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짐승의 차이를 아시나요?”
초등학교 때 일이었습니다. 몇 학년이었는지 희미하지만, 아마 ‘바른 생활’ 시간이었을 겁니다. 선생님이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간단히 적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사람은 생각을 하지만, 짐승은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적었습니다. 늘 듣고 배우던 말을 그대로 옮겨 쓴 답이었고, 아마 정답이라고 칭찬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스물다섯 해쯤 지난, 서른 중반의 어느 때였습니다. 미국 생활 13년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직후였습니다. 한학과 서예를 배우고 싶은 갈증이 컸습니다. 진홍의 철쭉이 천지를 물들인 늦봄, 회사 근처 홍릉의 허름한 골목길을 헤매다가 일흔 가까운 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분은 제 31대 할아버지이신 고려 말 역동 우탁 선생의 스승의 31대 후손이라 하셨습니다. 오래전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먼 세월을 건너 그 후손들 사이에서 다시 이어진 셈이었습니다.
처음 잡은 책은 『명심보감』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배우게 되었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그 가운데서도 예(禮)라고 선생님은 강조하셨습니다. 새로울 것 없는 말일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새롭고 좋았습니다. 어질고 의리 있고, 때로 재치 있게 행동할 줄 아는 짐승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의를 갖출 줄 아는 존재는 아마 사람뿐일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홍릉 스승님과의 인연은 몇 달로 끝났습니다. 그 뒤로는 인사도 더 열심히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더 공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사람답기 위해 예를 갈고닦는다는 일이, 어느 순간부터는 어색한 질곡처럼 갑갑하게 느껴졌습니다. 훗날 유명해지면 써먹으리라 마음먹었던 서예는 별로 진척이 없었고, 무엇보다 예의와 법도를 앞세우는 많은 말들에 대해 회의가 생겼습니다.
그로부터 일 이년 후, 비슷한 늦봄의 어느 날 남도에서 스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호젓한 산속 개천사라는 암자에서였습니다. 소박한 다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저는 스님께 불쑥 여쭈었습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가, 있다면 방향성이 있는가.” 저 자신과 제가 아끼는 많은 사람들의 존재 의미와 방향이 극도로 혼미했던 때라, 무척 조급했던 모양입니다.
스님은 곧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다르마’를 말씀하셨습니다. 물 흐르듯 이치에 따라 얽히고 흘러가는 법이라고 하셨습니다. 편안하고 고요한 음성이었습니다. 알 듯 모를 듯한 가운데, 스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으음, 그러니까….”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성(理性)이나 예(禮)를 말할 자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억지스러운 통찰을 꺼낼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기억이 흐릿했고, 그 차이도 모르면서 사람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떠벌이며 오래 어둡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범한 질문 같았지만, 그 순간 제 생의 첫 화두를 받은 셈이었습니다.
그 만남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로부터 약 3년이 지난 어느 화사한 봄날입니다. 세상은 어수선하지만, 봄은 여전히 봄입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그 질문은 보송보송 꿈이 푸르던 십 대의 어린 날부터, 온갖 세상 유혹 속에서 자신을 찾고 지키고 가꾸어야 할 불혹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저를 여러 번 찾아왔습니다. 잊을 만하면 멍한 아이를 깨우듯, 알 만하다 싶으면 새로운 인연 속에서 새로운 몽둥이처럼 다시 왔습니다.
오늘은 오래 전 10대의 저를 닮은 듯한 제 아이에게 물어봅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게 무엇이냐?”
아이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게임에 바쁩니다. 제 질문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그런 아이가 좋습니다. 어쩌면 제 나이에는 몰랐던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편안해 보입니다.
다르마는 태양과 같습니다. 천지를 밝히는 생명의 등불이자 모든 있음의 원천입니다. 그렇다고 “태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 모양이 궁금하다” 하며 맨눈으로 오래 뚫어지게 쳐다보면 두 눈이 상합니다. 근본의 문제를 향한 치열한 사유는 필요하지만, 그것을 한 번에 꿰뚫으려는 욕심과 집착은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흐린 날 구름 사이로 태양을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한 까닭입니다.
아이도 어쩌면 그것을 알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천지조화의 법리’를 단박에 알아내겠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버리기보다는, 게임 속 병정들을 조정하다 힐끔힐끔 주위를 둘러보고, 쉬엄쉬엄 그 존재와 모양을 생각해 나가는 오묘한 지혜에 조금은 눈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가만히 보니, 아이 두 눈 사이에는 그림자 같은 이상한 눈이 하나 더 보입니다. 자기 밖에서 자기를 볼 수 있는 눈, 멀고 가까운 우주의 한 지점에서 자신과 주변의 모든 것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관조적 성찰의 눈일 수 있습니다. 분명 짐승에는 없는 눈입니다. 짐승은 그런 눈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아마 거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 안에서 밖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밖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가. 자신과 연결된 세계를 함께 바라볼 수 있는가’. 그 눈, 그 법안(法眼)의 가능성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한 징표일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이 글은 2000년에 쓴 원고를 바탕으로,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다듬은 것이다.
우천식. KDI 연구부장, 재경부 자문관, OECD 선임분석관 등을 역임한 경제정책 전문가다. 피아니스트이자 사진가로 생활예술을 병행하며, 과학정신과 불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삶과 공동체를 탐구한다.
2026.7.26 접수 From 우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