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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정의 문학사회학적 연구
승인 2008.03.17 22:43:09
임형/ 문학평론가
출처: http://www.namdou.com/%B5%BF%B9%E9%C1%A4%C0%C7%20%B9%AE%C7%D0%BB%E7%C8%B8%C7%D0%C0%FB%20%BF%AC%B1%B8.htm
<목 차>
Ⅰ. 서론
Ⅱ. 부산면 지역의 사회문화적 특징
Ⅲ. 부산면 지역의 누정과 시회 양상
1. 누정의 현황
2. 시회의 현황과 시회 활동 양상
가. 난정회(蘭亭會)
나. 풍영계(風詠契)
다. 상영계(觴詠契)
라. 정사계(亭 契)
Ⅳ. 동백정의 문학과 시회 활동
1. 동백정의 문학 활동
가. 활동 문인
나. 기문(記文)과 시문(詩文)
다. 시문집
2. 동백정의 시회 활동
가. 동백정에서의 시회 양상
나. 동백정에서의 시작(詩作) 활동
다. 지역 시회에서 동백정의 역할
Ⅴ. 동백정의 문학사회학적 기능과 의의
1. 동백정의 문학사회학적 기능
2. 동백정의 문학사회학적 의의
Ⅵ. 결론
〔참고 문헌〕
Ⅰ. 서론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일어나는 감흥을 노래나 시로 표현했다. 한자로 문자생활을 했던 선비들은 한시의 형태로 각자가 자기의 뜻을 드러내어 흥취를 달래기도 했다. 경치를 완상하기 위한 모임이나 연회에서 돌려가며 한시를 짓던 모임은 시회(詩會), 또는 시계(詩契), 시사(詩社)라고 하였다.
선비들이 시회를 가졌던 대표적인 곳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서당이나 학당을 비롯하여, 향교, 서원, 성균관, 독서당 등 교육의 전당이요, 또 하나는 산수나 누정 등 자연의 승지이다. 전자는 독서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이러한 데의 참여로 시우로서의 인연이 맺어지고 그들과 시적 교우의 정의가 깊어져서 시회로서 서로의 정분을 두텁게 하던 것은 이미 고려 때부터 있었던 일이다. 후자는 흔히 유람취승(遊覽取勝)이나 은일한거(隱逸閑居)하고자 하여 찾았던 곳이다. 시회는 계회의 조직을 통해 모이는 예가 많았다. 주로 사대부 문인들의 참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를 문인계회(文人契會)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구로회(九老會), 금란사(金蘭社), 옥계시사(玉溪詩社) 등에 이어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가 등장하여 모든 시사의 흐름을 통합하기도 했는데, 1793년에 한양에서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시회(蘭亭詩會)를 기념하여 연 시회는 유명하다. 그 후로도 1870년대 변진환의 해당루(海棠樓)에서 창립이 된 육교시사(六橋詩社)나 1853년 최경흠(崔景欽)과 유재건(劉在建)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직하시사(稷下詩社) 등이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서울에서는 우이시회(牛耳詩會)나 난사시회(蘭社詩會) 등이 있어서 작시를 하고 있기도 하다.
경상북도 안동 하회에서도 매년 음력 7월 백중 무렵이면 부용대 밑을 흐르는 강 위에서 불꽃놀이를 하며 선유시회(船遊詩會)를 가지기도 했다.
누정에서 시사의 결성은 호남 지역은 16세기에도 있었다. 나주 금사정(錦沙亭)의 십일계회(十一契會), 창주정(滄洲亭)의 진솔회(眞率會), 담양 지정(池亭)의 백발회(白髮會) 등이 호남 누정 시단의 발전에 기여한 주요 시사로 주목된다. 시사는 근대 후기 내지는 20세기초에 이르러 한층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전남지역에서는 지리산을 끼고 있는 구례지역이 가장 활발하다. 매월음사(梅月吟社)나 용호정시계(龍湖亭詩契), 운흥정시사(雲興亭詩社), 방호시사(方壺詩社), 반천시사(蟠川詩社) 등이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목포에는 유선시사(儒仙詩社), 목포시사(木浦詩社) 등이 있는데 목포시사는 최근까지 춘추 200여 회의 시회를 가져왔다. 또한 광산에 있었던 만귀정시사(晩歸亭詩社)나 광주의 해양시사(海陽詩社)도 들 수 있다.
장흥지역 또한 탐진강변의 여러 누정을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의 시회가 존재했었다. 시계(詩契)를 조직하여 매년 정해진 날에 모여 시를 지으며 밤을 새기도 했다. 1853년에 창립된 난정회(蘭亭會)를 비롯하여 1924년에 조직이 된 풍영계(風詠契)와 1962년에 조직된 정사계(亭 契), 그리고 창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상영계(觴詠契) 등 다양한 시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학세대의 퇴조로 작시모임이 친목모임으로 변질은 되었지만, 이 중에 풍영계나 정사계는 최근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1580년대에 중건된 장흥 동백정(冬柏亭)을 중심으로 한 문학활동과 탐진강변 정자들, 예컨대 용호정(龍湖亭), 경호정(鏡湖亭), 독우재(篤友齋), 부춘정(富春亭), 농월정(弄月亭), 서륜당(敍倫堂) 등과 관련하여 이루어졌던 시회의 조직과 운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아보겠다.
동백정을 거쳐간 많은 문인들과 그들이 왜 동백정에 머물며 문학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 그들이 남긴 시문과 기문을 분석해 보고, 또한 동백정과 그 주변의 정자들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의 교유 양상과 시회의 운영에 관해서도 문학사회학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시회의 양상에 대해 자세히 궁구해 보기는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그리하여 남아 있는 동백정의 누정제영과 시회에서 생산되었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으로 범위를 한정하고, 시회는 창립 취지와 회원, 수계일과 장소를 중심으로 알아보되 남아 있는 시축을 중심으로 시회에서 생산되었던 작품 등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겠다.
전남 지역의 가단이나 누정, 누정제영에 관한 연구는 정익섭, 박준규 등의 업적이 남아 있으며,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에서는 1985년부터 91년까지 7년여에 걸쳐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하여 천착한 바가 있다. 그 결과물이 {호남문화연구}14집부터 20집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시회나 시사에 관한 선행연구로는 강명관의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 등에 이어 그 외의 연구 논문들이 있다.
Ⅱ. 부산면 지역의 사회문화적 특징
부산면(夫山面)은 전라남도 장흥군의 중심부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장흥군 3읍 7면 중 하나로 동쪽으로는 장동면, 남은 장흥읍, 서는 유치면, 북으로는 유치면과 장평면에 닿아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수령현(遂寧縣)의 일부에 속했고 1414년(조선 태종14년) 현재의 부산면에 속한 용반, 지천, 금자, 호계리가 용계면(龍溪面) 관할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계면의 호계(虎溪), 효자(孝子), 금장(金莊), 관한( 閑), 성자(成子), 홍단(洪丹), 용동(龍東), 용서(龍西), 심천(深川), 유정(柳亭), 지동(枝洞)의 11개 동리와 부동면(府東面)의 행내리(杏內里) 일부를 병합하여 부산면을 이루었다. 지금은 내안, 구룡, 유량, 지천, 용반, 금자, 호계, 기동, 부춘의 9개 법정리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용호정이나 독우재 등의 누정이 있는 용반이나 금자, 또는 호계가 한 때는 부산면이 아닌 용계면이라는 다른 행정 구역으로 되어 있었다가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부산면으로 재조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호계마을과 호계천이라는 냇가를 사이에 두고 있는 동백정만큼은 인근의 장동면에 편입됨으로써 면의 소재가 달라지게 된 것이다. 동백정은 소유권이나 생활권이 모두 호계리의 청주김씨 문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면의 북쪽에는 용두산(龍頭山)이 있고 전남의 3대 하천 중 하나인 탐진강(耽津江)이 영암군 금정면의 국사봉에서 발원하여 면의 중심부를 흐르고 있다. 탐진강은 유치면, 부산면, 장흥읍에 이르기까지 대소 20개 하천이 합류되어 사인암(舍人巖)에 이르러 영암군 월출산에서 발원한 금강천과 합류하여 강진만으로 흐르는 총연장 56㎞의 강줄기이다. 이를 일명 예양강(汭陽江)이라고도 하는데 강유역에는 용반들, 부산들 등의 비옥한 평야가 전개되어 있어 농산물이 비교적 풍부하다. 최근에는 부산면 지천리와 유치면 일대에 탐진댐이 축조되어 전남 서남부 지역의 식수원으로 사용할 예정으로 저수를 하고 있다.
부산면에는 자작일촌의 동족마을이 많다. 용반리의 낭주최씨(朗州崔氏), 용반리, 금자리의 인천이씨(仁川李氏), 기동리의 장흥위씨(長興魏氏), 호계리의 청주김씨(淸州金氏), 유양리 용동의 진주강씨(晋州姜氏), 내안리와 구룡리의 영광김씨(靈光金氏), 내안리, 구룡리, 부춘리의 청풍김씨(淸風金氏), 구룡리의 강릉유씨(江陵劉氏) 등이다. 이들 성씨는 대부분 각자 자기의 누정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마을의 조성은 용반리가 고려시대에 성촌이 되었고 대부분은 조선초나 중엽에 성촌이 되어 동족마을을 형성한 듯하다.
이 지역은 역사의 소용돌이 때마다 그 격랑의 한 복판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이 나와 의병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도 전남 지역의 동학의 포접(包接) 61개 중 부산면에 용반접과 부산접이 있어서 이방언(李邦彦) 접주가 거느린 장흥 지방 동학군은 부산접, 용반접을 중심으로 관군과 맞서기도 했다. 부산면 금자리에서 출토된 동학농민전쟁 당시에 사용했던 대포가 이를 증명한다.
예술은 작자를 둘러싼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어떤 작가의 작품이든 그 작품의 밑바탕에는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환경과 조건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작품의 사상이나 정조, 표현 형식 등도 예외는 아니다. 백옥과 같이 오염되지 않은 탐진강 물줄기가 구비구비 흘러가며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을 만나 빚어내는 절경은 저절로 시심을 일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한 절경 속에 선인들은 누정을 앉히고, 그 곳에서 풍류를 즐기며 시국을 논했을 것이다. 탐진강을 따라 펼쳐진 10여 개의 누정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머무르게 한다. 유치면을 거쳐 부산면의 중심을 흐르며 부산들을 적시는 탐진강은 빼어난 산수와 기름진 평야를 제공함으로써 이 곳에 터전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순후한 인심을 갖고 의리와 학문에 젖어들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누정을 중심으로 문인들의 시회가 이루어지고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Ⅲ. 부산면 지역의 누정과 시회 양상
1. 누정의 현황
누정(樓亭)은 누(樓)·정(亭)·당(堂)·정사(精舍)·각(閣)·재(齋)·헌(軒)·암(菴)·대(臺) 등의 이름이 있다. 재·헌·암은 주거 공간에 딸린 닫혀진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수반하며, 대는 건축물보다는 높은 장소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단순히 시문 제작의 측면만을 고려할 때는 누·정·당·정사·각에서의 활동이 재·헌·암·대에서보다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전남에는 광주, 담양을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 많은 누정이 분포되어 있다. 전남의 누정은 1687개소, 장흥의 누정은 현존 29개, 현재는 없는 누정 55개를 합해서 84개이다.
탐진강은 주변의 경치가 수려하여 강변의 풍광이 좋은 곳에는 많은 누정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용호정(龍湖亭), 경호정(鏡湖亭), 부춘정(富春亭), 창랑정(滄浪亭), 독취정(獨醉亭) 등이 주류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류인 호계천변에는 동백정(冬柏亭)이 있고, 강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사인정(舍人亭)이 있다. 영귀정(詠歸亭)은 유치면에 있다가 탐진강댐이 축조되면서 수몰지가 되어 이설했다. 이 외에도 주변에는 시회를 가졌던 여러 곳들이 있다. 독우재(篤友齋), 서륜당(敍倫堂), 농월정(弄月亭), 감모재(感慕齋), 영효재(永孝齋), 서경당(書耕堂), 영모재(永慕齋), 구음재(龜陰齋), 구양재(龜陽齋), 경모재(敬慕齋), 추원재(追遠齋), 승유재(承裕齋), 첨모재(瞻慕齋), 월만재(月滿齋), 덕림재(德林齋), 즉효재(則孝齋), 반룡재(盤龍齋), 죽림재(竹林齋) 등 이루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편이다. 또한 장흥읍 남산공원에는 영회당(永懷堂)과 최근에 건립된 흥덕정(興德亭)과 수녕정(遂寧亭)이 탐진강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호계마을 뒷산에 있던 병간정(屛澗亭)은 얼마 전에 소실되어 버린 정자이지만 풍영계의 수계장소나 후학 양성의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이 중에서 부산면 지역이나 그에 인접한 지역의 누정은 문중의 소유로 자손들이 관리를 하고 있으며 정자별로 돌아가면서 시회를 가졌던 유풍은 지금도 여전하다.
2. 시회의 현황과 시회 활동 양상
탐진강을 끼고 많은 누정이 들어서 있는 장흥군 부산면 일대는 일찍이 시인묵객들이 자주 찾아 그들의 시심을 불태웠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문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서 그들은 일정한 날에 정해진 누정에 모여 음풍농월하며 자연을 완상하고 시대를 한탄하는 시회로 발전시켜 나갔다. 조선시대 말에는 금장산가단(金莊山歌壇)이 형성되어 그 중심에 가사 [장한가(長恨歌)]를 지은 우곡 이중전(愚谷 李中銓, 1825∼1893)이 있기도 하였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시회는 1853년에 조직된 난정회(蘭亭會)를 비롯하여 풍영계(風詠契)나 상영계(觴詠契), 정사계(亭 契) 등의 활동을 들 수 있다. 부산면 지역에서는 팔정회(八亭會)나 향사회(鄕社會)와 더불어 낙양회(洛陽會), 죽계회(竹溪會) 등의 이름도 나오나 이 지역에 실재로 존재한 시회였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20세기를 전후하여 금계 이수하의 뒤를 이은 금강 백영윤, 소천 이인근, 만천 김진규 등이 이 지역 출신으로 지역의 문풍을 크게 진작시켰으며, 효당 김문옥은 1940년대 잠깐 이 곳에 머물면서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면 이러한 문인과 제자들이 참여한 다수의 시회들이 운영되었던 듯하다.
가. 난정회(蘭亭會)
난정회는 독우재주인 미천 이권전의 {독우재집유고(篤友齋集遺稿)}에 기록이 보인다. 이를 보면 난정회는 해마다 봄을 맞이하여 경치가 좋은 곳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짓는 모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진의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지회(蘭亭之會)'를 본받아서 '비록 문장은 왕희지보다 못하지만 경치를 즐기는 것은 같을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난정회'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왕희지의 중국 회계산 난정에서의 모임이 계축년 봄이었음을 강조하면서, 같은 간지인 계축년(1853년)에 20여인이 모여서 난정회를 창립한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끝 부분에는 7언율시가 실려있는데 진나라의 왕희지를 흠모하며 뜻깊은 시계를 시작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며 즐거워하고 있다.
蘭亭會記
夫會有慕古者多宋富鄭公慕樂天九老之會爲耆英會我東蘇應天慕東坡七月之遊爲赤壁遊今古以來慕古而遊不亦樂乎王逸少蘭亭之會眞古今之勝事也於玆嘗竊有恨不同時之歎矣幸癸丑之暮春適丁今年雖地非山陰年維癸丑則今之遊其猶古之遊乎是月也暮者春服旣成同我人士二十餘輩 往觀乎至其遊也列坐其次者少長也群賢也皆不知其何者爲主何者爲賓也脩 其事者風乎也浴乎也盖取諸其淸斯濯纓斯濯足矣茂林脩竹不下於古地之勝 絲竹管絃亦無具于今夕之嘉會然而暢敍之情足爲一觴一 感慨之志奚係視今視昔吾 雖有愧於逸少之文章而無愧於逸少之勝遊則同年暮春之樂亦一異代蘭亭之會也逸少之陳迹輝映會稽之山水而照人耳目赫赫若前日事今人傳繼豈不同美哉故詠而歸 其事焉末賦四韻
난정회기
모임에 옛사람을 사모함이 많으니 송나라 부정공은 백락천의 구로회를 사모하여 기영회를 만들었고, 우리나라 소응천은 소동파의 칠월에 놀던 것을 사모하여 적벽유를 만들었으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옛사람을 사모하여 노는 것이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왕일소의 난정회는 참으로 고금에 훌륭한 일이라. 항상 동시대에 함께하지 못함을 탄식하였더니 다행스럽게도 왕일소가 놀았던 계축년 모춘이 마침 금년에 해당되니 땅은 비록 산음이 아니지만 해는 계축년이니 오늘의 놀음이 그 옛날의 놀음과 같지 않겠는가.
이 달 그믐에 봄옷이 완성되면 우리 이십여 인사는 어찌 가서 놀지 아니하랴. 그 자리에 차례로 앉아 있는 이는 젊은이와 늙은이며 여러 현인들이라. 모두 그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며 그 모임을 하는 목적은 바람을 쐬고 목욕을 하는 일이라. 아마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뜻을 취함이리라. 우거진 숲과 긴대가 옛 땅의 경치만 못하지 않고, 거문고 피리 등 여러 악기들이 오늘저녁 모임에 갖추어지지는 못하였지만, 그러나 회포를 풀면서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으니 그 감격스런 뜻이 지금 사람들이 옛 사람들을 보듯이 하고, 또 후세 사람들이 지금 우리들을 보듯이 하지 않겠는가.
우리들이 왕일소의 문장에는 부끄러움이 있으나 왕일소의 흥취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니 금년 늦봄의 즐거움은 또한 그때의 난정회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왕일소의 옛 자취가 회계산수에 남아 있어 사람들의 이목에 비친 것이 꼭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니 지금 사람들이 그것을 이어가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읊으면서 돌아와 그 일을 서술하며 사운일수를 짓는다.
佳辰適値永和春 아름다운 때가 마침 영화춘을 당하였으니
吾輩風流慕晋人 우리들의 풍류는 진나라 사람들을 사모하네.
芍藥謠傳遺俗舊 작약노래 전해오니 남겨진 풍속이 예스럽고
芳蘭會續此遊新 꽃다운 난정회 이어가니 이 놀음이 새롭구나.
餠生香氣詩成韻 떡에서는 향기가 나고 시는 운치를 이루며
觴引淸波酒到巡 술잔에 맑은술 따르니 잔은 돌고 도네.
是日登山脩 樂 이날 산에 올라 계를 치르는 즐거움을
願將歌鼓奏頻頻 원컨대 가고를 가져다 오래도록 울리고 싶네.
이 시회는 1853년에 창계한 이듬해인 갑인년(1854년) 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는데 이권전의 시 [속난정회]에 잘 나타나 있다. 계축년에 이어서 열린 난정회에서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회원들이 정자에 빙 둘러앉아서 취흥에 겨워 시작을 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續蘭亭會(甲寅暮春)
歌鼓紛紛永夕同 노래소리 어울린 속에 저녁까지 함께 하니
去年餘會又春風 지난해 남은 여흥이 춘풍을 맞아 다시 살아나네.
初逅樽酒傾 綠 처음 술잔을 돌리니 푸르름은 기울고
滿地花枝剪綵紅 천지 가득 꽃가지는 붉은 비단을 재단해 놓은 듯.
衣袖聯携華席上 옷소매 이어대고 앉으니 자리는 더욱 빛나고
江山倒入畵屛中 강산은 그림병풍 속으로 들어오는 듯하네.
逢今不樂何時樂 이 좋은 시절이 아니라면 어느 때 즐길 것인가
半是松陰到老翁 소나무 그늘은 절반쯤 이 늙은이를 덮고 있네.
1847년에 독우재를 창건하고 나서 미천은 이 곳에서 당시의 문우들과 자주 어울렸다. 아마도 이 난정회는 독우재에서 창립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그 당시 각 문중 소유의 누정을 돌아가며 시회를 가졌던 것으로 보아, 이 시도 독우재나 1828년에 창건한 용호정, 남평문씨의 소유에서 1838년에 청풍김씨의 소유로 넘어간 부춘정 등에서의 시회 중 하나를 그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폐허 상태로 있다가 1872년에야 중건한 동백정은 난정회 창계 당시에는 이용할 수 없는 누정이어서 동백정에서의 시회는 아니라고 보겠다. 시축(詩軸)이나 그 외의 또 다른 시는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언제까지 이 시회가 이어지고 어느 곳에서 누가 참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는 상태이다.
나. 풍영계(風詠契)
풍영계는 1924년 5월 3일 영모재(永慕齋)에서 창립했다. 풍영계안이 남아 있고 지금도 계속 모임은 이루어지고 있다. 창립계원은 모두 15명으로 문낙중(文洛中, 字 道均, 1877년생), 최창희(崔昌熙, 字 鳳集, 1878년생), 최동민(崔東珉, 字 民玉, 1878년생), 김장수(金章洙, 字 章煥, 1879년생), 이행근(李行根, 字 春大, 1879년생), 김석권(金錫權, 字 順度, 1880년생), 임종래(林鍾來, 字 馨振, 1880년생), 강신황(姜信晃, 字 德五, 1881년생), 김병흡(金炳翕, 字 亨彬, 1881년생), 이정권(李正權, 字 允中, 1882년생), 이인근(李寅根, 字 景祉, 1883년생), 백영윤(白永允, 字 重彦, 1884년생), 김태식(金邰植, 字 敬章, 1887년생), 김용규(金容圭, 字 德三, 1886년생), 임승현(任承鉉, 字 奉禹, 1891년생)이 참가했다.
풍영계는 매년 돌아가며 유사를 맡은 이의 누정에서 수계(修契)를 했는데 날을 새워가며 시회를 가졌다. 강신일은 3월 그믐날이며 계안에는 다음과 같은 풍영계 조례가 있다.
조례(條例)
1. 각원은 돈 5냥씩을 수합해서 계를 치른다.
2. 강신일은 매년 3월 그믐으로 한다.
3. 창립회원 외에는 회원을 받지 않는다.
4. 해당유사는 10여일 전에 회의 장소와 회비 납부록을 회원들에게 통지한다.
1925(乙丑)년에 문락중이 유사를 하여 서경당에서 최초로 모임을 가졌고, 다음 해에는 독우재에서 유사를 맡았으며 그 다음해인 정묘년에는 동백정에서 맡았다. 풍영계 장소로 주로 이용되었던 곳은 동백정이나 독우재 등이었다.
풍영계의 시축은 남아 있지 않으나 소천 이인근의 {소천유고}에는 1925년 서경당 풍영계부터 1947년 구음재 풍영계까지 그가 지은 13편의 시가 실려 있으며, 만천 김진규의 {만천시고}에도 1934년 그가 풍영계에 참여하여 지은 7언율시 한 수가 실려 있다. 이전에도 때때로 만나 시를 읊던 사람들이 비로소 특정한 날을 잡아 유사를 치르며 계금을 걷어 공식적으로 풍영계란 조직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도 계속해서 수계는 하고 있지만 시를 지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사회는 갖지 않고 있다.
계답으로는 1931년에 금자리 66번지 논 1두락과 기동리 밭 8두락, 호계리 논 5승락이 있었으나 지금은 기동리와 호계리 것만 남아 있다. 현 회원은 16명으로 후손들이 대를 이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3대째 내려오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