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28-36 기도산이 변화산이다
예수님이 높은 산에 올라가셨는데, 변형되셨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종합해서 설명하자면, 용모가 변화되었는데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다(마 17:2, 막 9:3, 눅 9:29).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했다(30,31). 이렇게 예수님이 변화되었다고 하여 우리는 그 산을 “변화산”이라고 부른다, 이름대로 누구나 그 산에 올라가면 예수님처럼 변형될 수 있는가? 세상에 그런 산은 없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변화되셨을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선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는다. 왜 산에 오르셨는지 그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화려하게 변신하기 위해 산에 오르신 것인가? 아니다. 이런 모든 의문점을 풀어주는 성경이 있다. 어디인가? 누가복음 9장 오늘 본문이다. 예수님이 높은 산에 오르신 이유는 기도하기 위함이었고, 영광스럽게 변화된 이유 또한 다름 아닌 기도 때문이었다.
기도 중에 예수님이 영화롭게 변화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할 때 얻게 될 영광을 미리 체험한 것이다. 우리도 기도하면 예수님과 동일한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가? 없다. 예수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기도하면 우리의 영혼에 변화가 일어난다. 기도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변화들이 기도 중에 일어난다. 하나님과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을 볼 수 있는 자기 객관화가 일어난다.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던 것들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고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기도 중에 시시콜콜 자신의 크고 작은 죄를 회개하고, 징계를 달게 받겠다는 겸손을 보인다. 죄에 대한 혐오는 현실로 이어져 죄를 없애는 데까지 이른다. 생각이 말씀 쪽으로 변화되고, 마음[기분/감정]이 성령의 열매로 변화된다.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을 닮아간다(벧후 1:4). 성숙과 성화가 일어난다. 이런 일들이 기도 중에 일어난다.
기도 중에 구약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장차 무엇을 해야 하는지 즉 예루살렘에서 별세할 것을 말해 주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기도하실 때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이와 비슷한 메시지를 들은 바 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3:22)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의 죄를 위해 죽을 그 메시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다름 아닌 기도할 때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임을 구체적으로 들었다.
이렇듯 우리도 기도하면 성령과 말씀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사명을 알게 해준다. 즉시 알려주기도 하시지만 끊임없이 계속 기도할 때 알려주신다. 기도가 반복될수록 더욱 선명해지고 구체화 된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기도할 때 성령은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그 말씀을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구체화시켜 주신다. 기도한 후 설교를 들을 때 성령을 통해 감동과 확신이 밀려오고, 그 말씀을 어떻게 어디에 적용할 것인지 쉽게 그림이 그려진다.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질병과 어려움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 기도 중에 성령이 가르쳐 주고, 또는 생각나게 해 주고, 그 질병과 어려움을 놓고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계속 기도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그 질병과 어려움이 사라짐을 경험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기도할 때 생긴 성령의 역사이다. 생명력 있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기도에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이다.
기도 중에 영광스러운 변화 체험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이라는 메시지는 예수님에게 엄청난 동기부여가 되었다. 지금까지 메시아의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한 뿌듯함과 동시에 앞으로 걸어갈 십자가의 사명을 더욱 담대히 감당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기도를 통해 변화를 구체적으로 또한 자주 체험하게 되면, 기도 중에 말씀이 더 확고하게 믿어지면, 기도 중에 환상을 보면, 고난이 두렵지 않게 된다. 이미 보고 가는 길이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 두렵더라도 알고 가기 때문에 견딜 만하다. 지금까지 믿음으로 살아온 것에 대해 뿌듯함을 느끼게 되고, 앞으로도 더욱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고 싶은 동기부여/원동력이 된다. 기도 중에 나타난 변화와 체험이 이토록 중요하다.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이 죽을 것을 말할 때,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러 왔던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뭐하고 있었는가? 깊이 졸았다. 그러다가 끝물/막판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화와 두 사람을 보게 되었다(32). 졸다가 일어난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는 것이 몹시 아쉬워했던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을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33)라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정작 자신도 몰랐다. 찬란한 상황에 압도되어 황홀한 나머지 본능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하나님의 섭리와 영광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번복시킨 발언이었다. 하나님이 택하신 아들/메시아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에 불과한 모세와 엘리야와 동등한 수준으로 보려고 했다. 베드로는 구약에 머물러 있었다. 현상에 머물러 있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없었고, 그 영광을 이해할 수 없었고, 모세와 엘리야가 왜 예수님께 나타났다가 사라졌는지 그 이유도 몰랐다. 졸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과 다른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엇박자다, 기도하는데도 엇박자를 내는가? 평소 불순종하고 번복했기 때문이다.
그때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다. 순간 무서움이 몰려왔다. 구름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35)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모세를 통해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에게 이미 선포된 말씀이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 구약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이 그 선지자이고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메시아라는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한 시대에 획을 그었던[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인물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종/보조 역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선지자이고 그 선지자로서/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할 것을 말하고 떠나는 존재들이지 아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들이신 예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들을 예수님과 동급으로 여겨 하나님의 뜻을 역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제자들에게 딴소리[초막 짓자]하지 말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신하지 말고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순종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3장에 가면, 즉흥적이고 무능했던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하나님이 신 18:15을 인용하신 그 말씀을 솔로몬 행각에 모인 5천 명에게 선포한다. “모세와 사무엘 이후 모든 선지자들이 외친 그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라고”(행 3:18-24). 완전 딴사람이 되었다. 같은 인물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변했다. 영광스러운 변화산의 모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엉뚱한 말을 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이렇게 성경에 능통한 자가 되었는가? 하나님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는가? 오로지 기도하고 성령이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 졌기 때문이다(행 1-2장). 변화산에선 횡설수설하며 초막 셋을 짖자고 했던 베드로는 성령의 사람이 되자 그 당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정확하게 해석했다. 벧후 1: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기도할 때 졸다가 그 영광을 보았을 땐 상상할 수 없었던 고백이다.
기도할 때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생각, 태도, 기적과 표적, 환상, 예언, 꿈 등 변화를 경험할 때까지 기도에 집중하자. 성령이 역사한 것이다. 그 경험이 여러분을 담대하게 살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졸거나 토를 다는 것은 기도하지 않거나 기도하더라도 어떤 성령의 역사도 없다는 뜻이다. 회개하고 기도 중에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 수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길 축복한다. 고전 2:10-12 ,,,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