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하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의 목록이 누구에게나 있다. 내게는 <몽실 언니>가 그중 하나였다. 자주 가는 도서관의 인터넷 계정에는 ‘관심 도서목록’이 있는데 <몽실 언니>를 그 목록에 올려둔 지도 일 년이 넘었을 것이다. 어쩐지 매번 우선순위에서 밀려 읽지 못했다. 맑은 하늘과 깨끗한 공기가 예사롭지 않은 날, 글을 쓰려고 도서관에 갔다가 문득 이 책이 생각났다. 서가에서 찾은 <몽실 언니>는 무척 낡아 있었다. 저자인 권정생 선생의 동화 <강아지똥>을 이십여년 전에 읽은 적이 있다. 이것도 글이 될까 싶은 소재를 가지고 써내려간 책을 읽다가 감동에 젖은 기억이 있다. 나는 도서관 창밖의 초록이 넘치는 나무들을 힐끗 바라보고 나서 책을 읽기 시작한다.
<몽실 언니>는 200쪽이 넘지만 군더더기가 없고 쉬운 청소년 소설이라, 어느 사이에 이야기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남은 페이지를 가늠하면서 앞자리에 앉은 남자를 살폈다. 이대로 끝까지 읽다가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려 남자의 주의를 끌 것이 분명했다. 나는 눈물을 피하려고 잠시 책을 접고 숨을 가다듬었다. 감정을 진정시키고 나서 다시 마저 읽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 쾌청한 날에 공공도서관에서 눈물 바람을 하는 철 없는 중년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기구한 몽실의 삶에 사로잡힌다. 소설은 해방 직후에 태어난 어린 몽실의 태어나서부터 몇 년 간의 삶을 다룬다. 어린 몽실은 혼란스러운 세상의 가난한 시골집에 태어나 상상할 수 있는 온갖 고초를 차례대로 겪는다. 부모가 서로 헤어지고 제 각각 다른 사람을 만난다. 배다르고 씨가 다른 형제자매들이 차례로 태어난다. 저 살기도 막막한 어른들은 별다른 악의는 없지만, 어린 몽실을 냉대하거나 돌보지 않는다. 심지어 새아버지는 홧김에 몽실을 때리는데, 넘어진 몽실은 크게 다친다. 그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휴전이 되는데 어린 몽실은 동냥까지 하면서 동생을 먹여 살린다.
담담하게 쓰인 글이라 그렇지, 실제로 겪는다면 끔찍하기 그지없는 사연이 줄줄이 이어진다. 암울하고 처연한 사연들은 생생하다 못해 실제 같다. 작가 자신의 삶과 정서에 맞닿아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이야기다.
나는 도서관을 나와 터벅터벅 길을 걷는다. 어딘가에 있었고,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수많은 몽실을 생각한다. 칠십년 전의 이토록 슬픈 이야기가 왜 이다지 아름다운가. 나는 어릴 적에 살던 동네를 회상한다. 몽실이 살아낸 시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소박하고 빠듯했던 우리 집과 쌀도 외상으로 사야 할 만큼 가난했던 이웃들이 떠오른다. 권정생 선생은 평생 병마에 시달리며, 불우하고도 단순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그런 삶 속에서 저 낮은 곳의 삶이 지닌 진실함을 증언한 것이리라. 알고 보면 세상에는 부처 같고 예수 같은 사람이 많다.
그토록 척박했던 세상이 말 그대로 상전벽해가 되었다. 몽실이 살았던 세상에 비한다면 천국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 풍요와 화려함이 가득한 세상이 도래했다. 그런데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음질치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채워주는 2023년의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왜 이토록 공허한가. 이 멋진 신세계의 그늘에는 또 얼마나 많은 몽실이 있을까.
몇년 전 간단한 조직 검사를 하느라 며칠간 종합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이른바 ‘나이롱환자’나 다름없는 내 침대 옆에는 젊은 환자가 있었다. 거의 언제나 누워 있는 그 환자와 나 사이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얼굴은 못 보았는데, 희귀한 불치병을 앓는 그의 신음 소리는 지옥에서 바로 들려오는 것 같았다. 희망 없는 삶을 이어가는 그가 어머니와 함께 밤마다 드리는 기도를 들으며, 나는 이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하는, 고통받는 이들을 잊지 않겠다고 새삼 다짐했다. 그런데 나는 시간이 갈수록 평화로운 일상에 젖어든다. 세상에 만연해 있으면서도 놀랍도록 잘 숨겨져 있는 타인들의 고통을 자꾸만 망각한다. 아니, 그때 이미 자신이 잊을 것을 예감하면서도, 애써 잊지 말자고 교활하게 다짐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불행한 삶과 불의한 세상을 단단하고 고운 마음으로 헤쳐나간 몽실을 생각한다. 예전에 병원에서 했던 다짐을 다시 한번 해볼까 하다가, 또 무뎌지고 잊어버릴 게 분명한 자신이 미덥지 못해 그만둔다. 무언가를 다짐하는 척 자기를 정당화하고 나서, 언제나처럼 무심히 살아가는 나 자신이 가증스럽게 느껴진다. 어쩌면 그런 교묘한 다짐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몽실 언니, 그리고 언니를 그려내고 지금은 세상에 없는 권정생 선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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