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 / 서순희
남편과 갓바위에 갔다. 주일 오후이고 바람이 없는 따뜻한 날이었다. 걷기에 좋았다. 지금은 출렁다리가 있어 둘레를 바다 위로 돌아갈 수 있지만 그때는 산 위로 올라가서 부두 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산길을 내려와 평화광장 쪽으로 가는데, 모자로 보이는 두 사람이 우리 앞에 간다. 뒤를 따라가다 얼굴을 보았어도 나는 몰랐다. 남편은 인사를 한다. 여동생과 조카라며 웃으면서 쳐다본다, 시누는 몸이 건강했는데, 시름시름 아팠다. 병원에서 위암 말기라고 했다. 나이도 어린데 정말 걱정스러울 뿐이다.
시누 남편은 술 만 입에 대면 아내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견디다 못해 끝내 아들 둘 데리고 친정으로 왔다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집을 얻어 나갔다. 혼자서 자식을 키우는 것도 힘들었는데 아들까지도 속을 끓이고 공부도 못해 어디고 마음 편히 붙일 곳 없이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다. 아픈 엄마에게 학교 갈 때마다 혼자서 속 끓이지 말라는 작은아들은 착한 구석이 있었다. 힘들게 살았는데 병이 악화되자 학교를 휴학하고 엄마 곁에 있었다. 나는 옆에서 작은조카 얼굴만 봤다. 갓바위 쪽에서 갯내음 실은 바람이 불었다. 남편은 태연하게 잘 지내라며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나를 데리고 하당 쪽으로 갔다. 암담한 마음이 오랫동안 남았다. 4개 월 뒤에 시누는 죽었다.
장례식장은 썰렁했다. 두 아들이 어머니를 지켰다. 동생은 엄마 곁에서 묵묵히 있는데. 형은 앉았다 섰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고 또 어디론가 나가고 제 멋대로였다. 아무도 상주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자기 엄마와 알고 지냈던 아저씨가 형에게 주의를 줬다 ‘ 장례 때 만이라도 얌전히 앉아라.’ 하지만 그때뿐 막무가내 핸드폰으로 친구를 불렀다. 나중에는 여자 친구들도 왔다. 이해불가로 보기만 할 뿐이다. 동생은 형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장례를 치를 때 고3, 고2였던 두 아들이다. 시숙님은 여동생 유골을 함평 쪽 납골당에 안치하고, 너희 엄마를 잊지 말라며 이곳에서 보관 기간이 10년이란 말도 덧붙였다. 그 사이에 시누 양반도 세상을 떠났다. 간간히 두 아들은 큰댁에서 봤다. 설날 아니면 추석, 시어머니 제사 때 왔었다. 시누가 죽은 지 8년이 지나면서 네 번 정도 같이 했다.
남편에게 말했다. 전화라도 해보라며 조카가 어떻게 지내는지 염려하는 말을 했다. ‘즈그들 알아서 하겠지’ 너무도 무심한 답변이었다. 나도 나이가 들었지만 20대에는 잘못되거나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보면 꼭 말을 해야 줘야 한다. 이것이 내 신념이다. 왜냐하면 ‘그때 한 마디 했더라면 지금 이러지 않을 텐데,’ 결정적인 기회를 놓쳐 버린 셈이다. 갈증 날 때 물 마시듯 전화에서라도 안부를 물어보게 했다. 그때부터 돈 한 푼 없이 고아가 된 조카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려고 적은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6년이 됐다. 4년 전에 동사무소에서 받고 있는 적지만 통장 급료를 지금까지 한 푼도 쓰기 않았다. 우리 작은놈한테도 용돈을 조금밖에 못 준다며, ‘죽은 고모 아들에게 목돈을 주고 싶다’니 고개를 끄덕인다.
작은조카 생각만 했지 정작 큰조카는 잊고 있었다. 그런데 8월에 결혼한다는 기쁜 소식이 왔다. 진주 아가씨를 만났다. 스스로 불행한 가족사를 벗어나고자 열심히 기술을 닦고 관련 자격증을 따서 전기 회사에 취직했다. 전라도를 떠나고 싶었다고 한다. 어릴 적 어지러웠던 시간은 모든 것에서 털어버리고자 했다. 섬진강을 지나 ⟪토지⟫에서 보았던 경상도 진주에 갔다. 무더운 여름 날씨였지만 모두들 진심으로 축하하고 잘 살기를 바랐다. “외숙모 나는 장가도 못 갈 놈인 줄 알았습니다. 제가 열심히 살겠습니다.” 나에게 큰조카는 말했다. 신부 얼굴이 너무 이뻤다. 사돈을 찾아가서 깊은 절을 올렸다. “고맙습니다”. 사돈은 웃으면서 답례하였다. 결혼식은 여기저기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래 아내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고. ‘진심으로 결혼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