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은 요한이 베푼 세례운동과 비교할 때,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해야 할 만큼 그 당시 사회 현실이 파국적이라는 시국관에서는 일치했으나, 도덕적 회개를 강조한 요한에 비해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동시에 실질적으로 삶의 희망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는 달랐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는 세상의 죄로부터 더 이상 물들지 않겠다는 선언과 이로 인한 죄를 용서해 주는 사죄 효과를 거두었으나,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세상의 죄에 물들지 않음은 물론 죄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겠다는 다짐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구분되었다. 이것이 대속(代贖)적인 세례이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세례’(마르 10,39; 루카 12,50 참조)로 표현하셨다.
마르코와 그가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해외에서 거주하다가 예루살렘에 순례하러 왔다가 그리스도 신앙을 알게 된 이방계 유다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 역시 예수님을 직접 만났거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으나, 그리스도인들이 베푸는 도움과 애덕 실천을 체험했고,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임을 깨달으라는 요청을 받고 있었다. 그 결과, 대속의 세례를 받으려는 다짐을 하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미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줄도 모르고 살다가 많은 신앙의 증인들을 통해서 그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 것과 비슷하다. 이 깨달음의 힘이 애덕을 실천하도록 투신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미 받은 사랑을 깨닫고 그 속에 작용한 섭리적 손길을 느끼는 것, 그리하여 사랑의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처럼 살기로 결심하여 대속의 세례를 받기에 이르는 것, 이것이 마르코가 말하는 바, ‘예수를 아는 것’이다.
이는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은 체험한 ‘성령의 세례’(사도 2,1-13)이기도 했다. 과연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다고 책망 받던 제자 시절과는 딴판으로 ‘담대한 믿음’(사도 4,13.29.31)을 지니게 되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겁박하는 대사제 앞에서,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든가, 최고의회에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발휘하여 신자들을 이끌었다(사도 7장). 이에 신자들도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한” 결과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사도 2,42-47) 공동생활 양식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을 만큼 변화되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체험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