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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교인에게 바라는 것 信天함석헌
‘불교인’이라고, 그렇게 일반 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따라 부릅니다. 내 믿는대로 한다면 ‘불교인’ ‘기독교인’ 그런 것은 없다고 합니다. 나는 '종교’ 믿다가는 객사한다고 그럽니다. 다시 말한다면, 제집에 가지 못하고 길바닥에서 죽고 만다는 말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구경의 자리에 가잔 것인데, 자리도 아닌 자리인데. 그 자리에 가려면 이때까지 라고 오던 물건은 버려야 할 터인데(아무리 크고 편히 탈 것-大乘이라도), 못 버리고 그 속에서 죽었다면, 정말 내 자리엔 못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참 의미로는 종교인이란 것은 없습니다. 믿고 산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또 말을 하려면 내 선 자리를 먼저 밝혀야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보편(普遍)적인 자리에 섭니다. 모든 참된 종교의 알짬은 하나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종파, 교파는 하나의 편의(便宜)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파주의는 내버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또 나는 믿음에는 목적격도 주격도 붙을 수 없다 합니다. ‘부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이름 할 수 없는 데 믿음이 있습니다. 또 내가 믿는다, 네가 믿는다도 없다고 합니다. 하나도 아닌 하나에 하나인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말을 하자면 할 수 없이 하나님이라 하고, 아미타불, 관음보살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때에 내가 생각하는 것은 다른 누구의 생각하는 것과도 같지 않을 것입니다. 제각기 다 저만이 아는 독특한 체험입니다. 그 한없이 독특한 것들이 독특한 채로 하나인 자리가 믿음으로 알려집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아시고 마음을 열고 싶으시면 읽으시고, 그렇지 않고 믿음에 방해된다 생각하시거든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서로 째치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서로 반대되어도 저 무한에 가서 하나 될 것이고, 서로 꼬여도 이 가다리가 저 가다리를 엎누르지 않고 서로서로 도와줄 것입니다.
첨부터 씨알의 종교로 안왔다
불교만은 아니지만, 불교는 이날까지 우리 민족을 건져왔습니다. 우리 살 속, 뼈 속에 부처님의 길이 흐르고 있습니다. 사실 불교는 들어 올 때부터 씨알의 종교는 아니었습니다. 정치의 길을 타고 지배계급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리는 언제나 넘치는 법입니다. 이용하려는 자를 도리어 정복하는 법입니다.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삼국시대에 세 나라에 다 들어오면서도 종시 그 통일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만 것은 국가를 초월하는 고등종교로서 불교의 실패라고 하여야 할 것이지만 그래도 아주 멸망을 면하고 기형적으로나마 통일이 된 데는 역시 씨알 속에 들어간 불교의 힘이 클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소위 통일문화라고 하는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남의 것 뺏어 먹고 자랑하기 좋아하는 속알 없는 사람들은 지금도 세상은 마치 김춘추 김유신이 다 만들고, 불국사 석굴암은 정치 잘해서 된 것처럼만 말하지만, 채찍만 무서워하고 약탈물만 생각하는 군졸만 가지고 전쟁을 어떻게 하며, 건축가 조각가만 가지고 어찌 절을 짓고 부처님을 아로새길 수 있습니까? 꽃이 흙에서 나오듯이, 쇠가 바위에서 나오듯이, 모든 재주, 모든 힘은 씨알과 그 믿는, 믿는 줄도 모르게 믿는, 그 흙같이 부드러우면서도 바위같이 굳은, 그 신념에서 나옵니다. 씨알은 성도 이름도 없던 그 시대입니다. 인간 대접을 못 받으면서도 그 나라를 나라로 사랑했고, 일한 값을 받지도 못하면서 사람은 사람 노릇하여야 한다는 양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될 수 있었지, 그것 없이 짐승만 가자고 어찌 가능합니까? 여러분, 대웅전의 뒷 구석에 무너져가면서 아직도 아니 무너진 초초한 칠성각, 산신령은 그 눈물 한숨 섞인 가난한 신앙의 상징이 아니겠습니까? 그 죽은 재 밑에 한 번 지팡이를 넣어 불길을 올려볼 생각은 없습니까’?
내려가는 길을 걸은 불교
대체로 우리나라 불교는 삼국시대 이래 올라가는 길을 걷지 못하고 내려가는 길을 걸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교는 죽은 학문이나 습관이 아니고 산 믿음입니다. 믿음에는 능치 못한 것이 없다고 모든 종교가 다 증거합니다. 불교 자체가,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 그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불교통사』의 저자 이능화 선생은 그것을, 언제나 중국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셨습니다. 일본은 ‘불교의 일본적인 전개’를 말하는데, 만일 한국적인 전개를 찾는다면 어떻게 말하여야겠습니까? 조선조에 와서는 유교가 성해서 정치적으로 누른 점도 있기는 합니다만 종교는 반드시 탄압에 못 견디는 것만은 아닙니다. 도리어 순교 정신이야말로 역사를 빛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작았기 때문이라 할 수도, 국제관계가 험악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유대나라는 우리보다도 훨씬 더 작고, 더 참혹한 역사인데 거기서 세계를 휩쓰는 종교가 나왔으니 말입니다. 좀 너무 혹독한 말이 될지 모르지만 고려시대까지를 지배적인 종교로 내려왔으니만큼 최근 오륙백 년의 우리나라의 쇠약해진 것은 불교인이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유교는 엄정한 의미의 종교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자학 일변도의 조선조에 있어서도 상층 하층 할 것 없이 사회의 종교적 요구는 불교가 당해 나갔습니다. 19세기에 들면서 기독교가 처음으로 왔을 때 그 잔혹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맹렬한 형세로 번져나간 것은 정치적 사회적인 까닭도 있지만, 또 불교의 약점을 반증하는 사실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은 불교자체에서 깊이 반성하여서 밝혀주었으면 앞날 욜 위해 큰 힘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 더구나 안타까운 것은 월남 참전 이래 세계에서 들려오는 우리 민족이 아주 잔인하다는 평입니다. 우리는 이날까지 스스로 우리를 평화민족이라 주장해 옵니다. 단군의 건국이야기에서부터 평화적이요, 또 우리의 고유 종교 사상도 평화주의입니다. 나는, 도교(道敎)는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시작되어 중국으로 번졌다가 고구려시대에 다시 역수입한 것이라는, 이능화 선생의 주장이 상당히 이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도교에 본래 평화주의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구려의 온달, 신라의 처용, 백제의 검도령을 우리 민족의 세 전형적인 인물이라 합니다. 그밖에도 예를 들자면 많을 것입니다마는, 하여간 이날까지 우리는 스스로 착한 민족으로 자부해왔는데, 월남전에 가서 하는 짓을 보고 세계 사람들이 눈을 찌푸리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불살생을 강조하는 불교로서는 누구보다도 더 깊은 반성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은 마음 아프게 생각은 하고, 또 기회 있는 대로 그것은 한때의 현상이거나, 혹은 오해로 온 것일 거라고 설명은 하지만 천하의 입을 내 짝손으로 가리울 수도 없고 구태여 설명을 해본다면 일제 말년에 일본군이 중국 처처에서 저질렀다는 잔인으로 미루어서, 오늘 우리나라 군대의 간부가 일군에서 교육을 받은 데서 오게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하여간 민족으로서는 한 큰 문제입니다. 그런 성격적인 결함을 가지고서 는 세계가 하나인 이 시대에 도저히 옳게 서 나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비의 종교로서 깊이 반성해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새 불교적 인생관을 제시하라!
나는 오늘날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기성 종교는 다 크게 반성하여서 큰 개혁이 일어나야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인류는 한 큰 전환기에 들어간다고 봅니다. 그 중점은 국가관에 있습니다. 이날까지 국가는 인간 사회의 후견인 역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그 후견인을 지나쳐 자랐습니다. 이제 인류는 성인기에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모양으로 국가가 국가지상주의를 휘두르면 인간의 성장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시대의 고민은 거기 있다고 나는 봅니다. 동서의 구별 없이 지나가버리려는 국가지상주의를 단말마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자에 와서는 이데올로기 싸움도 퇴색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싸움이 그 종국에 가까이 간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가 일대 반성을 하고 그 대국가주의를 서로 버리지 않는 한 장래는 비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2차 대전 후 시대의 대세가 당연히 나가야 하는 권력분산의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고, 거꾸로 중앙집권적으로 나간 것은 이날까지의 국가관을 탈피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옅은 이기주의에 제각기 현상유지주의로 나가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화의 방향이 ‘물질에서 정신으로’로 되어 있는 이상 이 시대착오의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지 결코 영구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종교의 사명이 나옵니다. 이러한 인류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변천은 종교의 지도 없이는 될 수 없습니다. 사상의 새 종합을 하는 것이 종교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불교에만 한한 문제가 아니고 모든 종교가 다같이 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 나라의 불교도 자기 사명을 다할 생각을 하여서 우선 자체의 혁신을 이루도록 하여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점에서 감히 기탄없이 말한다면 불교가 누구보다도 더 뒤지지 않았나 합니다. 반드시 불교의 철학 자체가 꼭 그렇다고까지 단언할 자신은 없습니다마는, 통속적으로 불교라면 이 세상은 허망한 것이라는 생각과 사람을 개개로만 보는 개인주의적인 사상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사회는 유기적인 사회이어서 전체에서 독립한 개인이란 없습니다. 이것이 위에서 말한 인류가 성인기에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아직도 인간은 철두철미 개인적인 것으로 보고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불교적인 인생관을 제시 해주기를 바랍니다.
오늘까지의 불교 참 답답하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할 것은 동양적인 것을 다시 음미해 보자는 것 입니다. ‘빛은 동방에서’라는 말은 난지가 오랩니다. 그렇지만 근래에 와서는 서양 사람들은, 특히 미국 사람들은, 거의 신경질적이라고 하리만큼 동양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유 있는 일입니다. 근대라는 것은 엄정한 의미에서 서양적 근대인데, 그 시작은 다 아는 대로 문예 부흥에 있습니다. 그것으로 학문의 풍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 그것이 시작이 되어가지고 종교개혁에까지 이르게 됐고, 거기 이어서 산업혁명이 생기면서 현대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 문명이 자신만만하게 낙관주의를 가지고 내민 결과가 세계 제1차 대전이요 세계 제2차 대전입니 다. 그리고나서 위에서 말한 대로 서양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전부터 벌써 서양문명을 비평하는 말들이 있었지만, 지난번 대전을 겪고 나서야 정말 심각히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일제시대의 자주민 노릇 못했던 죄값으로 남북분단을 당하게 됐고, 그 때문에 지나치게 정치적인 관심만이 강해져서 미처 인류 역사의 대세를 한 눈에 굽어볼 겨를 없이 정치, 군사에만 주의를 뺏겨서 정말 중요한 인류의 생각이 어떻게 돌고 있는가는 미처 보지 못하고 넘어가고 있는 점이 있지만, 사실은 서양 자체 안에서는 상당히 진지하게 앞을 내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듯합니다.
그래서 서양적인 것만으로는 어딘지 크게 잘못된 점이 있으니 옛날에는 미개라고 멸시했던 동양을 새삼 눈을 씻고 보자는 열심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양이라면 어디보다도 먼저 인도를 보아야 할 것이고, 인도라면 응당 무엇보다도 불교를 먼저 집어 들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 점에서는 서양 사람보다는 우리가 더 유리한 처지에 있다고 봅니다. 이제 새로 연구를 한다 하여도 서양 사람이 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그래도 나을 것입니다. 전에는 동양이라 아시아라 멸시하는 바람에 정말 가치 없는 것인 줄 알고 내버려두고 있을 수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같은 동양인 중에서도 인도인들은 상당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웬일인지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인도는 자기네 인도만을 알지만 우리는 인도와는 별개로 발달한 동아시아 문화를 가지고 있으므로 새로운 종합을 하는 데는 더 유리하다 할 수 있는데, 여전히 서양 숭배 속에만 살고 있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자신 없는 민족이 어떻게 이 맹렬한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나올 수 있습니까? 큰 눈으로 보면 핵무기보다도 이것이 더 급한 것입니다. 세계사적 사명감 없는 민족이 어떻게 자신을 가지며, 자신 없는 민족이 누구를 이기며, 그보다도 누구와 협동할 수 있습니까? 불교는 일천 만 신도를 자랑합니다마는 민족적, 정신적 지도에 사명을 느끼지 못하는 종교가 일천 만 아니라 이천 만 삼천 만이면 무얼 합니까? 있나 없나 의심할 여지도 없습니다. 저쪽에서 도리어 우리의 묵은 고전 속에 보배가 들어 있다는데 우리 스스로가 아니 찾는 것은 참말 통탄할 일입니다. 한 종교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는 정치에 대한 태도를 보면 압니다. 정치와 밀착하고 썩지 않은 종교 없고, 발전을 위해 정치세력에 굽히고 들어가는 종교, 고등한 도덕적인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해방 후 오늘까지의 불교를 보면서 참말 답답한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오백 년을 학대를 받아왔다면 한 번 고개를 틀만하지 않습니까?
그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첨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째서 우리나라 불교는 교육, 학문에 힘을 쓰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좋은 전통은 물론 귀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변하는 것이고 인간은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육이 다 옳고 지금의 학문이 다 좋다는 말 아닙니다, 잘못되고 고칠 것, 버릴 것 많습니다. 그러나 고치는 것도 교육으로야 고칠 수 있고, 버리는 것도 학문해서만 버릴 수 있습니다. 일천 만 교도라면 어느 교단보다도 큽니다. 큰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조를 청해도 정치에 청할 것이 아니라 내 신도에게 성의로 한다면 정치 세력에서 나오는 유가 아닐 것입니다. 삼국시대에 그 문화 창조를 했던 민족을 오늘 동원을 못 시킨단 말입니까? 그때는 강제로 했겠지만 지금은 자진해서 할 것입니다. 다른 것을 다 치우고 인류 종교개혁에 앞장서려고 한 번 힘써보시기 바랍니다.
함부로 한 말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씨알의소리 1978년 12월 79호
저작집30; 7- 207
전집20; 5-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