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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소산/문재학
멕시코. 쿠바 여행기
2018. 3, 23 ~ 4. 1(10일)
2018년 3월 23일(금) 맑음
수양버들이 파릇파릇 물들어가는 화창한 봄날에 아름다운 해안도시 멕시코의 칸쿤(CANCUN)과 카스트로가 장기 집권한 아메리카의 유일한 공산주의 국가 쿠바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위해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12시 25분(AM 091=멕시코 여객기) 에 멕시코시티로 출발했다. 소요 예상시간은 12시간 30분이다.(귀국 시에는 14시간 45분)
일본 도쿄 상공 부근을 지날 무렵 때늦은 점심이 나왔다.
다른 여객기와는 달리 제시하는 4가지 음식 중에 필자는 버섯 소고기 비빔밥으로 선택 했는데 입맛에 맞아 좋았다. 이어서 태평양 상공이다.
여객기는 캐나다 밴쿠버 쪽으로 올라가다가 샌프란시스코 해안으로 방향을 바꾸고 이내 내륙 LA쪽으로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한국시간 23시 20분 피닉스시 부근을 지날 때 창밖을 보니 눈부신 태양이 여객기 날개위에 또 하나의 태양을 띄우고 있었고 멀리 지상 가까이에는 시선을 즐겁게 하는 은은한 노을이 환상적이었다.
현지시간 11시 도착예정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올 때 멕시코 시 부근은 구릉지 같은 낮은 산사이로 솜털 같은 안개가 서리어 있었다. 멀리 높은 산 주위로는 흰 구름이 휘감고 있었다.
멕시코 시내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시내 중심지에는 고층건물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고 상당히 넓어보였다.
현지시간 10시 35분에 멕시코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공항규모는 비교적 작아 보였으나 개류중인 여객기는 곳곳에 상당히 많았다.
입국수속을 끝내고 칸쿤행 환승 게이트로 가는 도중에 보니 이곳 사람들도 스마트폰에 열중하고 있었다.
게이트를 확인해 두고 기다리는데 출발 한 시간 전에 환승게이트가 68번으로 바뀌었다.
초행인 필자에게는 다소 불편했는데 이곳에서는 관행인 것 같았다.
68번 게이트를 찾아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는데 제복을 입은 승무원들이 반갑게 하는 인사가 남녀불문 모두 볼을 맞대는 인사가 인상 깊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13시 25분 칸쿤(AM577)으로 향했다. 소요시간은 2시간 20분이다.
좌석이 창가 쪽이라 공항 주변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직선으로 뻗은 골목을 중심으로 들어선 주택들은 지붕이 다소 붉은 빛 이였고 꼬부랑 골목길이 없어 이색적이었다.
농경지는 가끔 초록색 농작물이 보이기는 하나 대부분 경지정리가 되지 않은 황량한 들판이었다. 낮은 솜털구름이 지상에 그림자를 남기면서 흘러가고 있었다.
포장된 도로가 보이지 않는 농촌마을이 계속되는 가 싶더니 이내 짙푸른 바다 상공이다.
그리고 구름 한 점 없이 날씨는 쾌청했다.
14시 40분에 옆자리 현지인(처음에 좌석 때문에 약간의 의견이 있었음)이 졸고 있는 필자를 깨우며 바다에 길게 구불구불 뻗어있는 크스메루(Cozumel)섬을 보라고 했다.
너무나 아름다워 동영상으로 담았다.(칸쿤 공항에 도착하여 가이드에게 문의하니 이곳은 칸쿤에 1시간 거리에 있고 대형여객선이 자주 찾는 유명한 관광지라 했다.)
여객기는 이름 모를 대형마을이 산재된 곳을 지나는데 부근의 색상이 마치 바다위에 떠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특이한 풍광이었다.
가끔 짙은 초록색 농작물이 보여 바다가 아닌 지상으로 확인 되었다.
15시 현재까지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낮은 구름사이로 가끔 대형의 원형 또는 팔각형의 모양에 파란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어 그것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다.
얼마 후 경작지보다 수림이 욱어진 평야지대를 지나는데 상당히 풍성해 보였다.
경작지 하나 없는 거대한 수림평야지대가 계속되는데 필자가 세계여행 중에 처음 보는 광경으로 마치 잘 조성된 대평원의 잔디밭 같았다. 물론 인가도 없었다.
한참 후 쭉 뻗은 직선도로(?) 같은 것이 나타나다가 15시 18분경에 포장도로가 보이면서 차량이 다니고 있었다. 이어 칸쿤 공항에 도착했다.
규모가 작고 아담했다. 이곳은 멕시코보다 시차가 1시간 늦다.
공항에서 수하물을 찾은 후 아무런 신고 절차 없이 공항 밖으로 빠져나오니 가이드 이창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는 미니버스(독일산 벤츠로 뒤쪽으로 갈수록 자리가 높아 앞을 잘 볼 수 있어 관광용으로 적합함)에 올랐다. 이곳은 열대지역이라 년 중 덥다고 했다. 어제 한파(?)가 지나가 오늘 날씨가 25도로 선선하다고 했다.
칸쿤은 일 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창준씨는 이곳에서 35년째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주위의 수목은 다양한 종류의 야자수와 유도화 등 꽃 들이 이국적인 정취를 뿌리고 있었다.
칸(뱀)쿤(둥지)의 뜻인데 1970년대부터 개발하게 되어 칸쿤 국제공항이 생기고 1974년 유카탄주로부터 분리 되었다.
칸쿤은 면적 약1,979평방키로 이고 인구는 150만 명(?)이나 우리 교민은 가이드 몇 사람 이외는 없다고 했다.
도중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무장 경찰이 도로를 막고 검문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서 칸쿤은 치안 상태가 아주 좋다고 했다.
또 칸쿤의 대형 담수호와 바다를 연결하는 운하를 지나기도 했다.
담수호에는 야생 악어가 많아 조심해야 한다.
칸쿤은 30km의 실 같이 긴 해안선(폭이 좁은 곳은 200m도 안됨)을 따라 370여개의 대형호텔이 들어서 있는데 모두다 성업 중이라 했다.
우리가 묶을 호텔로 가는 도중의 즐비한 호텔 앞 도로변에는 크고 작은 야자수랑 이름 모를 열대수로 조경을 해두었고 그 사이로 좁은 땅인데도 푸른 잔디가 고운 골프장도 있었다.
주위를 지나는 사람 모두가 반팔 반바지 차림이었다.
20여분을 달려 GRAND PARK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입구에 있는 대형 호텔 안내판 앞에 시원한 폭포수가 우리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다.
필자는 푸른 바다가 눈앞에 보이는 4217호실에 여장을 풀었다
.이곳 호텔에서 투숙하는 사람은 음식. 각종 술. 음료수. 과일. 아이스크림. 빵 등을 무제한 무료라 했다 물론 호텔 방에 있는 술이랑 음료수도 무료다. 참으로 특이한 영업 방법이었다.
짙푸른 파도가 백사장을 넘나들고 약간 멀리 편의 시설이 있는 곳에는 관광객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사워를 하고 먼저 위스키부터 한잔 했다.
호텔 로비에 앉아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니 시원한 해풍조차 향기로웠다.
호텔 뒤편 풀장을 바라보는 곳에 상당히 넓은 식당이 있었다.18시 30분(한국과는 시차 14시간 늦음) 뷔페식당으로 들어가니 현지인들의 음악연주가 분위기를 돋우고 와인 등(술은 주문대로 무한정임)을 가져주며 서비스를 하는 종업원이 상당히 친절해 기분이 좋았다.
2018년 3월 24일(토) 맑음
아침 8시에 치첸이트사(Chichèn-Itzá)로 향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마야문명의 유적지를 보기위해서다.
멕시코는 면적 1,972,550평방키로(한반도는 220,847 평방키로 임) 이고, 인구는1억 5천만 명이다. 그 중 10%는 인디언이다.
연간 관광 수입이 250억불이나 되고 석유매장량은 세계 3위이고 銀은 세계 생산량의 80%나 되는 자원 부국이다.
상류 10%는 잘살고 90%의 국민들은 사회 복지제도가 잘되 있어 민원이 없다고 했다.
에어컨이 좋은 미니버스는 4차선 도로를 구불구불 달리고 있었다. 중앙 분리대에 있는 야자수의 노랗게 익은 야자는 군침을 돌게 하고 늘어진 야자수 잎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름 모를 열대 꽃들이 섞여 있어 시선을 즐겁게 했다.
얼마 달리지 않아 4차선 고속도로 중앙분리대는 자연 수목으로 차단되어 반대편 차량은 볼 수가 없었다. 직선으로 뻗어있는 도로 양안에는 열대림으로 수벽을 이루고 있어 보이는 것은 도로 따라 파랗게 하늘만 보이는 숲속을 계속 달리고 있었다.
가이드는 지루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특이한 열대식물의 재배이용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선인장과에 속하는 애니깽은 용설란의 일종으로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특산물로 가시도 많고 독소가 많지만 밧줄과 카펫의 원료 등 다양하게 이용한단다.
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알로에 선인장은 칸쿤을 끼고 있는 이곳 유카탄 반도가 원산지이다.
아가베 선인장에서 “데킬라” 라는 술을 만드는데 브랜드에 따라 엄청나게 비싼 것도 있단다.
또 치클(치아로 씹는다는 뜻)나무가 많아 그 수액으로 껌의 원료로 사용한다고 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대평원의 길 이 넓은 평야지대에 농작물을 생산하면 얼마나 좋을까.
경작지가 부족한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이 22% 즉 78%를 수입해 먹기에 정말 부러웠다.
참고로 선진국치고 식량자급률이 100% 안 되는 나라가 없다는데 절대적으로 식량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우량 농지를 혁신도시 부지나 공장 아파트로 전용이 되고 있어 걱정이다.
가령 전 국민이 5년 치 먹을 식량이 비축되어 있더라도 식량이 모자란다고 소문이 나면 한 끼도 굶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비축하여 썩히는 한이 있더라도 10년 치 가수요가 폭발하면 어떻게 대처 할 것인지 ? 위정자들이 자각했으면 좋겠다.
자손만대의 안정적인 식량 확보를 위해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에 경작지를 매입 하는 등 준비를 해두어야 하겠다.
일본이나 중국은 미래를 위해 수십 년 전부터 땅을 매입해 두고 있다고 했다.
우리 정부에서는 이에 관심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직선 도로위로 횡단하는 하얀 교량이 자주 나타났다.
평야지대를 가로지르는 도로 때문에 별도의 성토를 하여 차량이 지나가는 다리를 만들었는데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치첸이트사(Chichien Itza)”의 뜻은 치(입)첸(물)이트사(원주민 이름)이다.
이트사 족은 머리가 크고 목이 짧아 대부분 키가 작아 난장이라 부를 정도라 했다.
치첸이트사 피라미드 유적지 등은 기원전 200년 전부터 마야문명(물을 숭배)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곳 지역은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땅이라 비가 많이 와도 지하로 스며들어 절대적으로 물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9시 20분경 2번째 고속도로를 벗어나 치첸이트사로 가는 시골길에 들어섰다. 도로변에는 부실한 시설의 민속토산품 상점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경찰이 통제하는 지역을 지나자 현대식 건물이 있는 치첸이트사 마을이 나왔다. 그리고 얼마 안가 유적지 앞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뜨거운 열기가 확 밀려왔다.
현재온도는 27도 12시가 지나면 30도를 넘는다고 했다.
약간의 계단을 오르는 매표소 앞에는 많은 상인들과 관광객들이 있었다.
매일 15천명 관광객이 오는 곳인데 지금은 시간이 일러 약간 한산한 편이란다. 그래도 복잡했다.
멕시코에는 전체 2200개 피라미드가 있는데 그 중 치첸이트사는 규모는 작지만 태양을 이용한 천문학과 정확한 수학으로 365개의 계단을 쌓았고 4면(4계절을 나타냄)을 햇빛을 이용한 밤낮이 같은 춘분과 추분 에 북쪽계단에서 연출되는 독특한 효과를 볼 수 있다.
낮이 긴 하지와 밤이 짧은 동지를 정확하게 계산하였다니 놀라울 뿐이다. 현대과학으로 계산하여도 거의 오차가 없다고 했다
.
규모는 정사각형 한 면에 55m, 높이 약 30m로 총 높이는 36m 이다.
9세기경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자체 달력'으로 사방의 계단이 91개 이므로 91 x 4 = 364 계단, 여기다 정상의 1단을 더하면 365일이 되는 신비한 건축물이다.
피라미드의 쿠쿨칸(kukulkan)의 머리 부분에 모서리 그림자가 피라미드 한쪽 끝 부분에 있는 뱀 머리 모양 조각에 연결되어 있다. 해가 뜨면 그 그림자가 마치 뱀이 꿈틀대며 하강하는 모습이 연출된다는 것이다
금년 3월 21일 뱀의 신이 나타나는 행사에는 14만 명의 사람이 모였다고 했다.
다음은 광장의 서쪽에 있는 마야 볼(구기) 경기장으로 갔다.
폭35m, 길이145m 경기장에서 제사 신을 선발 하는데 경기장 양 벽면 높이 8.5m 아래 2m 높이 축대(경기 진행과정을 음각으로 새겨 놓았음)위에서 고리모양의 돌구멍에 축구공보다 작은 생고무 공을 엉덩이나 무릎으로 튕겨 올려 통과 시키는 경기로 먼저 넣는 사람. 즉 승자의 심장을 제단에 바친다고 하니 잔인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처절한 삶의 몸부림 같았다.
경기장을 들어서면 벽면 위 우측은 회의실이고, 벽면 위 좌측은 심판석 그리고 경기장 정면과 마주 보는 조금 높은 곳은 통치자 등이 경기 관람하는 로열석이라고 했다.
경기장 출구를 빠져나오자 가까운 곳에 3m 정도의 높이에 제물로 바쳐진 승자의 얼굴 모습을 새긴 돌로 축대를 쌓아 놓은 해골의 제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케 했다.
욱어진 나무 중 활엽수는 연초록 새잎이 나풀거리고 그 아래에 많은 상인들이 토산품을 팔고 있었다.
다시 발길은 500m 떨어진 곳에 있는 비의 신 ‘차크’가 산다고 믿었던 마야족들의 성지 세노테로 향했다.
여름옷을 입었는데도 연신 땀이 흘렀다.
숲속 좁은 길 양측으로는 노점상들이 빈틈없이 자리 잡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암반지대였다. 세노테 규모는 지름 약 30m 깊이 5~6m의 원형 홀이었다.
자연재앙으로부터 부족을 보호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15세 미만의 어린아이와 재물을 세노테에 바쳤다고 한다.
1904년 멕시코 주재 미국영사를 역임한 톰슨 박사가 이곳에서 발굴하면서 80여구의 시신의 뼈를 발굴했단다. 물에 염분이 많아 잘 보존되어 있었단다.
이곳을 보기 위해 무더위에도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인디언의 성지를 빠져나오니 치첸이트사의 북쪽 편에 도착했다.
가까이서 손뼉을 치니 찌엉 찌엉 제법 큰소리의 울림이 있었다. 정말 신기했다. 몰려드는 관광객들 저마다 한번 씩 손뼉을 쳤다.
치첸이트사를 바라보는 동북쪽 방향에는 ‘전사의 신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치첸이트사의 내부의 제전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규모는 달관으로 보아 치첸이트사와 비슷해 보였다.
옛날에는 치첸이트사 내부에서 관람을 했는데 보존을 위해 별도로 재현한 것이다.
신전 상단 중앙에는 누운 사람 모습의 ‘착몰상(Sculpture of Chaac Mool)’이 있다고 하는 데 아래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아래쪽으로 돌기둥이 줄지어 섰는데 모두 합하면 천여 개나 된다는 수많은 돌기둥은 그 횡과 열이 정확이 맞아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
전사의 신전 아래에는 한 면에 248개 사방 합하면 990개 돌기둥이 있었ek는데, 현재는 약 200개만 남아 있다.
11시 20분 관광을 끝내고 나오니 무더위 속에 관광객들이 밀려들고 있어 출입구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11시 43분 세노테(Cenote 성스러운 물) 주차장에 도착했다
.
주차장에는 많은 관광버스와 승용차가 있었다.
우리일행은 구내식당에서 현지식 뷔페로 점심을 하고 둘러보기로 했다.
세노테는 석회암 암반이 함몰하여 지하수가 들어난 천연 샘이다.
지하로 50m 정도 내려간 곳에 직경50~60m 수심 50m 정도의 크기로 유카탄 반도의 여러 세노테 중에서 마치 밀림을 연상케 하는 열대 식물의 뿌리 등이 길게 드리워져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광경에 모두 영상에 담느라 바빴다.
우리일행은 수영복을 지참했지만 아무도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남녀노소 수영복 차림으로 약간 높은 곳에서 짜릿한 다이빙과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지하로 흐르는 물이라 물이 상당히 깨끗했다.
시원한 곳에서 동영상을 담으면서 잠시 쉬었다가 지상으로 올라오니 다시 무더위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곳에는 탈의실이 없기에 지상으로 올라와 탈의실에 가야하기에 지나는 길에는 수영복 차림의 늘씬한 팔등신 미녀들이 쉴 새 없이 몸매를 자랑하며 지나 다녔다.
이곳 부근의 집들은 갈대로 지붕을 덮은 전통가옥이었다.
출입구에 있는 대형 매장을 나와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아름다운 정원을 돌아보며 여러 가지 꽃과 풍경을 영상으로 담고 13시 20분 칸쿤으로 향했다.
시원한 직선도로를 마음껏 달렸다.
칸쿤에 도착할 무렵에는 아카시아 꽃이 만발한 군락지를 지나기도 했다.
칸쿤에 도착하여 17시부터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칸쿤 시내 전경 투어에 나섰다.
차량이 많아 시간이 걸렸지만 해변을 비롯 이곳저곳의 풍경을 영상으로 부지런히 담았다.
고르뜨 린다 항구에 있는 높이 80m 의 토레에스세니카(Torre esconica)전망대에서 360도 회전 하면서 그림 같은 칸쿤의 전경을 동영상으로 담으면서 눈부시게 파란 캐리비안 해안까지 감상했다.
호텔에 돌아오니 18시 30분이였다.
저녁식사 전 바에서 맥주글라스에 얼음을 띄운 위스키 한잔과 식당에서 데킬라 2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2018년 3월 25일(일) 맑음
9시에 호텔을 나와 칸쿤 공항으로 향했다.
11시 51분 쿠바 하바나(AM477편)로 향했다. 1시간 20분 소요예정이다.
어디를 가나 승객은 만원이었다.
다시 보는 칸쿤 공항주변은 인가가 거의 없는 평야지 수림지대였다. 도로는 가끔 보였다.
곧바로 짙푸른 바다위에서 여객기는 고도를 잡고 있었다.
바다는 파도가 없이 조용하고 간혹 포말을 일으키는 선박이 지나가고 낮은 흰 구름이 점점이 바다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정말 기분 좋은 풍경이었다.
12시 45분 황토 빛 경작지가 보이는 작은 섬을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산재된 경작지와 사방으로 죽 뻗은 도로가 나왔다.
일부 경지정리가 되어 있고 초록 융단 같은 작물재배지역도 있었다.
산이 없는 평야지대에 조잡 하지만 경지정리가 되어 있고 해안선으로는 검푸른 수목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황토 빛 토양의 경작지가 대형의 원형 또는 팔각형의 아름다운 형상의 경작지도 지났다.
이어 여객기가 미지의 세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공항 주변의 포장도로는 간혹 차량이 보이고 인가도 많지 않았다.
14시 10분(현지시간 시차 적용)에 하바나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독특한 디자인의; 붉은 색 공항청사가 눈길을 끌었다.
규모가 작은 공항에는 게류중인 비행기도 많지 않았다.
여객기 출구통로를 나오자 안내 가이드가 우리를 안내 하면서 입국심사까지 도와주는데 처음 겪는 일이라 신기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행사도 국가가 운영하니 출입이 자유로운 것 같았다.
공항 밖을 나오니 역시 숨 막히는 더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엘라”라는 현지 여자가이드가 우리를 안내 했다.
약간 서툴지만 우리말을 비교적 잘했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는데 국영방송에서 한국드라마와 음악을 방송함으로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게 되어 한국문화원에 가서 한국말과 역사 문화 등을 배우게 되었고 따라서 한국 여행객 가이드를 맡게 되었다고 했다.
비행기를 한 번도 타 본적이 없고 한국 서강대학에서 초청을 받아도 한국 대사관이 없어 비자를 못 받아 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공항에서 식당까지 10분 정도였다. 간판도 없는 식당의 좁은 정원에서 돼지고기. 생선. 새우 등에서 선택을 하라고 했다. 알고 보니 식당도 국가에서 운영한다고 했다.
종업원들의 친절한 도움을 받으며 각자 주문한 메뉴로 점심을 즐겁게 했다.
쿠바(CUBA)는 카리브 해에서는 제일 큰 섬이고 세계에서는 15번째 섬이란다.
쿠바는 면적은 110,860평방키로 이고 인구는 1,139만 명으로 백인이 67%, 혼혈이 26%, 흑인이 9%이다. 스페인 치하 때 흑인을 100만 명을 아프리카로부터 수입 했단다.
수도 하바나(Havana)는 면적은 5,731평방키로 이고 인구는 210만 명이다.
이곳 하바나는 여우비가 가끔 내리지만 날씨는 항상 맑다고 했다.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변은 평야지인데도 방치한 땅이 많았다.
농작물은 바나나. 사탕수수와 이름 모를 과일 나무들이 보였다.
도로는 넓고 나무들이 울창할 정도로 대경목(大莖木)들이였으나 차량도 적게 다니고 사람도 많지 않았다. 1492 ~ 1898년까지 400년간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가 1898년 스페인과 미국과 함대 전투에서 미국이 승리하여 1959년 카스트로가 집권 할 때까지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1959년 독립한 카스트로 공산국가체제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오바마 시절에는 미국과 왕래도 잦고 달러($)가 유통되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고서는 달러 사용이 금지되고 있단다.
혁명광장을 지나자 도로는 울창한 숲으로 뒤 덮여 있었다. 그리고 숲에 가린 북한 대사관도 지났다.
하바나 해안가에 있는 하바나 리비에라(Habana Riviera) 대형 호텔에 도착했다.
이 호텔은 1950년대 미국의 마피아들이 준공했다는데 풍광이 좋은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호텔 로비가 운동장 같이 넓었다.
1621호실에 여장을 풀었다. 시설이 낡아 형편없을 줄 알았는데 세계어디에 가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객실도 넓고 모든 시설이 흡족했다.
이 건물을 준공 할 당시 우리나라는 6.25 전쟁이 한창 이였는데 이런 호화 호텔을 쿠바에 건축하여 활용 하였다니 놀라움을 금치 모할 정도였다.
19시에 호텔을 나왔다. 저녁을 하고 21시에 실시하는 야간 포격식장으로 가기 위해서다.
5 km의 해안가를 달리는데 바람 씌려 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밤이면 더 많다고 했다.
도중에 간판도 없는 오래된 고층 건물이 국립병원이라 했다.
얼마나 오래 동안 도색을 안했는지 마치 유령의 집 같았다.
이런 병원에 최신식 의료 장비가 갖추어져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대학까지 무료이고 병원도 무료라 했다.
이어 해변가에 있는 미국대사관도 지났다.
선생. 변호사는 월급이 30불, 공무원은 13불, 의사는 80불이라 했다.
대학까지 무료, 병원도 무료 취직도 시켜 준다지만, 이 월급으로는 좋은 음식도, 물건도, 여행도 다닐 수 없고 집수리도 불가능 하니 그저 목숨만 부지하니 무슨 희망과 의욕이 있을까.
그리고 새 차를 사려면 월급을 모아서는 불가능 하니 한산한 거리를 다니는 차량이 대부분 디자인이 독특한 옛날 차량이었다. 마치 옛날차량 전시장 같았다. 심지어는 1920년 차량도 달리고 있단다.
“쿠바 54” 라는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찾지 못할 작은 간판 (규격 높이 20 ~폭 60cm 정도)이 큰 빌딩 식당 입구에 부착되어 있었다.
이곳에도 몇 가지 메뉴를 제시 하면서 취향대로 저녁식사를 한 후 19시 30분 야간포격식장으로 향했다.
1958년도에 프랑스 기술진이 준공한 왕복 4차선 해저터널을 지나 스페인 식민시대에 해적과 적군을 방어할 목적으로 1589년에 시작 1639년 동안 완공한 모로성 요새를 좌측으로 하고, 맞은 편 우측에 있는 산 카를로스 데라 카바나 요새는 1763부터 1774년 걸쳐 완공했다.
성의 길이가 14km 달한다. 현재는 박물관과 군사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포격 시범은 18세기부터 스페인 병사들이 바다를 향해 쏘고 통행금지를 알리는 행사란다.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실시해오고 있단다.
땅거미가 내리는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미 차량들이 많이 도착해 있었다.
곳곳에 대포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꼬불꼬불 성벽을 돌아가서 다리를 건널 때는 옛날 복장을 한 군인들(실제는 대학생들이라고 함)이 지키고 있었다.
날은 계속 어두워지고 복잡한 길에 사람이 많아 영상을 담다 일행을 놓칠까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먼저 아르헨티나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저술가이자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인 체 게바라( Che Guevara 1928. 6. 14. ~ 1967. 10. 9)의 일대기와 그의 사무실을 전시한 곳에 들려 사진을 통한 설명을 들었다.
다시 포격식장으로 들어가는 골목에는 많은 상인들이 불을 밝혀놓고 토산품을 팔고 있었다.
우리일행은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해놓고 행사장으로 갔다.
어둠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밀려들고 있었다.
낮은 성벽위에는 흰색 옷을 입은 군인들이 간단한 햇불 쇼를 한 후 21시 정각에 터지는 포격소리는 예상은 하고 있어도 소리가 너무 커서 깜짝 놀랐다.
어둠속에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로 일행을 놓치지 않고 무사히 대기하고 있는 차에 올라 하바나 해협 건너 하바나의 야경을 즐기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2018년 3월 26일(월) 맑음
9시에 호텔을 나와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차량이 적어 한산했다.
가끔 지나가는 승용차들은 이미 지구촌에 사라진 옛날 자동차들이라 쿠바의 경제사정을 반영하고 있었다.
1929년에 준공한 국회의사당은 상당히 규모가 크고 돔 부위는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 우측으로는 1915년에 준공한 미려한 석조건물 오페라 하우스가 자리했다.
이곳에 지나는 승용차들 대부분 옛날 차들이고 굉음을 내면서 지나가고 낡은 터럭은 매연을 심하게 토하고 있었다.
간단한 인증 사진을 남기고 헤밍웨이 집(박물관)으로 향했다. 소요예정시간은 30분이다.
올드 하바나의 석조 건축물들은 대게 150년~ 300년이나 된다고 했다.
그 당시 한국의 서울은 시내라도 초가집에 살았기에 쿠바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렵게 살았을 것인데 참으로 대단했다.
도중에 현재는 혁명박물관으로 사용하는 대통령궁과 스페인 대사관 앞에 내려서 잠시 영상으로 담아보았다.
도심은 물론 어디에도 홍보용이나 전시용 간판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거리마다 간판이 넘쳐 났을 것인데 신기했다.
10시 10분부터 시외 왕복 8차선 도로를 달렸다.
포장상태가 좋지 않아 동영상을 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도로 주변은 그림 같은 야자수가 듬성듬성 있고 그사이로 바나나 등 이름 모를 과일나무들이 산재된 농가 중심으로 재배되고 있었다. 약간의 구릉지가 있었지만 대부분 평야지대였다.
얼마 후 작은 언덕 위에 있는 헤밍웨이 집 부근에 도착했다.
입장료를 주고 들어가는 길은 거대한 열대 나무가 길 좌우로 늘어서 있는 시원한 풍경이 마음을 설레이게 했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 들고 있었다.
헤밍웨이 집(박물관)앞 의 게스트하우스를 지나 노랑 바탕의 슬래브 집, 내부는 들어갈 수는 없어도 집필실과 서재. 주방. 침실. 생활용품 등을 전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바나 시가지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풀장과 목재로 만든 헤밍웨이의 호화요트를 둘러보았다.
집주위로 열대과일 나무와 꽃나무 등으로 조경을 잘해 두었다.
외기온도가 29도라 숲이 욱어진 길을 걸어도 땀을 많이 흘려야했다.
Ernest Hemingway(1898~1961)는 미국 일리노이주(현재 시카코)에서 태어나 미국 육군 상사로 예편한 미국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1940년부터 1950년까지 쿠바에서 살았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노인과 바다 등 소설을 남겼고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우리 일행은 헤밍웨이가 낚시를 하면서 노인과 바다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는 코히마르(Cojimar) 마을 해변으로 향했다. 소요시간은 20분이다.
11시 12분에 한산한 어촌 마을에 도착했다.
옛날 외침의 방어요새가 바닷가에 자리 잡고 그 뒤편에는 주민들이 헤밍웨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성금을 모아 건립한 헤밍웨이 흉상이 시산을 끌었다.
헤밍웨이는 가고 없어도 강하게 부는 바람 속에 철썩철썩 파도소리는 변함없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곳저곳의 풍경을 영상으로 담고 가까이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역시 간판 없는 식당으로 우리일행은 들어 갔다.
일행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주위풍광을 영상으로 담고 들어가려니 문이 잠겨 있었다. 문을 지키고 있는 노인이 문을 닫은 것이다.
문을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았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시골이라 길거리에는 사람하나 없어 순간적으로 야릇한 두려움이 확 밀려왔다.
식당이 간판은 없어도 사람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또 영업을 하는지 확인을 해야 하는 것이 식당인데, 참으로 난감했다. 손짓발짓으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가만히 보니 사람이 드나들 때 마다 문을 닫고 있었다.
손님의 편의를 위해 문을 지켜야 할 것인데,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왜 세워 났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참 후 외국인이 10여명 왔는데 빈자리가 있어도 예약된 것이라 안 된다고 하여 항의를 하다가 되돌아갔다 부근에는 식당이 없어 난감했을 것이다.
무슨 이런 나라가 있나. 처음 보는 해괴한 일이였다.
12시 46분 카사블랑카의 랜드마크 리틀 예수상을 보려 출발했다.
날씨는 한국의 한여름 날씨였다.
1958년에 쿠바의 조각가 힐마 마테라가 건립한 이곳의 예수상은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예수상과는 형상도 다르고 높이도 20m 정도로 작았다.
하바나 좁은 해협의 건너 하바나 공업지대에서는 굴뚝에 흰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하바나 구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다시 우리 일행은 군사장비 전시장을 거처 지난밤 포격식을 한곳을 지나 하바나 구시가지 관광에 나섰다.
13시 30분 헤밍웨이가 자주 다녔다는 술집(La Terraza)을 찾았다.
방문객들이 넘쳐 골목길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는 모히토(Mojito = 럼+설탕+라임쥬스+생민트 잎으로 만든 칵테일임)의 새콤달콤한 맛을 공짜로 맛보고 가까이에 있는 11세기에 건립한 구광장에 있는 대성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다시 발걸음은 약 50m 거리에 있는 하바나대학교(가이드의 모교)도 지났다.
골목마다 노천카페가 있고 사람들이 시장 통처럼 붐볐다. 한국의 남대문 시장을 연상케 했다.
이어 헤밍웨이가 집을 짓기 전 투숙했던 호텔의 출입구 내부를 살펴보았다.
1905년 미국의 은행용으로 건립한 대형 석조 건물 앞을 지나기도 했다.
구시가지의 오래된 건물들은 건물마다 작은 동판 등으로 건립년도를 명기해 놓았다.
도중에 반기문 총장이 이발을 한곳을 지나는데 유명인사라 사진게시는 물론 벽면에 방문 표지도 해두어 우리일행들은 영상으로 담았다.
이어 1739년 에 건립한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은 바로크 양식으로 탑의 높이가 46m로 부근에서 제일 높아 해적의 감시탑으로 활용했단다.
현재는 종합예술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럼 박물관을 견학하고 시음을 한 후 1519년에 조성한 아르마스 광장 등을 둘러보았다.
아르마스 광장 옆에는 1920년까지 사용한 대통령궁이 숲속에 가려져 있었다. 또 우측에는 미국 첫 대사관으로 사용하던 석조건물이 있었다.
30도 무더위에 이곳저곳을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다니면서 동영상으로 담아냈다.
필자가 둘러본 하바나 구시가지는 우리나라는 초가집에서 겨우 생계유지를 할 때 공공건물과 교회 등 100~200년 된 석조건물들이 유럽처럼 들어서 있었다는 것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1959년 카스트로가 집권할시 자유경제 체제로 추진하였다면 지금쯤 선진국이 되어 있었을 것 같았다.
발전 인프라는 충분히 구축 되어 있었는데도 카스트로의 공산 정권이 국민들의 희망의 의지를 꺾는 정책을 펼침으로서 몰락의 길로 들어서 오늘날 어렵게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였다.
우리의 미니버스는 16시 40분 쇼핑센터를 찾았다.
수백 평이나 되어 보이는 대형 쇼핑센터에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도중에 저녁식사를 하고 19시경에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부에나 비스타 소설클럽에서 22시에 공연하는 째즈 음악과 열정에 넘치는 화려한 춤을 1시간이 넘도록 관람했다.
2018년 3월 27일(화) 맑음
9시 40분 호텔을 나와 10시 정각에 올드카에 올랐다.
독특한 외관의 차가 굉음을 내면서 호텔 좌측 해안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필자가 탄 차는 1952년도에 생산된 “돌채”라는 차종으로 디자인도 색상도 이색적이라 호기심이 많았다.
66년이나 된 차가 굴러가는 게 신통했다.
웬만한 도로는 신호등이 없어 다른 차가 지나갈 때까지 마냥 기다려주는 미덕이 있었다.
매연이 심하여 황사 마스크를 날씨가 더워도 착용치 않을 수 없었다.
오픈카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해안가 6차선을 달렸다.
차가 여러 대가 지날 때는 소음은 귀가 아플 정도이고 매연은 마음껏 뿜어내고 있었다.
도로변은 집은 낡았지만 잘 가꾼 열대수와 꽃 등으로 조경을 잘해두어 기분이 좋았다.
제일 먼저 옛날에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는 바닷가 미라마르(Miramar)지역에 도착했다.
작은 공원에 나무뿌리가 주렁주렁 달린 “히웨이”라는 대경목이 늘어서 있는 곳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잠시 쉬었다.
가로수가 욱어진 좁은 도로를 지날 때 사람이 거주하지 못할 정도의 아주 오래된 2~3층 집들이 집단으로 있는 곳을 지나기도 했다.
시내를 지나갈 때는 소음과 매연이 심했지만 10시 46분 나무가 울창한 “아바나 숲”에 도착했다. 우리일행 이외 다른 팀들도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이 정해진 코스인 것 같았다.
큰 나무 전체를 휘감고 있는 기생식물이 장관이었다.
처음 보는 풍경이라 영상으로 열심히 담았다. 계속해서 각양각색의 올드카가 몰려들고 있었다.
10시 55분 대로변으로 나가는 길 좌측으로 인공기가 펄럭이고 있는 북한 대사관을 또다시 지났다.
한국은 대사관이 없고 코트라 지사만 있단다.
11시경에 하바나의 최중심지 넓고 넓은 혁명광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올드카와 버스가 넘쳐나고 있었다. 이곳에서 올드카의 임무는 끝났다.
1920년에 만들어진 혁명광장은 넓이가 72,000 평방미터로 세계에서 31번째 큰 광장이다.
노동절이나 혁명 기념일(7월 26일)에 이곳에서 행사가 치려진다.
광장의 약간 높은 곳의 중앙에 1958년에 준공한 호세마르티(1853년~1895년) 오각 모양의 기념탑(높이 109m)이 있고 그 앞에 호세마르티의 동상이 있다.
호세마르티는 혁명의 영웅이자 문학가이고 쿠바의 정신적인 지주라 했다.
탑의 좌측으로는 제1 정부청사. 국립 도서관. 맞은편에는 제2 정부청사(내무부) 벽면에는 대형 체 게바라(1928년~1967년)의 철근 부조가 있고, 그 옆의 제2 정부청사 벽면에는 혁명가인 시엔푸에고스(1932년~1989년)의 철근 부조가 있다. 탑 우측으로는 국립 극장이 있었다.
지난 5월 1일 행사 당일에는 200만 명이 집결하여 행사를 했다고 했다.
11시 50분 나무가 욱어진 호젓한 곳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7~8명의 종업원들이 유니폼을 입고 우리일행을 도로변까지 나와 맞아 주어 기분이 좋았다.
현지식으로 점심을 즐겁게 했다. 식당주위에 각종 꽃과 정원수로 조경을 해두어 분위기도 좋았다.
12시 10분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가는 왕복 8차선 중앙분리대는 높은 가로등이 마치 벽을 이루고 있고 도로 양측으로는 야자수들이 바람에 긴 잎을 휘날리고 있었다. 30분 만에 공항에 도착 했다.
조금 기다렸다가 출국수속을 마치고 비행기 표에 게이트 번호가 없었다.
게이트 번호가 9번으로 나와 있어 그곳에 기다리는데 다시 7번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처럼 비행기 표 발급 시에 게이트 번호가 명시 되지 않아 자주 확인을 해야 했다.
16시 05분 여객기(AM452)는 멕시코 공항으로 향했다.
소요시간은 2시간 30분이다. 처음으로 비행기 좌석이 남아돌아 조금 편하게 갈 수 있었다.
비즈니스 좌석으로 바꾸려면 100불을 추가로 내면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쿠바 공항주변은 평야지인대도 경작지는 많지 않았다.
직선도로가 가끔 보이고 부락은 산재되어 있었다.
숲은 별로 없고 일부지역에는 경지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여객기는 바다를 끼고 내륙으로 날고 있었다.
해안선 따라 바다의 청록색 물빛이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다.
멕시코 공항이 가까워질수록 흰 구름이 흘러가는 사이로 경작지도 자주 보이고 황토색 지붕의 농가 주택들이 보이드니 시내로 들어섰다.
일부 고층빌딩이 있는 지역을 제외 하고는 주택들이 잘 정돈된 숲속에 자리 잡고 있어 풍광이 아름다워 동영상으로 담았다. 상당히 넓은 멕시코 시내를 통과하여 착륙하였다.
비행장에는 게류중인 여객기도 많고 계속해서 이착륙을 하고 있어 활기가 넘쳐 보였다.
17시 15분에 도착하여 밖을 나오니 김민정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쿠바와 달리 선전용 야립간판이 중국의 고속도로변을 연상케 할 정도로 많았다. 시내로 향하는 길에 자동차도 넘쳐흘렀다.
멕시코시티의 면적은 1,485평방키로 이고 인구는 2,400만 명(외곽까지 포함 하면 2,700만 명)
이 중 우리 교민은 1,700명이란다. 그리고 이곳은 해발 2,240 m의 고도이다. 1일 교통량이 400만대나 된다고 했다.
주황색 저녁노을이 우리일행을 안내하고 있었다.
멕시코는 스페인의 지배를 300년이나 받았기에 언어는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주변에 대형 야립 간판이 계속 나타났다.
시내는 서울처럼 버스전용도로를 이용하고 있었다.
멕시코 좁은 도로는 가로수가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
멕시코 시내 중심지인 인슈랜드라는 거리에 있는 CALERIA PLAZA 호텔 830호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에 인접한 “수라상”이라는 한인 식당에서 불고기로 저녁을 했다.
2018년 3월 28일(수) 맑음
7시 30분 호텔을 나와 멕시코에 가징 오래된 도시이자. 천사의 도시라 불리는 푸에블라(PUZBLA)도시로 향했다.
푸에블라 도시는 면적 34,306평방키로 이고 인구는 590만 명이란다.
6차선 시내도로를 지나는데 차량이 너무 많아 지체되고 있었다.
멕시코 시내는 조금 지저분하고 어둡고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깨끗한 건물을 쉽게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간선도로에는 지하 통로를 많이 해두어 교통흐름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7시 50분 고속도로가 왕복 8차선이다. 외곽지대인데도 주거지역이 계속되고 있어 2,400만 명의 대도시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도로 로면 상태가 좋지 않아 동영상 촬영에 어려움이 있었다.
시내를 벗어나자 야산이 많이 나타나고 산록변에는 화려한 채색의 대규모 빈촌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지역은 그래도 대중교통은 편리 하다고 했다. 심지어 케이블카가 운행되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노란색의 긴 육교와 야립간판이 계속 나타나면서 도로를 뒤덮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나가니 왕복 6차선이다.
8시 50분부터는 6차선 도로가 산길로 접어들면서 구불구불 고개를 숨 가쁘게 넘고 있었다.
주위의 산에는 소나무 단일 樹種이고 林相은 좋지 않았다.
15여분을 다리자 평야지대가 나왔다.
도로 주변에는 休耕地가 많고 일부 밀 등이 재배되고 있었다.
9시 40분 푸에블라에 도착했다. 이곳도 해발 2,100m 고도에 위치한 도시다. 푸에블라는 타일과 도자기 생산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그래서 그런지 도로변에는 예쁘고 아름다운 도자기를 판매하는 상점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시내는 조용한 중소도시 풍경 그대로였다.
한참을 걸어서 산토도밍고 성당에 도착했다.
1572년에서 1649년까지 스페인 식민지 때 원주민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대성당. 성당의 높이는 72m이고 종탑에는 19개의 종이 있다.
바로크 양식의 성당내부로 들어가니 황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필자가 지금까지 세계여행을 하면서 본 것 중 가장 화려하다고 느껴졌다.
촬영이 허용되어 마음껏 영상으로 담고 담았다.
10시 30분까지 관람을 끝내고 벤자민 나무가 욱어진 보행자 전용도로를 지나 가까이에 있는 소깔로(?) 성당 옆 작은 공원에 도착했다.
이곳도 산도도밍고 성당 보다는 못했지만 내부 장식이 화려했다.
촬영이 금지되어 눈으로만 담았다.
성당 바닥은 30cm 정사각형 대리석이 얼마나 많은 사람 들이 다녔는지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다.
성당 옆 공원의 분수가 더위를 시원하게 식혀주고 있었다.
이국의 정취를 맛보면서 이색적인 곳은 영상으로 담으면서 잠시 여유를 가져 보았다.
이어 가까이에 있는 뷔페식당에서 중식을 하고 12시 50분 산타마리나 성당으로 향했다.
소요시간은 30분이다. 가는 도중에 “자카란다”라는 보라색 꽃이 만발한 도로를 지났다.
(남아공의 행정수도 프리토리아 에는 전부 자카린다 로 가로수를 심어 장관을 이루고 또한 축재도 열린다.)
활엽수는 연초록 잎이 부드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13시 30분 주차장에 도착했다.
도시 외곽에 있는 산타마리아 성당은 성모마리아의 3대 성지 중 하나라는데 내부에는 금장 장식이 화려했고 곳곳에 천개의 얼굴상을 새겨 두었는데 내부 촬영이 금지되어 아쉬웠다.
13시 50분 세계최초의 피라미드(사방 400m, 높이 76m) 위에 지어져 교황(요한 바오로 2세)이 다녀 간 전통적인 치유의 성모 성당으로 향했다. 소요시간은 20분이다.
스페인들 점령 시에 피라미드를 1/3정도 허물고 지금의 화려한 산난도리스(SANANDORES CHOLULA)성당을 지었단다.
오후 햇빛에 빤짝이는 성당을 향해 땀을 흘리며 숨차게 올라갔다. 물론 본 피라미드 주위로는 넓은 면적에 발굴된 수많은 유적들을 둘러보면서 올라갔다. 길이 가파르고 멀어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들고 있었다.
치유의 성모 성당도 기금 마련을 하고 있으면서 내부 촬영금지였다.
멕시코 사람들은 집에 우환이 생기거나 아픈 사람이 생기면 여기 와서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제단 위 성모상 뒤를 지나갈 수 있어 아름다움을 영상으로 담았다. 대단한 솜씨 들이였다.
15시에 우리일행은 멕시코 시내로 향했다. 왕복 6차선에 시원하게 달렸다.
도로변은 휴경지도 많았지만 울타리용이나 경계 표시용으로 수양버들이 산재해 있어 삭막하지는 않았다.
다시 꾀 높은 산 왕복 6차선 고속도로를 넘어야 했다.
석양을 안고 가야하고 외기온도가 30도를 넘어 에어컨 성능이 좋아도 시원치 않았다.
호텔에 도착하여 잠시 쉬었다가 가까운 곳에 있는 한인이 경영하는 아리랑 식당에서 삼겹살 파티를 했다.
2018년 3월 29일(목) 맑음
오늘은 시내 관광 투어라 9시에 호텔을 나와 수마야 박물관으로 향했다.
4차선 중앙 분리대에는 아름드리 소철나무 등이 아름다운 자태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부자들이 산다는 “마사리” 부촌지역을 지나는데 도로마다 숲으로 덮여 있었다.
독특한 디자인과 색상의 미려한 수마야 박물관은 멕시코 최고의 부자 카를로스가 세운 것으로 최대 규모의 로댕 작품과 예술품이 있다는데 내부 관람이 안 되어 건물 외관만 영상을 담고 9시 30분 인류학 박물관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도로변 가로수 아래에는 전부 꽃으로 조경을 해둔 대통령이 거처하는 궁을 지나 9시 45분에 인류학 박물관 주차장에 도착했다.
Chapultepec 공원에 위치한 인류학 박물관은 1964년에 문을 연 2만4천 평에 이르는 대규모이다.
입구 분수대를 지나 검색대를 통과하면 Pedro Ramirez에 의해 설계된 박물관에는 신화의 나무를 상징하는 “빠리아구아” 라는 한 개의 기둥에 올려 진 우산모양의 지붕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강진에 견디도록 내진 설계를 하였단다.
인류의 발현부터 고대사의 생활상과 아즈택 문명 , 마야문명 등을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둘러보았다.
특히 무게 24톤이나 되는 거대한 태양의 달력을 벽면에 부착시켜 관광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었다.
11시 30분 밖을 나오니 높은 장대에 줄을 매달아 줄 끝에 사람이 매달려 거꾸로 내려오는 ‘골라도래스“라는 곡예를 영상에 담고 또 주차장 옆에 깃털 등으로 요란한 원시인 복장을 한 남녀들이 북을 치며 노래하는 것도 영상에 담았다.
공원 옆에 있는 식당에서 현지인들의 음악 연주를 보며 중식을 끝내고
13시 30분 귀족들의 주거지 아즈택 시대의 수도였던 떼노츠티틀란 시대의 마지막 운하 소치밀코(꽃 생산지라는 뜻)로 향했다. 소요시간은 30분이다.
500페소의 사진 속 인물인 유명한 부부 미술가 프리다와 디에고가 살았던 청색 집을 돌아 외곽 순환도로를 탔다.
도로 중앙분리대에는 60년대에 도입된 지하철이 지나가고 있었다.
13시 58분 소치밀코 주차장에 도착하니 수백 대 차량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일행은 제일 가장자리에서 하차를 했다.
이곳 소치밀코는 그 길이가 180km 이고 선착장만 11개가 이는 거대한 규모다.
장대로 저어 운행하는 배는 (승선인원 20명 정도) 조잡한 단장과 비 가림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배가 움직이는 속에 장사군도 있고 곳곳에서 다양한 악기로 연주하는 요란한 소리가 유원지 분위기를 한층 고조 시키고 있었다.
우리 배에도 트름벳 3인과 현악 연주 4인 성악가 등이 승선하여 뻔쩍이는 유니폼을 입고 음악 연주로 흥을 돋우어 주었다.
40여 분간의 선상유람을 끝내고 소깔로 광장으로 향했다.
15시 55분 소깔로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 중앙에는 멕시코 대형국기가 긴 그림자를 뿌리며 휘날리고 관광객들은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1521년 스페인 정복자 코르데스 등에 의거 파괴되어 폐허가 된 역사의 현장이다. 소깔로는 '기반석'이라는 뜻의 넓은 광장 이었다,
1843년 산타 안나(Santa Anna) 대통령이 독립기념탑의 기반석을 놓으면서 소깔로로 이름을 바꾸었다.
도시의 중심인 소깔로 광장(Zocalo Square)은 아즈텍인이 해발 2240m에 도시를 세웠을 때부터 거대한 신전이 위치한 도시의 심장부였다
먼저 소깔로 동쪽에 있는 아즈택 시대의 신전의 유적이 발굴되어 있는 지하를 둘러보았다.
과거 문명의 흔적을 모형도까지 만들어 일목요연하게 설명토록 해두어 이해를 돕고 있었다.
이어 광장 중심에 있는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Cathedral Metropolitana)의 내부를 돌아보았다.
1524년 건축을 시작해 240년 동안 다양한 건축양식을 담아내면서 완공됐다고 했다
거대한 성당내부는 화려한 금박 장식과 높은 천정까지 닿는 거대한 돌기둥과 천정의 아름다운 채색을 살펴보면서 영상으로 담았다.
많은 교인들이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멕시코 중심에서 스페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을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대통령 궁(Palacio Nacioal)이 있고 그 정면에 있는 (청사 위에 멕시코 국기가 있는 건물은 전부 정부청사임) 정부청사 2동과 우측에는 호텔과 백화점 등이 소깔로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여러 곳을 열심히 영상으로 담고 16시 40분 호텔로 향했다.
소깔로 광장 가까이의 오른쪽 작은 광장이 있는 곳의 3층 석조건물 멕시코 국립미술관 앞을 지났다.
교통체증이 심했다. 얼마 안가 이번에는 왼쪽에 예술의 전당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17시 30분 호텔에 잠시 쉬었다가 18시에 첫날 들렸던 수라상 식당에서 비빔밥으로 저녁을 했다.
2018년 3월 30일(금) 맑음
오늘도 9시에 호텔을 나와 천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테오티우아칸으로 향했다.
필자가 머무는 호텔에서 보이는 로터리에 있는 독립을 상징하는 황금의 천사의 동상을 지나면서부터 계속되는 중앙 분리대가 폭 7~8m 숲이 욱어진 이 메인 도로 레포르마는 1860년대 페르디난드 폰 로젠지그가 설계 조성했단다.
테오티우아칸 까지는 차가 밀리지 않으면 1시간 예정이다.
아침이라 그런지 외곽으로 빠지는 왕복 6차선 도로는 교통체증이 없고 중앙 분리대에는 아름다운 소철 나무 아래로 버스 전용도로가 있었다.
9시 20분부터는 버스전용도로 안쪽으로 지하철이 지나가고 곳곳에 지하철 승강장이 나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도 가도 끝없는 멕시코의 빈민촌 달동네가 이어지고 있었다.
9시 30분 8차선 도로인가 싶더니 6차선이 되면서 갑자기 교통체증이 생겼다. 모두 테오티우아칸 피라미드로 가는 차량이라 했다.
우리가 탄 벤츠 미니버스는 체증을 피해 우회키로 하고 5개의 출입구 중 3번 출입구로 방향을 바꾸었다.
도로주변은 낡은 집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9시 50분부터는 전형적이 농촌지역이다. 간혹 녹색재배작물과 손바닥 선인장을 재배하는 것이 보이지만 대부분 아직 파종을 하지 않은 농지였다. 물론 경지정리는 되어 있지 않았다.
도로는 협소하고 포장상태도 좋지 않았다.
10시 15분에 정문에 도착했다. 태양의 신전 옆쪽이다.
이곳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 은 해발 2300여 m에 형성된 멕시코의 고대 도시이다.
이 도시는 멕시코시티에서 북동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산 후안 테오티우아칸 데 아리스타 (San Juán Teotihuacán de Arista)에 있으며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큰 피라미드 유적지로써 거대한 신전으로 유적지의 총 면적은 83평방키로 이다.
태양의 신전(규격 가로세로 각각 220m, 높이 65m, 248계단)등은 0세기부터 100년 동안 매일 5만 명을 동원 작은 돌들을 시멘트 공법으로 완공 했다고 했다. 태양의 신전 앞으로가서 정상을 오르는데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1시간 30분이면 다녀올 수 있다고 했다.
사람이 너무 많을 때는 5시간 소요 될 때도 있었다고 했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을 구분을 해두고 곳곳에서 이탈을 못하도록 통제를 하고 있었다.
물론 위로 올라 갈수록 통로가 좁아지고 있었다.
올라가면서 내려다보니 신전 사방으로 광활한 면적에 정교한 석축으로 쌓은 유적이 펼쳐져 있는데 그 규모가 대단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무더운 날씨 속에 극기 훈련처럼 땀을 많이 흘리면서 올라갔다.
태양 피라미드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수많은 석축 유적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평지로 내려와서 우리일행은 폭 40m, 길이 2.4km의 광장 끝에 있는 달빛 피라미드 향하는데 이곳에도 수많은 인파가 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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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서 유적지를 동영상으로 담으면서 달빛 피라미드(높이 46m, 5층 구조)의 가파른 경사의 계단을 올라 중간 지점 전망대에서 멀리 보이는 태양 피라미드를 포함한 부근의 방대한 유적을 영상으로 담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 사진 촬영도 쉽지 않았다.
5번 출구로 나가는 중간에 작은 규모의 공명 장소에서 박수를 처 보기도 했다.
노점상들이 즐비한 곳을 지나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라 데킬라 시음장으로 향했다.
12시가 지났는데도 피라미드로 입장 하려는 관광객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12시 15분 데킬라 시음장에서 다양한 종류의 주류를 시음해 보았다.
이곳에서 털 없는 개를 보았는데 머리는 개가 분명한데 몸통은 돼지를 닮은 것 같았다. 열대지방이라 이런 진화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버스는 13시 10분 식당으로 향하는데 역시 관광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관광하는 것이 전쟁이다.
가까이에 있는 뷔페식당에서 중식을 하고 13시 50분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을 대표하는 세계 3대 성지 중 1대 성모 발현지 과달루페 성당으로 향했다. 날씨가 약간 흐려 더위를 식혀 주었다.
왕복 4차선 도로변에는 과수농원도 있고 푸른 농작물이 곳곳에 자라고 있었다.
멀리 독립된 야산만 보일뿐 끝없는 평원이었다.
14시 경 부터는 산재된 주택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는 것이 계속되고 있었다.
14시 30분에 과달루페 성당 정문에 도착하니 후드득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곳에는 7개의 성당이 있다고 한다.
과달루페의 성모(Virgen de Guadalupe)는 1531년 12월, 후안 디에고라는 인디언 改宗者에게 동정녀 마리아가 무려 2번(11월 9일과 12월 12일) 나타나 교회를 세우라고 말한 그 장소 가까이에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동정녀 마리아의 2회 출현은 현재 과달루페 성당에 자리하고 있는 ‘과달루페의 동정녀 마리아’라는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과달루페의 성모 축일 날짜는 12월 12일이다. 이는 성모 마리아가 멕시코 시티 인근의 테페약 언덕에서 성 후안 디에고에게 나타난 날짜인 1531년 12월 12일을 기념하여 제정한 것이다
과달루페의 성모 성지 입구에는 국립 인류학 박물관을 설계한 페드로 라미레스 바스케스 (PEDRO RAMIREZ VASQUEZ) 가 설계한 기둥 없이 와이어로 지탱하는 독특한 원형 건물이있다.
이 성당은 1974년 착공해 1976년 10월 12일 완공 되었는데 만 명을 수용 할 수 있단다.
본당 앞 좌측에 있는 2개의 고딕체 성당은 1695년에 지어지기 시작 1709년에 완성되었는데 지진으로 인해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광장 중앙에는 시계탑이 있고 그 좌측에는 디에고가 틸마를 펼쳤을 때의 모습을 조각상으로 재현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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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지나 장미 정원을 지나서 찾아간 성당은 지진으로 성당 주변의 지반이 심한 균열과 침하가 있어 철망으로 덮여 놓았는데 성당이 훼손되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입구로 나오면서 만 명을 수용한다는 화려한 성당 내부와 “동정녀 마리아” 상을 둘러보았다.
15시 30분 멕시코 시내 한인 식당(도시락 찾음)을 거쳐 16시 10분에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20시에 AM090편으로 몬텔레이 공항으로 향했다.
소요시간은 1시간 45분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멕시코시 야경은 마치 보석을 뿌려 놓은 것처럼 정말 아름다웠다. 전기 사정이 좋아 보였다.
몬텔레이 공항에서 우리일행은 여객기에서 그대로 기다리고 항공유 보충과 한국행 승객을 태운 후 01시 20분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지루한 14시간 45분 비행 끝에 4월 1일 06시 1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