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강
양현주
문 닫았다고요
두꺼운 밑바닥에서 소리가 들린다 누구도 그의
곁에 머물 수 없었다
무슨 소용인가
뒤돌아보지 않고 흘러가는 한 시절
애초부터 물엔 뿌리가 없다
강물 속에는 비밀의 방 한 칸
크리스털 연구실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이다
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물의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한다
누가 저렇듯 속내를 가릴 수 있을까
한때 사랑이었던 것들이 저물어가고 그리웠던
시간이 낯설다
유리벽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휘어진 곡면
수평의 미학이 살아있다 그처럼 생각이 넓은
집은 없다
부딪치면 비켜서고
걸려 넘어지면 낮게 흘러가는 물줄기 그는,
사람을 끄는 처세술의 달인이다
철없는 눈송이 살얼음을 치다가 푹, 푹 발이 빠질 때를
기다린다
둥근 집
집집마다 대문을 닫아거는 저물녘
지상에 떨어진 별의 울음소리를 들은 적 있다
둥지 잃은 새의 노래를 부르며 간혹,
집 밖에서 떤 적이 있다
집 속에 집이 있어
사무실 열쇠를 현관문에 꽂고 흔든 적도 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쇠에 단단하게 새겨놓은 비밀의 언어를 해독하려면
협착한 집의 구멍을 읽어야 했다
자물쇠 내면에 음각된 암호처럼
내가 당신에게 닿는 길도 종종 그러했다
뚫린 길 하나 내는 것은 모진마음 깎는 일이었다
몇 번의 서걱거림으로 우리가 어긋났을 때
내 마음의 어둠을 깎고, 또 깎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바깥을 향해 길을 내듯이
당신도 내 안을 향해 길을 내며
무시로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겉돌던 마음도 열쇠 구멍에 끼우면 길이 보인다
과녁을 명중한 화살촉처럼 눈이 환해진다
비로소 둥근집이 열린다
나는 종종 인연을 연인으로 읽는다
연인도 등급이 있듯 인연에도 격이 있다
분위기에 맞게 모자를 골라 쓰는 것과는 또 다른 격이다
첫말이 끝말에 닿기도 전에 안녕이란 말 한마디 디딤돌을 놓지 못한 인연
가벼운 인연은 손보다 눈이 먼저 스캔한다
출근길에 꼭, 그 장소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
지각이라도 한 듯 볼 때마다 신발이 먼저 뛴다
몸에 잠을 매달고 총알을 장전한 그의 발바닥은
인연을 깊게 맺지 못한 딱딱한 길의 습관,
한 시절 겁나게 뜯어먹던 인연들은 이제
방구석 캐비닛 어디쯤 처박아둔 서류뭉치다
학창시절 펜팔을 주고받던 머스매는 지금 어느 섬에 갇혀 있을까?
통신이 끊어진 긴 시간 단짝 친구는 파도로 짧은 웨이브를 하고
하마, 섬돌 같은 애 서넛 낳고
동네 아지매와 격 없는 사이가 되었다
펑퍼짐한 성배덩굴 나무 꽃이 된 그녀의 허리는
바람을 베어 문 아코디언이다
잔정 많은 별이 흩뿌리는 불꽃으로 어둠이 빛부시다
그녀는 밤새도록 나무 등걸에 앉아 별 무더기를 땄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뱉어놓은 마른 입술에 물기가 어린다
북쪽 벌판을 걸어가던 사자자리 별이 침묵을 잡아먹고 발을 치켜들었다
종종 인연은 별의 뼈를 핥고 세상 밖으로 자랐다
달의 헛기침에 별똥별은
두 번씩이나 떨어졌다가 어느 들판에서 꽃 피었을까?
반짝, 사라진 듯 사라지지 않았던 수척한 큰 별이
옹골지게 어둠을 안았던 탓인지 인연은 별을 껴안고 열꽃이 핀다
우주를 빠져나가는 길을 찾지 못한 별들이 동구 밖에 성성이다가
인연, 혹은 연인의 길을 앓는다.
자작나무의 통신
손편지를 걷어갔던 바람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붉은 우체통만 제 자리에 뻘쭘하게 남아
햇살에 바삭하게 구워지는
길모퉁이
푸른 몸피에서 빠져나온 말의 언약들이
골목길에서 흩어진다.
나무가 잎의 빛깔을 바꿔 달며 찢어지고 훌쩍 자라는 동안
나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서랍 속,
창백한 서러움이 쏟아졌다
마른 나무가 낯설고 어색한 사람이 되어 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
간단한 문자를 보내고 무심한 쪽으로
잎이 넓어지는 것
이름을 잊고 엄마로 살거나 아저씨가 되는 것
당신이 기억 속에 없는 것처럼
눈이 마주쳐도 우두커니 행인의 눈빛 같은 무심한 시선으로
수명을 다한 사랑은 몸빛이 희다
자작나무 키 높이로 서 있다는 것은
나무의 성장을 지켜보지 못한 채 애환이 횡으로 지나갔다는 것이다
서로의 가슴 깊은 곳에서 열 번 죽어 별이 되었다는 증거다
사선을 긋고 떨어지는 별똥별의 몸짓은 당신에게 보내는 텔레파시,
상처받은 별들이 제 몸을 찢어 쓴 혈서를 몰래 읽는다
당신은 내가 잠가놓은 감옥 속
흰 손편지 같아서,
구름왕조실록
그녀가 곁을 앓는다
왕은 떠나가고 구름은 텅 비어있다
왕이 구름 속의 자오선을 지나는 찰나, 그늘에 앉아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그녀는, 구름을 닦고 답 없는 사각의 벽을 쇠망치로 뚫다가 햇빛 모서리를 사각사각 깎아 먹은 적도 있다 맛있었다
여름 한낮 왕의 그림자를 폭식한 웃음
거동이 미쁘다
구름 속에 들어도 왕은 없고
발걸음만 뜨겁다
혼자 뜨거운 저쪽, 꽃 덩굴이 한 올 풀렸다
담벼락을 넘어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하루
그녀는, 왕의 하루를 500킬로 헤르츠(㎑) 주파수로 설정해 놓았다
행여 길을 잃을까 담장 밖으로
문을 낸 안부
구중궁궐(九重宮闕) 분홍 기다림을 풀어놓은 저녁
열두 폭 주홍치마 두른 나팔
배시시 웃을 때
저기, 심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와
꽃등을 켜는
능소화
왕은 부재중이므로 나는 그 곁을 꽃이라 부른다
? 시집 『구름왕조실록』 (2018. 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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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주 / 1968년 충북 괴산 출생. 2014년 계간 《시산맥》으로 등단. 시집 『구름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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