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_전명길
개화
시린 손끝에 온기가 돈다
굳어 있던 근육이 풀리고
닫혀 있던 모공이 햇살을 들인다
깊은 곳에서
봄의 기운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창문을 스치는 바람의 실루엣
뽀얀 봄 햇살이 도톰한 밭이랑에
고요히 내려앉는다
물오른 장딴지와 허벅지에
힘이 솟아오른다
팽팽한 가지 끝이 긴장한다
울음이 터질 듯한 꽃망울이
숨을 삼키며 부풀어 오른다
툭, 툭 소리를 내며
빛과 숨결이 허공에 쏟아진다
폭죽이 터지듯 꽃망울이 흩어진다
빛의 조각이 탄환처럼 퍼져 나간다
허공은
봄의 숨결로 가득하다
꽃밭에서
꽃이 진 자리에
햇살이 스며든다
건조한 바람이 지나간다
시간이 멈춰 있다
스러져가는 이 생명은
언젠가 다시 올
완전한 모습을 그린다
바람은 눕고
햇살은 잠든다
뭉개져 누운 꽃잎,
밟힌 흔적 위에
애처로운 시간이 내려앉고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내 다시 돌아올 때
붉은 꽃잎을 보고 싶다
나는 떠난다
희망과 그리움을
한 줌 향기로 남기고
입추
따가운 햇살이
수수밭 사잇길로 접어들면
아침과 저녁
무게를 달리하는 8월의 들녘
바람을 가르는
투명한 잠자리의 날갯짓
노을이 물든 서쪽 하늘은
고단한 하루를 내려놓는다
열대야에 지친 밤은
깊어가고
여름의 끝자락 한 줄기
바람은 말없이 가을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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