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여름이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9월이다.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오랜만에 아산을 무대로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코로나19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시기였지만, 자전거와 함께 길을 나서면 답답했던 마음도 어느새 바람에 씻겨 나간다. 이번 라이딩은 단순히 페달을 밟는 여행이 아니었다. 공세리 성당의 고즈넉한 풍경을 만나고 김옥균 선생의 흔적을 더듬으며, 마지막에는 이순신 장군의 묘소를 찾아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 여행이었다. 2021년 9월12일 오전 11시, 온양온천역 1번 출구에 네 명의 바이콜 전사들이 모였다.
맑고 쾌청한 하늘 아래 우리는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온양관광호텔 방향으로 달리자 오래된 온천도시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온양온천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유서 깊은 온천으로, 조선시대 태조와 세종, 세조 등 여러 임금이 치료와 휴양을 위해 찾았던 곳이다. 한때 신혼여행지로 이름을 날렸던 온양관광호텔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소였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관광산업의 변화와 시설 노후화로 문을 닫게 된다는 소식은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시민로와 곡교천로를 따라 달리자 아산대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곡교천은 천안에서 발원하여 아산을 지나 삽교호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특히 은행나무 가로수길은 아산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하다. 계절이 가을로 깊어지면 노란 은행잎이 길을 수놓아 장관을 이룬다. 오늘은 아직 완연한 가을이 아니었지만 머지않아 찾아올 황금빛 풍경을 상상하며 페달을 밟았다. 아산대교를 건너자 염치읍의 넓은 들녘과 한적한 농촌 풍경이 펼쳐졌다.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 논과 마을 사이로 이어지는 길을 달리니 마음까지 한결 여유로워졌다. 그렇게 한동안 달려 공세길로 접어들자 오늘의 첫 번째 목적지인 공세리성당이 가까워졌다. 마침 점심식사 시간이 다가와 우선 식사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평택에 거주하는 허창무 동문이 점심을 사주겠다고 하면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고마운 친구다. 정겨운 이야기꽃을 피우며 소갈비살과 살치살을 맛있게 먹었다.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식사야말로 여행이 주는 가장 큰 행복이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바이크 손대장이 작은 선물 전하니 더욱 훈훈한 시간이 되었다. 든든한 배를 채우고 도착한 공세리성당은 입구부터 노란 금잔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우리를 반겼다. 봉긋한 언덕 위 공세리성당은 마치 숲속의 동화나라처럼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울창한 나무와 오래된 성당 건물이 어우러진 모습은 도시의 어느 성당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깊은 정취를 품고 있었다.
공세리성당의 역사는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출신 에밀리오 드비즈 신부가 이곳에 부임하면서 직접 설계하여 지은 이 아름다운 성당은 수많은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하다. 성당 주변에는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느티나무와 팽나무 등 노거수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운치가 한층 돋보였다. 성당의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십자가의 길이 나타났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으로 향했던 예루살렘의 길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공간이다. 고요한 숲길을 따라 걸으며 잠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공세리성당에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명래고약의 탄생 이야기다. 당시 드비즈 신부는 의학 지식을 활용해 종기를 치료하는 약을 만들어 지역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성당에서 심부름을 하던 이명래가 그 제조법과 치료법을 배웠다고 한다. 훗날 이명래가 이를 발전시켜 만든 것이 바로 유명한 이명래고약이다. 성당 입구의 작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잠시 여유를 즐긴 후 다시 페달을 밟았다.다음 목적지는 김옥균 선생의 유허지였다. 공세리성당에서 약 6km로, 한적한 소로와 들녘을 지나 도착한 유허지 앞에서 근대화를 꿈꾸며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단 3일 만에 좌절되고 타향에서 생을 마감해야했던 그의 격동적인 삶을 떠올렸다. 비록 시대를 앞서간 꿈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고자 했던 열정 만큼은 가슴 깊이 남았다. 마지막 목적지인 이충무공의 묘소로 향했다. 온양온천로를 따라 달리는 길은 오늘 라이딩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었다. 가파른 오르막이 연이어 나타나자 페달을 밟는 다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힘이 빠질 무렵, 음봉삼거리로 접어들자 마침내 이충무공 묘소 입구에 도착했다.입구에 세워진 신도비를 바라보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순신 장군의 삶을 떠올렸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시 국가적 위기 속에서 조선을 지켜낸 위대한 장수다. 수많은 전투에서 뛰어난 전략과 지휘력을 발휘하며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나라를 구했다. 그리고 1598년 노량해전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전장을 지키다 장렬하게 생을 마감했다. 아쉽게도 묘역 정비공사로 출입이 제한되어 안쪽까지 들어가지 못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뜻깊었다. 이제 온양온천역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충무로를 따라 페달을 밟자 멀리 온양온천역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이번 여행에서 람보림은 경복궁역사문화대학에서 공부한 학구파답게 역사적 장소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역사와 현장에서 듣는 역사는 달랐다. 역사 속 인물들의 삶과 시대적 배경을 함께 들여다보니 지나온 길 하나하나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오늘 우리가 달린 40km의 길도 언젠가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아산의 가을길에서 역사와 우정을 함께 만난 하루. 즐겁고 행복했던 이번 여행에 감사하며, 다음 길을 향해 다시 힘차게 페달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