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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분석의 방향으로-안티오이디푸스, 천의고원 읽기
분열분석의 방향으로
대담: 宇野邦一(우노 쿠니이치, 프랑스문학 전공)
우리는 어떻게 썼는가?
질문
처음에 질 들뢰즈와 공동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앙티 외디푸스, 카프카, 천의 고원이라는 세 가지 책의 글쓰기(écriture)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레이몽 루셀(Raymond Roussel)의 나는 어떻게 책을 썼는가를 생각해 내 봅시다.
가타리
레이몽 루셀은 의미의 생산요소로서 일종의 비대칭성(asymétrie)을 의도적으로 추구한 작가입니다.
이러한 비대칭성은 질(들뢰즈)과 저 사이에도 작용하였습니다.
모든 점에서 우리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으며 이 차이로부터 일련의 의미현상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표현, 어휘들을 생각해냈지만, 2,3년만 입을 꼭 다물고 있으면 서로가 전혀 다른 의미로 어떤
어휘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는 아연실색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크게 웃을 뿐이었고 이러한 오해는 결코 공동작업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차이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개념 ‘도구’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 ‘도구(outil)’라는 생각은 미셸 푸코를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채용한 것인데, 누군가의 저작으로부터 일부분
혹은 단지 하나의 단어, 표현, 개념을 빌어서 어떤 종류의 몽타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더욱이 미셸의 테크닉이며 미국의 작가들이 하는 컷업(cut-up)과도 유사했습니다.
개념에 관해서 말하자면 구성주의적인 실험을 한다는 뜻에서 개념은 경우에 따라서는 정말 피상적인 꼴라쥬로
되어버릴지도 모르지만 정확히 말하면 진실한 인식이나 창조 과정으로 되었습니다.
서로 기한을 정해서 강도 높게 일을 했습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종류의 분업이 있었습니다.
질 들뢰즈는 철학사, 사상사에 대한 놀랄만한 지식으로 자주 문제를 설정했습니다.
그가 무엇인가 심사 같은 것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공동으로 판단했지만, 제 쪽은 말하자면
탐험가의 역할, 다분히 어느 정도 위험한 역할을 했습니다.
좀 바보 같은 군사적 비유를 한다면, 그는 병력의 배치나 이동을 지휘하는 입장이었고 저는 공격대를 책임졌습니다.
질문
당신들이 알고 나서 공동작업을 시작하기까지 만남과 동기의 형성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가타리
그것은 거의 한 눈에 홀렸을 정도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진행되었습니다. 68년 사건 뒤였습니다.
한 친구의 소개로 질 들뢰즈를 만났습니다. 이 때 저는 라캉의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
습니다. 물론 라캉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습니다.
68년 운동을 해석하고 수습하려는 시도가 라캉주의 속에는 있었습니다. 아주 우습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전부터 라캉에게는 흥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종류의 비역사적인 구조주의는 정말로 반동적이라는 생각을
한편으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68년 5월 당시 마오주의자였던 사람들이 라캉주의자로 바뀌는 형태로 이루어진 운동의 수습은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위선적인 것이어서 심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꽁방디(Daniel Cohn-Bendit, 68년 운동에 적극 개입한 독일 학생)조차 라캉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분석과 정신병, 정신분석과 사회적 지평의 관계에 관해서 그 때까지 제가 가지고 있던 비판적
생각은 급속히 첨예화되었습니다.
비판은 직접 정치적 영역으로 나아가고 논쟁적인 특성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질에게 말했을 때 그는 대단히 흥미를 보였습니다.
그는 저에게서 라캉파의 내부고발을 발견하고 이것을 라캉파에 대한 자신의 비판에 결합시켜, 5월 사건에 관해서
자신의 이론적 조명을 했습니다.
그는 제가 말한 것을 책으로 만들자고 했습니다.
제 쪽에서는 그러한 준비를 하지는 않았고 어떤 본질적인 메세지를 곧바로 제공하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놀랄 정도로 성급하게 책을 쓰자고 권했고, ‘자네가 오늘 말한 것을 쓰기만 해도 좋아’라고 했습니다.
저는 농담 반으로 ‘천천히 하는 게 어떨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좋아, 그렇게 하자’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만남에서 였는지 두 번째 만남에서 였는지 어쨌든 말은 그렇게 급속히 진전되고 곧 책의 구체적인
구성에 관해서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이 앙티 외디푸스의 앞 부분에서 좀 성급한 어조로 숨가쁘게 표현되었습니다.
질문
라캉과 68년 5월이라는 의외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결합이 앙티 외디푸스의 탄생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는 뜻밖에 무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 책의 근본적인 배경으로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타리
이 책에 대한 놀랄만한 오해, 공격, 지지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로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앙티 외디푸스는 정신분석을 비롯한 다른 여러 가지 영역에서의 잠재적인 문제제기와 공명하는 사건이자
결별의 시도였습니다.
정치를 포함해서 모든 분야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라캉주의가 지닌 전대미문의 역겨운 태도에 싫증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라캉은 앙티 외디푸스를 출판할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준비중인 이 책을 대단히 염려하고 얘기를 듣거나
원고를 보고싶어 했습니다.
그는 라캉파 구조주의의 권력적 태도가 규탄받는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라캉의 세력은 대단하여 정신분석은 물론 정신의학과 그 연구교육의 장 특히
아동심리학의 영역에도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고, 카톨릭이나 유태교의 세계, 고등사범학교, 모택동주의자
사이에서도 일대 문화세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68년 이후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구조주의인데, 우선 라캉도 존경하고 있던 레비-스트로스, 야콥슨으로 대표
되는 구조주의가 있고, 그것으로부터의 또 하나 구조주의의 후예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구조주의자로 취급하면 화를 낼 구조주의인 프로이트주의를 표방하는 라캉주의가 있었습니다.
질문
라캉주의는 어떻게 68년의 반란을 그렇게 지적으로 수습할 수 있었습니까?
가타리
엘리트적인 지적 집합체를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속물적인 사교적 단체가 생겼고 이는 실로 고전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점은 조금도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백 만명 이상의 사람들을 동원했던 68년 사건에 직면해서 많은 지식인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새로이 존재이유나 명성을 손에 넣기 위해서 새로운 명칭(이름), 새로운 양식(모드)이 필요했습니다.
질문
들뢰즈와 당신은 각각 어떻게 질문이나 테마를 설정했습니까?
가타리
질은 차이와 반복과 의미의 논리학에서 역사적 사회적 특이성(singularité)에 접근하기 위한 아주 독창
적인 독해도구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나는 보통의 교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언표행위의 배치(agencement d'
énonciation)’는 다양한 영역을 횡단하는 이론적 장치를 만들어낼 정도로 충분히 자유롭지는 않았습니다.
서로 영향을 주는 가운데 저는 그를 전통적인 지평에서 끌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책을 쓰게 되어 들뢰즈의 천재성이 엉망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많았지요.
정식분석으로, 정신의학으로, 민속학으로, 경제학으로, 미학적 문제로 점차 옮겨 가면서 강도 높은 작업을 했습니다.
앙티 외디푸스와 천의 고원을 쓰는 과정에서 몇 개의 작업대상(atelier)이 생겼습니다.
카프카를 쓸 때 저는 푸르스트(Proust)론을 하고 들뢰즈는 영화론을 시작했습니다.
영화에 관해서는 우리는 보통 한 번도 의견을 일치시키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떤 영화를 보고 재미있다고 하면 그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그런가’ 했을 뿐입니다.
영화에 관한 의견차이를 넘어서기는 매우 어려웠고 단 한 편의 영화에 관해서 조차 우리는 함께 쓸 수가 없었습니다.
질문
이 공동작업은 일종의 기적적인 글쓰기 기계와 방식(style)을 생산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깊은 공감에 기초하여 엄청난 양의 일을 면밀하고 자세하게 분담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가타리
공감과 욕망에 기초한 일이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공통의 전제이며
두 사람 모두 물러서 버리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물론 매우 곤란한 일이 있었지만 공감이라는 점에서는 어떠한 문제도 없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에 따라서 어떤 종류의 분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분야별 분담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철학적 문제에 매달리고 질은 정신분석에 매달렸습니다.
저는, 다루는 영역의 모든 것에 관해서 하나 하나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문제제기를 하고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조정, 수정, 고쳐쓰기를 했습니다.
질도 같은 작업을 했지만 그는 그 깊고 방대한 교양을 가지고, 말하자면 전체에 관한 작업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부분에 관한 작업을 했다는 의미는 아니며, 정치적 차원이나 기계적 계통(phylum machinique),
탈영토화(déterritorialisation), 추상기계(machine abstraite) 같은 개념에 관해서 일반적 차원의 일도 했습니다.
다양한 개념적 도구나 장치를 실제로 사용하기까지는 여러 차례 시행착오가 필요했습니다.
언어의 사용법이 항상 문제로 되었습니다.
새로운 단어를 하나 만들고 그것을 버리고 또 고쳐서 사용했습니다.
하나의 단어를 사용한 후에 그 의미가 점차 변해버린 것이 있습니다.
질과 제가 만들었던 것은 결국 하나의 언어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이 언어를 말하기 시작하고 그 사람들이 또한 우리에게 새로운 말을 가져오고 여러
가지 텍스트가 이 언어에 도입되었습니다.
모든 저자로부터 언어적 약탈에 의해서 이 언어는 풍부해졌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일부 어휘가 거의 유행어로 변하고 아주 우스운 사태로까지 되었습니다.
들뢰즈의 주위에는 믿기지 않는 붐이 일었고 들뢰즈의 학생들이 저의 입에서 들뢰즈에게 들은 말이 그대로 나와서
어이없어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질문
당신과 들뢰즈는 그다지 만나지 않고도 편지로 공동작업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정말입니까?
가타리
제 쪽에서는 하나 하나의 주제에 관해서 쓰면서 동시에 주제 전체에 관해서 써 나갔습니다.
모든 요소가 시작부터 공존했다는 의미에서 결코 주제별로 시간을 나누어서 진행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주제에 관해서 쓰면서, 동시에 전체에 그것을 파급시켜 갔습니다.
질은 그것을 검토하고 분류했습니다. 그가, ‘이것은 지금 할 것이 아니니 좀 더 나중에 하자’든지 ‘이것은 흥미
있지만 발전시킬 필요는 없다’든지 하는, 일의 경제를 관리했습니다. 그는 재빨리 해치웠습니다.
앙티 외디푸스, 카프카, 천의 고원에 나온 주제는 대체로 미리 전체적으로 결정되었고 질이 진행을
조직했습니다.
저의 텍스트를 그가 고쳐쓰고 저도 그의 텍스트에 첨가했습니다.
항상 텍스트는 두 사람 사이에 왔다갔다 했고, 사실 어느 것이 저의 텍스트인지 질의 텍스트인지 구별할 수는
있었지만, 구별한다는 것이 정말로 무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질이 늘 최종 형태를 결정하였습니다. 저에게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질문
하여튼 다양한 조건에서 그렇게 시작해서 할 수 있었던, 거의 전례 없는 기적적인 공동작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타리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공동작업을 전적으로 참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장래가 약속된 철학자 들뢰즈가 완전히 엉터리 일에 발을 들여놓고 재능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의미이죠.
철학자들 사이에는 들뢰즈에 대한 가타리의 악영향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물론 제 자신이 이 공동작업을 기적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질에 의해서 리모트 컨트롤되고 지지받으면서 완전히 자유로운 이중의 감정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일에 대한 계획과 열광이 있었고, 들뢰즈의 방대한 교양에 도움받았지만 그래도 이데올로기적이고 인식론적인
의미에서는 어떠한 강제도 없었던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질문
이 공동작업에는 무언가 근본적으로 음악적인 요소, 충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도 당신도 콧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음악적 배분 없이는 불가능한 듀엣, 오케스트라로서의 공동
작업. 말을 듣고 있으면 두 사람의 작업이 전혀 직선적으로 구축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작업의 진행방식, 글쓰기 자체가 리좀입니다.
가타리
그 이미지를 전개하면 처음의 얘기로 되돌아가지만, 아주 이질적인 음악적 선분이 있고 그것이 교차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바르톡을 들어 봅시다. 민요나 반복구(ritournelle)가 오케스트라의 화성적 구축에 삽입됩니다.
하나의 새로운 음악이 이전에는 생각되지 않은 이질적인 멜로디, 하모니, 대위법, 오케스트레이션의 만남으로부터
생겨납니다.
제 자신 몇 가지 난폭한 대화법, 정치, 정신분석, 철학 등 상이한 영역을 간단히 연결시켜 버리는 경향은 질의 방식
(스타일)과 글쓰기 혹은 사고에 균열을 일으켰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는 결코 심정적인 의미에서 함께 노래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차이의 음악, 이질적인 음악이 간섭해서 생겨난 새로운 배열에 의한 음악이었지,
결코 교향곡 9번 ‘합창’은 아니었습니다.
질문
이 ‘차이의 음악’에 의해서 생긴 결합은 단지 두 가지 흐름의 결합이나 배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변수에 의해서 핵분열을 일으키듯이 몇 배로 증식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 결합, 증식에 의해서 ‘열린 텍스트’로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타리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이 책의 생성과정이 더욱이 독자에게 전파되어 가는 것, 각자가 사용법을 발견하는 것,
이런 것이 없으면 책은 자기 자신에 닫혀서 죽어 버립니다.
다양한 인식에 대한 촉매작용이 되고 작용이 배가되고 확산되는 것이야 말로 이러한 공저에서 바라는 바입니다.
처음 6개월 간은 이 책에 대해서 그다지 반향이 없었습니다.
라깡의 지령은 ‘이 책에 관해서는 침묵합시다’였고 모두가 그것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르 몽드(Le Monde)’ 지에 2페이지 정도의 긴 기사가 실리고 나서 곧 유행(모드)이 되었습니다.
정신의학, 정신분석 전문가들이 어떠한 반응을 하는가 대단히 흥미로왔지만, 그들은 이 책의 효과를 가능한 한
중화시키려고 했습니다.
다양한 비판, 비방이 일었고, 이론적 주장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제가 관계하고 있는 보르드 정신병원에까지
공격의 예봉이 향해져, 보르드에서는 전기쇼크를 사용한다는 등 터무니 없는 중상도 나타났습니다.
제가 관계하고 있는 잡지에도 비난이 미치고 제가 정부나 드디어는 CIA에 협력한다는 등 유언비어까지 나돌았
습니다. 한편에서는 예기치 못한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지지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일부분을 읽고 좋아하는 페이지를 뜯어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 학생이 있었고, 어린 사람들도 포함해서
놀랄 정도의 반향이 있었습니다.
예술가, 문화인류학자도 호의적이었습니다. 원래 저는 삐에르 끌라스트르(Pierre Clastres)와 친해서 그와는
전부터 다양한 의견교환을 하였는데, 일례로 ‘원국가(Urstaat)’라는 개념을 만들고 고대사회의 국가문제를 함께
연구했습니다.
그도 ‘국가 없는 사회’에 대한 연구를 같은 시기에 완성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문화인류학자와 저는 공동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러한 사정도 있어서 오히려 정신의학과 무관한 영역에서의 평가는 대단히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신분석, 정신의학에서의 반응은 두려워할 만한 것이었고, 저는 수십 명의 친구와 단교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정황은 없어졌지만, 믿지 못할 캐리커쳐가 등장하고,
앙티 외디푸스는 ‘욕망의 경제’로 모든 것을 파악해 버린다고 만화에까지도 묘사되었습니다.
이 책이 정말 어떤 책인가 제대로 읽지도 않고 중상을 해댔습니다.
카프카에서 아르토로
질문
예술가들이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실제 앙티 외디푸스와 문학 및 예술의 관계는 대단히 흥미롭
다고 생각합니다.
예술론 혹은 미학 책으로 읽을 때, 담론과 예술 사이에는 무언가 새로운 관계가 확립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가타리
이 질문을 들뢰즈에게도 해보면 재미있을 것입니다. 결코 같은 대답이 나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의 관점은 결국 순전히 분석적인 것에 그칩니다.
제가 한 것은 무의식의 형성이나 주체성의 생산을 밝혀낼 수 있게 하는 어떤 종류의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
(agencement collectif d'énonciation)’를 정의하고 작동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술, 문학에서도 같은 작업을 했습니다. 카프카에 관해서, 푸르스트에 관해서, 음악가나 화가들에 관해서 고찰한
것은, 결코 어떤 이론의 응용으로서도 아니고 이론적 개념적 구축의 영역으로서 시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생산적인 언표의 지분이 있고, 개념은 그 부산물, 이차적 이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동물되기(devenir animal)’라는 개념을 검토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카프카를 분석하면서 였
습니다.
또한 아르토(Antonin Artaud)에 관해서 고찰한다기보다, 아르토를 작동시키면서 ‘기관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라는 생각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기관없는 신체’는 어디에서나 예를 들면, 사도-마저흐에서도 발견되는 것이지만, 저에게 그것은 항상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레버 박사를 증상례로서 정신병에 관한 개념을 응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쉬레버씨 당신의 주체성은
어떻게 작동합니까?’, 아니 그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주체성을 작동시키시오’라고 그에게 요구합니다.
이것은 본질적인 전환이었습니다. 오늘날 주체성의 위대한 창조자는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누군가가 기계공학의 원리를 알면서 그것을 응용하여 차를 제조하는 공장에 지시합니다.
기계공은 지시대로 차를 제조하면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공업의 현실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자동차산업의 방향이 기사나 기술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언표된 혹은 생산된 대상의 ‘계통(phylum)'이 있으며 그것이 다양한 형태의 표현배치를 생산합니다.
카프카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카프카의 말의 배치의 여러 가지 형태에 관해서 고찰했습니다.
16살부터 저는 카프카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대단히 강한 인상을 받았고 성에 관해서는 완전히 동일시 체험을 했습니다.
뒤이어 21살쯤에는 처음으로 정신분열증환자를 대면했지만, 그는 완전히 카프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중증의
긴장병(catatonie) 환자였습니다.
저는 그에게 카프카를 함께 읽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카프카의 일기와 유사한 일기를 썼고, 외모도 카프카에
흡사한 유태인이었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과를 거쳐서 질과 카프카론을 앙티 외디푸스의 결론으로
썼습니다만, 이 때 저에게 있어서의 카프카적인 배치는 다시 한번 성격을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관료제, 전쟁기계, 동물되기, 분열적 근친성관계, 그리스도 등등에 관한 생각을 크게 진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질문
아르토의 존재는 앙띠 외디푸스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관없는 신체’ 개념이 앙띠 외디푸스의 핵심으로 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아르토 체험, 아르토 효과는 어떻게 위치지워집니까?
가타리
내용에 관한 한 확실히 ‘기관없는 신체’라는 주제에 관한 어떤 것도 지금 기술한 ‘언표행위의 배치’의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말해야 합니다.
아르토는 이 점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에 속합니다.
그는 우선 고도로 단련된 글쓰기의 지속 그 자체이며, 이 글쓰기는 구석구석 정말로 특이한 방향에서 그 자신을
분열증화해버리는 부하를 받습니다.
조이스의 글쓰기에서도 똑같이 분열적인 의욕을 느낄 수가 있다고 해도, 조이스의 글쓰기는 의욕이며 일입니다.
피네간의 경야(經夜)(Finegan's Wake)는 정말로 세련된 글쓰기입니다.
그러나 아르토의 경우 그 글쓰기의 부하는 갑자기 정상적인 세계나 문학에서 다양한 의미의 좌표를 횡단하고
언표행위의 과정 자체에 작용합니다.
아르토는 글쓰기로 오랫동안 모델로서가 아니라(그는 어떠한 모델화와도 무관한 인물이었습니다) 정말로 놀랄
만한 지평을 우리에게 계속 보여줍니다.
이러한 강도(intensité)에 달한 글쓰기의 현상은 드물게 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리진스키의 일기, 슈레버 박사의 기록과 같은 현상도 있지만 아르토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글쓰기를 확실히 보여줍니다.
화가들은 처음에 세잔느를 보고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그림(tableau)입니다. 글쓰기의 차원에는 다다,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결렬, 실험이 있습
니다만, 늘 계속해서 문학적인 좌표를 다시 엮어내게 됩니다.
아르토의 경우는 자신의 존재가 지닌 주체성의 뿌리 자체가 되돌아 옵니다. 그 때문에 그의 생애는 진정한 실험이
됩니다.
단순한 표상의 예술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으로, 이로 인해 그는 위대한 철학적 작가가 됩니다.
그는 직접적으로 매개없이 사고합니다. 존재의 학이라는 의미의 철학이 거기에 실현됩니다.
위대한 철학자 속에는 항상 하나의 진정한 선분이 발견됩니다.
파스칼에도 데카르트에도 스피노자에게도 어떤 존재적인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있으며, 나중에 그들이 통합하는
모든 추론이나 논리에 반복되고 다시 나타납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대학을 관리하고 지배적인 담론을 편성하고 있는 철학자도 있습니다.
아르토처럼 코스모스에 있어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언어에 있어서, 빈틈없이 투쟁을 계속한 사람은 보기 드뭅니다.
그리고 인식의 장치를 형성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치 인식에 있어서 오디세이아의 여행입니다.
질문
아르토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사고의 형태, 사고의 근본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문학의 어떤 장르에도 철학의 어떤 정식(shema)에도 위치 지우기 어렵습니다.
편지에서 혹은 시적 텍스트에서 그가 젊었을 때 집요하게 계속 질문한 것은 사고란 무엇인가였으며, 자동사(自動詞)
로서의 사고가 모든 사고의 제한과 대상을 파열시켰습니다.
사고를 생산하는 것이 유일한 현실로 되고 질문으로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도, 존재도, 언어도, 사고도 영도점(zéro intensité)에서 생산되어야 했습니다.
이 상태는 역시 사고에 관한 것이면서 하나의 철학적 시도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사고 자체의
생성에 관한 실천이며 실험인 그런 철학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르토는 연극인으로서 실험연극의 창시자로서 주목받는 일이 많지만, 그의 연극은 이렇게 전적
으로 독창적인 사고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이 뿌리에서 발생해 가는 것으로서 시도되었습니다.
가타리
아르토는 단 한 번도 어긋나지 않은 필자입니다.
로트레아몽(Lautréamont)을 예로 들어 보아도 말도로르의 노래(Les Chants de Maldoror)는 확실히 훌륭
하지만 포에지(poésie)(단편모음)에는 일종의 어긋남(décalage)이 보입니다.
거기에서 그가 한 장난은 그다지 감상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랭보(Rimbaud)처럼 어긋나지 않은 필자, 실존적인
하강에 의해서 손에 쥔 것을 시장에서 거래하지 않는 필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질문
앙티 외디푸스와 천의 고원을 ‘힘 철학’ 혹은 ‘신체 철학’의 계보에 두어도 좋습니까.
물론 그것은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에 의해서 만들어진 계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체’라고 해도 어떤 ‘기관 없는 신체’에 의해서 파악된 신체, 현상학에서 특히 메를로 퐁티에게서와 같은 통일
적인 신체상과는 상당히 다른 신체상이 문제입니다.
가타리
결국 용어 문제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결코 우리 책의 주제를 ‘힘’이라는 말로 정의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모든 것을 갈등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역학적 사고, 이 갈등에 따라서 분명히 구별되는 심급을 찾고 더욱이 리비도
같은 등가물의 보편적 경제를 동반하는 그러한 사고를 거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 역학, 에너지, 에너지 경제학 등등에 관한 사고는 전통적인 심리학과 불가분합니다.
그것은 결국 주체성의 철학, 개인화된 주체의 철학에 기초하고 있으며, 우리의 관심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이라고 할 때에는 물론 다른 것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질문
그렇다면 역능(puissance)이라든가 강도같은 말은 어떤 맥락에서 설명됩니까?
가타리
질이 도입한 역능, 강도라는 말은 - 강도는 이미 힘과는 다른 개념입니다만 - 그 물리학적 비유로 인해 우리의
의도를 어긋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정신분석에서 흡사 물리학적 생물학적 비유를 없애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신분석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의미의 논리학’의 문제에 근거해서 보아야 합니다. ‘기관없는 신체’의
논리학이 거기에서 도출됩니다.
이 논리는 결코 에너지적 공간적 시간적 좌표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 ‘힘’에 관해서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에 ‘힘’은 존재하지 않
습니다. 모든 것이 평평합니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몽환적인 세계의 갈등도 거기에는 없습니다.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또한 사라지고 다른 것으로 이동합니다.
마술적이기도 하고 현실적이기도 한 이 세계에 ‘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체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기관없는 신체’는 ‘부분없는 전체’처럼 하나의 난점(aporie)입니다.
하나의 전체, 부분을 포괄하는 전체가 아니라 부분의 옆에 있는 전체입니다.
이러한 표현으로 어떤 유형의 논리학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저는 최근 ‘기호론적 에너지학’이라는 텍스트를
썼지만, 근대과학이 취급한 에너지 개념은 정확히 하나의 유형에 지나지 않고 완전히 다른 개념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다른 데서 몇 가지 개념을 도입했지만, 우선 어떤 기만적인 사고방식, 즉 모든 의미나 주체성의
현상을 은폐하고 정제하고 공동화하며 어디에서고 이원적인 관계에 있는 집합에 따르게 하고, 압력, 벡터, 힘
이라는 상(image)속에 이원화되고 이중화되고 벡터화된 관계에 종속시키는 사고방식과 결별해야 합니다.
주체는 결코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결코 당신이 여기에 있고 당신 앞에 펠릭스(제)가 있는 그런 식이 아닙니다.
당신은 어디에나 있고 저는 당신 속에 있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작은 장소를 부여하기 위해 코스모스를 침범하지는 않습니다. 거기에 ‘저’는 있지 않습니다.
루이스 캐롤(Lewis Carroll, 1832-1898,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의 논리란 그런 것입니다.
질문
그러나 니체, 들뢰즈의 사고에서 ‘힘 철학’은 그러한 논리와 통하지 않습니까? ‘힘’은 결국 대립적으로 변증법적
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에너지적인 시공간적 좌표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공간 개념,
대립적이지 않고 완전히 내재적인 세계를 기술하는 개념입니다.
가타리
니체의 인용에 대해서 저는 상당히 경계합니다.
니체는 결코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무언가 오싹하게 하는 게 있고 저는 깊은 적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훌륭한 텍스트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힘 개념을 보통 말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이 말[힘]을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게 사용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힘철학은 어디에나 있고 힘을 둘러싸고
다양한 유형의 권력이 존재합니다.
‘초인’에 관해서 기술하자면 어찌됐든 어떤 종류의 애매함을 지니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질문
저는 아르토를 연구하면서 그의 ‘힘’, ‘잔혹(cruauté)’, ‘기관없는 신체’라는 주제를 해명하려고 시도했습니다만,
아르토에게는 확실히 원초적인 에너지라는 모티브가 있고 그것에 따라서 ‘힘’ 혹은 ‘강도’를 기술해가도 어쨌든
애매함을 피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다분히 ‘기관없는 신체’ 개념이 이 애매함에 대한 하나의 해답으로 된다고 느끼고 있어도.
가타리
‘기관없는 신체’는 완전히 새로운 말이지만 에너지적인 힘, 전체화된 집합이라는 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도 ‘에너지’도 어떤 종류의 선험적인 의미성을 가지고 있어서 까다롭게 됩니다. 힘은 항상 ‘힘 관계’를
동반하고 ‘힘 관계’의 지도학을 동반합니다. 힘들 관계의 ‘대리(代理)’ 또는 ‘대리’와 ‘강도’의 대립이라는 사고
방식을 동반합니다.
질문
그러나 들뢰즈에게는 니체, 스피노자의 사상과 관련해서 이것은 거의 명확하지 않은가요? 강도적인 차원과 연장(extension)적인 차원은 확실히 대립합니다. 그러나 강도의 차원에는 대립이, 이른바 ‘힘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내재성의 차원이 존재할 뿐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언표행위와 언어
질문
‘언표행위의 배치’ 개념에 관해서도, 이 개념은 구조주의 언어학, 촘스키 언어학에 대한 당신들의 비판의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학(詩學)조차 몽상할 수 있게 하기에 충분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결코 쉬운 개념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카프카에서 그것은 정말로 다이나믹하게 효과적으로 운용되고 있지만, 다른 어떤 작가나 저작에도
이 개념을 적용할 수가 있을까요?
가타리
언표행위(énonciation) 이론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결코 우리가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이미 방브니스트
(Benveniste), 오스틴(Austin)이 예리한 고찰을 했고 오스왈드 뒤크로(Oswald Ducrot)도 그것에 관해서 연구
했습니다.
그러나 언어학자가 언표행위 문제에 대해 지니는 태도는 좀 불가사의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언표행위를 더욱 중요한 과제로서 연구하고 언표(énoncé)에 언표행위를 개입시키면서
동시에 언표행위 문제를 주변으로 몰아내려고 하는 이중성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언어현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언표행위이며 이것이 의미생산의 요소들을 성립시킵니다.
의미의 생산도, 주체성의 생산도, 결코 기표의 조직에 고유한 내적 현상이 아닙니다.
구조주의 언어학의 사명은 끝났습니다. 본질적인 전환이 필요하며, 언표행위는 언어의 내부에 담론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 관여한다는 식으로 언표행위에 약간의 권리를 고려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담론은 의미를 생성합니다. 이 때 언어는 담론의 성립에서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요소가 결합됩니다. 기관없는 신체의 요소, 사회경제적 요소, 생태학적 우주적 요소 등 무수한
요소가 결합됩니다.
그들 요소 모두가 말하며 의미를 생산합니다. 기표의 연쇄, 즉 구조는 거기서는 커다란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질문
이 경우 구조주의 언어학에 기초한 텍스트이론, 시학은 유효성을 잃어 버립니까?
가타리
물론입니다. 의미의 생성을 가져오는 것은 구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미의 생성을 가져오는 것은 막 얘기한 것처럼 다양한 작용이 침입하는 것 자체입니다.
음악의 영역에서는 아주 분명합니다.
드뷔시가 가져온 전환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결코 오음음계의 사용만은 아닙니다.
‘후렴구(ritournelle)’, 다양한 음악적 텍스트의 새로운 결합, 새로운 오케스트레이션(ochestration), 그것은 더욱이
새로운 세계를 듣는 방식이며 음악 내부의 사건은 아닙니다.
드뷔시의 시상(poésie)이 음악적인 텍스트에 침입하고 오음음계를 점거해 버립니다.
아시아나 다양한 지역에서 행해지는 여러 가지 후렴구가 거기서 혼합됩니다.
다른 영역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의미는 완전히 이질적인 요소의 집합에 의해서 합성됩니다.
언표행위는 이질적인 표현의 소재들 사이에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경제학적 관계 사이에서, 동물행동학적 관계
사이에서 완성되어 갑니다.
이러한 다양한 관계가 시나 음악의 영역에서 돌연변이적인 언표의 생성을 향해 몰려듭니다.
이러한 작용을 파악하기 위해서 문체론이나 시학을 특별한 메타언어로서 발명하지만,
그 결과는 알고 있듯이 그다지 산뜻한 것은 아닙니다.
질문
시학의 중요한 영역인 이야기[서사]론, 설화론 문제를 생각할 때, 이 ‘언표행위의 배치’는 어떠한 위치를 차지
합니까? 물론 하나의 이야기는 이미 다양한 언표행위를 배치하는 것이라고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가타리
이야기에서 언표행위의 배치는 원칙적으로 메타모델화(meta-modelisation) 활동이라고 정의될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다양한 형태의 모델화를 통해서 하나의 기관없는 신체, 하나의 좌표를 구성하고 생산하는 능력입니다.
드뷔시가 행한 메타모델화는 새로운 유형의 오음음계, 음색, 후렴구를 대상으로 한 실존적 생산입니다.
메타모델화는 단순한 글쓰기를 위한 메타언어가 아닙니다. 항상 새로운 것은 이 메타모델화이며 표현의 돌연변이(mutation)는 이 메타모델화에 의해서 생깁니다.
이야기는 고대사회에서 이미 주체성을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선 기억과 혈통을 전달합니다.
기초적인 이야기는 ‘당신의 조상의 리스트를 말해주세요’에 답하는 것, 고유명사에서 생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곧이어 혈통에만 그치지 않는 신화적 문학적 요소가 첨가되어 증식해 갑니다.
저는 어떤 이집트인, 도착적인 법률가를 상상해 봅니다. 이 때 글쓰기는 단순히 보리자루를 세고 묘비명을 새기는
것에만 쓰이지만, 어떤 때는 그는 젊은 남녀를 향해서 쓰기 시작하고 글쓰기에 에로틱한 요소를 도입합니다.
그는 이야기기계에 전혀 예정되지 않은 언표행위의 대행자(agence)를 들여오고 새싹이 돋아나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아가(雅歌, 궁중아악)’가 드디어 자립하고 별도의 이야기의 정치학이 성립하고, 이것이 후대의
궁정연애나 기사도연애에 연결되어 하나의 새로운 배치가 새로운 리비도 조직을 부여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는 주체성의 자동생산 장치로 됩니다. 글쓰기 기계는 영토화된 주체성의 배치에 따르지만,
이야기는 그 스스로 주체성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글쓰기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새로이 자본주의적 주체성의 재생산이 이루어지고 이야기나 메타
이야기가 주체성 전체를 자본화합니다.
문화인류학이 세계의 곳곳에서 주체성을 자본화합니다. 흑인 아프리카의 다양한 반복구가 북아프리카의 째즈에
흡수됩니다. 메타이야기는 메타모델화 작용으로 됩니다.
‘나는 너를 주체화 해버리겠다.’ 오스트레일리아나 아프리카의 토착민에게 북아메리카의 매체에 의해서 수정되고
완성된 주체성이 군더더기로 강요됩니다.
메타이야기, 메타모델화로부터 원초적인 이야기로 복귀하는 것도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정신분석은 이야기의
재도래, 가족소설의 재발명입니다.
노동의 집단적 조직에 의해서 주체성은 자본주의적 주체로 완성되지만, 사람이 집에서 애기를 보며, 머리 속에
서는 잠잘 때도 성교할 때도 분석의사의 치료실에서도 이 이야기, 이 가족소설을 말하도록 강제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야기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문학적인 현상에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주체성의 양식 전체를 자본화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의 대표자, 체현자가 존재하는 것은 확실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금을 관리하는 은행가의 역할이 존재하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그것은 화폐가 은행가에게만 관계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의 모든 장소에, 화폐경제에 관련한 모든
장소에 관련하고 있습니다.
문학, 글쓰기로 일하는 사람도 모든 사람들이 관계하는 주체성에 관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대중매체화되고 정보통신화된 연결망(réseu)은 매일 변화하는 역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지구적인 규모에서 주체화를 실행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다양한 인용의 대상으로 되고 모든 국지적
요소를 초코드화하고 생산체계를 성립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선분으로 됩니다.
모든 생산이 이러한 현대적인 자본주의적 주체화에 인접해 있습니다.
우리는 개체적인 혈통에만 관련하는 이야기의 국지적 상태에서 출발했지만 이제 이야기가 모든 주체화 영역을
자본화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생산이 이렇게 자본화됩니다. 이 이야기에 따라서, 발전의 범위란 어떤 것인가, 엘리트로 여겨지는 인간의
영향이란 어떤 것인가, 보장된 인간과 보장되지 않아서 주변으로 밀려난 인간의 위치는 어떤 것인가가 결정됩니다.
하부구조적인 물질을 이루는 생산의 배치도 또한 이 이야기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이야기는 보통 언어적 생산으로서 상부구조로 보일 뿐일지라도 실제로는 하부구조의 메타모델화의 현저한
장치로 됩니다. 따라서 이야기문제는 어쨌든 문학의 틀 속에 가라앉는 것은 아닙니다.
질문
예를 들면 파이에(J. P. Paye)는 이야기의 작용이 권력형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몇 가지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자세히 연구하고 있는데, 이야기가 주체성을 자본화[포획]하는 보편적 과정이 어떻게 실현
되는가 하는 측면은 또한 앞으로의 과제에 속한다고 생각됩니다.
이야기의 형성과 변용에 관한 연구에서 더 나아가 어떻게 해서 이야기가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분자에 횡단적
으로 작용해 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가타리
이야기는 주체성을 생산하는 것이며 이 주체성의 생산이 생산형태의 토대입니다. 사회의 생산, 제도의 생산,
생산력 자체의 생산의 토대이죠. 하나의 로켓을 달에 보내는 사업이 발표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과학, 기술, 정보의 모든 수준에서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만, 우선 필요한 것은 이 로켓을 제조
하려는 욕망을 만들어내는 주체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아폴로 계획은 사람을 달에 보내는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생산과정에 속합니다.
물론 그것에 모든 유형의 물질, 자본, 힘이 결합되어야 합니다. 이 주체성이 붕괴해 버릴 때 아폴로 계획 전체가
수정되고 마침내 사라져 버립니다.
질문
문학 내부에는 이렇게 주체성을 자본화하는 이야기를 해체하고 파괴하려고 하는 흐름도 항상 존재합니다.
이야기 사이의 투쟁, 그것에 이야기와 반이야기의 싸움이 보입니다.
가타리
반이야기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거의 캐리커쳐적인 반이야기, 인공적으로 이야기를 파괴하려고 하는
시나 행위(performance, 퍼포먼스), 누보 로망(Nouvaux Roman) 같은 것이 있는 한편, 여러 가지 방향으로
모든 표현을 향해서 나아가는 반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언어가 다른 요소나 다른 차원과 결합하여 록이나 러브뮤직, 일부의 자유 라디오에 보이는 것 같은
완전히 이질적인 언표배치, 시상을 만들어 냅니다.
질문
일본의 광고 메세지에도 언뜻 그러한 현상이 보입니다. 단형시(短型詩)적인 발상, 한자의 다-기호론적인
(poly-semiotique) 요소, 외국어의 인용과 이미지가 결합되어 부드러운(soft) 자본주의적 주체성의 형성에 작용
합니다.
가타리
이러한 메세지가 오늘날의 맥락과는 완전히 달리 미래에는 시로서 읽히기도 할 것입니다. 프랑스의 광고는 또한
그 정도로 눈에 띄지는 않습니다. 영화관에 걸린 광고(commercial)만이 꽤 역동적일 뿐이죠.
질문
철학적 대상으로서의 일본은 어떻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타리
일본은 역시 언표행위의 하나의 배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언표된 것으로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언표행위 과정은 지구 전체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브로델(Braudel)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세계도시’입니다. 거기에는 끊임없이 언표행위의 수정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관계가 다시 고려되고 다시 현실화됩니다.
재연결화의 거점이 성립합니다. 일본이 세계의 수도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입니다.
결국 일본은 일본인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은 혹성적인 기계의 과정에 참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있는 것은 낡은 구조의 잔재, 고대성이 일본에서는 완전히 돌연변이적인 언표행위 과정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다른 공업국에서는 노동력은 완전히 탈영토화되고 가족적 인격적 공동체적 요소가 소멸해서 사회적 생산적인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성공한 것은 고대적인 구조를 동시에 강제로 해방적인 체계를 만들어 내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언제까지 지속할지는 모릅니다. 이러한 체계가 어느날 갑자기 휙 날아가고 파리의 5월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것은 대수롭지 않은 기적입니다. 일본인은 스스로를 일본인으로서 결국 독자적 혈통 속에서
느끼고 동시에 놀랄만한 기술적 문화적 돌연변이를 수행합니다.
미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미국에는 일본인 같은 혈통 의식은 존재하지 않지만 개척시대에
즉석에서 출신국별 집단형성이 이루어지고 주체화의 기초적 집단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집단은 미국의 창조적 요소의 기초로 되었습니다.
질문
몇 가지 난폭한 적용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천의 고원에 있는 ‘전쟁기계’나 앙티 외디푸스에 있는
‘분자적 작동’이라는 개념이, 일본의 정당, 기업, 학교, 가족 등 다양한 장소를 횡단하면서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가타리
학교나 가족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미시사회지만 분자적 조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미시사회와 분자적 조직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고 반대로 대중매체처럼 거대한 현상이 분자적 구조에 침윤하기도
합니다. 미국의 대통령후보 선거에서 나타난 하트[민주당대통령후보, 당내 경선과정에서 대중들의 호응을 덩어
갑작스럽게 부상하였슴]현상 처럼 미시사회 수준에서 분자적인 돌연변이가 일어납니다.
질문
미시사회로서의 가족이나 학교가 일본에서는 어떤 종류의 분자적 조직의 생산장치로 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억압 체계가 동시에 해방 체계인 것 같은 양의성(equivosity)의 기초가 생겨납니다.
예를 들면 일종의 신체정치가 있고 학교는 놀랄 정도로 주의 깊게 어린이들의 신체를 관리합니다.
기업도 학교도 가족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현실적인 내용은 이러한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아침 기업에서 하는 라디오체조 등에서도 보여집니다.
가타리
결국 그 예에서 미시사회는 결코 몰적인(mole)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대단히 흥미있습니다.
몰적으로 주어진 구조가 분자적인 기계적 작용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질문
권력의 형성과 자본화가 분자적인 조직에 의해서 강력하게 행해집니다.
가타리
도착적인 가부장성, 외디푸스의 몰적인 구조는 어떤 종류의 열정이나 에로스와 결합하여 작동합니다.
이 점에서 일본인은 지구에서 가장 위대한 도착적 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인이 얼마나 하나의 대상에 광인처럼 집착할 수 있는가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라디오에서 요사이 히말라야를 등정하다 죽은 사람의 반수가 일본인이라고 들었습니다. 대단합니다. 동경에서
아침에 골프연습장을 보았습니다. 우아한 자세로, 정말로 정교한 장치로, 셀 수 없을 정도의 사람들이 일사불란
하게 공을 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언가 이해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일종의 기계적인 도착, 광기입니다.
일본인은 일만 하는 불쌍한 노예라든가 셀러리맨은 결코 휴가를 내지 않고 아가씨들은 25세까지 집에서 자유로
울 수 없다는 등 통념이 만연하고 있지만, 노예는 아니고 거기에는 일종의 에로스, 사드-마저흐(Sade-Masoch)가
존재합니다.
죄의식이나 법의 내면화도 다른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몇 백년 계속해서 사회 전체를 규제하는 일신교가 아니라 다양한 계수를 지닌 기호적인 자유도(自由度)가 있고,
어떤 종류의 온순함, 신체에 대한 배려, 의식이나 레테르(명칭)에 대한 편애, 인간관계의 우아함(elegance)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분열분석과 현장
질문
마지막으로 정신병원에서의 일과 당신 자신의 사색의 궤적 사이의 관련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보르드 병원은 당신의 저작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습니까?
가타리
그것은 결코 직접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23,4세 때 저는 이 병원의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까지 라캉의 세미나에도 참석했고 일정한 정신분석학 교육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은 그것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신경증, 히스테리, 분열증을 지닌 그 어느 환자를
보아도 정신분석학자들의 가르침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저는 라캉주의자인 한편 동시에 정신요법의사, 병원관리자로서 실천의 장을 지녔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 담론을
계속 가지고 있었습니다.
라캉을 옹호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면으로 현장에 관련하려 하지 않는 정신분석학자의 잘못을 비판했습니다.
68년 사건까지 저는 이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문제는 그래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론적인 이중성은 고통스럽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정치적인 대립으로
까지 표면화하도록 놓아두지는 않았습니다.
극좌활동가이며 라캉주의자이며 현장의 정신과의사라는 삼중성에 그대로 머물러 앉아 있지는 않았습니다.
보르드에서의 체험으로 정신분석의사로서도 정치활동가로서도 제가 다른 사람과는 이질적인 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다른 활동가는 저의 정신병원에서의 활동에 흥미를 지니면서도 쌀쌀한 눈으로 보려고 했고 라캉의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질문
보르드에서 처음으로 존립/存立(consistance)을 발견했습니까?
가타리
존립(存立)은 앙티 외디푸스를 쓸 때 처음으로 확립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르드에서 하나의 요청이, 현장의 요청이 생겼습니다. 이른바 문화주의시대의 민족학자(ethnologiste)
들은 말리노프스키를 제외하면 정말로 정직하지 않으며 현장을 시야에 두지 않은 채 불가능한 거대한 이론화를
했습니다.
레비-스트로스조차도 이러한 경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분열증과 분열분석의 생각은 현장의 요청으로 생긴 것입니다. 처음 병원 동료들은 ‘제도적 정신요법(psychothér
apie institutionelle)’이라고 불렀습니다.
‘정신요법’이라는 생각은 상당히 한정적이라고 생각되어서 저는 ‘제도분석(analyse institutionelle)’ 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도적 정신요법은 인칭적 혹은 상호인칭적 개념의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대해서 무의식 형성의 분석은 단지 심리학, 정신병리학 등에 의한 상호인칭적 개념의 분석에 머물러
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의식 형성은 다양한 생산체계 전체와 관련하고 있습니다. ‘제도적 정신요법’은 ‘제도분석’의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의식은 교육, 도시, 경제, 사회생활, 예술 등의 모든 것에 관련합니다. 68년까지는 라틴 아메리카 등을 포함하여
‘제도분석’의 다양한 흐름이 존재했습니다.
말하자면 사회심리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정신분석에는 없는 ‘언표행위’의 분석에도 손을 댔지만 결코 충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도적 전이(transfert institutionelle)’라든가 ‘횡단성(transversalité)’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고 어떠한 기호
적 메카니즘이 거기에 작용하고 있는가를 연구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앙티 외디푸스에서 분열분석을 전개했을 때 그 때까지의 어휘를 버리고 처음으로 이러한 질문을 명확히
할 수 있었습니다. ‘분열분석’은 ‘제도적 정신요법’이나 ‘제도분석’의 실천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도 정신요법도 주로 신경증을 대상으로 했지만 분열분석은 정신병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특권화한 언표행위의 좌표를 이렇게 해서 탈중심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질문
앙티 외디푸스를 읽은 독자는 통념과는 반대로 이 책이 광기를 거의 즐거움에 찬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신병원에서 당신이 확인한 사실입니까?
가타리
스피노자가 말한 것을 생각해내야 합니다. 즐거움은 정말로 본질적인 개념입니다.
단 그것을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되고 ‘즐거움의 정치학’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고의 좌표를 바꾸어 버리는 유머의
정치학, 의미를 무화하는 전환의 정치학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확실히 슬픔, 절망, 분리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점차 사고좌표의 돌연변이가 발생합니다.
제가 여러 가지 체험한 것 속에서도 특히 유머에 가득찬 것은 모두 병원에서 분열증 친구들과 체험한 것입니다.
제가 그들에게 영향을 주기보다도 제가 상당히 영향을 받았습니다.
저는 마치 분열병을 지닌 사람이 보듯이 사람들이나 세계를 보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선문답의 섬광
같이, 이 지구상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젊었을 때에 어떤 환자와 대단히 친해서 곧잘 잡담을 했는데, 어떤 때 그는 제 말을 들으면서 오랫동안 저를 계속
쳐다보았습니다. 그래도 말을 계속하면 그는 제 눈을 들여다보면서 갑자기 ‘이 남자는 또 지껄인다’고 했습니다.
제 말이 전부 어긋나버린 것 같았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분열증 자체가 유머에 찬 즐거운 것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혁명이지요. 정신병은 공포스러운 것이며 병원은 처량한 장소입니다.
우리가 분열증으로 되는 것이 새로운 혁명의 길이라고 주장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분열적 과정을 극복하고, 거기에서 다양한 배치를 파괴하고, 특이성을 개입시키고, 분열적
과정에 눈을 돌리는 것, 어떤 견해를 고찰하고 웃음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삶은 불길한 것, 두려운 것이지만, 정말로 유쾌한 것, 불가사의한 것, 새로운 사태가 항상 발생하고 모험도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언가 불행, 스캔달이 지속되든가, 그리고 그것들 모두에 직면하여 도대체 무엇을 당황해
할 것이 있든가......
(이 인터뷰는 1984년 3월 30일 파리에서 남쪽으로 약 15Km 아래에 있는 데이송 마을의 가타리 집에서 녹음한
것입니다. 그가 근무하는 보르드 정신병원은 그 근처에 있습니다.)
現代思想, (總特輯 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 靑土社, 1984, vol. 12-11, pp. 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