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3일 성탄절 후 아홉째 주일예배
성경: 빌3:17-4:1절(신322)
제목: 복음적 생활(삶)의 본 (나경수 목사)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천국의 왕)에게 속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과 다른 생활의 본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성도(거룩한 자)’입니다. 1:27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천국)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여기서 ‘생활하라(폴리튜에스데)’는 문자적으로 ‘시민답게 살아라’의 의미로서 여기서는 ‘하늘의 시민답게 살아라’입니다(20). 하늘의 시민답게 사는 기준(본, 패턴)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또한, “너희 안에 이 마음(이것)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것)이니”(2:5) 그의 권면에 역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2:6-8)과 ‘높아지심’(2:9-11),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범(본)으로 제시됩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도 그의 간증(4-16)에 근거한 그의 권면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복음의 기준(본)에 따라 살 것을 권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권면은 두 개의 이유(18-21)와 같은 의미의 부사인 ‘그와 같이(후토)’(17)와 ‘이와 같이(후토스)’(4:1)의 수미쌍관법(inclusio)을 통하여 강조되고 있습니다.
1. 바울과 같은 복음적 생활(삶)을 본받으라는 권면입니다(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여기 ‘형제들아’는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즉 동일한 영적 가족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호칭입니다.
먼저,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권면합니다. 여기서 ‘나’는 간증(3:4-16)의 바울을 가리키며, ‘함께’는 모두 다 그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본을 소유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권면합니다. 여기서 ‘본(튀포스)’은 본래 ‘타격으로 생긴 자국’으로 여기서는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국인 본(패턴)’을 의미합니다.
특히 바울은 ‘우리’를 사용하여 그들의 본이 되는 사람들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신을 제시하면서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권면합니다. 여기서 ‘그와 같이(후토이)’는 ‘너희가(빌립보 교인) 우리를 본으로 소유하는 것처럼’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나(바울)의 본, 우리의 본, 빌립보 교인들의 본, 그리고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의 본’은 그의 간증(3:4-16)의 바울, 즉 ‘복음적 생활(삶)’입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무슨 의미일까요? 아마 그들을 눈여겨보아 그들에게서 복음의 진리의 증거, 즉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복음의 자국(본)을 찾아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고후4:7-12).
2. 복음적 생활(삶)의 본으로 살아야 할 부정적인 이유입니다(18-19).
먼저 18절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함께 다 자신(우리)을 본받고 그들과 같이 행하는 자들을 주시하라(17)는 이유는 그의 거듭된 눈물의 권면 또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다른 방법으로 행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18). “왜냐하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원수로 행하기 때문이니라.”
바울은 관계대명사의 종속절(19)을 사용하여 ‘십자가의 그 원수들’을 수식합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먼저, 십자가의 그 원수들의 ‘마침(궁극적인 최후)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이는 그들의 구원의 유일한 수단인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구원을 거부하는 것인 영원한 멸망입니다.
이제 그들의 특징은 ‘그들의 신(하나님)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일까요? 언뜻 보면, ‘배(코이리아)’와 ‘부끄러움(아이스쿠네)’라는 단어들은 그들이 육욕적인 만족과 부끄러운 성적인 죄들을 즐기는 무 율법주의자(방종한 자)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자랑하는 손 할례당’(2-3)을 배경으로 한 바울의 간증(3:4-16)에 근거하여 ‘그(우리)를 본받으라’(17)는 권면의 이유로 18-19절이 제시되었다면, 무율법주의자들로 해석하는 것은 문맥상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의 신은 배요’는 사람이 음식으로 그의 배를 신과 같이 헌신적으로 섬기는 것과 같이 음식에 관한 유대 율법을 신과 같이 헌신적으로 섬기는 자, 율법주의자들을 의미합니다(롬16:18). 즉 음식에 관한 율법에 대한 준수가 그들의 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는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신체 부위를 절단하는 할례에 대한 조소적인 언급입니다. 갈6:12-13절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이처럼 그들은 음식에 대한 율법의 준수를 그들의 신으로 삼았고, 그들의 할례를 그들의 영광, 즉 자랑으로 삼았던 율법주의자들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원수들’입니다.
그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들의 열성적인 종교와 의식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버리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의 역사가 있을 수 없기에 오직 그들의 행위 중심의 종교만 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 당시(고후2:17)나 현재에도 십자가의 원수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이것이 이상하게도 교리와 의식에 열정적인 사람들에게 나타날 가능성이 크기에 매우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3. 복음적 생활(삶)의 본으로 살아야 할 긍정적인 이유입니다(20-21).
20절입니다. “그러나(왜냐하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원문에는 이유의 접속사 ‘가르(왜냐하면)’가 있는데, 앞절의 내용과 자연스럽지 못하다 하여 ‘그러나’로 번역하였으나 20절이 17절의 권면의 이유로 이해한다면, ‘가르(왜냐하면)’가 자연스럽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시민권(나라)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20a).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여행자)이지만, 우리는 하늘나라(천국)의 시민권자답게 천국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여야 합니다(1:27).
둘째로 하늘로부터 구원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20b).
우리는 천국 복음으로 이미 구원받아 하늘의 시민권을 소유하였지만, 21절의 말씀대로 완전한 영화의 구원(롬8:31), 즉 ‘우리의 낮은 몸을 그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21) ‘구원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기 때문에 그들과 다르게 천국 복음의 본(주님과 연합의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도 바울은 관계대명사 종속절(21)을 사용하여,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는 하늘로부터 오실 ‘구원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합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여기서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는 십자가와 부활(승천)을 통하여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2:6-11), ‘역사(에네르게이안)’는 권능, 즉 그의 초자연적 능력을 의미하며, ‘우리의 낮은 몸’은 재림 전의 우리가 타락, 연약함, 고통, 슬픔, 부패함, 죽음의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2:6-8)과 높아지심(2:9-11), 즉 그의 복음의 패턴입니다(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기서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도 그의 복음의 패턴, 즉 그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을 현재 우리 고난을 통하여 경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고후4:10-11절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4. 오늘 본문의 결론적인 권면입니다(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이것은 17-21절에 근거한(그러므로) 권면입니다.
먼저 바울은 17절의 ‘형제들아’의 호칭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의 호칭으로 더욱 확대하여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친밀함, 영적 가족의 하나 됨(교제, 코이노이아)을 더욱 강조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로 호칭합니다. 여기서 ‘사랑하고(아가페토이)’는 ‘사랑받는’이라는 수동적인 의미의 형용사로서 그들이 바울에게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를 보여주며, ‘사모하는(에피포데토이)’도 수동적인 의미의 형용사로서 그들이 바울에게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모 받은 대상’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의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이 바울에게 사랑받고 사모 받은 대상일까요? 그들이 주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사모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그들을 사역의 열매인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받는) 자들’로 호칭합니다. 왜 그들이 바울에게 그의 기쁨으로 면류관으로 사랑받은 대상일까요? 주 안에서 주님의 기쁨과 면류관으로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권면합니다. 여기서 ‘이와 같이(후토스)’는 ‘그와 같이(후토)’(17)와 같은 부사이기에 ‘주 안에 서라’는 ‘나를 함께 본받으라’(17)와 같은 의미의 권면입니다. 즉 주 안에서 복음적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의 간증(3:4-16)의 바울, 즉 복음적 생활의 본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배웠습니다.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를 아는 오직 한 가지 일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머리로만 아니라 그의 고난들을 본받아 그의 부활의 권능을 충만하게 경험하시는 복음적 생활의 본(패턴)을 세상에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