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의 외출
김용례
가을의 끝에서 겨울을 재촉하는 찬비가 내린다.
작은아이 수능도 마치고 이젠 뭔가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으로 미루고 망설
였던 그리고 꿈꿔왔던 혼자만의 여행길에 나섰다. 책 몇 권 챙기고 세차하고 연료 가득
채우고 처 밖아 두었던 포크송 테이프 까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속도로를 질주해
선운사에 도착하니 벌써 해는 서산으로 기울었다.
선운사 동백 숲은 씩씩한 청년처럼 푸르름으로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삼월쯤이면
붉은 동백꽃을 피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울렁증을 일으킬 겐가 또 얼마나 많은
언어들을 낳을 것인가.
산사의 어둠은 급하게도 찾아온다. 맑은 풍경소리가 나그네 된 나를 더 쓸쓸하게 한
다 찬 바람을 맞으며 혼자라는 외로움이 엄습해오고 바람은 억새를 흔들고 그 흔들림
에 내 마음도 흔들린다.
비온 뒤의 썰렁함 때문인가 출발 할 때의 들뜸은 다 사라지고 온몸을 감싼 외로움과
불안감 낮선 곳에서 홀로 보는 달빛은 소름끼치도록 차갑다. 철지난 바닷가 모래사장
에 덩그마니 버려진 노 없는 돛단배가 지금의 내 마음일까 들지 못하는 잠을 청하려 책
도 읽어보고 낙서도 해보지만 왜 이렇게 새벽은 더디 오는지 이렇게 반갑게 맞아본 새벽
이 있었던가, 서둘러 잠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미당 서정주 문학관에는 누이 같은 노란국화가 선명한 그리움을 지닌 채 곱게 피어있
었다 시인을 키워준 팔 할이 바람이라더니 부안은 정말 바람이 많이도 분다.
해지기전 집으로 돌아가려면 서둘러야했다. 그래도 여행인데 혹여 영화에서처럼 우- 14
연을 빙자해 멋진 만남이 있으려나하고 잠시 바닷가를 거닐어보았다. 밀물 때였다. 끝
없이 펼쳐진 뺄 속으로 밤새 이슬을 밟고 다닌 주정뱅이처럼 후줄근한 적삼을 걸친 사내
들의 무리가 고달픈 몸을 이끌고 허연 이를 히죽거리며 밀려온다. 멋진 만남을 못한 아
쉬움과 파도를 뒤로 한 채 더 머물고 싶은 미련을 버리고 담양 우리 문학의 산실인 가
사문학관으로 차를 돌렸다.
당시 조정의 당파 싸움에 연루되어 평생을 귀양살이로 마치면서도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다. 책으로만 보던 송강 정철의 송강
정, 송강의 스승이었던 면앙 송순의 면앙정, 석천 임억령의 식영정.
송강 정철은 은거 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많은 가사와
시조를 통해 임금에 대한 충성과 나라의 안위와 풍류를 즐겼던 선인의 숭고한 정신과
멋을 느낄 수 있었다.
시인을 생각하며 식영정 정자 끝에 가만히 앉아 보았다 어디선가 한줄기 시 같은 바
람이 불어온다 정자 앞에 흐르는 강물은 애절한 노랫소리, 대나무 숲은 그님의 빛나는
눈빛, 소나무 숲의 따스한 솔바람은 아직도 가슴에 뜨겁게 품고 있는 님의 사랑인 듯 안
온하다.
선인들의 숨결을 느끼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처음으로 혼자해본 초겨울의 긴 외출 큰일을 해낸 것 같은 뿌듯함과 낮 익은 거리를
보니 초동의 알싸한 바람이 기분 좋은 피로감으로 몰려온다 오늘은 서정시 같은 평온
함으로 달큰한 잠을 잘 것 같다.
2005/23집
첫댓글 처음으로 혼자해본 초겨울의 긴 외출 큰일을 해낸 것 같은 뿌듯함과 낮 익은 거리를
보니 초동의 알싸한 바람이 기분 좋은 피로감으로 몰려온다 오늘은 서정시 같은 평온
함으로 달큰한 잠을 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