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은 잘 웃고 잘 운다. 27은 1996년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 가장 빡빡한 스케줄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어지러운 봄을 보내며 근래에는 자주 슬프다. 다양한 얼굴을 가진 슬픔과의 이별을 극복이라도 하듯 길었던 머리를 짧게 잘라내 버린 27은 몸은 훨씬 가벼워진 상태다. 가벼워지길 바라는 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27은 ‘희극인’에 속해 있다. ‘희극인’은 27의 고향 친구 4명과 함께하는 모임으로 비정기적으로 만난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2022년 4월의 마지막 금요일에도 그들은 합정에서 만났다. 희극인이란 희극을 전문적으로 연기하는 사람이니, 아마 27은 최선을 다해 기쁨을 연기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본격적인 인터뷰를 위해 27이 날 차에 태우고 수원의 한 카페로 간다. 차에서 옅게 노래가 흘러나왔다. “너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이 늘 처음 만난 그 날만 같길(Forever Young, 블랙핑크)” 처음 만난 그 날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희극인’들은 여전히 뭣 같은 일을 끊임없이, 서로를 위해 이야기하는 중일 것이다.
27이 가장 빡빡한 스케줄을 보내는 있는 이유 중 하나로 일을 빼놓을 수가 없겠다. 수원의 한 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27은 매일 차 뒷좌석에 노란 바구니를 싣고 있다. 4시 30분 퇴근인 27은 오늘도 5시 5분에 회의를 끝내고선 초췌한 얼굴로 날 데리러 왔다. 그럼에도 일의 기쁨과 슬픔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얘들아, 어땠어? 재미있었지?” 수업의 전 과정을 ‘준비-실행-결과’로 돌아본다면, 27은 수업 결과를 가장 아낀다. 6학년 1학기 사회 1단원은 ‘민주주의 발전과 시민 참여’다. 먼저 행정부의 문체부, 행안부, 환경부 등을 만들고, 국회가 각 부처의 예산안 심의도 한다. 물론 법원에서는 정기적으로 재판도 열린다. ‘삼권분립’의 학습 내용을 학급 생활에 대응하여 운영하는 것이다. 27의 평소 관심사도 아닌데다가 손이 많이 가는 수업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 아이들의 즐거움은 곧 27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27은 글쓰기도 잊지 않았다. 인터뷰를 핑계로 27의 글 한 편을 미리 받았다. 제목은 ‘처음 만난 컴퍼스’. 원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 서툴게 컴퍼스 사용법을 익히는 과정을 담은 글이다. 27은 살아가면서 처음의 순간에, 처음이 두려워질 때, 우리가 컴퍼스와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면 좋겠다고 했다. 글의 소재 뿐만 아니라 등장 인물들의 말과 행동도 원 같다. 말 그대로 둥글둥글함 위에서 쓰여진 글이라는 생각에 27에게 물었다. “이 마음은 어릴 적부터 가지고 계셨던 건지 궁금합니다.” “사실 저는 그러질 못해서 아이들에게 더 바라요.” 의외다. 잘 웃고 잘 울었던 27의 대학 시절 별명은 파프리카였다. 큰 리액션을 가진 파프리카는, 아니 27은 예쁘게 썰린 파프리카의 단면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27은 스스로를 몰아세우면서 커온 편이라고 했다. 성격도 급해서 출근길에 집 안팎을 오가는 일도 잦았고, 자주 깜빡하고 주의가 산만해지기도 한다. 교실에서 이런 단면을 가진 아이들을 보면 어떤가. 답답하다. 애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말이다. 27은 이때 둥글둥글한 마음이 튀어나온다. 이만하면 됐어. 늦으면 어때.
“사람들은 왜 이렇게 자신의 못난 부분만 가장 먼저 알아보는 걸까요? 안타까워요. 좋은 모습을 발견하면 착각이라고 쉽게 넘기면서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가진 좋음을 대신 찾아주기로 했다. 27은 편지를 꺼내들었다. “2019년의 너에게 항상 고마울 거야.” 딱 1년 전, 27의 새로운 집에 초대받았을 때 제로웨이스트 주방용 키트와 함께 준 편지다. 그때의 27도 여전히 잘 웃고 잘 울었었다. 나의 예민함을 사랑한다고 했다. 작은 카드에 꾹꾹 눌러밟은 글자들이 감동이었단다. 반대로 난 27의 말을 사랑했다. 주워담을 수 없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간의 감정을 온 몸으로 표현한다. 주방용 장갑을 줬을 때도 내 앞에서 장갑을 끼고 춤을 추며 고맙다고 노래했었다.
NoSmokeWithoutFire. 우리가 앉아있던 카페의 영업 종료 시간이 되었다. 평소 감사했던 주변 분을 위한 드립백까지 구매한 27은 나를 데리고 어느 주차장으로 이끌었다. “지난 번 추천해주신 권진아의 ‘우리의 방식’을 즐겨 듣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줄곧 이 노래를 반복재생 했답니다. ‘잊고 있던 사랑하는 수많은 방식들’이라는 가사가 참 좋았거든요.” 27의 방식대로 그려나가는 미래가 궁금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방식들을 사랑해요. 지금 이대로만 쭉,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근데 한편으로는 깨질 걸 알고도 있어요. 깨지더라도 깨진대로 잘 지내고 싶어요.” 평범한 일상이다. 평범하니까 가장 어렵다. 그래도 꿈이 크면 깨진 조각도 크댔다. 하나하나 아쉽고 두려워하다 보면 아무것도 못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27은 지금 이 방식대로, 지금 웃고 지금 슬픈 것에 더욱 몰입하고 있다. “그게 27의 사랑하는 방식이네요. 오늘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어김없이 오월이 왔다. 유난히 짙고 긴 밤, 27은 여전히 날 데리러 온다. 지금처럼만 잘 잊고 잘 웃고. 잘 자고 잘 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