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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펜화 김영택 화백 작품, 고려 이전 까지는 좌식문화에 고층 빌딩이 있었으나 소빙하기로 온 조선 하층민의 온돌이 대유행, 고층건립에 난방 문제등 어려움 발생. 사진 불교박물관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 왕조의 천년 역사를 담고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 지역으로, 황룡사(皇龍寺) 9층 탑은 그 상징적 유산 중 하나이다. 황룡(黃龍)이 나타나서 황룡사라지만, 황(皇)은 황제의 황이다. 분황사(芬皇寺)고 그렇다. 신라는 9족을 통합하려고 한 웅혼한 기상을 가진 황제국이었디.
신라는 고대 한국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왕조로, 57 B.C.에서 935 A.D.까지 천 년간 존재했습니다. 신라의 위상은 그들의 건축물, 불교 유적, 왕경 유적 등 다양한 유적들에서 비롯된다. 특히 경주지역은 신라의 중심지로, 신라의 건축 기술, 불교 문화, 왕경 구조 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유적들은 신라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문화적, 정치적 중심지였음을 입증하며,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은 경주역사유적지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2000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종합역사지구로, 총 5개 지구로 나뉘어 있다. 남산지구, 월성지구, 대릉원 지구, 황룡사지구, 산성지구 인데 황룡사지는 이 중에서도 신라 불교의 정수로 여겨지며, 신라의 불교적 이상과 정치적 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찰터이다. 사찰이라지만 궁궐로 시용하려고 대규모로 조성되었다는 설도 있다.
경주가 주는 의미는 크다. 소수의 오갈데 없는 북방의 이주민들이 유목의 전통인 和白이라는 최고의 민주적 시스템을 가동하여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헸디. 백제.고구려.왜에 굴종하면서 닦은 실력으로 결국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니 이것이 바로 오늘의 韓流의 원조이다. 사진 문광부
황룡사 9층 탑은 645년(선덕여왕 14)에 건립되었다. 당시 탑의 높이는 약 80미터로 추정되며, 이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목탑이었다. 이 탑은 불교적 상징성과 신라의 권위, 기술적 성취를 나타내는 중요한 건축물로, 9층의 구조와 각 층의 장식은 당시 신라의 불교적 이상과 왕권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탑의 건립에는 백제의 장인 아비지와 신라의 장인들이 참여하였으며, 이는 신라가 문화적으로 매우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협력에 열려 있었음을 시사한다.
만일 몽고침략 때 소실되지 않았으면 1300년이 지난 1969년 한진빌딩(82m)의 건립전 까지는 한반도에서 최고의 건물의 위치를 유지했을 것이다.
경주 황룡원 중도타워는 신라 황룡사 9층 탑의 형태를 모방하여 복원한 현대의 건축물이다. 이 탑은 신라의 유산을 현대에 재현하려는 시도로, 명상과 힐링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황룡원 중도타워는 명상실과 고급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석굴암 일출 명상과 황룡사 9층 탑지에서의 낙조 명상 프로그램 등을 통해 현대인들에게 신라의 문화유산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고있다. 외부는 황룡사 9층탑을 최대한 재현하고져 했고 인근 중도타워와 함께 경주의 명소이다. 한 기업의 원력으로 이정도 나마 그 위용을 보게 된 것은 다행이다.
황룡사의 복원은 지금은 요원하고 1970년 말 박정권과 모재벌이 관심을 가졌고 2천년대 이후 시도가 있었으나 역시 유적보호라는 의미와 유네스코의 반대로 제동이 걸린 상태이다.
중도타워와 황룡원, 보문단지에 있고, 황룡사 목탑의 외형을 추구한 동국제강 그룹의 연수원 겸 숙박시설로써, 공식적인 복원도 아니고 황룡사지에 위치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현재 황룡사의 구체적인 설계 외형을 추론할 만한 자료가 부족하고, 황룡사지의 실제 복원에 많은 논란과 부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 건물이 황룡사의 모습을 경주 관광객들에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도타워는 설계공모에서 2등이나 1등으로 집을 안짓고 이걸로 무단 건설, 그래서 논란, 후에 사실확인 표지석도 세우는 소동, 이 중도타워와 뒤 황룡원이 딱 들어 맞는 컨셉이라 결혼식을 했다는 말도 있다. 사진 네이버블로그
그러나 경제력 기술력이 되는 지금, 이의 복원에 대한 논의는 필요할 것이다. 민족 대통합과 동방 9족을 상징하는 제1층은 왜(日本), 제2층은 중화(中原), 제3층은 오월(吳越,남중국 동남아), 제4층은 탁라(托羅, 제주), 제5층은 응유(鷹遊, 백제), 제6층은 말갈(靺鞨.거란), 제7층은 단국(丹國.발해), 제8층은 여적(女狄,여진), 제9층은 예맥(濊貊,고구려)인데, 이 동방의 화해와 통합이 시급한 시점에서 그 상징성은 매우크다.
황룡사와 같은 신라의 대사찰들은 단순한 종교적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신라의 불교적 이상과 왕권을 상징하며,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황룡사 9층 탑은 신라인들이 지닌 불교적 이상과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 국가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이러한 유적들은 중요한 학문적 자산이자, 현대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황룡사 9층 탑과 그 주변 유적들이 신라 시대의 위상과 문화적 중요성을 어떻게 반영하는지를 설명하면서 황룡사는 단순한 역사적 유적을 넘어, 신라의 불교적 이상과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고 현대에도 우리의 기상 속에 살아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1300년전 이 땅에 이렇듯 위대한 세계적 유산이 존재 했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유전자 속에 남아 세계적 韓流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상 오픈된 민족은 살아남았고 패쇄된 민족은 망했다. 지금도 우리는 남과 북의 사례에서도 똑똑히 보고 있다는 것이다.
흐르는 물과 열린 공간에는 항상 새롭고 신선함이 유지되고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씨 조선의 쇄국과 교조적 학문에 의한 멸망,일본열도의 오픈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흥성, 그리고 명나라 정화의 함대를 막은 명왕조의 패쇄로 기마민족에 의한 멸망등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적용되는 황룡사 9층 탑의 기상이다. 얄팍한 엘리트 의식과 약간의 재력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폐쇄적 집단을 이루고 외세에 빌붙고 외래종교와 사상에 탐닉하여 일만년 민족사를 모독하는 무리들에게 내리는 엄청난 경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류의 거대한 물결은 그런 잔재들을 일거에 쓸어버리려 하니 그것은 바로 황용사 9층 탑이 주는 대원력일것이다. (글 권오철 기자)
고려시대 김극기의 詩
層梯繚繞欲飛空층 제 요 요 욕 비 공 층계로 된 사다리는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萬水千山一望通만 수 천 산 일 망 통 일만 강과 일천 산이 한눈에 바라보이네
身出盧敖登降外신 출 노 오 등 강 외 내 몸은 노오가 오르내린 바깥에 나왔고
眼呑竪亥去來中안 탄 수 해 거 래 중 내 눈은 수해가 오가던 가운데를 삼키네
星槎影落檐前雨성 사 영 락 첨 전 우 성사의 그림자는 처마 앞에 비처럼 떨어지고
月桂香飄檻下風월 계 향 표 함 하 풍 월계수 향기는 난간 밑 바람에 나부끼네
俯視東都何限戶부 시 동 도 하 한 호 굽어보니 동도(東都)에 수없이 많은 집들
蜂窠蟻穴轉溟濛봉 과 의 혈 전 명 몽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히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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