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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제작 : 임진규
각본 : 이종용, 이재순, 박찬욱
감독 : 박찬욱
스 튜 디 오 박 스
09, JAN. 2000
1. 검은 화면
FM 방송의 여자 진행자 - 김미숙의 목소리가 흐르는 가운데 크레딧 오른다.
김미숙
전 착한 사람입니다. 성실한 근로자죠. 하지만…….
하지만 전 행복하진 않습니다.
…….저한테 피붙이라곤 누나밖에 없습니다.
절 미대에 보내려고, 누나는 진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병에 걸려서
직장을 그만둬야 했구, 그래서 저두 대학에 못 갔죠.
2. 방송국 녹음 스튜디오
김미숙이 엽서를 읽는다.
김미숙
…….하지만 그런 건 아무렇지두 않습니다.
수술 받으면 누나가 살 수 있다는데, 저한텐 너무 큰돈입니다.
…….누나한테 얘기해야 할지, 계속 감춰야 할지 망설이고 있습니다.
만약 결심이 선다면 이 방송을 누나와 함께 들을 생각입니다.
제 입으론 말할 수 없어요.
그녀의 손에 들린 엽서의 반대 면이 보인다. 훌륭한 솜씨의 그림 -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소년이 누나로 보이는 소녀의 어깨에 기대앉았다. 소녀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3. 고향 - 회상
디졸브. 강둑에 앉은 소년 류와 누나. 흑염소 한 마리가 묶여 있다. 카메라, 천천히 접근해서 둘만을 잡는다.
김미숙
(소리)
…….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장애인이니까요.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진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수술비를 마련할 거예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하지 못하는 절 위해서 대신 누나한테 이 편지를 읽어주세요.
4. 병원 옥상
다시 디졸브되면, (회상과는 반대로) 동생 류柳에게 기대 안긴 환자복 차림의 누나. 고전적인 삼각형 구도. 오누이, 그림 같이 미동도 없는 가운데, 멀리 배경으로 먹구름 잔뜩 낀 하늘.
김미숙
(소리)
…….누나, 내 말 듣고 있지?
잘 들어…….오늘 내 콩팥을 누나한테 주는 수술을 신청했어.
그럼 살 수 있대…….
죽으면 우리가 염소 먹이던 강둑에 묻어달라 그랬지?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해줄게.
하지만 그건 육 십 년 후의 일이야.
나, 무조건 누나 살릴 거야. 정말이야, 맹세해. 나 믿지?
손에 작은 라디오를 쥔 류. 라디오에 연결된 코드를 훑고 올라가는 카메라. 이어폰을 꽂고 귀를 기울이는 누나, 눈물을 흘린다.
둘의 모습에 타이틀.
5. 공장
엄청난 소음. 넓은 실내에 커다란 기계류와 노동자들. 사장이 친구를 데리고 구경시킨다. 앞을 지날 때마다 꾸벅 인사하는 노동자들.
사장
(악을 쓰며)
해야된다니까, 구조조정…….다 짤러, 다 짤러!
걔들이 죽느냐, 니가 죽느냐, 이 께임인데 망설일 게 뭐냐!
이 기계들 이거, 노는 거 봐. 이게 얼마짜리들인데, 응?!
나 이거 볼 때마다 아주 미친대니까!
친구, 묵묵히 걷기만 한다. 사무실로 들어가는 두 사람. 카메라 이동, 노동자들을 보여준다. 류를 제외한 모든 노동자들이 방음용 귀마개를 착용하고 있다.
6. 공장 정문
떼지어 퇴근하는 노동자들 가운데 류, 지친 몰골이다.
7. 남산3호 터널
심야. 드문드문 지나가는 자동차들. 한 차선을 막고 일하는 인부들. 사다리에 올라선 류, 노란 램프의 덮개에 묻은 매연 그을음을 닦아내고 있다.
8. 병원
병원 건물 외경.
9. 진찰실
의사와 마주 앉은 류.
의사
(검사지를 흔들어대며)
아니 세상에, 자기 혈액형두 몰라?!
에이는 뭐가 에이야, 삐잖어, 삐!
혈액형 안 맞으면 이식 못 해요, 이 사람아!
넋이 나가 멍하니 앉은 류의 얼굴에 의사 목소리.
의사
(의사)
입원비 부담스러우면 일단 퇴원해.
마땅한 기증자 나타날 때까지.
투석이나 와서 꼬박꼬박 하구.
10. 병원 입원실
간호사가 류에게 피하주사 놓는 법을 가르쳐 준다. 고무로 만든 모조 팔에 찌르려고 주사 바늘을 갖다대는 류.
11. 류의 집
누나의 진짜 팔에 바늘을 찔러 넣는 류. 침대에 누운 누나 몸이 덜컹 하고 들썩인다.
12. 아파트 단지
알고 보면, 침대는 큰 트럭 짐칸에 실려있고 주위엔 가구와 가재도구가 가득하다. 링거를 맞으며 누운 누나와, 그 옆에 링거 병 스탠드를 붙들고 선 류. 둘을 태운 이삿짐 센터 트럭, 멀어져 간다.
류
(목소리)
누나가 피땀 흘려 장만한 아파트지만 내놓을 수밖에 없다.
그 동안의 입원비를 내려면 이 집 보증금이 필요하니까…….
병원에서 나오려면, 집에서도 나와야 한다.
13. 류의 새 집
좁고 허름한 연립주택의 半지하방. 부부 싸움하는 소리, 정사하는 소리, TV 소리 등으로 온통 시끄러운 가운데,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 오누이.
류
(소리)
…….새 집은 오래된 집이다.
복덕방 아저씬, 내가 농아라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누난 농아가 아니다.
누나가 못 자니까 나도 못 잔다.
14. 옆집
벽에 나란히 기대앉아 도색 영화를 보면서 자위 행위중인 십대 소년 넷, 모두 벽에 귀를 대고 있다. 옆집에서 울려오는 여자의 요란한 신음 소리. 수평이동하는 카메라, 두 집을 가르는 벽의 단면이 시커멓게 시야를 가리고 지나가고 나면 류의 집.
15. 류의 집
그 소리의 주인공 - 통증을 못 이겨 몸부림치는 누나. 꼭 끌어안고 달래는 류, 이를 악물고 있다.
16. 고향, 강 언덕
아직 어둡다. 새벽을 맞는 순간의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 나뭇잎이 바람결에 살랑거린다.
17. 병원 투석실
창 밖이 부옇게 밝아온다. 피를 빼서 노폐물을 걸러낸 다음 다시 넣어주는 투석기의 세부. 죽은 듯이 잠자는 누나. 물수건으로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아주는 류. 간호사, 류의 어깨를 툭 친다.
간호사
(입술 움직임을 뚜렷하게 하려고 애쓰며)
사흘에 한번은 꼭 와야된댔잖아요. 큰일 날 뻔했어요.
18. 병원 화장실
똥을 누면서 즉석복권을 긁던 류, 문짝에 붙은 스티커를 발견한다. ‘장기 제공’ 운운하는 내용과 휴대전화 번호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류.
19. 공장
한창 일하는 류에게 누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소음 때문에 들리지 않는다. 일손을 놓고 현장을 떠나는 류의 불안한 표정.
20. 사무실 앞
유리 칸막이 너머로 보이는 류의 뒷모습, 높은 사람과 마주 앉았다. 높은 사람, 뭐라고 떠들지만 들리지 않는다. 봉투와 서류를 내미는 높은 사람.
21. 사무실
퇴직금 영수증에 서명하는 류. 악수하자고 손을 내미는 높은 사람. 사장실에서 사장이 나온다.
사장
(쾌활하게)
밥 먹으러들 안 가나?
사무직원들 일제히 일어나 간다. 높은 사람도 간다. 졸지에 넓은 사무실에 혼자 남게된 류, 가만히 앉아 있다. 갑자기 시계에서 뻐꾸기 두 마리가 튀어나와 시끄럽게 울어댄다.
21. 거리
찻길 옆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류, 손에 장미 한 송이를 들었다. 이윽고 차 한 대가 와서 앞에 서자 타는 류.
22. 복도
[사랑의 나눔 운동 추진 본부]라고 쓰인 플라스틱판이 문짝에 붙어 있다.
23. 장기 밀매조직 사무실
시든 장미 한 송이를 뽑아버리고 류가 가져온 새 장미를 꽃병에 꽂는 사내, 선글래스를 썼다. 소파에 마주 앉는 류와 사내. 실내에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류, 둘러보면 살짝 열린 문틈으로 옆방이 보인다. 수술용 침대와 장비들, 아이스박스 몇 개.
사내
(알아듣기 쉬우라고 또박또박 말한다)
천만 원밖에 없다구요?
(끄덕끄덕)
많은 환자들이 우리만 바라보면서 죽어가고 있죠.
그 중엔 당신이 도와주면 살아날 수 있는 사람도 있어요.
물론, 당신 누나도 얼굴도 모르는
기증자의 도움으로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구요.
당신이 신장을 제공할 용의만 있다면
우린 천만 원에도 일을 추진할 수 있어요.
없어도 되는 조그만 고깃덩어리 하나와 천만 원,
이걸로 누날 살릴 수만 있다면 괜찮은 거래 아닌가요?
류, 종이에 재빨리 적는다. ‘제 신장이 누구에게나 이식 가능한 것은 아니잖아요?’
사내
(경건하게)
우린 많은 환자들과 거래를 합니다.
누구든지 누군가에겐 생명의 은인이 될 수 있어요.
생각에 잠긴 류.
보스
(소리)
근데, 혈액형이 어떻게 되시나요?
24. 류의 집
고물 선풍기가 덜덜거리며 돌아간다. 벌거벗고 누운 누나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주는 류. 마치 염쟁이가 하듯, 얇은 이불 속으로 손만 집어넣고 구석구석 닦아 내린다. 이따금 대야에 받아놓은 물에 수건을 다시 적셔가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류. 대야에 띄워 놓은 얼음 덩어리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고통에 신음하다가도 가끔씩 간지럽다는 듯 쿡쿡 웃으며 몸을 뒤척이기도 하는 누나.
25. 사무실
만원권을 세는 장기밀매조직의 부하1, 다 세더니 보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짓는 보스.
보스
삐형 맞는 거죠?
고개를 끄덕이는 류.
보스
(소리)
지 혈액형두 모르는 병신 같은 놈 때문에
한번 좆 된 적이 있어 갖구 말이야…….
작은 병을 꺼내 뚜껑에 주사 바늘을 꽂는 보스, 뽑아낸 액체를 자기 팔뚝에 주사한다. 낮게 신음하며 약효를 음미한다. 실내 전경에서 페이드 아웃.
페이드 인하면 이미 옷을 벗고 침대에 누운 류. 마취에 의해 흐려지는 류의 시점 쇼트. 다시 페이드 아웃.
페이드 인하면서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는 시점 쇼트. 바닥에 떨어진 장미 한 송이. 정신을 차리는 류의 얼굴. 한동안 눈만 끔뻑거리다가 불현듯 몸을 일으켜 맨 바닥에 누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의료장비는 물론이고 집기들 하나도 없이 텅 빈 방에 홀로 남은 류, 수술부위를 움켜쥐고 신음한다. 페이드 아웃.
검은 화면에 자막 - 35일 후
의사
(소리)
축하해요, 정말 잘 됐지?
26. 진찰실
즐거운 표정의 의사가 신나게 얘기하고 있다.
의사
이렇게 빨리 기증자가 나타난 건 기적이라구.
조직검사결과도 좋구 말야.
의사의 말을 듣는 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그 얼굴 위로 의사의 말 계속 이어진다.
의사
일주일 뒤로 수술 잡았으니까 닷새 있다 입원하면 되겠고…….
수술비는 있다고 했으니까…….
이제 문제 다 해결됐구만, 안 그래? 좋지?
절망적인 표정의 류 얼굴.
27. 영미의 방
앞 장면과 연결 - 절망적인 표정의 류 얼굴. 벌거벗고 침대에 나란히 누운 류와 영미,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표정이다. 담배를 뻑뻑 피우는 영미.
영미
…….좆 됐구나…….
잠시 침묵.
영미
(결심한 듯 단호하게)
…….부잣집 아이를 하나 유괴해서 몸값을 받아내는 거야. 어때?
류
(수화)
미쳤어요?
영미
그게 왜?
류
유괴는 가장 죄질이 나쁜 범죄예요.
영미
(달래듯)
…….유괴를 그렇게 나쁘게만 볼 일은 아냐. 그건…….
류
(말을 끊으며)
하여튼 안 돼요.
영미
그럼 어쩔 건데?
일주일 밖에 안 남았는데.
이번 기회 놓치구 또 언제까지 기증잘 기다려?
고개를 저으며 비탄에 잠기는 류.
28. 동진의 집 앞
망원 렌즈에 의한 시점 쇼트. 어느 부촌에 자리한 호화 빌라. 두 계집아이가 등교하는 모습. 한 아이에게는 부모 둘 다, 또 다른 아이에게는 아빠만 있다. 아내 있는 남자에게 운전기사가 꾸벅 절한다. 부모를 다 가진 아이에게 초점을 맞추는 시선. 커팅되면, 빌라 맞은편에 서 있는 자동차 안의 류와 영미. 영미가 운전석에 앉았다.
영미
저 기집애야?
끄덕이는 류. 다시 시점 쇼트 - 고급 외제차 운전석에 앉는 그 아이의 아빠. 그 딸은 운전기사가 모는 국산 차에 탄다. 외제차가 먼저 떠난다.
영미
(소리)
저 새끼가 너네 사장이야? …….씨발놈…….
저 차 한대면 너한테 10년은 월급 줄 수 있겠다…….
‘엄마 없는 아이’는 자기 아빠와 뽀뽀하고 친구네 국산 차에 탄다. 사라지는 자동차 꽁무니를 따르는 시선. 뒤창에 붙어서 아빠에게 손을 흔드는 엄마 없는 아이. 카메라, 급히 팬해서 다시 집 앞. 이웃집 여자한테 인사하고, 차가 사라진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아내 없는 남자’. 영미, 아이들이 탄 차를 미행하기 시작한다.
영미
(소리)
누나 병간호하느라 결근하고 지각한 노동자를 해고한 새끼가,
지 자식은 끔찍이 위한다 이거지…….위선자 새끼들…….!
저것들도 남의 뱃속에 든 콩팥을 도둑질해 가는 놈들하고 똑같애.
아니, 저 새끼가 널 짜르지 않았으면
니가 그걸 도둑맞지도 않았을 테니까
저 새끼가 니 돈하구 콩팥을 훔쳐간 거나 마찬가지야.
우린 그걸 돌려받는 거고…….
이러니까 빨리 혁명이 일어나야 된대니까!
아픈 사람은 무조건 무료루 치료 받구
콩팥두 받구 간, 쓸개, 똥꼬 이런 거 뭐
졸라 다 받는 그런 세상이 와야된대니까!!
무산자 혁명 만세, 체 게바라 만세!!!
열이 올라, 류가 듣든 말든 혼자 마구 떠들어대는 영미.
29. 영미의 집 (플래쉬 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