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鍮器)는 구리합금(놋)으로 만드는 기물을 말한다. 한반도에서는 흔히 고급 식기를 만들었으며 이것을 '놋그릇'이라고 한다.
신라시대(8세기 경)부터 유기를 만드는 국가의 전문기관인 철유전(鐵鍮典)이 있었고, 일본에 전해지기도 했다(정창원 신라 유기그릇). 고려시대에는 그 기술이 더욱더 발전하여 얇고 광택이 아름다운 유기를 만들었다. 이때의 우리나라 유기제품은 외국에서 신라동, 고려동이라 해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고려시대부터 도자기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배계급의 그릇이 청자, 백자 등 자기로 바뀌게 되어 상대적으로 시장 점유율이 떨어졌으나, 조선 후기 광업의 발달로 인해 원자재 공급이 용이해지면서 18세기에 이르러 대세가 되었다. 당시 사대부들이 경기도 안성에 유기를 주문 생산케 하였는데, 안성에서 제작된 유기는 형태나 기능이 월등히 뛰어나 사대부들의 마음을 흡족케 했고, 그로 인해 '안성맞춤' 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유기장 역시 한양보다 갑절 이상 규모가 컸다고 전해진다. '유기' 하면 안성을 떠올리게 된 것이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 외에도 정주와 김천·함양은 방짜, 순천은 방짜와 주물의 중간 형태인 반방짜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안성은 주물 유기가 유명하다.
▲유기(鍮器)장수
놋주발, 놋대야. 놋요강을 팔고 있다
▲(上) 놋대야 (下) 놋요강
▲장날이다. 길가에 놋주발과 놋주걱을 진열한 유기장수
▲ 남녀의 놋주발(밥그릇)
남자 것은 대체로 어깨가 넓고 밑으로 내려가면서 점차 좁아지고,
여자 것은 배가 부르면서 곡선미가 있다.
▲ 놋주걱
▲담뱃대가 한창 길었던 1890년대의 어느 유기장수
징, 꽹과리, 워낭, 촛대, 양푼 등 다양한 놋제품을 팔고 있다..
▲ (上) 워낭 (下) 놋양푼
(詩)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엔 박넝쿨 올리고 /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 놓고
밤이면 싫컷 별을 안고 /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나는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 여우 나는 산골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 징. 꽹과리
▲ 담뱃대를 파는 등짐장수
▲ 마른 명태가 널려 있는 건어물가게
▲ 건어물과 건과일이 진열된 가게
▲ 시징에서 굴비두름을 들고 흥정하는 사천상인
경남 사천은 남으로 바다와 접해있는 곳으로 수산물이 풍부하다.
▲ 어느 장날
▲ 곡물가게와 노점상. 1930년
▲ 한성의 싸전거리
▲ 곡물가게를 '싸전'이라 불렀다. 1935년
▲ 체장수 : 체는 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거르는데 쓰인다
▲왼쪽은 체로 치고, 오른쪽은 키로 까분다.
불랼품 검정고무신이 장바닥에 쌓여 헐값에 팔리고 있다.
짝만 잘 맞추면 제 몫은 톡톡히 하는 물건이다.
▲ 은방(銀房) 앞의 고무신가게와 행상
▲ 1940년대의 마포나루
첫댓글 댓글 NO1
제가 기억나는 것 몇 가지 멘트를 해야 하겠습니다.
놋그릇! 놋그릇에 밥을 담아 먹던 생각이 납니다.
외출해서 밥상에 앉지 못한 식구 따듯한 밥 주기 위해
온돌방 아랫목에 이불에 쌓아 놓고 식구 챙기시던
어머니 생각이 나고 그립습니다.
일정 말기 놋그릇을 공출했습니다.
이를 감추기 위해 마루 밑에 숨겨 놓았습니다.
또 색이 변합니다. 이를 빛을 내기위해 기왓장 곱게 갈아
새끼줄에 묻혀 닦아 빛을 냈습니다.
굴비! 사진에 들고 있는 마른 굴비가 왜 그리 큽니까!
요즈음 그 정도면 명절 때 100만원이상 갈 것 같습니다.
옛날 봄철 쑥갓 나올 때 마포로 조기가 들어 왔습니다.
니야까 장사꾼이 가마니에 넣은 조기를 팔러 다닙니다.
집집마다 접으로 한 접 두 접으로 삽니다.
덤을 달라하면 3~4마리 던져 줍니다.
알배기 조기매운탕 식구들이 상에 둘러 앉아 먹습니다.
그 나머지는 굴비를 만들던지 절여 가을 김장 때
배추김치에 넣습니다.
지금 서민들이 굴비다운 굴비를 못 먹는 것은 냉동창고업이
생긴 까닭인 것 같습니다.
댓글 NO2
싸전가게! 그 때는 10말이 한가마입니다.
중량제가 실시되면서 80Kg가 한가마가 되었습니다.
근래는 봉지 넣어 20Kg 씩 판매하고 있습니다.
마포나루! 8·15이후에도 배가 마포에 들어 왔습니다.
마포는 전차 종점입니다.
누구나 쉽게 새우젓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새우젓 독은 큰 아이 키만 했습니다.
이 새우젓 독이 점점 적어져 갓난아이 크기만 못하게
되더니 그마저 사라지고 없어졌습니다.
새우젓은 가정에 필수품입니다. 조금 싸게 먹기 위해
소래항구에 갑니다. 잡은 새우를 말로 파는데 말이라는 것이
어디서 만들었는지 조그마한 바가지만 합니다.
한 말 두 말 구입해서 집에서 젓갈을 만듭니다.
저희 집도 몇 번 젓갈을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싸게 먹는 방법이 아닌 가
여겨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트에서 구입을 해야 하는데
1Kg정도 될까하는 병에 육젓 경우 값이 2만원정도 합니다.
전술한 큰 아이만한 독이라면 병 200개 이상 될 겁니다.
새우젓 한독에 400만원이라, 계산이 그렇게 나옵니다.
아, 옛날이여!
이민혜선생님 고맙습니다.
너무 싱거운 댓글 올려 미안합니다.
김윤권 선생님의 자상한 댓글이, 무채색의 '구한말의 풍경'을 천연색으로 만드셨어요.
놋그릇 공출 때의 풍경, 명절이 다가오면 둘러앉아 놋그릇 닦던 풍경, 굴비 두름과 큰 새우젓독...
눈에 선합니다.
구한말 풍경 중에서 장수들을 위주로 조사한 것이 다음 회로 마지막이 됩니다.
그간 애독해 주시고 댓글 주셔서 넘넘 감사합니다.
어릴 때 사용했던 놋그릇은 다 어디로 갔는지...놋 화로 하나만 유산으로 가져와 서재에 두고 있습니다. 불을 피우지 않는 夏爐가 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