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庭光散人사랑방 스크랩 무장사지 아미타조상비 귀부 및 이수 좌대 설치 현장에 가다
庭光文培 추천 0 조회 20 11.11.30 11: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무장사지 아미타불상造像碑 귀부 및 이수 좌대 설치 현장을 남겨두다

 

 

<경주 무장사지 귀부 및 이수 좌대 설치 현장/2011.11.23 수요일 글돋촬영>

 

 

 

01

02

03

04

정비공사로 귀부와 불리

된 이수-좌대설치를위해

뒷편 깊이5미터정도를

장방형으로 구덩이를 

불리된 이수(비머리)

여의주 양쪽에 용문양

이 꿈틀되고 있다 

귀부와 이수(정비 전) 

 무장사아미타불 조상

사적비 이수 및 귀부

정비공사2010.7.28~2011.

11.23일현재


 

01

02

03

2002년 시대에 이수외 귀부가

분리되어 있던 현장 사진(한국의

불교문화 사진자료) 

2011.11.23 이수와 귀부 해체

분리되어 정비 작업중 사진 

귀갑 훼손이 심한 귀부부분 



 

 

  삼층석탑은 원래 무너져 있던 것을 1963년에 일부 석재를 보충하여 지금처럼 세워놓았다. 기단의 안상문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구부와 이수는 구덩이 양 옆에 분리되어 놓여있었다. 이동하기위해 귀부를 묶어놓은 피대끈이 억박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움틀거리는 용 조각의 생동감-비머리(이수)조각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사적비 이수(비머리)및 귀부 정비공사 현장을 찾아

 

2008년 11월20일에 무장사지 아미타불상 사적비 비신 복원을 위한 현지조사를 경주시와 문화재청이 실시하는 과정에서 귀중한 발견을 하게 된다.

쌍귀부 좌측면 머리1점이 주위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 당시 비신을 없고 쌍귀부 우축 머리가 파손되어 뒹굴고 있어고 사라진 좌측면 머리1점 마저 발견되어 큰 주목을 받았던 현장이다.

필자가 무장사지를 찾은 것은 2002년6월경이었다. 현장을 오르는 길엔 잡초가 우거져 삼층석탑은 물론 쌍귀부가 있는 곳까지 잡초덩불로 접근조차 힘들었다.

거의 방치된 현장이었다.

 

 

2003년 무장사지에서 약 3.3키로 떨어진 무장산정 주위  억새밭을 배경으로  촬영된  '태극기휘날리며'란 영화 덕분으로 억새밭이 주목을 받았다. 이후 2008년 선덕여왕 드라마 촬영지로서 각광을 받은 후 수 많은 인파가 무장산을 찾았다. 입구 길도 포장되고 승용차의 통행과 주자장 시설 확보로 목장길과 억새밭을 오르는 길목에 위치한 무장사지가 주목을 받았다.

 

등산객 인파로 인해 무장사지 정비계획이 2008년11.20 관계자들의 현장 답사로 밑그림이 그려졌다. 그 현장에서 발견된 귀수 때문에 더욱 빠른 정비계획이 세워졌다.

기사에 의히면 09년 비신복원을 통해서 쌍귀부가 제자리를 찾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문화재청장도 교체된 이유인지 모르지만 2009년 조용했었다. 2010년 7월28일에 드디어 이수 귀부 정비공사가 시작되어진다. 일년이 지난 11.24일 현장에 가보았다. 문화재 정비 때 기록을 담아 두는 것도 좋은 기록물인 까닭이다. 마침 아침에 흩날리는 초겨울 소나기성 빗줄기가 흐릿한 구름에 흩날린다.

 

오후 2시경 산바람에 계곡 언덕의 억새풀이 누우른 수염을 뒤로 눕히며 사걱되며 흔들거린다. 입구에서 본 공사장 1톤 푸른 트럭인부들이 오후 작업을 위해 현장 길을 오른다. 10년 만에 다시 찾은 무장사지를 오르는 길 양 옆 계곡물 수량이 풍부하다. 무장사지 안내표지팻말이 많아 정말 찾기 쉬웠다. 10년만에 달라진 큰 변화였다.

 

입구에서 약2킬로 정도 오르다. 오른편에 무장사지 목재계단이 연이어 놓여있다. 달라진 점이만 그 곳까지였다. 삼층석탑 현장과 그 한 단 위쪽 '무장사 아미타불 조상사적비 이수 및 귀부'가 있던 자리는 역시 10년 전의 모습 그대인 것 같다. 다만 잡초만 잘 제거된 상태였다.

 

삼층석탑은 원래 무너져 있던 것을 1963년에 일부 석재를 보충하여 지금처럼 세워놓았다. 기단의 안상문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필자의 오늘의 관심사는 역시 귀부와 이수의 정비공사 현장이었다. 흐릿한 초겨울의 날씨에 6명정도의 인부들이 일하고 있었다. 좌대를 만들기 위해서 장방형 구덩이를 파고 있었고 구부와 이수는 구덩이 양 옆에 분리되어 놓여있었다. 이동하기위해 귀부를 묶어놓은 피대끈이 억박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발견된 구수(귀부의 머리)의 학술적 가치 중요성

 

 

1963년 발견될 당시 비신은 없고 조선순조 17년(1817) 추사 김정희가 발견한 비편 2점과 1914년에 다시 이 곳에서 발견된 비편 1점은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고 한다. 2008년 11.20일 귀부의 좌측 귀수의 학술적 가치는 높다.귀부의 양식이 귀두에서(무열왕릉귀부.고사사지 귀두) 용두(용의 머리/고려시대)로 변화되어가는 중간단계의 모습이기 때문에 학술적 가치가 커다

 

무장사 창건 시기 혼란에 대한 정리

 

무장사지 창건에 대한 연대에 대한 혼란이 온다

왜냐하면 무장사란 어원이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투구와 병기를 이 곳에 묻었고 이 절을 창건하는데 큰 힘이되었다고 문화재청 자료에 나와있다.

문무왕시대는 30대문무왕(661~681)시기이다.  무장사창건 시기는 원성왕(38대 785년
~798년)의 부친 효양이 그 숙부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고 한다.

원성왕의 아들 소성왕(39대)의 왕비가 조상한 아미타불상 조상비와 귀부가 현재 발견되어 원성왕의 창건설에 무게를 보태게 된다.

무장사지란 어원에서 문무왕시대에 창건설에 대한 오해 소지가 짙고 일부 사람들은 문무왕시대를 연상하는 편이 많았지만, 다시 정리해 보면 무장사 창건이 있기전에 이 곳에 문무왕이 투구와 병기를 묻었고 100여년 후 원성왕 시대 이 곳에다 문무왕의 평화 정신을 기리며 무장사라 명명하였다고 정리하면 된다. 

년대상으로 정리해 본 필자의 견해이다. 이런 것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무장사 창건에 문무왕과 원성왕 시대의 혼란이 머리 속에 정리되지 않을 것 같다.

경주에 남아있는 4기의 쌍귀부및 원성왕과 쌍귀부

경주에는 쌍귀부가 4기가 남아있다. 남산가는 길 창림사의 쌍귀부, 무장사지의 쌍귀부, 포항 법수면 진평왕의 원찰 법수사의 쌍귀부,

괘능에 묻혀있는 원성왕(김경신)의 원찰인 숭복사지 있었던 귀부, 현재 국립경주 박물관 뜰안에 자리하고 있다.

무장사지의 쌍귀부도 원성왕의 아들 소성왕시대에 조성되어, 경주박물관 뜰안에 있는 귀부와는 거의 동시대의 귀부로서 원형 복원에 활용될 수 있다.

원성왕 때 무장사가 창건되었다. 원성왕은 어떤 왕이었나, 내물왕(17대)의 12대손으로 이름은 김경신이다. 36대 혜공왕을 죽이고 상대등으로 올라 결국 왕이된다. 쿠테타에 의한 정권 획득이다. 죽은 후에 외동읍 괘릉에 묻힌다.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 42대 흥덕왕릉과 릉형태와 소구드 무인상과 문인상이 비슷한 점이 다른 능과 차별점이다.(글돋선생)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외동읍)에 있었던 쌍귀부-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뜨락에 있음/09.1.15 촬영>-귀두는 용두로 변해있다>

 

‘무장사아미타조상사적비’ 쌍귀부와 이수

 

 

 신라 제 39대 소성왕(재위 799∼800)의 왕비인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만들면서 그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비이다. 1915년 주변에서 발견된 세 조각의 비석 파편에 새겨진 글을 통해 ‘무장사아미타조상사적비’임이 밝혀져 이곳에 무장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장사는 신라 제 38대 원성왕의 부친인 효양이 그의 숙부를 추모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비는 전체적으로 파손되어 비몸돌은 다른 곳에 보관되어 있고, 현재 절터에는 부서진 비받침과 비의 머릿돌만이 떨어진 채로 남아 있다. 비받침은 얼굴형상을 알 수 없으나 2좌로 구성된 점이 특이하다. 등 중앙에 마련된 잘려진 비좌(碑座)는 비몸을 직접 끼워두는 곳으로 사각형이며, 네 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잘려진 머릿돌에는 용이 구름속에서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는 조각이 있고, 왼쪽 면에는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의 조사기가 별도로 기록되어 있다. 이 석비는 통일신라 전기에 만들어진 경주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를 제외하고 그 이후 머릿돌이 남아 있는 예가 드문 상황에서 당시 머릿돌의 변화과정을 살필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문화재청 자료실)

<중앙에 마련된 잘려진 비좌(碑座)는 비몸을 직접 끼워두는 곳으로 사각형이며, 네 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

"먼저 돌아간 지아비(소성왕)를 위해 지어미(계화부인)는 여섯 종류의 화려한 옷을 희사하고, 9부에 저장했던 재물을 다 내어 명장(名匠)에게 아미타불을 모시도록 했습니다.장엄하고 아름다웠을 불상과 지아비를 향한 애틋한 사연이 담겼을 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비를 받치고 섰던 귀부와 이수만이 옛터에 덩그마니 놓여 있습니다.세월의 흐름은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마저도 역사의 뒤안길로 돌려놓는가 봅니다. 찾는 이 드믄 무장사지에 서면 그래서 더욱,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스님의 블로그 자료)

 

무장사지 삼층석탑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병기와 투구를 매장한 곳이라는 뜻으로 ‘무장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즉 병기가 필요없는 평화스러운 시대를 열겠다는 문무왕의 결연한 의지가 이 절을 창건하는데 큰 힘이 되었고, 또한 절 안에 3층석탑을 세우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양식이다. 아래층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 2개를 새겼고, 윗층 기단은 동그란 안상(眼象)을 각 면에 2개씩 조각하였다. 탑의 중심부분인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1층 몸돌은 조금 높은 편이다.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층마다 기둥 모양이 조각되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각 층의 지붕돌은 크기의 줄어든 정도가 적당하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5단이며,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양 끝에서 부드럽게 살짝 들려있다. 1층 몸돌이 조금 높지만 간략화가 심하지 않고, 기단부에 새겨둔 안상은 양식상 시대가 내려옴을 의미하므로 9세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 무너진 채 깨어져 있었던 것을 1963년 일부를 보충하여 다시 세웠다. (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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