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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4-29
초심으로의 회복 / 고병호 목사
최근 들어 매스컴을 통해 우리가 자주 접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자살”이라고 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최근에 신문 지상에 오르내린 자살을 살펴보면, 생활고를 비관하던 30대 주부가 세 자녀와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온 나라를 충격을 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대하는 아버지 곁으로 가는 것이 싫었던 초등학생이 역시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습니다. 군 내부 반에서 인격적인 모욕과 성적 희롱을 당한 사병이 그 모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서 목을 메달아 자살했습니다. 그런가하면 공부를 못해서 비관하던 고교생이 목을 매어 자살했고, 어떤 주부는 쌍꺼풀 수술이 잘 못 되었다고 비관하다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산에 사는 40대 부부는 아들의 카드 빚을 고민하다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문제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참으로 암울한 사건들의 나열입니다. 아마 내용과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들 가운데도 감당하기 힘든 극심한 무력감과 고통을 느끼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계시리라 여겨집니다.
그 같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도 같은 곳에 있는 여러분들과 저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무엇을 하나님께 소원하시겠습니까?
이와 동일한 질문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솔로몬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솔로몬은 성군으로 소문난 그의 아비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이 된 사람입니다. 처음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들 가운데 있나이다.”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그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깨달은 그는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다고 하는 것은 그가 그 자신의 무능함을 얼마나 철저하게 깨닫고 있었는지, 그가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가 이 같은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이 때 솔로몬이 구한 것은 “지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가 구한 지혜뿐만 아니라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처음 약속을 지키셨고, 솔로몬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지혜”만 구한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화를 허락하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가 구한 “지혜”라고 하는 단어를 묵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솔로몬의 지혜는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지성적인 것이거나 분별력이 뛰어난 어떤 지적 능력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구한 지혜는 그런 성격의 지혜가 아닙니다. 몰론 이러한 의미를 지니는 지혜도 성경에 나옵니다. 그것은 히브리어로 “비나”라고 하는 데, 우리 말 성경에 주로 명철, 지식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구한 지혜는 히브리어로 “호크마“라고 합니다. 이 말을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듣는 마음, 혹은 순종하고 복종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나오는 단어 중에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은 생각하고 느끼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근원 혹은 샘을 의미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마음을 대장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들을 이곳에서 만들 듯이 우리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결정 짓는 곳이 바로 마음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에서 마음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 얼굴 표정, 눈 빛, 심지 걸음걸이까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13)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
그렇습니다. 마음에 소망으로 가득 차 있으면 절망 가운데서도 웃고 기뻐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에 사람이 넘치면 말투, 표정, 행동에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마음에 용서가 있으면 어떤 사람이라도 이해하고 용서하고 관용하고 품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시기가 있으면 질투하고 배신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미움이 넘치면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악한 것이 있으면 악한 말을 하고, 악한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 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부부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의 재산과 소유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얼마를 감추고 얼마를 사도들의 발 앞에 둡니다. 이를 보고 베드로가 이렇게 꾸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네 마음에 사단이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로다.” 결국 부부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문제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사단이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그들이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다스리도록 영적 관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사단이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었고, 그 사단에 영에 지배를 받은 그들은 결국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여 그 같은 불행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한 것이 그들이 그처럼 불행하게 된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권면하고 계십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그렇습니다. 마음은 곧 생명입니다. 마음을 지키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죽습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불행하게 됩니다, 비참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도 없고 다스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어렵고 힘든 일이 많지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지키는 것 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하나님과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 부부처럼, 자신들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실수하고, 화내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교만하고, 잘난 체 하고, 절망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부모들이 범하는 실수 중의 하나가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인 내가 얼마든지 다스리고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큰 착각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큰 교만인지 모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해 이리 쓰러지고 저리 실패하는 우리 자신이 누구의 마음을 다스린단 마입니까? 누구의 마음을 내가 지키고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오만이요 착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명의 길이 되고,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인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을 우리 마음에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앞서 살핀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근원지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워 넣습니다. 새겨 넣습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오겠습니까? 그렇습ㄴ다. 우리의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보는 것, 느끼는 것, 행동하는 것이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받고, 통치되고,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이 때 우리의 삶과 행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삶, 거룩한 행실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원하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별 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주 명확합니다.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 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 이 두가지 내용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사실을 기초하여 우리는 솔로몬의 간구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게 지혜를 주옵소서.
= 하나님, 제게 듣는 마음을 주옵소서.
= 제 마음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주시옵소서,
= 제 마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백성들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이것이 바로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기도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이 같은 기도가 너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리란 판단은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솔로몬의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처음 왕이 되었을 때, 솔로몬의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깨끗하고, 순전하고 겸손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소리와 백성들의 소리에 민감했습니다. 그의 심장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면서 솔로몬의 이 첫 마음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처음
사랑과 열정이 식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처음 하나님께 보여주었던 결심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맑고 깨끗하고 순전했던 그의 처음 마음이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삶이 부유해지고, 그의 이름이 알려 지면서, 어두워지고, 흐려지고, 더럽혀지고, 거짓된 영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그의 첫 열심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식어지기 시작했음을 암시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선, 그의 왕궁에는 금으로 만든 장식품들이 넘쳐 난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금으로 만든 방패가 500개, 정금으로 입힌 상아보좌, 정금으로 만든 컵과 식기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묘사는 그의 부귀를 나타내지만 동시에 그이 타락상을 엿보게 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신 17장에 보면 “왕은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세운 왕은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 자신을 위하여, 그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고 과시하고 폼 재기 위하여 이 같은 금제품을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금 방패를 500개나 만들어 그의 왕궁에 두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그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에 깊은 관심과 욕심을 두고 있었는지를 엿보게 합니다.
더군다나 그 같은 제품을 만드는데 들어간 대부분의 정금들은 백성들로부터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것입니다. 백성들을 위해 사용해야 할 금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한 것도 문제이지만, 이처럼 백성들의 노역과 세금으로 그의 배를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리에 민감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입니다. 그리고 그는 많은 말과 병거들을 구입했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입니다.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순종했지만, 하나님보다 다른 힘에 더 의존하는 것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많은 이방여인들과 결혼함으로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라”는 말씀도 어겼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같은 그의 상황을 가르켜 “마음이 온전하지 못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그의 통치 말년은 그의 통치 초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쁘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바뀌었습니다. 삶의 척도가 바뀌었습니다. 관심사가 달라졌습니다. 처음 왕이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리에 민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 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의 그의 마음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척도를 중요시 여겼습니다. 자신의 평안과 번영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솔로몬의 마음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완전히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마음 상태를 본문 11:9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이처럼 그가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 역시 그를 떠났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버리자 하나님 역시 그를 버렸습니다. 이것을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고 버리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솔로몬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리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들의 마음을 지키시고 다스리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는 물질의 문제가 아니요, 환경의 문제도 아니요, 정치적인 문제도 아닙니다.바로 마음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이 물질이 세상의 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방치해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소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마음을 지배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평강의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바로 빌 4:4-7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키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걱정이 변하여 찬양이 되고, 염려가 바뀌어 기쁨이 되고, 한숨이 변하여 감사가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리에 민감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처음 왕이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리에 민감하기를 소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요, 백성들의 고통이 하나님의 고통이요, 백성들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백성들을 섬기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같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나만 힘든게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다 힘듭니다. 이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내가 힘들다고 나만 생각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내가 힘겨워도 다른 사람의 아픔, 다른 사람의 한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손을 펴서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저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일전에 30대 여인이 세 자녀와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습니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그 때 아이들이 이렇게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엄마 살려줘. 안 죽을래, 살래” 이건 아이들의 소리가 아닙니다. 내 백성들을 살려달라는 하나님의 부르짖음입니다. 이 땅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르는 절망의 소리, 한숨의 소리에 민감해야 합니다.
마지막은 하나님 앞에서 고백했던 처음 약속이 변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처음 왕이 되었을 때 솔로몬의 다짐과 결심은 대단했습니다. 수도, 부도, 영화도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소리, 백성들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을 구할 정도로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이후 그는 한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며 빚진 마음으로 통치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변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초심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 같은 변심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 처음 열정, 처음 감격,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다짐하고 약속했던 초심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우리는 언제나 깨어 기도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을 넘어뜨리고 패배시킨 사탄이 오늘은 저와 여러분들의 초심을 빼앗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높은 뜻을 생각하며 이제는 정말 제대로 예수 한 번 믿어보겠다고, 올바른 신앙 생활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굳게 다짐하고 결심하고 약속하고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 교인이 된 저와 여러분들은 그 처음 다짐이 변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처음 마음, 처음 다짐, 처음 사랑, 처음 열정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던 단단해 진보할 수 있도록 깨어서 더 간절하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많은 댓가를 지부라고 모인 만큼 하나님 앞과 한국교회 앞에 빚진 마음, 선한 부담을 안고 신앙생활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같은 빚진 마음을 놓치고, 초심을 잃어버린다면 우리 교회는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은 솔로몬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잔뜩 만들어 그의 왕궁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금방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교회와 저와 여러분들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신앙의 자리는 어떠합니까? 첨 사랑과 열정, 그 다짐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진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진보하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봉사는 어떻습니까? 기도 생활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다시 한번 저와 여러분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여러분들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