이나 능력이 나와 상관없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즐비해도 음식이 내가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면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능력으로 세계를 붙들고 계시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도와주시고, 은혜와 복을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나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은 구약과 신약이 다릅니다. 구약에서는 먼저 선택받은 이스라엘 사람이라야 했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못났어도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또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하고 율법을 따라 산다면 하나님의 그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그가 어느 민족이냐 그리고 율법을 지키느냐의 차원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시느냐 아니냐가 결정되지 않습니다. 요1:12 말씀대로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확신하고 그분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스라엘에게 어떤 하나님이 되어주시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야곱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 식으로 풀면 에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에수님의 공로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신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잘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떤 하나님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말은 곧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하나님은 나의 창조자이십니다(1절).
사실 창조자 하나님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창조자이십니다. 믿는 사람도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이 땅에 존재하고 불신자도 역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이 땅에 존재합니다.
창1:1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영적인 존재가 되었든 물질적인 존재가 되었든 어떤 존재도 하나님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들이 있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존재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자신을 낳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같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섬겨야 하듯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자에 대해서 묵상할 때 가장 핵심적인 것은 그분의 능력입니다. 창1장에 보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창조한다고 할 때는 유에서 유의 창조인데 비하여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사40:12-26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자로서의 능력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피조물에 비하여 그분이 얼마나 광대하신 분인지 그리고 그분이 가지신 능력이 얼마나 탁월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15절을 보면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
는 먼지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26절에서는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40:27-31을 보면 창조자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면 나는 그분으로 힘을 얻게됩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성경은 이렇게 분명하게 창조자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는데도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고 고백했던 다윗의 고백을 자신의 고백으로 삼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있다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빌4:13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자가 능력이 부족해서 무능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능력 있는 도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무능하게 사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고 믿는다면 시시하게 배경이나 돈을 의지하여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런 것 때문에 기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히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2.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1,3,11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번 하나님을 구원자로 체험했습니다. 그들이 애굽의 압제에서 고통 당하다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유다 3대 왕 아사 시대에 구스 사람 세라가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유다를 침공한 일이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세라를 이길 수 없는 아사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한 일이 있습니다.
대하 14:11을 보면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사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스 사람을 쳐서 패하게 하시고 아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창조자 하나님이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창조자이시며 구원자가 되셔야 합니다. 인류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 죄를 범하고 사단의 종이 되었습니다. 사단의 종이 된 인간은 사단과 그의 추종자를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 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인류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의 죄를 담당하실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그분을 믿기만 하면 믿는 사람의 모든 죄는 그분에게 넘어가고 그분의 생명이 믿는 자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구원의 범위에 대한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죄에서 구원 즉 영원 구원으로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하나님은 사람들을 죄악에서만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육신의 질병에서 구원해 주셨고, 엘리사를 찾아온 선지생도의 아내는 빚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행16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사도바울은 환경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구원을 어떤 사람이 받을 수 있습니까?
시50:15에 보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능력도 부족하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사 31:1에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습니다.
3.하나님은 나의 보호자이십니다(2절).
2절에 보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약속하십니다. 물 가운데서 불 가운데서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이 말씀을 경험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은 바람을 불게 하셔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바닷물이 벽처럼 쌓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가운데로 통과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좇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물 가운데서도 그들의 보호자가 되셨습니다. 또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벤느고가 우상 앞에 절하지 않아 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왕 앞에서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요즘처럼 신앙의 지조를 쉽게 버리는 시대에 도전이 될만한 일입니다. 그들을 설득하던 왕이 진노하여 풀무 불을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뜨거운 불에 세 친구를 던졌는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불 속에 들어간 친구들이 타지도 않고 불 속에서 거닐고 있었으며 분명히 불 속에 들어간 사람은 셋인데 네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 중 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게서 그들 가운데 찾아오셔서 7배나 되는 풀무 불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와 목사를 그리고 성도들을 물 가운데서 불 가운데서 보호해주신 분입니다.
성경을 읽고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보호에 대한 확신을 있습니다.
신32:9-10에보면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슥 2:8에서는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주님의 눈동자를 범할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감히 누가 주님의 눈동자를 범하겠습니까? 그런데 감사한 것은 주님은 우리를 주님의 눈동자로 여기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눈동자를 지키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을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4.하나님은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4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존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이유는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신자는 당연히 최고의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이 자존감은 신자의 인격이나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성경적으로 아는 만큼 높은 자존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럼 내가 성경적으로 어떤 존재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으뜸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존귀한 존재입니다. 요3:16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독생자가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도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목숨을 주고 나를 살리셨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존재면 자신의 목숨을 주시면서 나를 사랑하시겠습니까?
지체개념으로 나를 보면 나의 가치가 좀 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되시니 교회가 지상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입니다. 그런데 성도인 나는 교회의 지체입니다. 머리가 주님이시니 지체인 나는 주님의 지체입니다. 성전 개념으로 봐도 주님과 나는 하나입니다. 그분은 머릿돌이시며 나는 성전의 돌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주님과 함께 성전을 이루는 돌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김새나 능력으로 자신의 존귀함을 따지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적이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못났어도 왕자는 노예와 다른 것입니다. 노예가 왕자보다 힘이 세고 잘 생겼어도 왕자의 존귀에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고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겨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하찮은 일에 드렸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사단의 속임수와 사람들의 거짓된 말에 속아서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믿어왔던 것입니다. 아마 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성경은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말씀대로 자신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알지 못한다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렇게 느낀다면 그 느낌이 잘못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그렇게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말이 모두 다 틀 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만이 완전한 진리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5.하나님은 나를 자신의 증인으로 세우시는 분입니다(12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민의식에 빠져서 자신들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자신들을 구별시켰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라면 요나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니느웨성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이 심하여 멸망이 가까웠다는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고도 니느웨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물고기 배속에 들어간 요나가 회개하고 기적적으로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증거했는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증인 삼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방인도 성령께서 임하시면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행1:8에서는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이 되리라고 가르쳐줍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복음을 증거하는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증인의 자격은 사건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잘났어도 목격하지 못한 사람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못났어도 목격자는 증인의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것은 전도입니다. 전도는 모든 믿는 자의 사명입니다. 전도는 인물이 잘났느냐 못났느냐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로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약 진실로 주님을 믿고 우리의 영으로 주님을 경험했다면 우리는 목격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성령을 받고 주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복음을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목격한 것을 말할 때 예수가 확실히 증거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