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회영과 신흥무관학교
우당 이회영
조선의 명문가 이회영 일가 우리나라가 일제에 망하자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독립투쟁의 길을 걷기위해 위해 만주로 간 몇몇 양반 가문들이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양반들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는 헌신했으나 나라가 망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구한말에는 대부분의 지배층들이 자신과 가문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데 일조했다. 그들은 당파차원에서, 계급차원에서 집단적 매국에 가담했고 그 결과 조선은 몰락하였으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압제에 신음하는 백성들과 국가의 안위는 없었다. 오직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처신하거나, 체념어린 동조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가가 온몸을 던져 망명에 투신한 집단이 있다. 서울의 우당 이회영 일가가 대표적이며, 강화도와 진천의 양명학자들, 그리고 경상도 안동의 이상룡, 김대락 일가 등이 그들이었다. 매천야록을 남긴 전라도 구례의 매천 황현도 비록 자결하였지만 그들과 일맥상통한다. 그들은 당시 집권층이며 일제 동조세력인 노론세력에서 소외된 양반 계층이었다. 당파적으로는 야당인 소론과 재야인 남인에 속한 이들이 먼저 집단적으로 만주로 이주해 독립기지를 건설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상룡
우담 이회영 일가는 대대로부터 문벌이 높은 집안으로 서울에서 내노라하는 명문대가 출신이었다. 임진왜란 때 백사 이항복은 이회영의 10대조 선조다. 그 밖에도 고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이유원 등 모두 여섯명의 정승과 두 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가였다. 이회영의 부친 이유승은 이조판서와 우찬성을 역임했으며, 모친 역시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딸이었다.
그러나 국망의 위기가 닥치자 집단망명을 결심하고 여섯 형제 모두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무장 독립투쟁에 헌신하기 위해 가족과 일가친척, 집안의 하인들, 소작인들, 자신에 동조하는 양민들을 거느리고 머나먼 북녘 땅 만주로 떠나기로 하였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집단 망명을 결의하는 이회영 형제들
북풍 부는 만주로 한일합병 조약체결을 듣고 매천 황현이 목숨을 끊었던 1910년 8월 하순, 이회영은 이동녕과 장유순 그리고 이관직과 함께 종이장수로 위장한 채 만주로 떠났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길은 군사를 길러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우는 방법과 교육으로 후세를 양성하여 훗날 광복을 도모하는 방법뿐이었다. 무장투쟁과 교육사업은 우당 이회영의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추진해온 사업이었다.
채근식은 <무장독립운동비사>에 이렇게 썼다.
1909년 봄에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는 신민회 간부의 비밀 회의가 열렸으니...이회의에서 결정한 안건은 독립기지 건설과 군관학교 설치건이었다. ...그리하여 동년 여름에 간부 이회영, 이동녕, 주진수, 장유순등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에 적당한 지점을 매수케 하였다.
한 달 남짓 남만주 일대를 돌며 기지를 물색하던 일행이 돌아왔다. 귀국 후 이회영은 집안 형제들에게 만주로 이주하자고 설득했다. 당시 대한제국 육군장교였던 이관직이 쓴 <우당 이회영 실기>에서는 이회영이 형제들을 설득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슬프다! 세상사람들은 우리가족에 대해 말하기를 대한 공신의 후예라 하며, 국은과 세덕이 이 시대의 으뜸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는 나라와 더불어 안락과 근심을 같이할 위치에 있다. 지금 한일합병의 괴변으로 인하여 한반도의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명문호적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을 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는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이회영은 여섯 형제 중 넷째인데, 위로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이 있었고, 아래로 이시영과 이호영이 있었다. 여섯 형제는 모두 그의 말에 따르기로 결심하고 가산을 처분했다. 급하게 팔다보니 제값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회영 일가가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은 약 40만원이었다. 당시 쌀 한섬이 3원 정도였는데, 이를 2000년대 쌀값으로 단순 계산하더라도 약 600억 원 정도 되는 거금이다. 우당 형제들이 이런 거금을 마련할 수 있는 데는 둘째 이석영의 동참이 결정적이었다. 이석영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양자가 되었고 한때 대원군의 정적으로 꼽히기도 했던 이유원은 막대한 재산가였다. 이석영은 아우의 뜻에 따라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모두 팔아 만주 망명에 동참했다.
교포들의 정착지, 삼원보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국경지역은 일제의 감시가 삼엄했다. 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간 한인들이 독립운동을 하며 강을 건넜기 때문이다. 1911년 정월 초 마차 10여대에 나누어 타고 첫 일행이 만주로 향했다.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에 도착한 이회영 일가는 황도촌으로 떠났다. 영하 20-30도의 살을 에는듯한 추위 속에 이루어진 강행군이었다. 매서운 북풍을 맞으며 고국을 등지고 기약 없는 발길로 북간도로 향하는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1911년 2월 7일 1차 목적지인 황도촌에 도착했다.
황도촌에는 백하 김대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룡의 처남인 김대락 역시 의성 김씨 일문을 거느리고 집단 망명했다. 김대락은 그곳에서 학교를 열었는데 모두 일곱 칸이었다. 이미 다른 망명객들이 하나씩 쓰고 있었다. 이회영 일가는 곧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로 갔다. 남만주 답사 때 무관학교의 적지로 점찍어 놓은 곳이었다. 삼원보는 현재 삼원포로 부르는데 작은 강물 세 줄기가 합쳐 흐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추가가 마을 뒤에는 6백미터 높이의 대고산과 소고산이 있고 그 뒤에도 산들이 연해 있어 유사시 대피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황도촌과 삼원보, 추가가와 뒤이어 이주할 합니하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한 운동가들의 집단 거주지가 되었다. 이회영 일가가 추가가로 이주한 뒤 많은 교포들이 뒤를 따라 이곳에 도착했다. 서울의 이회영 일가를 비롯해, 강화도의 이건승, 진천의 정원하, 홍승헌, 안동의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망명자들이 독립학교를 세우고 독립역사의 새로운 장을 만들기 위하여 속속 모여 들었다.
추가가
주경야독의 경학사의 설립 1911년 4월 대고산에서 수 백명의 한인 이주민들이 모여 노천 군중대회를 열었다. 이회영과 이동녕, 이상룡이 주축이 되어 열린 집회에서 이동녕이 임시회장이 되어 이주 동포들의 안착과 농업생산을 지도하는 교육기관인 경학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일제가 신민회 사건 판결문에서 밝힌 바 있듯이 “경학사는 민단을 일으키고 학교 및 교회를 설립하고 나아가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기회를 타서 독립전쟁을 일으켜 구한국의 국권을 회복한다.”라는 취지에 따라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로 건설된 ‘민단적 성격의 자치기관’이었다. 경학사는 누구나 농사를 짓도록 하여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표방하였다. 경학사 사장에는 이상룡이 추대 되었고, 내무부장에 이회영, 농무부장에 장유순, 재무부장에 이동녕, 교무부장에 유인식이 선출되었다. “아아! 사랑할 것은 한국이요, 슬픈 것은 한 민족이로구나”로 시작하는 <경학사 취지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무장 투쟁을 결사하겠다는 의지를 대외에 천명한다.
부여의 옛 땅은 눈강(송화강 지류)에 달하였은즉 이곳은 이국의 땅이 아니며, 고구려의 유족들이 발해에 모여 있은 즉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옛 동포들 아니던가 .... 아! 우리 집단을 지키는 것은 곧 우리 민족을 지키는 것이요. 경학사를 사랑하는 것은 곧 우리 국가를 사랑하는 것이라. 아! 기러기 떼 지어날고 서풍은 날을 재촉하는 듯하지만, 그러나 금계가 한번 울어대면 곧 동천이 밝아 올 것이다.
기지건설
그러나 이런 민단기지 건설이 결코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현지 중국인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추가장은 원래 추씨 일가들의 땅으로 그들은 조선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면 일본인들이 쳐들어올 것을 의심했다. 추씨 일가들은 한인들에게 땅을 팔지 않고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방해 공작을 하는 등 안간힘을 썼다. 이회영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동삼성 총독을 찾아가 설득하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회영은 심사숙고 한 끝에 중국 총리대신 원세개를 만나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원세개는 이회영의 부친 이유승과 친교가 있는 사이였다. 원세개는 일제에 빼앗긴 대한제국에 큰 관심이 있던 터에 이회영이 찾아오자 적극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동삼성 총독에게 훈시하여 중국인들과의 갈등을 해결하여 주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자 “3성의 현수 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후로는 한국인들을 두려워하였다.”고 전해진다. 원세개의 비서 호명신은 독립군 훈련학교 부지를 위해 추가가의 땅 대신 더 좋은 지역을 추천하였다. 이의 권유에 따라 선정된 곳이 합니하(哈泥荷)였다. 현재의 광화라는 이름으로 바뀐 합니하는 추가가보다 훨씬 험한 요지였다. 동남쪽으로는 태산준령인 고뢰자가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 있었고, 북쪽에는 청구자의 심산유곡이 펼쳐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요가구의 장산 밀림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지로, 파저강 상류 합니하의 물이 반원을 그리며 압록강을 향해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석영은 거금을 쾌척하여 이 일대의 토지를 사들였고, 1912년 음력 3월부터 학교 신축공사를 시작했다. 모든 공사는 교사와 학생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삽과 괭이로 고원지대를 평지로 만들어야 했고, 내왕 20리나 되는 좁은 산길 요가구의 험한 산턱 돌산을 파 뒤져 어깨와 등으로 날라야만 하는 중노동이었지만, 우리는 힘든 줄 몰랐고 오히려 원기왕성하게 청년의 노래로 기백을 높이며 진행했다.” 원병상은 수기에 이렇게 썼다.
합니하
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 학교 1912년 음력 6월 드디어 새로운 교사가 완성되고, 100여명의 이주민들은 낙성식을 열어 기쁨을 함께했다. 신흥무관 학교에는 본과와 특별과가 있었는데 본과는 4년제 중학과정이었고, 6개월, 3개월의 속성과는 무관 양성을 위한 특별과였다. 학년별로 널찍한 강당과 내무반이 부설되어 학생들은 교내에서 내무생활을 하도록 하였으며, 내무반 낭하에는 생도들 성명이 부착된 총기가 진열되어 있었다. 새벽 여섯시에 기상하여 전교생이 연병장에 모이면 교감의 훈시를 시작으로 체조와 독립운동가를 불렀다. 학과는 전략, 전술, 측도학등의 이론과 기마, 포격, 총검술 등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의 제반 사정은 몹시 어려웠다. 그중에서도 식량문제가 가장 애로사항이었다. 당초 신민부는 국외 독립운동기지와 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하면서 평북 이승훈이 15만원, 경기 양기탁이 20만원등 평북, 평남, 황해, 강원, 경기 등 5도에서 총 75만원의 자금을 모금해 전달하기로 했다. 하지만 1911년 9월의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사건’으로 주요간부 700명이 검거되고 그중 105명이 실형을 선고받아 사실상 해체 상태에 처하는 바람에 자금을 보낼 수 없었다.
신흥무관학교자리
학교 경영이 점차 어려워지자 중국인의 토지를 빌려 밭을 일구었다. 일과가 끝나면 학생들은 편대를 지어 조별로 산비탈을 일구었다. 나무를 베어내고 억센 풀뿌리와 돌멩이를 고르며 밭을 일구어 옥수수, 콩, 수수 등을 심고 파종해 거두었다. 학교 건너편 낙천동 산턱에서 허리까지 차는 적설을 헤치고 나무를 베었다. 이 나무 둥지를 끌어내려서 자르고 도끼로 찍어내 땔감으로 만들어 혹독한 겨울을 났다. 척박한 땅을 힘들게 개척해 냈지만 가혹한 기후 조건은 그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개교한 이래 3년 동안 내내 가뭄과 기근이 들더니 풍토병마저 돌아 많은 인명까지 빼앗겼다. 슬픔과 눈물로 얼룩진 고난의 시기를 넘겨야만 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무장하고 단군조선의 후예라는 민족적 역사의식과 독립투쟁의 의지로 어려운 난관을 극복해 나갔다. 신흥무관학교는 이철영, 이동녕, 이상룡, 여준, 이광 등이 차례로 교장을 역임했으며 1919년 11월 일본군에 쫓겨 안도현 삼림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무려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신흥무관학교 교육광경 사진
신흥무관학생들의 의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지만 여전히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1919년 7월 하순 유하현 고산자에 있던 무관학교의 교감 윤기섭과 교관 박영희 그리고 학생 여러 명이 마적 장장호에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에 일제 압력도 가해졌다. 일제는 만주지역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1920년 5월 만주 군벌 장작림과 봉천, 길림 등지에서 중일 합동수사를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이지역의 대표적 무장독립단체인 서로군정서를 유하현에서 안도현으로 이주케 만들었다. 결국 이런 상황에 몰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8월 페교 되었지만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맹세하고, 졸업 후에는 대부분 독립군 전사나 비밀결사대원이 되어 일제와 맞서 싸웠다.
청산리 대첩 기념사진
독립운동 사상 최대 전과인 청산리대첩은 신흥무관학교가 일궈낸 전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0년 10월 21부터 26일까지 6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 1,200명을 사살해 일제를 경악케 했던 청산리 대첩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대거 가담했다. 승첩을 이끈 부대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었다. 북로군정서에는 사관양성소가 있었는데 신흥무관학교는 김좌진의 요청으로 김춘식, 오상세, 박영희, 백종열, 강화린, 최해, 이운강 등을 교관으로 파견했다. 이들이 훈련시킨 독립군들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서간도 지역의 무장독립군인 서로군정서에는 더욱 많은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가담했는데, 김학규, 백광윤, 오광선 등 서로군정서와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간부로 활약한 이들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이덕일의 <이회영과 젊은 그들> 요약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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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혹된 영혼 원문보기 글쓴이: 지 담
첫댓글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또 하나의 훌륭한 사례입니다.
6형제 중 다섯째 이시영(초대 부통령)을 제외한 다섯 형제가 모두 굶어죽거나 고문당해 죽었는데
넷째 우당 이회영선생의 손자들이 바로 이종찬(전국정원장), 이종걸(의원) 등이지요.
이종찬씨는 여당의원에서 새한국당대표로 나중에는 김대중정부 국정원장을 했는데
민주화운동 당시 신교동 자택으로 민주화운동 의논차 수차례 방문했던 기억이...
그게 벌써 25년 전 추억이 되었네요...^^
민족의 얼을 잇는다는 게 다름 아닌 이런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을
더 알리고 알게 됨으로써 당면한 현안적 과제들을 지혜를 모아
해결해나감으로써 우리 민족의 고래로부터 이어져 온 홍익정신을
펼쳐나가는 것이라 봅니다~^^
훌륭한 모범을 보이신 가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