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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4장
1. 싸움과 다툼(1-3)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현재의 모습으로 판단을 하지만, 인생은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입니다. 지금 부자가 나중에 가난해질 수 있고, 지금 가난한 자가 나중에 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끝까지 가봐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생의 끝에 서서 그 마지막이 어떻게 갈리는가가, 인생의 진정한 모습이기 때문에, 끝까지 가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지막 때 내가 어떤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성도라면 하루하루를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있어야 하는 싸움입니다.
이것을 왜 싸움이라고 말씀드리는가 하면, 우리 안의 욕망은 항상 나를, 세상 모두가 달려가는 길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내가 높아지는 길입니다.
반면에 성도가 달려가는 십자가의 길은 낮아지는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은, 내가 낮아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내 안의 욕망이 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곧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에, 성도에게 싸움은 필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싸움, 다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1절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느 것이 아니냐?” 여기서 말하는 싸움은, 앞에서 언급한 성도에게 있어야 할 싸움이 아닌, 욕망의 충돌로 인해서 나타나는 싸움을 말합니다.
인간의 세계는 다른 말로, 곧 욕망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존재하는 곳에서 필히 나타나게 되는 것은, 싸움이고 다툼인 것입니다. 욕망은 낮아짐이 아니라 높아짐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자신의 높아짐을 위해, 경쟁하고 투쟁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을 더욱 충돌질하여 극대화시킴으로써, 끝없는 경쟁 속에서 더 많은 효율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회사든, 학교든, 어디를 가도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까지 이러한 세상의 방식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봉사하고 전도하고 기도하는 것까지 경쟁화해서, 타인을 이기기 위해 교회를 다니고, 봉사하게 하고 헌금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과 전혀 상관이 없는, 세상의 싸움일 뿐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싸움을, 눈치 챌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싸움에 휘말려 살아가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깨어있는 성도입니다.
예수님을 아무리 부르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도 깨어있지 못한다면, 세상과 다른 시각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자신의 욕망의 싸움과 다툼의 현장으로, 끌어들이는 것밖에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아닙니까? 얼마든지 세상으로부터 대접을 받으실 능력이 있으셨지만, 오히려 배척을 받고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의 많은 성도들은, 십자가 앞에서 누구를 만나는지 모르겠습니다. 힘 있는 영웅으로 세상에 오셔서, 세상으로부터 온갖 대접을 받은, 그런 예수를 만나는 것인지,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세상에 힘 있는 자 되는 포부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복을 달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자신의 욕망의 싸움에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간의 하찮은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멸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고난을 외면하면서, 십자가를 외치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욕망은 악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세상은 욕망을 포부와 비전 등등으로 해석하면서, 욕망을 가진 자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을 하기도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을 죽인 원수로 드러날 뿐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도,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붙들렸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리고 욕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에, 결국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게 되고, 평가된 가치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면서, 결국 차별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의 모습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기에,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것이, 교회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상관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심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줘야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에 서서, 하나님이 벌이실 일을 바라보면서, 참된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부지런히 선포해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조차도 참된 가치를 보지 못함으로 인해서, 세상과 똑같은 싸움을 하게 되고, 세상과 똑같은 시각과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과 다툼이 소멸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이, 사실은 헛되고 헛된 것이며, 쓸데없는 것들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 여부가 돈과 권력을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에 있음을 진심으로 믿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욕망에 의한 싸움과 다툼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싸우고 다투지 않습니다. 세상이 볼 때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야 말로, 쓸데없는 짓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한 것에는, 단 한 푼의 돈도, 일초의 시간도 아깝다고 여길 만큼, 세상이 볼 때 그리스도를 아는 문제는, 밥 먹고 할 일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쓸데없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 때,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인생의 성공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벼락을 맞고 하루아침에 권력자가 되는 것보다도,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인생의 성공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개는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세상과 같은 욕망으로, 싸움과 다툼 속에 살면서 예수를 부릅니다. 이것을 야고보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2-3절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러분은 이 내용을 근거로 해서,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을,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물론 본문의 내용대로 하면,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는 것은, 잘못 구하는 것이 분명하고,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도 분명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사업이 성공해서 부자 되게 해주세요’라면,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돕고 싶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습니다. 그러니 사업이 성공하게 해서, 가난한 자들을 많이 돕게 해주세요’라고 하면,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정욕으로 쓴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많이 돕고 싶다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욕망일 뿐입니다.
대개는 그런 생각을 선하다고 생각하고,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데, 남을 돕든 무엇을 하든, 자신에게 주어진 분량 안에서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분량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이 하고 싶다는 것은 욕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선한 것이든 무엇이든, 작은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욱 크고 많은 일을 함으로써, 자기만족을 이루고 싶어 하는, 욕망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이, 세상이 선한 것으로 여기는 일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선한 일을 한다’는 것으로, 자신의 기도를 정당화하면서, 하나님은 당연히 자기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고, 응답하실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위해 기도하는 모든 것이,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구하여도 받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은 결국 욕망으로 드러날 뿐이고, 싸움과 다툼으로 나올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의 뜻을 살피고, 주의 뜻에 순종하기를 소원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주의 뜻은 주의 백성이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에서 높아지는 길이 아닌, 주님이 가신 낮아지는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대접 받고, 그 이름이 높임 받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미움을 받고 고난을 받는 길이라고 해도, 주님이 가신 길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러한 길을 갈 수 있기를 소원하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하늘로부터 온 지혜로 인해서, 인생에게 참으로 소중하고 존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이러한 성도로 만들어 갑니다. 진심으로 존귀한 것을 깨닫게 하시고, 욕망으로 나는 싸움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성도로, 굳게 서기 위한 싸움이 있는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원할 것이, 바로 이런 성도로 굳게 서는 것입니다. 높아지기 위한 길이 아니라, 낮아지기 위한 길을 가고자 하는,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싸움이 있는 성도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원수(4)
지구상에는 수많은 나라가 존재하는데, 각 나라마다 문화와 사고방식이 다릅니다. 미국과 한국의 문화나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미국에서 한국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드러내면, 자칫 큰 곤경에 처할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얼마든지 이해되고 통용되는 일들이, 미국에서는 범죄로 취급되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로 여행할 때는, 미리 그 나라의 풍습이나 사고방식, 문화 등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지구에 속한 나라들끼리도, 문화나 생각, 사고방식이 다른데, 하물며 아예 이 세상과는 다른 나라, 곧 하나님 나라의 생각이나 사고방식은,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기존의 생각과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는 뜻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보통인 것입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4절 “간음한 여자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간음한 여자들을 향해서,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원수를, 어떤 존재로 생각합니까? 대개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욕하는 사람이나, 교회나 성도를 괴롭히고 박해하는 사람, 또는 부처를 믿는 불교나 점쟁이 무당과 같은 존재를, 하나님의 원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야고보는 세상과 벗된 것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합니다. 곧 교회를 다니든 다니지 않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 벗되어 살아가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세상과 벗되어 살아가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벗되어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내가 세상과 벗되어 살아가는 하나님의 원수인지 아닌지를,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간음한 여자들을, 세상과 벗되어 살아가는 것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간음이라는 행위 자체가, 세상과 벗되어 사는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간음하는 행위가 세상과 벗되어 사는 것이라면, 간음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할 것입니다.
간음한 여자란 신랑이 있으면서도, 마음에 다른 남자를 두고 그와 동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마음에 신랑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남자를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음은 여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도 모두 하는 것인데, 왜 여자만을 지칭할까요? 그것은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는 대로 예수님과 성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만납니다. 성도가 영원히 의지하고 사랑해야 할 분이, 신랑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연약한 신부를 지키고 보호하시면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해 가시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신랑 되시는 그리스도만을 마음에 두지 않고, 다른 사랑의 대상을 마음에 두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간음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랑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랑의 대상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사람의 싸움과 다툼이,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정욕을 다른 말로 하면, 관심이 예수님께 있지 않다는 것이 됩니다. 사랑의 대상이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싸움과 다툼이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싸움과 다툼이 발생하는 동기는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그 원인을 하나로 압축한다면, 관심이 예수님이 아닌 다른데 있다는 것이 됩니다.
교회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에만 모든 관심을 두고 모여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모든 관심을 둔다면, 싸움과 다툼의 동기가 발생한다고 해도, 그것이 싸움과 다툼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성도가 예수님에게 모든 관심을 둔다는 것은, 낮아진 자리에서 주님의 섬김과 희생을 증거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도가 교회 안에서, 자신의 자존심과 자기의 뜻을 내세우면서, 싸움과 다툼으로 나가겠습니까? 내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은혜와 섬김을, 증거하는 것인지를 살피면서 행동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 모든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관심이 자신을 향해 있다면, 결국 자기를 향한 관심은, 자기 사랑과 자기 자존심을 토할 수밖에 없고, 서로의 자존심으로 결국 싸움과 다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세상과 벗되어 살아가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벗되어 산다고 해서, 세상의 쾌락에 빠져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살아가는 것처럼,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두고 사는 것이, 곧 세상과 벗되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르되, 자기에게 관심을 둔 채 부르기 때문에, 결국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에게 마음을 두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을 두고, 간음한 여자들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세상과 벗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과 원수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말씀을 두고 생각할 때, 우리 자신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떳떳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말하되, 여전히 내 속은 나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한 채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원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것으로, 자신을 정당한 성도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야고보가 교회를 향해서,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야고보는 교회가 하나님께 입은 은혜가 어떠한가를, 깨닫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원수된 자를 사랑하시고, 긍휼을 베푸신 분임을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은혜가, 착하고 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당장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하나님의 원수에게 부어진, 은총이고 자비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원수는, 세상과 벗되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결국 하루 한순간도, 세상과 벗되어 살아가는, 원수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원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 은총을 베푸시고, 믿음을 주시고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앞에, ‘이게 웬 은혜입니까?’라는, 감사의 탄식이 나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된다면, 자연히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관심이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자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가 더욱 크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성도가 모이는 것이고, 이처럼 예수님에게 관심을 둔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욕심을 나타내려고 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고 증거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두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베풀어진 하늘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 그 분량을 압니까? 사실 하늘의 은총의 분량은, 인간이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날마다 새롭게 알아가고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에 불과한 자 같은 우리에게, 쏟아진 은총의 단비를 맞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면 살 수 없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우리의 심령은 하늘의 좋은 것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심령의 소유자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마음 뺏기기 보다는, 주님의 사랑에 마음을 뺏긴 채, 하늘을 소망하면서,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을 증거하는 자로 사는 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삶일 것입니다.
3. 성령이 시기하기까지(5-6)
천국은 싸움과 다툼이 없는 나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천국에 들어가면 다들 온유해지고, 남에게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모든 것이 충족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충족된 나라라는 것은, 세상에서 소원했던 것들이 넘칠 정도로 주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소원하고 사모하는 것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곧 세상의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던 마음이, 하늘의 은총에 모든 가치를 두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달라졌다면, 그런 마음으로 천국에 거한다면, 원하는 것이 모두 충족된 마음이기 때문에, 갖기 위해서 싸우고 다투는 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과 똑같이 싸움과 다툼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원하는 것이 하늘의 것이 아니라, 땅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사모하고, 세상의 것으로 위로를 얻고, 힘을 얻고 싶어 하는 그것이야 말로, 세상을 벗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5절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이 구절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성도를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신다는 뜻으로 생각되기 쉬운데, 성령이 하나님을 시기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구절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모하시는 그 마음이, 얼마나 큰가를 뜻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서 인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모하시는 것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은혜로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를 사모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과 벗되어 살아가는 자를 사모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소망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을 사모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형편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세상과 벗이 되어서, 하나님의 원수의 길만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지 않겠습니까? 곧 세상과 벗되어 살아가는 것을 두고, 시기하신다는 뜻입니다.
그토록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철저히 외면해 버린 채, 오직 세상에서의 내 인생만 생각하고 관심두면서,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여전히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것을 더욱 큰 은혜라고 말합니다. 6절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보면, 멸망에 있는 자를 예수님의 피로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 은혜로, 은혜가 종결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 외에, 또 다른 은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죄인된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배반한 채 세상과 벗이 되어,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가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붙들어 주시고,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고 징계하시면서,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된 자리에, 붙들어 놓고자 하시는 은혜가 우리를 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큰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주시고, 그 피를 믿고 구원 얻는 것은, 우리의 책임으로 맡겨 놓으셨다면, 생명에 이를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의 가치를 알아볼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상의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악함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에서, 하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또 다시 우리의 악함까지 다스리시면서, 하늘의 은총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자리까지 이끌어 가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은혜 위에 은혜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출 34:14절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하나님을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질투라는 인간적 속성이 하나님께도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긴다면, 심판을 해서라도, 기어코 하나님만 섬기는 백성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참으로 강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이 지금 우리들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그나마 예수님에게서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무엇을 의지하겠습니까? 나를 지금 성도의 자리에 있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세상의 그 무엇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교만한 자란 주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른 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힘도 죄인된 우리를, 생명에 도달하게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야 말로, 교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겸손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에 점점 크게 부각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하는 독생자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하시고, 백성으로 삼아주신 그 은혜가, 크게 부각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도의 마음은 자연히 하나님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족함을 누리고 싶어 하기보다는, 여전히 세상의 것으로, 마음의 족함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싸움과 다툼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싸움과 다툼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에서 예수님에게만 마음을 두고, 하늘의 것만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모여서 하늘의 것만을 구하고, 하늘의 것으로만 감사하고자 한다면, 싸울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에서의 싸움과 다툼은,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자기 이름을 높이고, 자랑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가 중심에 있기 때문에, 타인보다 높아지기 위한 싸움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것으로만 감사하고자 한다면, 이미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서, 원하는 모든 것들은 충족될 것입니다. 곧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부족함이 없는데, 또 무엇을 채우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으로 채워진 심령이기 때문에, 자신의 높아짐으로 자기를 채우고자 하는 욕망은, 이미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싸움이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것을 천국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을 사모하십니다. 그래서 세상과 벗되어 살아갈 때, 성령이 시기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눈만 뜨면 여전히 세상이 크게 보이는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더욱 크신 은혜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우리를 생명에 있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6-10)
하나님의 은혜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모든 백성에게, 동일하게 베풀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은혜에 차별이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왜냐하면 각자에게 주어진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풍족하게 사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어렵게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사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질병으로 인해 고통스럽게 살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동일하지 않고, 마치 차별된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과 육신의 것을, 좋은 것으로 간주한 채 살아가는, 인간의 잘못된 가치관에 의한, 잘못된 판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세상의 것을, 좋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늘의 것만이 좋은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좋은 것으로 선물을 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하나님의 선물에 담겨 있는,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조건만을 바라본 채, 은혜를 판단하고 저울질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되고, 은혜의 기쁨 역시 알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아는 성도는, 비록 세상의 현실이 어려움과 고통으로 다가온다고 해도, 그런 모든 일에서 자신을,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하늘의 은총만을 구하는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참되고 크신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붙드심과 간섭하심을 보게 됨으로써,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7절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여러분은 이 말씀대로 마귀를 대적하여, 마귀가 여러분을 피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럴 힘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세상과 벗되어 살고 싶어 하고, 세상에 있는 것이 더 의지가 되고, 힘으로 삼고 싶어 하는데, 그런 우리가 어떻게 마귀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성도를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여, 마귀가 피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 힘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사모할 것은, 바로 이러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어떤 은혜를 구합니까?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구합니까? 과연 그런 은혜를 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은혜를 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마 거의 대부분은, 세상이 우러러보는 위치에 우뚝 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그것을 크신 은혜로 간주할 뿐입니다.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곧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마귀의 시험을 보면, 마귀는 예수님에게 세상에서 영광을 얻고, 그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제시합니다. 곧 세상이 기대하고 원하는 것을 내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증거를, 세상의 복과, 영광과 기적을 체험하는 것으로, 증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을, 예수님은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삶의 원칙을 제시하시고,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며,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삶이며, 내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서 떡을 얻고자 하고, 자기 이름이 높임 받는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귀에게 순종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욕망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참된 은혜로 알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그러한 성령의 사람으로, 굳게 세우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그래서 성도가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가면, 성령이 근심하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성도라면, 성령의 근심과 탄식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복종하면서 마귀를 대적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소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8절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것은, 반대로 세상과는 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합니다. 곧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세상에서 풍족하게 살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 위해,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그 마음이 세상에서는 멀어지고, 대신 하나님의 나라가 그 심령에 더욱 선명하고, 확실하게 다가오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것으로 풍족함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의 마음 상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심령의 성도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은혜는, 항상 세상으로 마음이 나눠진 채 살아가는 우리를,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에만 소망을 두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은혜로 여길 수 있어야 하고, 이러한 은혜를 소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으로부터 멀어진 심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10절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이 말씀도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추구하는 것은, 슬픔도 애통도 울음도 아니라, 웃음과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히려,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버리고 싶은 것을 오히려 추구하라고 말하는데, 누가 이런 말에 순종하고자 하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가 아니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내용인 것입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것은, 세상의 웃음에 취해서, 하늘의 기쁨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잊고 있는 자신을 두고, 애통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세상에 마음이 취해 살아가는,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면, 분명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진 자신으로 인해, 슬퍼하고 애통해 하며 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은혜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슬퍼하고 애통해 하며 울 수 있는 사람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 외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웃음과 즐거움의 자리에서, 내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을 발견하고, 그로 인해 애통해 하고 근심하는 것이야 말로, 낮아진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마음을 높이시는 것입니다. 곧 심령이 가난한 자가, 하나님 앞에서 높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욕망으로 구하는 것들이, 채워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욕망에 이끌려 가고 있는 길에서, 정신 차리게 되고, 세상이 추구하는 웃음과 즐거움 대신에,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자로 인해서, 슬퍼하고 애통해 하며 울 수 있는, 심령이 되는 것이야 말로 큰 은혜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이며, 은혜가 충만한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이 보지 못하는 하늘의 것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것을 구하는 성도로 살아가게 합니다. 이러한 큰 은혜를 구하기 바랍니다.
5. 서로 비방하지 말라(11-12)
11절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야고보가 형제를 비방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데, 사실 사람에게 있어서 타인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그 본성상 아주 자연스런 행동입니다. 곧 사람의 성품에 따라서 비방을 할 수 있고, 하지 않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게서는 비방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단순히 비방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뜻으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러한 말은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와 실천으로 맺어질 수 있는,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왜, 비방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본문에 보면 야고보는 단순히,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곧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말입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한 것이, 왜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한 것이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형제가 곧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형제가 율법일 수는 없습니다.
야고보의 말대로 하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힘쓰면서 살아왔다고 해도, 야고보가 볼 때는,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왜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한 것을,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사람이 사람을 비방하는 것은, 자신의 죄와 실수와 허물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비방과 판단은, 자신의 허물과 죄와 악을 보지 않음으로써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에는 타인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비판을 받아야 할 입장에 있을 뿐, 비판을 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타인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곧 자신이 비판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한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를 말한들, 그것이 과연 진심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성도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그 고백이 진심이라면, 그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심판을 받아야 할, 악한 자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달은 성도라면, 타인을 비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타인을 비판할 자격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비방하지 말라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비방하는 것은 나쁜 행동이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이 형제를 비방할 자격이 없음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너도 비방을 받아야 할, 악한 자라는 것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기 때문에, 항상 주님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을 봐야 하고, 타인을 봐야 합니다. 내가 기준이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기준으로 하지 못하고, 내가 기준이 되어서, 타인을 비방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보게 되면, 누구도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과연 예수님의 피 앞에서, 자신의 선행과 의를 주장하며, 타인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설사 타인보다 더 나은 행동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해도, 그 역시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는 악한 존재일 뿐인데, 타인보다 더 낫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주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성도에게서는, 오직 죄인이라는 고백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처럼 주님과의 관계에서 형제를 바라본다면, 형제의 어떤 허물을 보게 된다고 해도, 나도 같은 악한 자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음을 발견하기 때문에, 자연히 비방과 판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의 어떤 허물이나 죄도, 그냥 덮고 넘어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형제를 사랑한다면, 허물을 그냥 덮고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방과 판단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만 형제로 하여금, 자신의 허물을 보게 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으며, 의의 길로 가도록 돕게 될 뿐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굴레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준행자라는 의미도, 율법으로 인해서 죄를 깨달으며, 예수님이 피 흘리신 은혜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곧 율법을 높이는 것은 율법 앞에서, 자신의 악함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를 비방한다면, 자신을 상대방에 비해 더 나은 자로 여기고, 자신의 악을 보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모든 인간을 죄 있는 자로 선언하는,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아주 가볍게 여기는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심각한 문제로, 드러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교회를 다니고, 아무리 입술로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간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또한 타인보다 예배에 많이 출석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본다고 해서, 타인보다 더 나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간주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이미 자신보다 열심이 적은,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결코, 주일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보는 것을, 타인보다 더 의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해도 인간은 죄인일 뿐이라는 것이, 율법의 선언인데, 그런 선언 앞에서 자기 행위를 보면서, 타인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나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2절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이 말씀대로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도, 입법자와 재판관의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기준으로 세울 수도 없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타인을 비방하고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형제를 대한다면, 비방과 판단이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비방과 판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죄의 몸으로 십자가 앞에 나갔을 때, 십자가는 여러분의 무엇을 대합니까? 비방과 판단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일찌감치, 멸망의 자리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인 우리를 비방과 판단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로 대했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용서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주시는, 사랑과 은혜인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법의 기준은 비방과 판단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이며 용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십자가의 법의 기준으로 형제를 대하지 않고, 나의 기준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방과 판단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비방과 판단은, 성도가 십자가의 법에 순종할 때,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 아래서, 형제 또한 은혜로 만날 때, 자연히 비방과 판단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비방과 판단은 우리의 의지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십자가의 법을 나의 법으로, 굳게 세우고 살아감으로써 해결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도를 이러한 사람으로 세워갑니다. 나의 법이 아니라, 십자가의 법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법이 여러분의 심령에, 굳건한 법으로 세워지기 바랍니다.
6. 허탄한 자랑(13-17)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 포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포부가 크면 클수록, 장래성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아무런 포부도 없이 살아간다면, 나약하고 장래성이 없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13절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3절의 말은, 대다수의 사람이 갖고 있는, 계획과 목표와 포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 그러한 생각과 포부를 책망을 합니다.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러면 성도는 장사를 해도, 이익을 남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또한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도 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본문은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어떤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장사해서 돈 좀 벌어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인간은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 생명 또한 안개와 같은 것임을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야고보는, 단지 장사해서 이익을 남기고자 하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인생의 주관자가 누구신가를, 아예 잊고 있는 사고방식을 책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살고 죽는 것이, 나의 소관이 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살고 죽는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15절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겠다는 것보다는,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할 것입니다’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은, 나의 계획과 포부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게 하신 대로 살아간다면,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형편과 상황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의 처지가 비록 불만스럽다고 해도, 변할 수 없고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잊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처지에 불만을 가지며, 좀 더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고, 성공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는 돈 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처지와 형편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이 살게 하신 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임을 생각하지 않고, 좀 더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겠다는, 사고방식이 문제임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장사해서 많은 이익을 남기겠다는 것은,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에는, 현재에 대한 만족과 감사가 없습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은혜임을 망각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허탄한 자랑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열심과 힘으로 이룬 성과를 자랑하기를 즐겨합니다. 자신의 능력과 성공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이러한 것이 허탄한 자랑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16절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왜냐하면 세상의 성공이라는 것은, 인생이 끝남과 동시에 끝나고 사라질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탄한 자랑을 악하다고 말하는 이유도, 허탄한 자랑에는 인간의 공로와 능력만 담겨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공로를 자랑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인생을 자랑하고 싶습니까? 자랑할 만한 것이 없어서, 자랑을 하지 못합니까? 남보다 나은 것도 없고, 잘된 것도 없어서 자랑을 하지 못합니까?
성도라면 자랑할 만한 것이 없어서 자랑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생에서의 모든 것이 허탄한 자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랑이 없어야 합니다. 안개와 같은 것이 인생이고,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떤 결과를 얻었든, 모든 것은 주의 뜻이 이룬 것임을 안다면, 자랑은 자연히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랑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자랑하고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멸시하는 악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각기 저마다 주어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제각기 하나님의 뜻에 의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종의 위치입니다. 이처럼 종의 위치에서, 하나님이 살게 하신 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야 말로 선이 되는 것입니다.
17절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이 말씀도 그런 의미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라는 것은, 착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죄다는 뜻이 아닙니다. 곧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또 그런 생각을 했으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인간의 양심과 도덕에 의한 행동을 말하지 않습니다. 선이 그런 것이라면, 믿음과 상관없이 선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선하지 않아서, 멸망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선한 일을 하지 않아서, 책망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선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선을 선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한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신 대로, 그 자리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주어지면 감사하다고 하고, 좋은 것이 없으면 불평하는 식의 삶이 아닙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뜻임을 믿으면서, 감사가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라는 것도 알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믿음으로 사는 것인가도, 들어서 알 것입니다. 그런데 행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알면서도 항상 다른 것을 속에 두고 삽니다.
그래서 현재의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집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죄를 안다면, 자기의 것을 내어놓는 허탄한 자랑 따위는 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그러한 자랑이 자신을 더욱 부끄럽게 하는 교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어떤 일도,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여러분이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이 가치 있다고 여겨주는 것으로, 자신의 우월감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은 허탄한 자랑일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성도에게 허탄하지 않는 것은, 믿음의 삶뿐입니다. 주의 뜻을 바라보며, 주가 살게 하신 대로 살아가면서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야말로, 허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랑하려면, 주님만 자랑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