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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2.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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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2.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10.21 21:47 2026년 10월 22일 목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2,49-53
평화를 배우는 이 주간 한복판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흔드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천사들이 “땅에서는 사람들에게 평화!” 하고 노래하며 오신 그분이,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먼저 ‘불’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불은 심판이기도 하지만, 불타는 떨기나무처럼 ‘하느님의 현존’이며, 성령 강림 때의 불꽃처럼 ‘사랑과 열정’입니다. 그러니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은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붙이러 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애타게 말씀하십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런데 사랑의 불은 아무것도 태우지 않고 지나가지 않습니다. 그 불은 우리 안의 미지근함, 거짓, 이기심을 태웁니다. 그리고 여기서 ‘분열’이 생깁니다. 그 불을 받아들인 사람은 이전처럼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보고도 눈감던 사람이 눈을 뜨고, 다들 그렇게 산다며 넘어가던 일을 더는 넘기지 못합니다. 그러면 가장 가까운 이들이 먼저 불편해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맞섭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짚었듯, 예수님께서 분열을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진리 앞에서는 사람들이 갈라진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메온 노인의 예언대로, 그분은 ‘반대받는 표징’이십니다. 그리고 그분 자신이 그 대가를 가장 먼저 치르십니다 ―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곧 십자가입니다. 불을 놓으시는 분이 스스로 불에 타신 것입니다.
평화·인내 주간의 눈으로 보면 여기서 두 가지 평화가 갈립니다. 하나는 ‘거짓 평화’입니다. 불의를 못 본 척하고, 잘못을 덮고, 다투기 싫어 침묵하는 미지근한 평온입니다.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마취입니다. 다른 하나는 ‘참된 평화’입니다. 진리의 불을 통과하고, 회개를 거쳐, 화해에 이르는 평화입니다. 그것은 값비싸고, 오래 걸리며, 인내를 요구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그 증인입니다. 그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고 외치며 거짓 평화 위에 세워진 압제에 맞섰습니다. 그 때문에 세상은 요동쳤고, 그는 총에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병상에서 그 사람을 용서했고, 감옥으로 찾아가 손을 잡았습니다. 불을 통과한 평화는 이렇게, 용서로 완성됩니다. 사도 바오로의 필레몬서도 그러합니다 ― 도망친 종을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 주라는 편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내 안의 그 불(사랑의 열정)은 지금 타오르고 있는가? 나는 다투기 싫어 불의를 덮는 ‘거짓 평화’에 안주하지 않는가? 나는 진리 때문에 오해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나의 평화는 용서로 완성되고 있는가?
주님, 제 안의 미지근함을 당신 사랑의 불로 태워 주소서. 거짓 평화에 안주하지 않게 하시고, 진리를 지나 용서로 완성되는 참 평화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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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2.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10.21. 15:41
하느님 나라의 가족 공동체(Kin-dom) 안에서 서로를 품고 살아가는 은총!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복음은 제국이 가장 멸시하던 이들을 들어 올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로 삼아 주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제국과 그리스도 영성 하느님 나라의 가족 공동체(Kin-dom) 안에서 서로를 품고 살아가는 은총! 2026년 10월 21일 수요일 신학자 카트 아르마스는 초대 교회 신자들이 복음을 통해 존엄과 소속감을 들었음을 기뻐하며, 이는 정복자와 피정복자를 나누던 제국의 논리와는 대조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제국의 질서 안에서 '소속'은 양날의 칼과 같았습니다. 이름이 존중받고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으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국의 욕망을 닮은 모습으로 깎아내야 했습니다. 제국의 뜻에 순응하는 것은 생존의 방식이었지만, 이는 정체성을 지워버린 쓴 평화였습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다양성의 아름다움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고, 인간 존재의 광대한 스펙트럼을 담아낼 여백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복음의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집니다. "여기에(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인도 유다인도, 할례 받은 이도 받지 않은 이도, 야만인도, 스키타이인도, 종도, 자유인도 더 이상 구분되지 않습니다…"(콜로새서 3,11). 이 이름들—그리스인, 유다인, 종, 자유인—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영혼을 가두는 벽이었고, 누가 높아질 수 있는지, 누가 섬김에 묶여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장벽이었습니다. 그러나 콜로새서의 담대한 선포 앞에서 제국의 철벽 같은 구분은 흔들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외인마저 환영받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억지로 굴복해야만 소속된다는 논리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가족 공동체는 "평화는 침묵을 요구한다"는 거짓을 허물어 버립니다 …. 예수님의 길은 제국의 방식과 뚜렷이 대조됩니다. 복음은 제국이 가장 멸시하던 이들을 새롭게 빚어 주며, 단순한 소속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존귀한 자녀 됨을 선사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 상상력의 가장 버려진 구석까지 뻗어가 형제자매를 일으켜 세웁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려움 속에 있던 이들이 가족으로 변하는 사랑을 발견합니다.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가족 공동체(kin-dom) 안에서는 더 낮은 계급도, 일치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정복도 없습니다. 유다인과 그리스인, 종과 자유인, 야만인과 스키타이인 모두가 같은 식탁에 모여, 각자가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받습니다. 아르마스는 하느님의 움직임이 다양성과 소속감을 함께 지지하였음을 강조합니다: 바오로가 콜로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옛 인간을 벗어버리라"고 말하며 제국의 옷을 벗어던지라고 권고할 때, 이는 단순한 치장이나 외적 장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새 탄생으로의 초대입니다. 로마의 개선식에서 승리자는 옛 옷을 벗고 정복자의 권세를 드러내는 승리의 옷을 입었지만, 제국 안에서 올바른 복장은 곧 문명 자체를 상징했습니다. 로마인으로 인정받으려면 "제대로 입는 것"이 필수였고, "야만인"이라 불린 이들은 세련됨이 없다는 이유로 외인으로 낙인찍혔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유럽의 식민지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잔재로 남아 있습니다. 제국에 속하려면 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다른 옷을 입으라고 초대합니다. 곧 자비와 친절, 겸손과 온유, 인내,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으로 자신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얕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묶고 치유하며, 단순한 구분만 있던 곳에 친교를 이루어 줍니다.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가족 공동체 안에서는 권력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깊은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우리에게 집이 되어, 다름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합니다. 곧 친교와 연대, 그리고 우정의 자리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와 마찬가지로 많은 친구와 가족이 부끄러움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전염병과도 같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권위주의적 지배자에게 끌리고, 또 하나의 나라 안에서 깊이 분열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난 여덟 해 동안 제 안의 부끄러움을 벗겨내는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저의 희망은 모든 이가 부끄러움의 독성을 깨닫고, 내적 평화를 향한 길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 Greg I. Reference Kat Armas, Liturgies for Resisting Empire: Seeking Community, Belonging, and Peace in a Dehumanizing World (Brazos Press, 2025), 180–181.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마치 오래된 돌들이 서서히 언덕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제국의 구조물들은 사라져 가지만, 땅에 뿌리내린 예수님의 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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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2.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22 05:01
- 사랑의 근본작업
오늘 에페소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 말씀이 그리고 이 모습이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저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 앞에 무릎 꿇은 것이 왜 아름다울까요? 굴복 또는 승복 때문입니까?
오늘 여기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기 위해서고, 그것도 자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신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이기에 아름답고 저도 그러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자기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보다 더 아름답지도 않고 더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음 만큼 행복하지 않고 사랑이 넘칠 정도로 충만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은 남을 위해 절대 기도할 수 없잖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만큼 행복하고 사랑도 충만해야 하는데 관건은 어떻게 그리될 수가 있느냐 그것입니다.
에페소서의 이어지는 말씀에 그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고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면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지극히 당연합니다. 이것이 충만해지는 가장 완전한 방법인데 관건은 이것이 충만해지는 가장 완전한 방법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말에 알아야 면장도 해 먹지!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 안에는 면장직이란 별것 아닌 것도 알아야 할 수 있다는 뜻이 있지요.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모르면 할 수 없다는 뜻이 있고, 그러니 대단하면 할수록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은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처럼 사랑하는 법을 알고 행복하게 되는 법을 우선 아는 사람이고, 다음으로 아는 것을 실제로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알게 되어 실제로 사랑을 실천하기까지의 그사이에 뿌리 내리기 곧 하느님 사랑에 뿌리 내리기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아는 그 시작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흘러넘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면 우리 사랑이 하느님 사랑에 풍덩 잠겨 거기서 뿌리내려야 합니다.
어제 수녀님들과 식사하며 요즘 한창 연근 캐는 얘기를 했는데 연이 연꽃과 연잎으로 우리 눈을 행복하게 하고 우리의 입을 감미롭게 하기까지 연근은 물속에서 드러나지 않게 행복과 아름다움을 끌어올리는 작업을 했겠지요.
하느님의 사랑은 사랑의 근본이고 우리 사랑의 근원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뿌리 내리기는 우리 뿌리(根)가 본원(本原)에 가닿고 연결되는 근본작업입니다.
뿌리가 흔들려도 존재는 몸살을 하는데 뿌리가 근본적으로 뽑히면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도 근본작업을 잘해야 함을 깨닫고 지금이라도 그 작업을 튼실히 하는 우리가 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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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2.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10.22. 05:24 삶의 의미를 찾아가기 위해...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삶의 의미를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이고요... 사실 예수님께서는 자주 "나는 …하기 위해 왔다."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루카 5,32).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오늘 복음),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요한 5,43).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요한 12,27).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요한 12,47).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요한 16,28).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고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요한 18,3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디서 오셨는지, 왜 오셨는지를 분명히 아신 분이십니다. 삶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은 힘을 잃고 기운이 빠지는 것이며, 열정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존재의 의미를 아셨기에 불과 같은 열정을 지니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여기서 "세례"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잠김, 잠수, 깊이 뛰어듦"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명 속으로 뛰어들기를 갈망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불과 같았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 선언한 것처럼, "나의 말이 불과 같고 바위를 부수는 망치와 같지 않으냐?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23,29). 평화의 임금이신 예수님께서 가져오시는 평화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은 듯한 무기력한 평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거짓된 평화를 가르고 깨트리며 불사르는 칼이요 불로서 진정한 하느님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신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서 말하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화의 임금이신 분께서는 우리의 거짓된 평화, 즉 '내' 안위만을 바라는 '세상적 평화'를 부수시고 하느님의 진정한 평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 내면에 불을 놓으시고 갈등하게 만드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시는 가족간의 분열은 바로 '내' 안위에만 무의식적으로 머물고자 하는 우리의 정신을 깨우는 예수님의 불이요 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제 안에서의 어떤 불안과 같은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고자 하는 순간에도 어떤 때는 제 존재의 의미가 전혀 와닿지 않기까지 합니다. 불안하고 무의미하고 피하고 싶고... 등등.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제 내면의 상황이 바로 주님께서 저로 하여금 참된 평화, 참된 존재의 의미로 나아가게끔 제 안에 불을 지르고 제 정신을 칼로 베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요즘 느끼는 제 내면의 불안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긍정적인 것이겠지요?! 우리는 어차피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불안을 느끼기도 하고 호된 시련의 한가운데를 건너가야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때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평화로 이끄시기 위해 우리 존재 안으로, 우리 삶 깊숙한 곳으로 개입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한다면 우리는 이 시간을 주님과 더불어 건널 수 있게 되겠지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과 완성으로 이끄시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분열과 불의 길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분열과 불의 길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길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온전한 사랑으로 '내' 중심의 정신구조 안에서 오랫동안 익숙해져 온 우리의 오염된 내면을 정화시켜 주시는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면 이런 긍정적인 결론이 분명히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궁극에 가서는 사랑과 선이 미움과 죄를 모두 다 씻어내는 그런 기쁜 소식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삶의 여정 안에서 우리 내면 안으로 들어오시는, 아니 아미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현존하시며 일하시는 주님께 우리 마음의 시선을 집중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사랑 안에서 불안과 시련 가운데서도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길 저쪽에서 오는 빛줄기를 발견하게 되겠지요?! 이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분명히 밝히셨듯이, 우리도 우리 삶의 의미를 분명하게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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