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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4. 13. 소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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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 아들을 내주신 하나님 사랑 (이성희)
2. 103년 아낌없이 주고 간 사랑! (유승준)
3. 삶이 흔들릴 때면 꿰맨 옆구리를 보아라! (조호진)
출처 : 『사랑이 한 일』 빛과 소금 2025년 4월호
1. 자기 아들을 내주신 하나님 사랑
글쓴이 이성희는 연동교회 원로목사입니다
현대는 양극화 시대입니다. 경제 양극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갈수록 심화되고, 정보 양극화는 진보하는 최첨단 사회에서 후진 시민을 만들고, 영성 양극화는 영성 사회에서 이름만 가진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사랑'이라는 주제를 떠올릴 때 사랑의 양극화 현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사랑이라는 단어가 흔하고 저속한 용어로 변질된 때가 없을 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사랑해"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합니다. 고상한 용어인 '러브'를 아무 데나 붙여 사랑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하트'를 표하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사랑이 메마른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사랑 대신 미움을 쌓고 형제간에 법정 다툼이 일어납니다. 층간소음 때문에 이해 대신 분노를 쌓고 살인까지 일어납니다. 운전 중 약간의 방해가 되었다고 양보 대신 보복을 일삼고 심지어 주먹을 휘두르는 폭력이 일어납니다. "사랑해"라는 입의 말만큼, '하트'를 날리는 손만큼만 사랑해도 우리 사회는 살 만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경제성장이 아닙니다. 요긴하게 회복되어야 할 것은 사회정의가 아닙니다. 이 시대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을 뒤덮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이 사랑의 나라, 에덴동산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종말 현상을 말씀하시면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라고 하셨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속적 현상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구약성경이 기록된 히브리어로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하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함께 포함하는 말입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이 기록된 그리스어로 사랑이라는 단어는 여럿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와 형제의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 육체적인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 그리고 부모와 가족의 사랑을 뜻하는 '스토르게'입니다.
그 가운데 아가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아들을 죽이신 그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 구원을 깊이 체험한 많은 분이 생명을 던져가며 복음을 전함으로 이웃에게 그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어떤 이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기도 하고, 하나님을 지칭할 때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많다'는 말은 '적다'라는 말의 상대적인 말, 즉 반대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적은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좀 더 많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입니다. 성경은 확실하게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아가페'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속성, 즉 하나님의 성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영원성, 창조성, 전지성, 전능성, 사랑, 거룩성, 정의, 사고, 실존성 등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영원성, 창조성, 전지성 등은 하나님만 가지고 계시는 속성입니다.
반면에 사랑, 거룩성, 정의 등은 하나님의 속성이지만 인간이 함께 가지는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는데 이런 하나님을 닮은 성품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나 정의 등의 속성은 하나님의 것과 인간의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도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나 창조성 등 모든 속성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사랑이라는 하나의 속성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정의나 질투도 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66권, 1,189장, 3만 1,102절입니다. 3만이 넘는 많은 절 가운데 성경 전체를 가장 잘 아우르며 복음이 요약되어 있는 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이 성경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가장 먼저 접하고 암송하던 귀한 말씀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절을 '작은 복음'이라 불렀습니다.
'복음'이란 문자적으로 '기쁜 소식'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 66권 가운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네 책이 있습니다. 모두가 생명을 주는 귀한 말씀이며, 구원을 선포하는 말씀이지만 이 네 권만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말씀하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장 귀한 복음의 시작, 동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오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동기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고, 다시 살아나게 했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를 구겨서 없애버리고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말 잘 듣는 사람을 다시 만드셔도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불순종의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살려두시고 모든 인간들을 한 번으로 영원히 구원받게 하실 구원의 장치를 계획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신학의 한 주제 가운데 '언약신학'이란 것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언약을 맺으셨답니다. 첫째는 구속의 언약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을 이미 아시고 구속하실 언약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행위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동산에 두시고 "이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죽이겠다는 뜻이 아니라 먹지 않으면 영원히 살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셋째는 은혜의 언약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죄를 범한 다음에 삼위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는 은혜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 언약으로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인간을 영원히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삼위 하나님의 언약의 동기도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어떤 사랑에도 비교가 안 될 만큼 크고 귀합니다. 우리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얼마만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빚어 당신의 형상을 주신 인간을 사랑하셔서 절대 버릴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죽게 하시고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롬 8:15).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아들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 양녀입니다. 하나님은 양자, 양녀를 위하여 친아들을 죽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친아들보다 양자, 양녀를 더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엄청난 사랑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의 위대한 신앙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백 세가 되어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모리아까지 사흘 길을 갔습니다. 그는 이삭을 묶어 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말씀하십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고 세상에 보내시려고 예정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려는 마음을 보시고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어쩜 그렇게 내 마음을 닮았느냐?"라고 감탄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외아들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보내셨고, 하나님을 사랑한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넓고 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9)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렘 31:3).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만큼 끝도 없이 무한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 아들을 내주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가장 아껴야 하는 아들도 주신 하나님께서 아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므로 아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주실 수 있는 풍성한 사랑의 아버지이시기에 아끼지 않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그리고 만물의 주인이라도 사랑이 없는 인색한 분이라면 절대로 우리가 얻지 못할 것입니다. 목자이신 우리 하나님을 따르며 아낌없는 무한한 그분의 사랑 안에 사는 사람들은 부족함이 없이 하나님께서 필요를 채우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 안에서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몸으로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아가페'한 것 같이 너희는 서로 '아가페'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위하여 자신을 죽이는 희생으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흘리신 보혈의 대가를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에게 드려야 합니다. '사랑장'이라 부르는 고린도전서 13장은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가 무엇인지를 소상히 설명합니다. 바울은 아가페의 결론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여 '사랑 제일'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우리를 구원받게 하는 가장 귀한 것은 믿음입니다. 사랑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한다면 단연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이미 있다면 아가페가 제일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이신 아가페,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를 본받아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귀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 103년 아낌없이 주고 간 사랑!
글쓴이 유승준은 오랫동안 책을 만들오다, 지금은 강릉에서 집필에 전념하는 작가
2021년 8월 30일 오후. 나는 급히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으로 향했다. 빗줄기가 거셌다. 악천후에도 장례식장은 조문객들로 북적였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많은 사람이 찾아온 것이다. 영정 앞에 헌화한 뒤 유족에게 조의를 표하고 조문객 사이에서 저녁을 먹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빈소에서 들려오는 '애국가'였다. 많은 상가를 다녀봤지만, 문상 온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은 처음이었다. 소리를 따라갔다. 백발의 노인들이 애국가를 합창 중이었다. 전율이 느껴졌다. 아들 친구들이 모여 애국가를 부른 것이다. 103년 동안이나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 떠난 김옥라 선생의 삶 자체가 조국과 국민을 위한 것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김옥라는 1918년 강원도 고성군 간성면에 있는 두메산골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기독교 신자였다. 간성에는 원산항을 통해 선교사들이 드나들었다.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없었다. 향학열에 불타던 그녀는 원산에 있는 보혜성경학교에 들어갔다가 거포계(Kate S. Cooper, 1886~1978) 목사의 추천을 받아 서울에 있는 감리교신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정상적인 강의가 이어지질 못했다.
미국에서 선교사들에 대한 철수령이 내려지자 김옥라는 1941년 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들어갔다. 그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셋째 오빠가 보내주던 학비 지원이 끊겼다. 설상가상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여학생들마저 산업현장으로 내몰았다. 그녀 역시 해군 항공창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으나 때마침 해방이 찾아왔다.
조기 졸업장을 받은 그녀는 조국 땅을 다시 밟았다. 하지만 삼팔선으로 남북이 분단되면서 고향이 이북에 편입되어 돌아갈 수 없었다. 얼마 후 그녀는 도시샤여자전문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선배의 주선으로 미군정청 인사과에서 번역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결혼은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만난 청년 라익진에게서 구혼장을 받았다. 훗날 한국무역협회 창설을 주도하고 체신부 차관과 상공부 장관으로 공직에 있다가 산업은행 총재를 지낸 인물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몇 달 전 나와의 인터뷰에서 김옥라 선생은 이렇게 회고했다. “가정에 있으면 아이 낳고 살림하면서 사회 활동을 하지 못해 결혼 안 한다고 했더니 자기가 다 용인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시절 고등교육 받은 사람이 천분의 일인데, 그런 희귀한 사람을 가정에 붙들어 두면 안 되고 사회에 내보내 활약하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이 터졌다. 죽음의 위기를 넘긴 그녀는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해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바닷가 작은 집에 머물던 그녀는 전쟁고아 중 소녀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이때 걸스카우트 운동의 기수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걸스카우트를 통해 나라를 사랑하겠다' 이 생각뿐이었다. 지인들과 송도걸스카우트위원회를 만들어 소녀들을 모아 희망의 작은 씨앗들을 뿌려 나갔다.
1952년 11월 피난지에서 모인 대한소녀단 중앙연합회 이사회에서 김옥라는 간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도 하고 수익 사업도 했다. 그러면서 미국 걸스카우트 본부와 영국 런던에 있는 세계 걸스카우트 본부에 편지를 써 보냈다. "걸스카우트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전쟁 중인 당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걸스카우트가 활동하고 있다는 김옥라의 편지를 받은 미국과 영국의 걸스카우트는 감동했다. 영국 세계 본부에서는 300달러를 보내왔고, 미국 본부에서도 한 달에 100달러씩 6개월 동안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전쟁 통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1953년 9월 휴전과 더불어 서울로 올라온 김옥라는 걸스카우트 재건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중구 필동 보이스카우트 본부에 허름한 방 하나를 얻어 사무실을 차렸다. 여러 학교를 수없이 찾아다니며 학생들이 걸스카우트가 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적은 수였지만, 정성껏 교본을 만들고 강사 교육도 시작했다. 부산에서 불을 지핀 걸스카우트 운동은 서울을 거쳐 마산, 광주 등으로 점점 확산되었다. 1954년에는 태평로회관까지 마련할 수 있었다.
1957년에는 제16차 세계대회를 앞두고 한국이 세계연맹의 준회원 심사를 받게 되었다. 그즈음 미국 걸스카우트 본부의 초대를 받아 김옥라는 5개월 동안 세계 시찰 여행을 떠났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 한국이 준회원으로 승인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미국 걸스카우트 중앙 지도자 캠프에 초대받았다. 그때 다급한 일이 벌어졌다. 국기 게양을 해야 하는데, 준비해 온 태극기가 없는 것이었다. 김옥라는 현지 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빨강, 파랑, 검정 색깔 천을 구해 바늘로 꿰매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태극기가 전 세계 회원들이 보는 가운데 국기 게양대에 올라갔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1963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걸스카우트 세계연맹 제18차 세계대회가 열렸다. 한국스카우트연맹 인터내셔널 커미셔너를 맡고 있던 김옥라는 아시아재단 후원으로 대회에 참석했다. 이때 대한민국이 정회원으로 승인되었다. 오륜기와 함께 제대로 만들어진 태극기가 행사장에 게양되었다. 정회원은 세계연맹에서 발언권과 의결권을 가질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유엔에 가입하기도 전에 한국걸스카우트가 세계 정회원이 된 것은 외교적 쾌거였다.
김옥라는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했다. 1975년에는 장로 안수를 받았고 은퇴 후에는 명예장로로 활동했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초대 부회장과 2대 회장으로 봉사했고, 1974년부터 1982년까지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전국연합회장으로 봉사했으며, 1976년부터 1981년까지 세계감리교 여성연합회 동남아지역 회장으로 봉사했다.
1981년 7월 하와이에서 감리교 세계대회가 열렸다. 김옥라는 세계감리교 여성연합회 동남아지역 회장을 마지막으로 여선교회 일을 내려놓고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는 데 매진하고자 결심했다. 그런데 하와이에 도착한 그녀에게 전혀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5년 임기의 차기 회장으로 김옥라가 추천된 것이다.
그때까지 세계감리교 여성연합회 회장은 주로 서양 사람들이 맡아 왔다. 따라서 김옥라로서는 자신이 회장이 된다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시간도 능력도 부족해 맡을 수 없다며 계속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공천위원회 의장인 밀타 파이퍼가 다가와 김옥라에게 김활란 박사 이야기를 꺼냈다.
1923년 유학 중이던 김활란 박사는 미국 감리교 총회에 참석해 감동적인 연설을 함으로써 세계감리교 여선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 기억을 상기시킨 것이다. 조선에 들어와 많은 학교와 병원을 지어 근대화에 기여하고 백성들을 보살폈던 감리교회에 은혜를 갚을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틀 후 임원을 선출하는 투표가 진행되었다. 김옥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회장에 당선되었다. 한국 여성이 세계기구 회장에 선출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신임 회장으로서 단상에 올라 수락 연설을 해야 했다. 생각지도 않은 직책을 맡았으니 준비한 연설이 있을 리 없었다. 그때 성경 한절이 떠올랐다. 요한복음 15장 16절이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을 영어로 몇 번 반복했다. 그런 다음 지금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게 전부라고 하고 단상을 내려왔다.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이후 5년 동안 그녀는 전 세계를 다니며 깨달은 바를 몸소 실천했다. 그것은 사랑의 다리를 놓는 일이었다. 총 50여 개국 100여 개의 도시를 찾아 사람들을 만났다. 비행 거리만 42만㎞에 달했다. 예산이 넉넉지 않아 많은 부분을 자비로 해결해야 했다. 팩스와 이메일이 없던 시절 그녀가 5년 동안 세계 각국에 보낸 편지는 9,361통에 달했다. 평균 하루에 다섯 통의 편지를 쓴 셈이다. 칠순이 코앞이었음에도 그녀는 또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조국의 척박한 땅에 사랑의 씨앗을 심는 일, 즉 자원봉사의 싹을 틔우는 작업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원봉사자 전문양성기관인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는 이렇게 설립되었다. 지금의 각당복지재단이다.
그녀의 삶은 대나무와 같았다. 어렵사리 하나의 매듭이 지어지는가 싶으면 곧바로 다음 매듭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매듭과 매듭이 끊임없이 이어져 커다란 대나무가 되고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강습회가 이어지며 자원봉사 모임이 자리를 잡자 김옥라는 호스피스 봉사를 시작했다.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평안한 임종을 맞도록 돕는 봉사였다. 1990년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계기로 죽음을 탁상 위에 올려놓고 공론화하는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를 만들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생의 마지막까지 자원봉사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선진국의 시민운동이 순수한 자원봉사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한 나라가 선진국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는 그 나라에 남을 돕는 문화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기부와 나눔 같은 이타적 행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나라는 선진국이다.
후진국일수록 극단적 이기주의가 만연해 있다. 서로 돕고 베푸는 국민이 있어야 성숙한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 "자원봉사 정신으로 인류사회에 봉사함으로 사랑의 사회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갑니다." 서울시 종로구 경희궁길에 있는 각당복지재단에 들어섰을 때 맨 처음 맞닥뜨리는 글귀다. 자원봉사 분야의 선각자이자 사회 공헌 분야의 대모로 불리던 김옥라 선생의 103년 인생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아닐까. 난마처럼 얽힌 세상사에서 실마리를 발견해내고, 짙은 안개에 싸인 삶의 여정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내는 것은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나 자신을 기꺼이 던질 수 있는 지극한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3. 삶이 흔들릴 때면 꿰맨 옆구리를 보아라!
글쓴이 조호진은 시인이다. 시집 <우린 식구다>, 에세이집 <소년의 눈물>을 썼다.
< 1 >
내 몸을 떠난 신장 한쪽이 잘 지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서 신장이식 수술을 진행한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연락했더니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신다"라고 안부를 전해 주었습니다. 마흔여섯 해 동안 내 몸의 건강을 지키는 임무를 완수한 왼쪽 신장이 만성신부전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스물다섯 살 청년에게 2007년 5월 31일 오전 8시경 아산병원 수술실에서 이식됐습니다.
18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마흔셋의 중년이 된 그분은 이식에 따른 부작용 없이 건강하게 지내다 결혼했으며 행복하게 지낸다고 했습니다. 부모 형제끼리 주고받은 경우를 제외한 대다수의 신장 공여자와 수용자는 생면부지입니다. 이식의 부작용을 주의해야 하듯이 신장 공여에 대한 대가 요구 등의 부작용을 차단하기 위해 서로의 얼굴도,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는 것이 원칙입니다. 나의 것을 나눈 게 아니라 주신 걸 나눈 것이므로 대가를 바라거나 생색내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 없습니다. 그래서, 잊고 지냈습니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 문득 생각이 나서 처음으로 안부를 물었습니다.
내가 낳은 적 없는 새들이 우짖고 내가 씨 뿌린 적 없는 들꽃이 화들짝 피어 만발한 봄 들녘을 보면 저절로 "하나님 아버지, 어찌 이리 아름다운지요!" 찬양하게 되는데 하물며 나의 한쪽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찌 아니 기쁠 수 있을까요. 꽃과 새들이 노래하는 봄이 아름답긴 하지만 꺼져가던 생명의 불꽃이 회복하는 소생의 봄보다 더 아름다울까요.
2007년 6월 6일 퇴원하던 날, 40대 후반의 여인이 제 병실에 찾아오셨습니다. 청년의 어머니였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청년의 어머니는 "부모도 주지 못했는데 남이 어떻게 주실 수 있는지요. ...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얼마나..."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습니까”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 까닭은 여인의 두 아들이 유전에 의한 만성신부전으로 고통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낳은 두 아들이 현대 의학으로도 극복하기 힘든 병으로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면서, 부모의 유전에 의한 병이라는 사실 앞에서 어머니는 얼마나 가슴을 치면서 울부짖었을까요. 청년의 어머니는 자신의 한쪽 신장을 한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을 다른 아들에게 주고 싶었으나 줄 수가 없는 가슴 아픈 사정을 전해 들은 저는 청년의 어머니에게 "다 잘 됐으니 얼마나 좋습니까"라는 말과 함께 "아드님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말의 속뜻은 내 몸을 떠나 그 청년의 신체가 된 한쪽 신장이 나에게 해 준 것처럼 임무 수행을 잘해 달라는 당부였고, 그 청년이 만성신부전의 고통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살길 빈다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서원을 이행한 제가 부끄러운 삶을 벗기 위해 바친 참회의 기도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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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피산이 형이 예순여섯의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총명한 소년이었던 형은 어머니가 가출한 뒤에 구두닦이를 했고, 판자촌 또래들과 어울려 패싸움했고, 물건을 훔치다가 소년원에 갔습니다. 소년원에서 나온 뒤에는 순천교도소에 갔고 38 따라지 고달픈 피난살이에 지친 아버지는 오마니 계신 북녘 고향을 그리다가 행려병자로 생을 마쳤습니다. 자식 버린 죄의 공소시효가 끝났음에도 "당신이 나를 버려서 내 인생이 이렇게 됐다!"면서 노모의 죄를 추궁하며 난동을 피우던 피산이 형이 무연고자로 세상을 하직했을 때,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 그가 깬 소주병과 유리창과 핏자국과 울부짖음의 기억을 지우면서 오랜 악연을 수습했습니다.
이혼과 파산의 벼랑에 내몰렸던 서른 몇 살의 저는 문패도 번지도 없는 주소불명의 아비였습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두 아들이 아비의 삶을 대물림하는 건 끔찍했습니다. 세상은 막막했고 살벌했습니다. 두 아들을 데리고 월세방을 얻으러 갔더니 홀아비에겐 방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너무 서러워서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린 큰아들이 "아빠, 하나님이 더 좋은 곳을 주실 거예요!"라면서 못난 아비를 위로했고, 막내아들은 누군가 준 꼬깃꼬깃한 5천 원짜리를 저에게 주면서 "아빠, 이 돈으로 빚 갚으세요”라며 막장에 내몰린 저에게 삶의 희망을 선물했습니다.
하나님과 저는 생면부지였습니다. 판자촌에 살던 어린 시절, 친구들이 교회 가자고 해서 따라갔다가 가난을 차별하는 것만 같아서 다신 가지 않았습니다. 시골 공고를 졸업한 직후, 기독교인이 만든 공장의 공원(工員)으로 기숙사 생활했습니다. 일요일이면 쉬어야 하는데도 교회에 가야만 했습니다. 야간 잔업 등의 장시간 노동에 지친 공원에게 필요한 건 예배가 아니라 밀린 잠이었습니다. 잠과 휴식을 빼앗는 교회가 싫었고 가난한 공원에게 달콤한 사탕발림하는 장로 사장님이 싫어서 공장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던 제가 울며불며 기도했습니다.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캄캄한 지하 예배당에서 눈물로 기도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면 생면부지였던 하나님이 저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안아 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나와 함께 살아야 이혼과 파산, 배신과 버려짐, 술 취함과 방탕으로 얼룩진 가계의 저주를 끊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서원(誓願했습니다. 깨진 가정을 회복시켜 주시면 하나님이 주신 신장 한쪽을 나누겠노라고. 그랬더니 천사 같은 아내와 재혼을 허락해 주시고 깨진 가정을 회복시켜 주셨으며, 아프리카 선교사를 꿈꾸던 큰아들을 연구교수로 세워주시고 막내아들은 위기청소년의 자립을 돕는 '소년희망공장'(카페) 공장장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복에 겨운데 손녀와 손자까지 선물로 주셨으니 고난을 끝내 이기면 축복의 날이 오리라던 말씀은 헛된 약속이 아니라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생면부지인 저를 조건 없이 사랑해 주셨지만 저는 조건을 내걸고 거래했습니다. 불순한 의도를 잘 아시면서도 괜찮다고, 가난과 버림받음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건져내면 죄의 웅덩이에 또 빠지고 또 빠지는 인생을 건져 주었음에도 아버지 품을 떠나는 탕자를 기다리겠노라고, 어미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다 씻겨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환대해 주셨습니다. 티끌만큼이라도 염치가 있으면 통회자복하고 다신 넘어가지 않아야 마땅함에도 습관처럼 죄에 넘어가는 저를 향해 네 놈은 구제불능의 인생이라고 욕하면서 잡은 손을 놓으신다 해도 무슨 염치로 고개 들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불쌍한 나의 아들아! 가계에 흐르는 저주의 피를 씻어야지. 네가 아니면 그 누가 저주를 끊겠느냐며 쓰러진 저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몸이 아플 때면 가장 취약한 곳인 왼쪽 신장 부위가 아려왔고 그러면 아버지가 수술 자국이 선연한 옆구리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로마 군인이 찌른 창에 피를 다 쏟아내신 주님이 한 줌의 재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육신에게 주의 면류관을 씌워 주시면서 한 생명을 살린 것을 잘했노라 칭찬해 주시면서, 삶이 흔들릴 때면 너의 옆구리 꿰맨 자국을 보면서 흔들리는 생을 부여잡으라고, 그리 살다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거든 가계에 흐르던 저주의 피를 끊는 임무를 완수하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라고, 아내와 자식과 손주에게 믿음을 유업으로 물려주고 오라 하시는 주 은혜의 말씀에 두 손 모으는 사순절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