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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성령과 지혜로 충만의 달☜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마10:34-42절) 전투적인 하나님의 나라
처음에 남자들이 신병(新兵) 훈련소에 입대하면, 머리를 깎게 되는데, 그때 머리카락 한 줌을 봉투에 넣어 보관하게 합니다. 혹시라도 훈련을 받는 중에 죽어서 시체를 찾지 못하면 그 머리카락을 시체대신 집으로 보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제서야 신병들은 이제부터의 군대 생활이 장난이 아니며,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굳이 군대가 아니더라도 대단히 전투적인 비밀 결사단체의 경우는 신입 회원들에게 죽음을 맹세하게 한 후, 회원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유명한 테러단의 신입 회원이 되려면, 죽음을 맹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테러단이 존재하는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며, 또 잡히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치 이런 테러단의 입단식과 같은 조건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결단코 편안한 삶을 주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오셨으며, 그의 제자들은 이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워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때로는 그들은 가장 가까운 가족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늘 자신의 죽음을 각오한 사람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붙들려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Ⅰ.전투적인 하나님의 나라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종교가 무엇이냐? 고 묻는다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기독교’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평화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가 칼을 휘둘렀을 때, 주님은‘칼을 꽂으라’고 하시면서‘칼을 사용하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매우 무시무시한 말씀을 이렇게 하십니다.
10:34절)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군인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평범한 어부나 농사짓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내가 너희에게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신 것은‘이제부터 너희들은 결코 평안하게 지내려고 해서는 안 되며,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해 오신 것과 너무나도 상반(相反)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보아온 예수님의 모습은 지극히 평화를 사랑하시는 모습이었고, 전쟁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즉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은 처음부터 다릅니다. 즉 무기(武器)를 좋아하고 시간만 나면, 무기 다루는 연습을 하고, 또 자기 주위에 힘세고 싸우기를 잘하는 사람들을 모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기도 없을 뿐더러 그의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도 모두 전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선 검(劍)이라는 것은 반드시 공격용(攻擊用)무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군인이나 경찰이 무장을 하는 것은 공격하겠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방어적(防禦的)인 의미가 강(强)합니다. 즉 누군가가 악(惡)한 동기로 공격을 해오면, 이 무기로 물리치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신 것은 칼로 온 세상을 정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회교(回敎)는 칼로 이 세상을 정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도 칼과 총으로 온 세상을 정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결코 그런 뜻으로 검(劍)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검을 주러 오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되면, 더 이상 주위 사람들과 좋은 관계에서 지낼 수 없기 때문에 갈등과 분쟁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며, 전에 알고 있던 그 어떤 사상과도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사사건건 부딪히는 갈등을 겪게 되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신앙을 공격해서 그로 하여금 그 신앙을 포기하게끔 하는 전쟁(戰爭)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몸에 어떤 새로운 단백질(蛋白質)이나 균(菌)이 들어오면, 우리 몸은 어떻게 반응할까? 몸 전체가 아프고 혈액 안에 있는 백혈구(白血球)수가 많아지면서 그 단백질이나 균과 싸워서 그것을 몸 밖으로 밀어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회나 가족 안에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 그는 그 집단에서 이상한 단백질이나 균처럼 취급되어, 가족전체나 사회전체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면서 그에게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거나 아니면, 그를 그 곳에서 밀어내려고 하는 경향이 생기게 됩니다.
왜냐면 그만큼 하나님을 아는 이 신앙은 독특하면서도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모든 가족들이 열심히 제사를 지내는데, 가족 중 한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그때부터는 제사 제도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에게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게 됩니다.
혹은 모든 친구들이 술로 우의(友誼)를 다지면서 지내는데, 한 친구가 신앙을 가지게 되면, 그들의 우정은 깨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친구에게 신앙을 포기하고 다시 옛날의 관계를 회복하자고 강하게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검(劍)’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나의 신앙을 강요하기 위한 공격용 검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이러한 세상과의 갈등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신앙 때문에 갈등이 일어날 때는 갈등을 피하려고 화평하지 말고 그냥 계속 갈등(葛藤)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 때문에 잃어버릴 것이 있으면, 과감하게 잃어버리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 때문에 상속권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사회적 신분을 잃을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을 아까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잃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곧 내 영혼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라도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 시간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볼 수 있는 기준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자문해 보십시오. ‘과연 나는 신앙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킨 적이 있는가? 그리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인하여 돈이나 지위나 사람을 잃은 적이 있는가?’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아마 기독교 문화 안에 몸을 담고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참된 신앙을 가지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위험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그의 존재 자체가 자신을 정죄하고, 그의 삶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며, 자신의 삶이 총체적으로 엉터리이며, 가짜라는 것을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벌거벗고 있는데, 누가 방안에 불을 켜면 한사코 불을 끄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나의 신앙으로 인하여 위협을 느끼지 않고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의 신앙은 생명력을 잃은 신앙이든지, 병든 신앙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35-36절)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어떤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먼저 알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보다 그를 가까이에서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의 하루하루의 삶이 예전과 다릅니다. 신앙은 그를 아주 작은 데서부터 다르게 만들어 놓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의 생활 습관이나 말하는 태도, 남을 대하는 자세나 순간순간의 자세에서 예전과는 다른 어떤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정반대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야, 저 사람 참 신앙 좋구나. 매우 모범적인 사람인데...*라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와 함께 생활을 하는 식구는 *너 같은 것이 집사라구? 정말 그만둬라. 네가 집사라면 나같이 신앙 없는 사람도 얼마든지 집사하겠다* 면서 핀잔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먼저 우리의 변화를 보고 불편해하고,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는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곧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을 때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력이 넘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도 알 정도로 생명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믿는다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면, 그는 더 이상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고, 그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두렵게 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 신앙에 대하여 가장 좋은 바로미터는 가장 가까운 동료나 믿지 않는 식구들이 나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느냐? 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혀 나에 대하여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와 똑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나의 신앙은 위기에 빠져 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잘못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Ⅱ.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태도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미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며, 그들에게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 사람을 두고 양쪽에서 우리를 잡아 당기기 시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더욱 변화시켜서 이 세상에 큰 영향력을 미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서 옛날 하나님을 모르던 상태로 돌아가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37절)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 ‘변하지 말자. 예전처럼 좋은 관계에서 지내자’는 것입니다. 특히 가장 가까운 부모님이나 자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사서 고생하려고 하느냐? 가만히 있으면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편안하고 넉넉한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왜 예수라는 것을 믿어서 일부러 고생을 자처하고 또 가족들을 고생시키느냐’ 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데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실망시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들을 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과 주님이 나를 당기는데 세상 쪽으로 기울어지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부모님을 실망시켜 드릴 수가 없어서 나를 더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주님을 멀리하고 원래 상태로 돌아가면,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갈등이 더 커지는 쪽으로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더 변화되고 도대체 미래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과감하게 발걸음을 옮기라는 뜻입니다.그러면 여기서‘내게 합당하지 않다’는 것은 이제 다시는 구원이 없다는 뜻일까? 물론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결코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며, 그런 식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한두 번 굴복하고도 다시 정신을 차려서 얼마든지 신앙을 회복할 수는 있지만, 굴복하고 있는 동안 그는 하나님과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들에게 신앙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식구들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두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그를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한 사람이라도 확실하게 물에서 빠져나가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두 사람 모두 허우적거린다 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미안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확실하게 살아서 나간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또 도구 같은 것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확실하게 건짐을 받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미안하지만 가족을 실망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라도 나 한 사람이라도 확실한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당당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즉 다시 그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들 때문에 신앙이 자라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은 진정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남편 때문에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것은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또 부모 때문에 신앙적인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도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나 자신이라도 신앙을 굳건하게 하는 것이 부모를 도울 수 있는 바른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0:38절)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은‘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당시 죄수들은 사형 당하러 갈 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반역자들이 집단적으로 사형을 당할 때도 모두 지기 십자가를 지고 두목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무리를 한번 생각해 보면 모두가 죽음을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힘든 부분을‘자기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병든 부모를 모셔야 할 때, 그것을 자기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부인은 물이 잘 나오지 않는 집에서 살면서 그것을 자기 십자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만 그래도 당해야 하는 어려움을 자기 십자가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자기 십자가를 지고’라고 말씀하신 것은‘죽음을 각오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것은 육체적 죽음일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사회적 죽음일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친구들을 잃어버리거나 지위를 잃거나 다른 많은 특권을 잃을 각오를 하고 주님을 따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세상이 자기에게 준 모든 특혜를 잃을 각오를 해야만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직장이라면, 직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재산이라면, 그 재산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사회적인 모든 기득권을 잃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말씀대로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직 분명한 것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아직 살아 있다는 이 두 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맞추어서 사는 사람의 신앙은 죽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신앙을 가진 우리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다 빼앗아 가고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 산에서 움막을 짓고 살면 몰라도 도저히 이 세상 안에서는 말씀대로 살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산에서 움막을 짓고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움막을 짓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특권을 버리고, 거지같이 살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래야만 주님의 말씀대로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음과 같은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10:39절)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론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 정상입니다. 즉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직장도 얻지 못하고, 결혼도 제때 하지 못하고, 집도 구하지 못하므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도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오히려 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하셔서 예전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놀랍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애굽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은 길이 바다 밑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심지어는 우리도 보지 못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하나님의 티오(table of organization)라고 부릅니다.
정상적으로 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직장에서 다 쫓겨나야 하며, 시장에서도 장사를 하지 못해야 합니다. 부정도 하지 못하고, 뇌물도 주지 못하는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도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티오(To)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철저하고 완벽하게 시험을 치르고 모든 것을 다 준비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몫을 반드시 남겨놓으십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의 생명력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면, 예수는 믿지만 그의 신앙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삶을 얻지 못하며, 결국 주님이 주시려는 많은 하늘의 복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것을 포기한 사람은 하늘의 것을 풍성하게 누릴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티오(TO)로 특별한 인도와 복(福)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생명력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Ⅲ.예수님의 대 위임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혼자 하시지 않고, 제자들 곧 우리 믿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십니다. 이것이 곧 우리에게 가장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위대한 구원 사역을 예수님께 위임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우리에게 위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아랫사람에게 위임(委任)합니다. 즉 우두머리는 자기가 하기 싫은 중요하지 않은 일을 밑에 있는 부하에게 시키고, 또 그 부하는 귀찮으니까 자기보다 더 밑에 있는 부하에게 그 일을 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 대위임 명령을 소홀하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놀라운 복음의 증거를 우리에게 위임하신 것은 마치 축구에서 얼마든지 자기가 꼴인을 시킬 수도 있는데, 동료에게 패스해서 그로 하여금 꼴인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는 것에 비유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한 일을 예수님께 맡기셨고,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또 제자들에게 맡기셔서 그들로 하여금 이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일에 동참한 자들에게 영원한 상급(賞給)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10:40절)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중에 함께 변하는 자는 우리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면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곧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시며, 그를 지키시고 주님이나 우리와 똑같이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하나님 나라가 달려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며, 그들이 믿는 바에 따라 영원한 운명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좀 더 솔직하고 정직해야 할 것입니다.
즉 *사실은 말인데, 우리는 예수님을 너무 조금밖에 닮지 못했습니다. 지금 닮으려고 애를 쓰는데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의 태도를 보고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우리의 열매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변화시켰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급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41절)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이 말씀은 매우 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믿는 자들과 또 우리를 만나는 모든 자들에게 복과 상급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우선 이 말씀은 우리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선지자로 나타날 수 있으면, 그보다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공부 잘하는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이나 혹은 더 나쁘게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맡은 사람이요, 언제나 그에게 가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보다 더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나올까? 돈일까? 재능일까? 여러 가지 상술일까? 세상적인 정보일까? 그런 것으로는 주님 앞에서 칭찬과 상급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니라, 그 사람이 선지자의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면 그 사람도 우리처럼 선지자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지자로 가면, 다른 사람들도 선지자로 변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깨닫고 분별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느냐?는 것이 우리의 상급입니다.
우리가 의인으로 이 세상에 나아가면, 복된 것입니다. 의인(義人)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이 옳은 줄 알고 도우면, 그 사람도 의인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상까지 곱으로 받게 됩니다. 결국 내가 의롭게 살기 위해 고난을 받으면, 나를 보고 변화된 사람들의 상까지 모두 곱으로 받게 됩니다. 물론 그 한 사람 한 사람도 의인의 상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의 상급은 얼마나 다른 사람을 변화시켰느냐? 에 따라 몇 곱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요즘은 여러 회사에서 직원들의 급료(給料)를 성과급(成果給)으로 준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대학 교수들의 월급까지 성과급제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천국의 상급은 철저하게 성과급제입니다. 특히 선지자로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선지자로 만들었느냐? 혹은 의인으로 얼마나 다른 사람들도 의인으로 살게 했느냐? 는 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 양육을 하면 상급이 그만큼 곱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만 의롭게 사는 것으로는 큰 상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기본 점수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보너스를 상으로 받게 됩니다.
10:42절)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작은 자’란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능력의 말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쳐 있을 때, 물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주님이 결코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위로 한마디 그리고 아주 작은 격려 하나가 그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물 한 그릇은 결코 큰 것이 아닙니다. 작은 관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하는 자에 대한 작은 관심을 예수님은 매우 고마워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무서운 죄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복음에 대한 무관심(無關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고개를 돌리고 욕을 하고 업신여길 때, 그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분명히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하여 답변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관심일지라도 주님을 감격스럽게 하기에는 충분합니다.‘물 한 그릇’이라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을 것입니다. ‘벤허’라는 영화에서 벤허가 노예로 잡혀갈 때, 손이 묶여 있어서 물을 마시지 못해 목말라 하는데, 누군가가 그에게 친절하게 물을 줍니다.
그는 그 사람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노예에서 풀려나 돌아와서 예수님이 십자기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는 것을 봅니다. 그는 물을 들고 주님을 따라가지만 물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고통을 받는 자에게는 물 한 그릇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복(福)이 되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그 작은 관심을 절대로 잊지 않고 갚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문제에 빠져서 생명을 구하는 이런 일에 무관심하고 무시하는 자는 심판대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은 영향력(影響力)입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을 통하여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다시 이 세상으로 끌고 가서 신앙을 버리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변해야 합니다. 갈등하는 이 세상에서 더 갈등하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합당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야 마지막 날에 주님이 나를 아신다고 할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망(亡)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알지 못하고 우리도 알지 못하는 티오(TO)가 있고 새로운 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국 천국의 상(賞)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며, 자신도 그렇게 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 더 변합시다. 그래서 모든 선지자의 상(賞)을 받기를 축원합니다.아-멘 찬송가 358장 *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
*매일 새벽 4-5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site/Kakao 선교회 안내
주님의 선교 명령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가치와 아름다운 가정과 영생을 위하여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대상 : ▷불신자 ▷개종자 ▷코로나시대 바빠서 교회출석 못하는 자 자발적인 전화 신청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 ▷영생 받고 사망 후 천국 가길 원하는 자. 즉▷허무에서 가치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멸망에서 영생으로, ▷권태에서 행복으로, ▷염려에서 기쁨으로, ▷어리석음에서 지혜로, ▷저주에서 풍요로, ▷종교인에서 주님의 제자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으로,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지옥 불 땔감에서 천국 맨션(mansion)을 원하는자.
물론 각자 의지와 기질과 순종여부에 따라 차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계21:8절)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교갱원 설립할 온라인 특별 헌금▽
농협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종류)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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