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조 불교종립대학 금강대총장] 아미타불의 성전《淨土三部經》
[1]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의 성립
무량수경(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의
세가지 경을 합해《정토삼부경》이라 한다.
모두 서방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의
나라에 왕생(往生)하고자 하는
정토신앙에 관계되는 문헌들이다.
이 경전들을 비롯해서 정토사상 그 자체도
인도적인 영향이 크다고 보여진다.
극락정토를 묘사하는 경經의 표현 가운데
많은 궁전들이 있고 그 가운데
또한 화려한 옥좌(玉座), 칠보(七寶)로
장식된 난간이 있으며 아름다운
천녀(天女)들의 노래와 진귀한 향연이
끊이지 않는다고 설하신 구절이 있다.
이것은 쿠샤아나왕조시대의 호부(豪富)들의 생활상,
나아가서 그들이 가장 이상으로 삼던
세계의 표현이라 하여 이 경전이 성립된 것은
쿠샤아나왕조시대가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다.
또 극락정토에는 거대한 보리수가 있다 했는데
그 높이가 천육백 유순(由旬)이라 했다.
이것 역시 우파니샤드의 범천(梵天) 세계
묘사 가운데 삽입되어 있는『이리야』라는
거목에 관한 언급과 일치하는 사고방식이다.
또 한 가지 주목을 모으는 것은
이 경전에서는 불상숭배가 강조되고 있는 점이다.
불상(佛像)의 출현은 헬레니즘의 영향에 의한
간다라예술의 출현 이후의 일이다.
《정토삼부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이
소승불교의 용어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 경經의 체계는 기원전 2, 3세기경에 이미
확립되어 기원 후에 성립되었음이 틀림없다.
대승경전 가운데에서도 금강경(金剛經)은
탑파(塔婆) 숭배가 강조된다.
따라서 정토삼부경은 그보다 훨씬 후, 즉
서력기원 후 이세기 경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은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전술한 불상숭배의 풍조,
사용되는 용어 등으로 보아서도 그리하지만,
용수(龍樹)의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에도
정토사상에 관한 언급이 있기에 내려진 결론인 것이다.
지역적으로 보아서는 대단히 더운 지방, 즉
인도의 중남부 지방이 아닌가 생각한다.
경經을 한역(漢譯)한 사람들의 출신지가
모두 중남부 인도라는 점,
그리고 극락을 묘사하면서
『매우 쾌적하며 세탁과 건조에도 용이하다』는
등의 표현이 있어 더운 지방에 사는 이들의
희구와 심정이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2] 한량없는 빛을 지니신 분
정토신앙은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그가 계신 극락정토에 대한 왕생의 믿음을 가리킨다.
아미타아브하(한량없는 빛) 또는
아미타아우스(한량없는 목숨)이라는 뜻에서
무량광(無量光) 또는
무량수(無量壽) 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빛은 신성함의 상징이다.
빛은 어두움을 쫓는다.
그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은밀한 예지의 빛이다.
《무량수경》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서방(西方)의 청정한 국토에서
중생들을 위해 설법하는 부처님이라 했다.
그 분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이름의 보살로서 수행한 적이 있다.
중생을 제도하려는 대원(大願)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그 원願을 성취하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얻으신 것이다.
그 분은 보살도를 실천하는 분이고
또 그것을 완성한 분이다.
그 분이 계신 곳을 극락(極樂)세계라 했고
그곳은 서쪽으로 십만 팔 천리를 간 곳에 있다 했다.
서방이니 십만 팔 천리니 하는 표현을
수학적으로 또는 지리적으로 측량할 필요는 없다.
더운 나라 인도의 사상가들은
이상세계를 늘 해지는 쪽, 서쪽으로 생각해 왔다.
베다에 등장하는 여러 신 가운데
율법(律法)의 신 바루나가 주재하는
세계도 역시 서쪽이다.
백팔 십만 팔천 등은 모두 먼 거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인도적 관습이다.
그곳은 추상적 실재(實在)도 아니며
공간적 · 시간적 범주(範疇)에
포함시킬 수 있는 곳도 아니다.
초월적 경계 · 상징적 경지, 어떤 의미로는
우리의 마음 속 깊숙한 곳,
일심(一心)의 세계인 것이다.
『그 국토의 만물(萬物)에는
아소심(我所心)도 염착심(染着心)도 없다.
나아가고 들어오는 일상 생활이 모두
정(情)에 얽혀 있지 않아서
수의자재(隨意自在)하고
맞고 안 맞고 하는 일이 없다.
또 거기에는 피(彼) · 아(我)의 구별이 없고
경쟁과 쟁송(爭訟)이 없다.
다만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심,
요익심(饒益心)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부드럽고 균형이 잡혔으며,
분노와 원한이 없고, 무엇이든 걸림이 없고,
또 싫증을 내거나 태만함이 없다.
그저 평등한 마음, 모든 것을 참는 마음,
깊은 마음, 가라 앉은 마음 만이 있다.
법을 좋아하고 그것 만을 따르며
기뻐하는 마음이 있어 온갖 종류의 번뇌가
다 사라졌고 따라서 육도윤회에
빠지는 일이 없다.』(無量壽經, 下卷)
[3] 염불(念佛)과 왕생(往生)
중생은 누구나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존재다.
물론 다시 태어나 좋은 곳에 가는 것도 왕생이다.
그러나 왕생이란 생물학적 윤회전생의
의미만 담긴 것은 아닌 듯 싶다.
왕생한다는 것은 깨달음을 얻는다는 의미다.
본래의 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는 뜻이다.
《아미타경》의 말씀대로
<위없는 바른 깨달음에 대한
믿음의 마음을 일으켜서> (發菩提心),
그곳에 안주(安住)하려는 원이요
정토에 안주하면
<위없는 깨달음에서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
(得不退轉)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 같은 경지의 증득이 가능한가?
경전에서는 염불(念佛)이라 했다.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면
부처님은 그 사람을 극락정토로 맞이한다 했다.
정토신앙이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일본 · 중국 등 대승불교 문화권에서
많은 호응을 얻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대중성에 기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염불은 중생교화의 방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토신앙은
불국토신앙으로 발전된 적이 있다.
한 생각이 맑으면 정토(淨土)를 이루고
한 생각이 더러우면 지옥이 된다.
지옥도 극락도 우리 마음속에 담긴 것
<心淨卽佛土淨>이란 이러한 역학관계를
직설(直說)한 지혜의 말씀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정토를 이룩하고야 말겠다는 대원과 아울러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땅이 본래 부처님의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나 만이 선택받았노라는
율법주의적 배타주의가 아니다.
나 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노라는
선민(選民)의식도 아니다.
<나> 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깨달음을 얻고야 말겠다는
승화된 믿음의 표본이었던 것이다.
《무량수경》은 말한다.
『지혜는 대해와 같고 삼매는 산왕(山王)과 같다.
지혜의 빛이 밝고 맑은 것은
태양이나 달보다 더하다.
그 맑고 흰 것이 가득 차 있기로는
마치 설산(雪山)과 같다.
또 그 마음이 넓고
차별 없는 것으로 말하면 대지와 같다.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좋은 것과 싫은 것,
그런 것들을 차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지혜와 삼매의 능력이 강하기로 말한다면
정수(淨水)와 같다.
모든 때와 더러움을 다 씻어 버리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화왕(火王)과 같다.
모든 번뇌를 불태워 버리기 때문이다.』
중생이란 더러움을 갖고 있는 존재다.
하찮은 것에 집착하는 미혹(迷惑)된
어리석음의 상태를 범부라고도 한다.
범부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왕생해야만 하는 것이다.
중생이 곧 부처라고 했을 때
우리의 더러운 상태,
이것이 곧 깨끗함이라는 말은 아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란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는
무분별(無分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초극된 그 자리가
본래의 <저것>과 같다는 철학적인 표현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이상이 정토신앙의 핵심이며
그것은 또한 내일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지금, 눈앞의 문제인 것이다.
정병조鄭炳朝 합장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