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北 남침설 가짜” 알렸는데…전두환 계엄 확대는 교묘했다
제3부 금남로의 총소리
3회 5·18로 가는 길, 5·17
1980년 5월 17일 밤 서울 중앙청에서 열린 비상국무회의장에 무장한 군인이 1~2m 간격으로 배치돼 있다.
긴급소집된 이날 국무회의는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5·17을 결의했다. 중앙포토
1980년 5월 10일은 5·17로 가는 출발점이었다. 이날 3가지 일이 벌어졌다.
첫째,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을 떠났다.
원유 수입선 확보가 긴요한 상황이라서 불가피했다곤 하지만, 당시 일촉즉발의 국내 사정을 감안하면 생뚱맞은 외유였다.
둘째, 중앙정보부가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중국을 방문 중인 일본 고위 관리가 베이징 당국으로부터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셋째,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에게 ‘학원 소요를 근절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갑자기 날아든 북한의 ‘남침 결심’설
1978년 당시 국무총리 최규하와 환담하는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 12·12 이후에도 글라이스틴은 최규하 정부에 대한 지지를 거듭 천명하는 방식으로 신군부를 견제하고자 했다.
1980년 5월 전두환이 내놓은 '북한의 남침 결심설' 첩보에 대해서도 '근거 없음'이란 판단을 최규하에게 전달했다. 중앙포토
중앙정보부가 보고한 남침설은 구체적이었다. 전두환 회고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북한은 한국 정부가 1980년 4월 중순 김재규를 처형할 것으로 예상했음. 김재규 처형 시 격렬한 항의 데모가 발생해 남침을 위한 결정적 시기가 조성될 것으로 판단.
김재규 처형이 지연됨에 따라 남침을 연기해 오던 중 5월 들어 소요사태가 격화되자, 북한은 소요사태가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5월 15일부터 20일 사이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했음.’
일본은 이 정보를 미국에도 전달했다. 미국은 중국과 일본의 정보망을 동원해 확인한 결과 ‘근거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회고록에서 ‘곧바로 한국에 통보해 줬다’고 밝혔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가 보고한 ‘북괴 남침설 분석’에서도 결론은 ‘특이 전쟁 징후 없음’이다.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200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