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은 객관성 지향한 집단창작 산물
당세의 인물을 극화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2002. 1. 15> 박종철 군이 사망한 지 15년.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다. 자료화면 등을 통해 다큐멘터리로 구성한다면 별 문제지만 ‘제 5공화국’ 드라마가 쉽게 만들어지지 못하듯 드라마는 시간의 경과를 필요로 한다. 고인의 명예훼손 문제, 살아 있는 주변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사실만 가지고 드라마를 만드는 것은 드라마틱하지도 않을 뿐더러 극성(劇性)도 떨어진다. ‘박종철 드라마’의 경우도 이 같은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물론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부터 치안총수의 구속까지 신문지상에 알려진 사실들은 많았다. 이를 그대로 재구성하여 다큐멘터리 드라마로 가볼까 하는 고려를 한동안 했다. 그러나 사건들을 이어 붙여보니 너무 건조한 느낌이 들었다. 박종철 군의 생애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틱 구성은 허구성에 대한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반발이 예상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박종철 군의 모든 면을 미화할 수만도 없는 문제였다. 이러한 드라마는 객관성이 생명이다. 이에 자료수집을 먼저 한 후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적절히 가미하기로 일단 결론을 내렸다.
집단 창작시스템 시도
<2002. 2. 1> MBC 2001년 베스트극장 공모에 당선된 작가 5명이 특집극 사무실에 같이 모였다. 집단 창작시스템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드라마국의 입장을 듣자 취지에는 모두 수긍을 했으나 글을 써보자는 데 오케이를 한 사람은 셋이었다. 일주일 후에는 2명으로 줄었다. 역시 어려운 작업이라 점차로 포기하겠구나 우려가 많았었는데 노유경, 여정미 작가가 끝까지 함께 해줬다. 드라마 극본을 두 사람이 같이 쓴다는 것은 역시 장단점이 있었다. 한 명이 전체의 줄거리를 통일성 있게 잡아가는 게 일인작가시스템의 장점이라면 객관적 시각, 토론을 통한 다양한 분석과 융합이라는 측면에서는 두 사람이 유리했다. ‘박종철 특집극’의 경우는 객관성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물론 사공이 하나 더 늘다보니 삐그덕거릴 때도 많았다. 서로가 1,2부를 교대로 써보며 수위조절을 했고 네 작품, 내 작품이 아닌 팀워크의 산물로서 작품을 내고자 하는 서로의 묵시 하에 하루하루가 흘렀다. 이런 드라마라면 앞으로도 집단창작을 해보고 싶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고문장면 자신있게 재연
<2002. 2. 20>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많은 자료가 있어야만 ‘박종철 드라마’가 편파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했다. 이 인터뷰가 방송을 타지는 못했지만….
박종철 군 아버지와 황적준 박사가 인상적인 사람들이었다. 아들의 죽음 이후 민주투사가 되신 박종철 군 아버지는 이제는 오히려 담담한 어조로 아들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그려달라고 부탁하셨고 아들이 초등학교 때 받아온 상장과 성적표를 보여주며 가끔씩 회한에 잠기곤 했다.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였고 지금은 고려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황적준 박사는 자그마한 키에 까만 안경 속에서 반짝이는 눈망울이 인상적이었고 차분한 어조와 명쾌한 목소리는 박종철 군의 사인을 자세하게 규명해줬다. 박종철 군의 죽음은 정권의 운명뿐 아니라 개개인들의 운명도 많이 바꾸어놓았다. 황적준 박사가 양심선언으로 국과수를 그만두었다면 당시 담당검사였던 안상수 검사는 박종철 군 사건 때 사표를 제출, 변호사를 거쳐 한나라당 의원이 되어 있었다. 당시 공안부장이었던 최환 변호사, 사체를 처음 본 오연상 용산병원 의사, 당시 기사를 특종한 동아일보 황호택 논설위원 그리고 대학교 친구들 등등….
재미있던 점은 많은 재료를 증언을 통해 확보하려 했던 당초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일이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증언만큼 많은 에피소드가 확보되리라 했던 예상과 달리 서로의 주장간에는 이견이 많았다. 박종철 군 연행시간뿐만 아니라 사인에 대해서도 물 고문, 혹은 전기 고문의 가능성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들, 특종에 대한 배경, 당시 검찰 내에서의 역할 분담 등 서로간에 적극 주장하는 이견들로 오히려 하나의 의견을 드라마화기가 어려워졌다. 이는 서로간의 의견차이뿐 아니라 이해관계도 한 몫을 했다. 결국 확실하지 않은 부분은 추정으로 주장하거나 배제하기로 했다.
고문 당시의 상황에 대한 부분은 덕수법무법인에 있는 김형태 변호사로부터 당시의 공판기록(민사소송)을 얻어 근거자료로 삼았다. 이 공판 기록덕에 소송문제까지도 고려해야 했던 고문장면은 자신감있게 그릴 수 있었고 고문경찰관을 돈으로 매수하려 했던 장면들이나 박 군이 죽은 뒤 검찰의 심문을 예상해 경찰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예행연습을 해보는 장면까지도 방송을 탈 수 있었다. 일반 드라마라면 익명의 인물로도 얼마든지 더 자극적으로 그릴 수 있었겠지만 실명이 거론되고 화면을 보면 누가누군지 추정할 수 있는 이번 드라마에선 그 정도라도 수확이라 할 만했다. 처음엔 자극적인 부분을 빼자고 주장했던 김형태 변호사도 신문기사, 책, 인터뷰 자료, 공판 기록에 힘입어 소송이 들어와도 충분히 싸워볼 수 있다며 방송 전날 보내진 테이프에 만족해했다.
대본을 열 번쯤 고치다
<2002. 4. 20> 대본을 열 번쯤 고쳤을까, 순서의 편집이 문제였던 것 같다. 박 군의 대학시절 그리고 사망 당시의 전후 한 달을 어느 순서로 보여줘야 효과적일까하는 고민으로 대본을 많이 수정하게 된 것 같다. 100% 마음에 드는 대본은 아니었지만 방송날짜가 잡혔고 서둘러야 했다.
70명에 이르는 배역을 연극을 직접 보기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추천을 받기도 하면서 일일이 오디션을 거쳤다. 덕분에 좋은 연극배우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문제는 주인공이었다. 아역 배우 오디션이 별 소득 없이 끝나고 박종철 군 모교인 서울대내에서 후보를 찾는다는 원칙 하에 서울대 연극반 8개 단대 동아리에서 50여 명의 오디션을 거쳤으나 적당한 인물이 나오질 않아 고민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양평의 민주화묘역을 찾아가 박종철 군의 가묘에 술을 부어주고 왔는데 박 군의 죽은 영혼이 프로그램을 도왔는지 서울대 내 길거리 캐스팅에서 박 군과 똑같은 최동성 군을 만날 수 있었다. 같은 부산출신에 같은 동네 출신. 성실한 자세와 진지한 노력으로 한 학기를 포기하면서 드라마에 협조해준 최동성 군의 경우는 그의 연기에 대한 몇 사람의 지적을 초월하여 지금까지 같이 했던 주인공 중 가장 흡족하게 적역을 맡았다고 여기는 경우다.
사체 모형이 사기를 돋우다
<2002. 5. 15>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은 80년대 중반의 고증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박종철 군이 사망한 1987년 1월 14일 전후 1주일간의 이야기를 담으려 하니 대본의 70%가 겨울 신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한여름에 겨울 신을 안 찍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러기에는 겨울분량이 너무 많았고 따라서 서울시내 차량장면을 비롯해 일부 신은 6mm 카메라로 번지는 효과를 냈고, 박 군의 유해를 임진강 지류에 뿌리는 장면에서는 대폭 배경을 좁히는 수밖에 없었다. 사방은 푸르렀고 월드컵의 열기를 반영하듯 시내 곳곳에 태극기가 나붙어 있었다. 중요한 신을 찍을 적마다 한국의 중요한 경기가 있었다. 누구도 예상 못한 16강을 넘어선 8강, 그리고 4강. 경기가 끝날 적마다 기쁜 마음으로 맥주 한 잔 대신 촬영장으로 향해야했고 선수들의 무용담으로 촬영장 분위기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민감한 사안이라 이해는 했지만 경찰청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유감이었고 프로그램 이름을 다 말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기곤 했다. 그 와중에 오랜만에 허락해준 서울대의 촬영협조는 단비였고 분장팀이 한 달에 걸쳐 만들어낸 박 군 사체 모형은 사기를 돋구었다. 가슴을 자르면 내부 장기들이 그대로 보여지도록 사실적으로 제작된 박 군 모형에 막상 해부용 칼을 대고 장기를 들어내는 씬을 찍고 나니 너무 자극적이라 주위에서 말려 미리 편집에서 잘라냈는데, 박 군의 부검이 고문치사를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점에서 더 보여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TV표현의 제약과 함께 남았다.
월드컵에 묻힐까 우려
<2002. 6. 24> 그리고 어김없이 다가오는 D-데이.
방송 당일 저녁 8시까지 편집을 해야 했던 어려움보다는 드라마가 월드컵의 화려한 폭죽소리에 묻혀 지나가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게 더 큰 우려였다. 두 달 전에 잡힌 편성시간. 기대 밖 4강의 뜨거운 열기에 그 틈새로 조용히 묻혀간 게 아닌가 싶다.
어느 누구를 편들거나 누구를 단죄하고자 시작한 드라마는 아니었다. 서로 다른 이슈지만 그때도 시청 앞 광장은 인파로 가득했었다. 사건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가 문제가 아니라 너무 빨리 잊혀지는 나라. 박 군이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분명히 죽어갔을 당시의 정국. 하수인 5명의 고문 경찰관에게 내려진 짧은 구형. 그리고 박 군의 가족이 짊어지고 가야 할 긴 세월들. 그것은 불과 15년 전 일이었고 잊기엔 너무 짧은 기간은 아닐까?
진작 박종철 군의 드라마가 만들어졌더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인간적인 면에 대한 다양한 접근으로 훨씬 인간미 넘치는 인물을 그리고 싶었고 모범생으로 일관되는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었으나 ‘박종철’로 첫 실명 방송되는 프로그램이라 부담이 컸다.
이정표 MBC 드라마국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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