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만지역 역사답사길에 올라 나흘째에 목단강에 이른 우리는 선참 저 유명한 “8녀투강 기념비”를 찾아 갔다. 항일전쟁시기 동북항일련군의 8명 녀전사들이 일본침략군과 완강히 싸우다가 왜놈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목단강에 몸을 던졌고 그 비장한 이야기는 대를 이어 전해지고 있었다. 몇해전에 가본적 있었지만 다시 경건한 마음을 품고 기념비를 향해 달려갔다. 목단강역에서 택시로 8원가량 소요(所要), 그닥 멀지않은 거리를 달려 “8녀투강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빈강공원에 이르렀다. 이제는 목단강의 상징물처럼 되여버린 그 기념비에 대해 택시기사들은 익숙했고 대뜸 안내했다. 공원에 도착하자 광장복판에 건립된 조각물이 선참 눈에 띄였다. 예사롭지 않은 석조물이였다. 앞만 바라고 걸음을 다잡는 모습, 부상입은 동지를 부축한 모습, 손에는 총대를 꽉 부여잡고 뒤쫓는 적을 응시하는 모습, 녀전사들의 표정은 결연했고 눈빛은 강렬했다. 그 비장하고 결연한 모습들이 살아숨쉬는듯해 보는이들을 전류을 느끼게 했다. 그중 치마저고리 차림의 두명의 조선족 녀전사가 유난히 눈에 띄였다. 8명의 녀전사들로는 제2로군 제5군 부녀퇀의 지도원 랭운과 반장 호수지, 양귀진, 피복공장의 공장장 안순복 그리고 전사 곽계금, 황계청, 왕혜민, 리봉선이였다. 그중 안순복과 리봉선은 조선족이였다. 그들중 나이가 제일 많은 랭운이 25살이고 제일 어린 왕혜민은 13살이였다.8명녀전사들의 리더였던 랭운은 본명이 정지민이며 1915년에 출생, 흑룡강성 화천현 사람으로서 "9.18"사변이후 항일운동에 뛰여들어 가목사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36년, 동북항일련군 제5군에 가입하였고 후에 제5군 부녀퇀에 전근되여 소대장, 정치지도원을 력임하였다. 이들중에서 전사들로부터 “안언니”라고 친절하게 불리운 안순복은 랭운과 동갑나이였고 녀전사들중의 골간인물이였다.키가 1메터55밖에 안되는 작은 체구였지만 강의한 의지와 불타는 정력을 지닌 녀성이라고 전하고있다. 당원이였던 부친과 오빠를 왜놈들에게 잃고 항일에 투신한 그는 항일련군 4사 정치부주임인 박덕산과 결혼하여 딸아이 하나를 보았다. 그후 남편은 태여난 아이도 보지못한채 의란현 대하당(依兰县大哈唐)전투에서 희생되였다. 엄동설한에 적의 소탕을 피하여 부대가 이동하던중 안순복과 9명의 녀전사들은 부대의 대의를 위해 아이들을 당지 사람들에게 맡기고 떠났는데 그후 그 아이도 찾지못하고 말았다. 이들중 리봉선에 대한 자료가 가장 적었다. 그저 조선인이며 20세 남짓하고 림구현사람이라는것 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1938년 봄, 일본관동군은 송화강하류에서 이른바 “3강대토벌”을 감행하였다. 당시 동북항일련군 제5군 제1사에는 30명으로 구성된 녀성유격대원들이 있었는데 8명의 녀전사들은 그 부대의 소속이였다.
그해 10월, 북만의 바람은 세찼고 날씨는 몹시 차가웠다. 10월상순, 부대는 원정하여 목단강하류에 도착하였다. 대원들은 목단강 기슭에 모닥불을 지피고 숙영하다 밀정의 밀고로 그만 일본괴뢰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일본괴뢰군의 수효는 엄청나 1000여명이나 되였다.10월 10일 새벽, 새벽대기를 가르며 되알진 총성이 울렸다. 일본괴뢰군이 공격을 개시한것이다. 대부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8명의 녀전사는 강변쪽에 남았다. 지도원 랭운의 지휘하에 일본군과 맞불질하며 강변으로 유인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대부대는 순조롭게 적을 따돌리고 철수할수 있었다. 하지만 남아있는 8명 녀전사들은 삼면으로부터 적의 공격을 받게 되였다. 적들은 점점 포위망을 좁히면서 그녀들을 생포하려고 하였다. 고립무원에 빠지고 탄약이 떨어졌지만 녀전사들은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마지막 한개의 수류탄을 뿌리고 탄약이 떨어진 총을 바위에 쳐 부수어 버렸다. 왜놈들이 각일각 조여오자 일본군의 포로가 될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손에 손잡고 “국제가”를 부르며 강심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녀들은 한송이 또 한송이의 락화처럼 꽃같은 육신을 차디찬 강물에 서슴없이 던졌다. 여덟 녀전사들이 몸을 던진 정확한 위치는 흑룡강성 림구현 조령진 삼가자촌(林口县刁翎镇三家子村)에서 동북쪽으로 약 4키로메터 떨어진 작목강자(柞木岗子)산아래의 우수훈(乌斯浑)강으로 알려져 있다. 목단강의 지류인 우수훈강은 만족어로 “흉포한 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들이 희생된지 약 한개월 되던 11월 4일날 동북련군2로군 총지휘인 주보중(周保中)은 일기에 “목단강 사람들은 언젠가는 꼭 이 렬녀들을 표방(標榜)해야 할것이다”라고 적었다. "8녀 투강"의 이야기는 그후 영화, 연극, 그림책 등 다양한 쟝르로 각색되여 중국전역에서 항일경전이야기로 떠올랐다. 1950년과 1987년에 두차례 영화로 각색되여 스크린에 올랐는데 1950년에 “중화의 딸들”이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영화는 새 중국이 성립된후의 첫 전쟁영화이며 또 “카로위발리 영화절”에서 “자유투쟁상”을 수상해 첫 국제수상작으로 되기도 했다. 목단강시는 이들을 기리기위해1986년 9월 7일, 강빈공원광장에 “팔녀투강 기념비”를 경립했다. 기념비는 중앙미술원이 창작을 맡고 사천미술학원이 조각을 담당하여 예술적 표현력을 과시한 석조물로 구축했다. 기념동상은 높이가 13메터, 길이가 무려 8.8메터에 이르며 단단한 화강암을 조각해 장엄하면서 경건한 느낌을 준다.당시 전국정협부주석이였던 강극청이 “팔녀영령은 영생불명하리라”는 제사를, 원 전국정협주석이였던 등영초가 “8녀투강”이라는 기념비의 제사를 썼다. 1989년 이 기념비는 중국 국무원에 의해 “중점렬사기념건축물 보호단위”, “성급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지정됐다.이들의 장렬한 희생은 항일전쟁시기 왜놈들과 끝까지 싸운 항일용사들의 백절불굴의 영웅기개를 보여주었으며 그들의 희생정신은 조국의 해방과 건설 사업에서도 고무, 격려, 분발의 동력으로 되였다.2009년 새중국 창건 60주년을 맞아 중앙조직부, 중앙선전부, 중앙통전부 등 11개 부문은 련합으로 “100명 새중국 창건에 돌출한 기여를 한 영웅모범인물”과 “100명 새중국 창건이래 중국을 감동한 인물” 선정평의활동을 펼쳤는데 그중 제1위로 “8녀투강”의 녀전사들이 뽑혔고 그중 조선족 녀항일투사인 리봉선과 안순복이 정률성과 함께 포함되면서 “8녀투강”의 이야기가 다시 사람들에게 회자(脍炙)되고있다.일본군 포로가 되느니 태산같이 높은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 항일녀전사들. 목단강은 오늘도찾아온 사람들에게 그 서사시를 전하며 흐르고있다.
첫댓글 목단강의 대표적 관광명소 가 됨
동북항일연군이 독립운동 포상 받는 세상이 빨리오길 기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