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혁명 여걸 김마리아
기미년 3.1운동에 앞서 1919년 2월 8일, 일제의 심장부 도쿄에서 최초의 독립선언이 있었습니다.
재일 조선 유학생들이 독립 만세를 외친 그날의 현장에 청년 김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일본 유학 생활 중에도 한복을 고집할 정도로 투철했던 민족의식이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김마리아는 일제의 감시가 심한 남성을 대신해 자신이 직접 기모노를 입고 2.8독립선언서를 숨겨 반입에 성공했고 전국 각지에 배포했습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일어난 3.1운동은 여성들이 사회 전면에 등장하게 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김마리는 이후 여성 비밀결사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국내외에 지부를 설치하고,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의 성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동료의 배신으로 김마리아는 일제에 체포됐고 고문으로 인해 한 쪽 가슴을 잃어 평생 안섶과 겉섶의 길이가 다른 저고리를 입어야만 했습니다.
심각한 고문 후유증으로 대수술과 치료를 이어가던 중 그녀는 비밀리에 망명길에 올라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 헌장에 남녀 평등과 여성의 참정권을 명시하며 국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선포했고,
김마리아는 임시의정원에서 최초의 여성의원으로 당선되며 여성으로서 위대한 발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자주독립의 핵심은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 김마리아는 미국 유학길에 오릅니다.
유학 중에도 여성 독립운동 단체 근화회의 회장을 맡고, 흥사단에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습니다.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야 조국의 품에 돌아온 김마리아는 일제의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는 등
항거를 이어갔지만 평생을 괴롭혀온 고문의 후유증을 넘지 못하고 1944년 3월 13일, 한 줌의 재가 되어 잠들고 맙니다.
그녀가 남기고 간 것은 낡은 수저 한 벌 뿐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 신여성이었지만 탄탄대로의 삶을 포기하고 일생을 홀로 독립운동에 바친
김마리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김마리아의 애국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까요?
링크 : https://youtu.be/d3T94SVqZO4?si=ZpslLVxVnyKWxY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