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무신태왕 님을 보니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문정창, 임승국 이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두분 다 재야사학자란 타이틀이 붙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학시절은 두 분의 책을 읽고 많은 영향도 받았고, 또 의문도 가졌습니다.
이런 분들의 주장이 설득력도 있는데, 왜 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할까?
특히 대무신태왕님이 문제를 제기한 한사군 문제에 대한 이분들과 학계의 차이는 너무도 엄청나게 틀립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 나 역시 진지하게 아주 오래 오래 고민을 했었습니다.
한사군의 위치 문제 크게 두 가지 문제로 나눠집니다.
첫째. 한사군의 첫 설치 지역 = 위만조선의 위치 = 고조선의 위치
둘째. 낙랑군과 대방군의 위치 = 백제와 고구려의 접경 지역.
첫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아직도 이견이 있습니다. 나는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요하 하류 정도에 비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확정할 수는 없지만. 이럴 가능성이 매우 큼을 염두에 두고 있고,
언젠가는 다시금 연구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모른다고 합니다. 기존의 학설을 깰 만큼 저의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고조선사 연구를 제대로 시작도 안 한 상태라 확답하고 싶지 않은 문제입니다.
두번째. 문제는 엄밀하게 말해 한사군 문제가 아니라, 낙랑, 대방군의 위치 문제인데, 이 문제는 서기 37년 낙랑국의 멸망과,
서기 44년 광무제에 의한 낙랑군 설치 문제가 있기 때무에, 첫번째 문제와 달리 볼 수 있는 소지가 있겠지요.
이 두번째 문제에 있어서는 나는 현재의 평양과 황해도 일대 지역이라는 학계의 정설을 인정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고증을 하게 되면, 너무 너무 길어지지만,
과거에 내가 왜 두번째 문제에 대해 문정창, 임승국 님의 설을 거부했는가 하는이야기를 드리지요.
그것은 천관우 선생님의 '난하 하류의 조선'이란 논문, 그리고 확정적으로 생각을 굳히게 만든 것은
고구건이의 '낙랑고분문화 연구'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랑 대화를 하다가, 이런 말들이 오고갔습니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없다면, 좋겠고, 또 그러면 우리 역사가 과거에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잘못된 선입견도 없앨 수 있으니 좋다. 하지만,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건 없건이 왜 문제인가? 과거 부터 한반도는 순수한 우리 땅이라는 고집은 우리 스스로 반도인임을 자처하는 것이 아닌가? 영토라 팽창과 수축이 있는데, 왜 한반도에는 왜국의 근거지, 중국의 근거지가 있으면 안되는가? 원나라의 동녕부, 쌍성총관부, 탐라총관부는 다 한반도 안에 있었는데, 그것마저 부정하려 하는가?
고구려가 북경까지 진출한 것을 자랑하는 것 만큼,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다는 것도 액면 그대로 인정할 줄 알아야 역사를 공정히 보는 것이다. 만약 한사군이 한반도에 없었다고 한다면, 요동, 요서 지역의 중국 군현들이 줄줄이 서쪽으로 이동시켜야 하는데, 그와 같은 지명 비정이 가능할 수 있을까?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보면, 낙랑군을 요서에 두기가 어렵다.
또한 낙랑, 대방과 관계를 맺은 한반도 남부의 여러 소국들은 활동 등도 줄줄이 달라져야 하는데, 그것은 또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지명의 이동문제는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복합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기존 학계에서 이덕일 선생의 책에 답을 하지 않는 이유는 답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이 지적했듯이, 이덕일 선생의 주장은 이미 70-80년대에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한 것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며, 낙랑군의 위치 등은 한국고대사의 지명 고증이나 문화 전파 등에 있어서 기본 상식이 된 문제로 취급되기 때문에 굳이 대응할 필요조차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덕일 선생이 제기한 주장들만으로는 기존의 학설을 깨기에는 너무도 부족합니다.
몇년 전 평양낙랑구역 정백동 출토 목간은 낙랑군의 위치가 평양 주변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학계에서 뭐 자연스러운 일이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평양지역을 낙랑군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은 이 목간을 놓고 무리하게 해석을 하려고 했습니다. 현재까지는 유물로 볼 때 평양일대가 후한시기 이후 낙랑군임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님이 만약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면, 천관우 선생의 논문을 보고 중국 군현의 위치 비정을 전면적으로 다시 하고, 고구건이의 방대한 낙랑고분 출토 유물들을 다른 고구려와 백제 유물과 비교해보면서 이것은 중국것도 아닌 낙랑군의 것임을 밝히고, 남한 지역 내에 낙랑문화에 영향을 받은 유물들의 해석을 전부 다 바꾸는 수고를 해준다면,
기존의 학설이 바뀔 수도 있겠지요.
인터넷에서 일부 성급한 사람들은 낙랑군을 한반도에 있다고 주장하면 식민사학자요, 대륙에 있다고 주장하면 민족주의 사학자다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누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정말 한심한 편가르기 입니다. 낙랑군의 위치가 한반도라고 해서 우리 역사가 못났고, 대륙에 있다고 해서 우리 역사가 더 화려해지고 우리 조상들이 더 잘나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운지를 따져보는 것입니다. 보기 싫다고 왜면하고, 아니라고만해서는 안 되겠지요.
역사는 정답이 딱 정해진 학문은 아닙니다. 언제든지 답이 바뀔 수도 있지만, 그것을 바꾸려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한 것이 정답이 아니라고 해 선생 나와. 뭐야 이 엉터리 선생 하고 성급히 분노하기 보다는, 차분하게 논리적 근거를 축적해서 정답이 a가 아닌 b 입을 증명해서 선생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현명한 학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대학 3학년 때 읽었던 천관우 선생의 '난하하류의 조선' 논문을 첨부하니, 한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난하 하류의 조선(천관우).pdf
님을 정모 때 만나보고 싶군요. 10년 전 우리 카페에 중 3이던 신농 회원이 나를 찾아왔을 때 생각이 납니다.
신농 회원은 지금은 군대에 가있고, 사학과 대학생입니다. 님의 미래가 궁금합니다.
님의 열정에 찬사를 보냅니다. 하지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고 빨리 결론을 내려고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소장님께서 이렇게 신경을 써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아직 어린 나이이니 만큼 무조건 반박을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주장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는 장래 희망을 역사학자나 경제학자 또는 정치가가 되려고 설정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너무 모자란 인간이어서 그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이렇게 글을 써주시니 영광입니다. 제가 너무 글을 늦게 읽은것 같습니다.
술자리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다가.. 언뜻 아이디어가 생각났는데. 평안도 지역에 전선이 생기기 힘들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사군이 몇개 군단으로 조직될 만한 지리적 조건이 안된다는 것이죠. 그만한 군대조직이 있을려면 광대한 평야지역에서 군량미를 가져와야 하는데요.. 당시 주곡이 옥수수였는지는 잘모르지만.. 평안도 지역은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생각해보니 종로 광장시장에서 김병기박사님과 막걸리 한잔하다가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데.. 선생님도 묵언으로 인정하는 눈치였습니다. 아 그때 이덕일 선생도 있었던것 같네요 ㅎㅎㅎ
평양 지역은 지금도 농사가 잘 되는 지역이고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지요. 배로 실어나르면 됩니다.
혹시 대동강을 통해서 평양까지 통행할 수있는 배들의 적재량이 얼마인줄은 아십니까? 한나라의 수군장 양복이 인솔하던 루상선이 과연 당시 대동강을 통과하였는지는 아직껏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아래 댓글을 보니 구산선생은 군사전문가인듯 싶군요.. 육군의 유격대가 전투를 할 때, 방어선 진격이라는것이 있는데..총을 쏘다가 전선에 다가 섯을 때는 대검을 꼿고 진격하는 ..모습으로 그 옛날 상고시대의 전쟁을 상상하시는것도 재미 있습니다. 당시는 배가 나룻배이고..불법어선들에서 짱꼴라들이 해경에게 대드는것 보십시요.. 그런 상상도 하게 됩니다. 수군이 어느쪽이 강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상상력은 안보이는 것을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한사군의 강역에 대한 토론에서 우선 두가지로 나눌수가 있군요.그것은 재요동설과 한반도설입니다.그런데 재요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께서는 주로 요서지방으로 한사군을 배치하고 재한반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께서는 평양성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지역에 배치시키고 있습니다.따라서 먼저 문제가 된 재평양설이 굳어지게 되는 원인중에 한나라의 수군침공로의 성립여부입니다.한나라의 수군은 산동성 제남에서 7000명의 병력을 싣고 발해의 서쪽연안을 통과하여 열구현에 이르러 5만명의 육군병력을 수송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그러나 약속이 어긋나 양복이 일부병력으로 단독작전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고 합니다.
자 그렇다면 열구현(난하하구)에 도착했던 한나라의 수군선은 다량의 병력을 수송할 수 있는 루상선인데 루상선은 인력으로 노를 저어서 연근해만 통행할수 있는 기능외에 바람을 탈수있는 돗대가 없습니다.그런대 이러한 배로서 험하기로 소문난 발해내역을 벗어나 서한만을 통해서 대동강까지 접근하려면 적어도 수개월이 걸리는 거리입니다.항해도중 방해물이 없다 하더래도 쉬운 항해가 아닐텐데 하물며 우수한 조선의 수군을 상대하며 통과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입니다.이밖에도 대동강은 물이 낮아 60톤이상의 배는 평양까지 올라갈 수 없었다는 사실도 재평양설을 부정하는 대목의 하나입니다.전문가님들의 의견을 기다려봅니다.
옳은 이야기 같습니다. 다만 첨하여 생각되는 것은..식민사관의 기록이 진실이 아니라고 했을 때, 왜 한사군의 위치를 압록강이남으로 설정했을까요? 혹 일제의 만주공략의 이유 때문은 아닐까요? 요동 땅도 엄연히 우리의 고토가 아닙니까? 물론 위화도 회군으로 압록강이 경계가 되긴 하지만...
고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일제 때 거의 조작되었다는 것이고, 민족의 자부심을 꺽고자하는 내선일체의 작전이었고, 일제치하에서 신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 그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이면서, 자기의 사상으로 만들어 버렸기에, 저도 고등학교때 한사군의 위치를 달달 외워야 했구요..아무런 의심없이..그래서 나도 모르게 내선일체가 되버린 꼴입니다. 누가 그러는데 삼국사기가 240자나 조작되었다고 하는군요.
고구려사를 전공하시는 김용만선생께 갑작스럽게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니 이런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대꾸를 해야 옳은지는 무척 당혹스럽기도 한 난제지요.무려 수백년을 통하여 왜곡되어온 사실들을 추출하여 그 가부를 따져야 할것이고 그러한 결론에 따라 한사군의 한반도설도 그 가부가 결정이 되는것이니까요.그런데 여기에는 정치력이 맛물려 강대국의 침략사관이 끼어들었고 우격다짐으로 역사를 왜곡시켰습니다.이러한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료가 으뜸이요.매장물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출토품들이 증거물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못지않게 중요한것이 사건의 진행을 인정할 수 있는 환경적인 타당성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대동강 평양성을 한나라의 낙랑군이라고 우겨도 한나라 무제군이 수군들을 앞세우고 평양에 도착한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면 그건 허구인것입니다.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이를 낙랑유물이라고 주장하지만 거기에도 나름대로 헛점이 많습니다.더구나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침략할 당시 요동반도를 통과한 기록이 전무합니다.난하에서 요동반도를 경유하여 평양성에 도착하기까지는 수많은 방어성이 있었습니다.그러나 전투기록은 패수서군과 상군이라는 단순한 기록뿐입니다.따라서 의심이 많이 남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후. 왜 이리 댓글을 다실까요? 뭔 말씀을 하시려고요. 한나라가 공격한 평양이 현재의 평양이 아닌, 요동일 가능성이 크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사군 평양설을 비판할 때, 한나라 수군이 평양을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란 추론은 별 설득력이 없습니다. 저너럴셔면호도 평양에 들어오는 판에, 한나라 나무배가 왜 못들어옵니까. 수, 당나라도 대동강으로 직접 공격해왔으니,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또 고조선 시대에는 별로 성을 쌓은 시대가 아닙니다. 그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말씀대로 한나라가 공격한 평양이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고 가정된다면 현재 통설로 주장되고 있는 평양왕험성설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그문제에 대해서는 김용만선생께서도 일부 그렇게 생각을 하신다니 다행이구요.져너널셔먼호는 철선으로서 600톤이었지만 홍수에 물이 불어 이를 이용하여 물의를 하여 들어갔다가 물이 줄자 나오지 못하고 공격당하여 전소한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수천척의 당나라 전선들이 대동강을 공격하였다는 주장도 이치에 맞지않는 대목이 많아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그리고 당시 요동땅을 공터로 남겨두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방어시설이 전무할리는 없지요.
왜 옛날에 주요 항구가 인천이나 목포 등이 아니라, 강 중류인 강경, 나주 인줄 생각해보였으면 합니다. 대동강은 엄청나게 좋은 수로 환경을 갖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택한 것은, 해상 조건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수천척의 당나라 전선은 대동강 하구에서 전투를 치루고, 그리고 상륙을 시작한 것입니다. 항해 조건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고조선시대에는 성을 많이 만들었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 시대 조건을 너무 현대처럼 생각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또 평양을 위만조선의 수도로 보는 견해에서는 한-고조선 경계선을 동쪽으로 옮겨놓고 보니 그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접근이 필요합니다
>>또 평양을 위만조선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한-고조선 경계선을 동쪽으로 옮겨놓고 보니 그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서쪽에 있어야 할 한-고조선의 경계선을 동쪽으로 옮긴다는 발상자체가 비상식적이지요.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택한 이유를 해상조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하시는데 평양은 내륙에 위치한 도시이지 해양도시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대동강 평양은 후당 이후 옮겨진 신평양이지 고평양이 아니라는 정사의 사료들이 있지만 이를 믿지 않고 밀어부치는 명색이 학자님들의 속내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6주 훈련 받고 갓 2박3일 휴가(내일 복귀)를 나온 신농 학생입니다. ^^; 김선생님 말씀따나 생각이 계속 바뀌는 과정이 곧 공부의 발전이며 성숙이라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카페를 들러 선생님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