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염모,
소상공인 적합 업종
염색 가격이 옛날보다 세 배나 올라 머리카락이 쭈뼛할 정도입니다.
한양에 있는 염색은 으레 부자가 되니,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조정에서 조처해야 할 일입니다.
양성지, [눌재집]
우리나라 사람을 백의민족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삼국시대부터 흰 옷을 즐겨 입은 것은 사실이다.
19세기 말 우리나라를 방문한 서양 사람들은 온통 흰옷으로 뒤덮인 시장의 모습이 흡사 솜밭 같다고 했다.
어째서 흰 옷을 좋아했을까?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서?
그렇지 않다.
서양에서 흰색은 평화의 상징이지만 동양에서 흰색은 전쟁의 상징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흰색이 상징하는 것이 또 있다.
죽음이다.
흰옷은 원래 상복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상복을 자주 입었다.
팔촌 이내 친척이 죽으면 상복을 입었고,
왕실에 상이 있으면 전 국민이 상복을 입어야 했다.
가난한 사람은 대부분 단벌이었다. 경조사에도 있고 평상시에도 있고 입을 수 있는 옷은 흰 옷 밖에 없다.
그래서 흰색을 자주 입었다.
나라에서는 흰 옷 입는 풍습을 골치 아파했다.
평상복과 상복의 구분이 없으면 예법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흰옷 대신 동방을 상징하는 푸른 옷을 입으라고 권장하기도 했다.
세종이 관원들에게 푸른 옷을 입으라고 했다.
관원들은 염색값이 비싸다며 다른 색깔로 바꿔달라고 했다.
그러자 세종이 말했다.
"노란 옷은 중국에서 흉복으로 간주하고, 빨간 옷은 여자 옷 같고, 남색 옷은 일본 옷 같으니 안 된다. 푸른 옷을 입어라"
하지만 세종의 푸른 옷 입기 캠페인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비용 때문이었던 듯하다.
염색한 옷은 부의 상징이었다.
[용재총화]에 따르면 부자들이 화려한 옷으로 사치를 부리는 바람에 염색값이 치솟았다고 한다.
가격은 비쌌지만 품질은 좋았다.
우리나라 염색 기술은 일찍부터 중국에 알려졌다.
송나라 사람 왕운의 [계림지]에서 고려는 염색을 잘하는데 특히 홍색과 자색이 아름답다고 했다.
조선의 자주색 비단에 반해서 열 필 넘게 염색해 간 중국 사신도 있었다.
염료는 모두 자연에서 얻었다.
자주색은 지초, 붉은색은 홍화와 오미자,
노란색은 괴화와 치자, 푸른색은 쪽풀과 이끼를 사용했다.
여기에 매실, 명반. 잿물 따위를 적절히 섞어 넣었다.
염색값은 직물과 색상에 따라 달랐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자주색 명주는 노란색 명주의 다섯 배, 붉우 모시는 노란 모시의 열 배 가격이었다.
염색은 염모라고 하는 여성 기술자가 사실 염색은 고된 육체노동이다.
그런데 염색이 여성 업종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여성이 입을 옷을 남성이 손대는 것을 꺼렸기 때문인 듯하다.
남녀의 옷을 한데 보관하는 것조차 꺼리던 시절이다.
고종 때의 재정백서 [탁지준절]에 따르면 염모에게는 수공포라고 하는 공임을 지급했다.
비단 한 필을 염색하면 삼베 석자 다섯 치를 끊어준다.
비단 열 필을 염색해야 삼베 한 필이 될까 말까다.
쌀 대여섯 말 가격이다.
중노동의 대가치고는 결코 많지 않다.
그래도 달리 생계를 해결할 길이 없는 가난한 여성에게는 감지덕지였다.
호조의 아전 김수팽이 선혜청 아전으로 근무하는 동생의 집을 집에 갔더니 마당에 큰 물동이가 줄지어 있었다.
김수팽이 무엇이냐고 묻자 동생이 말했다.
"아내가 염색업을 합니다"
김수팽은 불같이 화를 냈다.
"나라의 녹봉을 받는 우리 형제까지 염색업을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겠느냐?"
김수팽은 물동이를 모두 엎어버렸다.
값비싼 푸른 염료가 콸콸 흘러 도랑에 가득 찼다.
염색업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백성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염색은 소상공인의 생계형 업종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활동하기 불편하고 세탁하기도 힘들다는 이유로 흰옷을 버리고 색옷을 입자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자발적이었지만 일제는 점차 색옷 입기를 강요했다.
면직원과 순사들은 흰옷 입은 사람을 보면 먹물을 칠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꿋꿋이 흰옷을 입었다.
이유야 어떻건 간에 흰옷은 이미 민족은 상징이었던 것이다.
조선잡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