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악의 질병-1918년 스페인 독감 2】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면서 일상생활이 중단되어 버렸다. 일부 지역에서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걸고 고객이 오더라도 가게 밖에서 필요한 물품을 남겨두도록 요구하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의료인력이 병에 걸려서 치료를 못하게 되거나 무덤을 팔 수 있을 만큼 건강한 사람이 없게된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지역에서 증기기관을 이용해 땅을 파낸 뒤 관없이 집단으로 매장해 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1918~1919 스페인독감으로 인한 정확한 치사율은 확인하기 어렵지만 전체 인류의 20%이상이 감염되어 2.5~5%의 치사율을 보였으므로 전체 인구 0.5~1%에 달하는 약 5천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병이 발병하기 시작한 첫 25주 동안 2천5백만명이 사망했으며 당시의 추정으로는 약 4천만~5천만명 정도의 인구가 사망했고 오늘날의 추산으로는 전세계적으로 약 5천만에서 1억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높은 피해 때문에 1918년의 인플루엔자 대유행은 흑사병보다 심한 역사상 최대의 피해를 기록한 질병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에는 2천3백만명이 감염되어 39만명이 사망했다. 미국의 경우에는 전체 인구의 28%가 이 질병을 앓았고 50만~67만5천명이 사망했다.
영국에서는 25만명이 사망했고 프랑스의 사망자수는 40만명이 넘었다. 캐나다의 경우에는 약 5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알라스카와 남아프리카에서는 모든 마을이 병을 앓았다. 에디오피아에서도 수도인 아디스 아바바에서만 5천~1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영국령 소말리아에서도 공식적으로 전체인구의 약 7%가 독감으로 사망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1만2천명이 사망했고 피지같은 경우에는 불과 2주만에 전체 인구의 14%가 사망했으며 서 사모아에서는 인구의 22%가 사망했다.
일제 치하의 한반도도 스페인 독감에 예외일 수는 없었다. 1918년에 조선 전역은 “무오년 독감”으로 기록된 독감에 7백만여 명이 감염되어 14만 명이 죽었다. 조선 총독부의 통계로 잡힌것만 이 정도니까 실제 사망자는 더 될 것이다. “경성에서 독감으로 사망한 사람이 268명인데 그중에서 조선 사람이 119명이다.”(매일신보 11월12일자) “서산 1군에만 8만명의 독감 환자가 있고, 예산·홍성서도 야단이다. 감기로 사망한 사람이 2000명이나 된다.”(매일신보 12월3일자) 이 병의 유행으로 들판에 곡식이 여물어도 거둘 사람이 없을 지경이라 했고 쌀값은 폭등했다. 인심은 흉흉해졌고 가뜩이나 일본인들의 횡포에 배가 아프던 조선인들에게 굶주림까지 이어지면서 일제에 대한 분노가 무르익어갔으니 이 또한 우리가 잘 모르는 3.1운동의 또 다른 배경 중 하나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1918년의 독감은 그 높은 치사율과 전염성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이후 조류독감이 새로 주목받기 까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일부 역사학자들은 스페인 독감을 ‘잊혀진 전염병’이라고도 부르는데 실제로 1990년대 까지 미국에서 출간된 대중도서 중에 스페인 독감을 다룬 것은 5권 정도에 불과하다.
이토록 관심을 받지 못한 이유로는 전염병이 위력을 떨치고 소멸되기 까지의 기간이 너무 짧았다.(미국의 경우에는 약 9개월 정도)는 점과 1차대전의 참상으로 인해 전염병의 공포가 덜 중시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또, 병에 감염된 주요 연령대가 1918년 독감이 잊혀진 원인이라는 설명도 있다. 당시는 스페인 독감만이 아니라 1차세계대전이 한창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망하던 시기로 전염병에 의한 사망이 전사나 전쟁으로 인해 부상을 입은 수많은 젊은이들에 가려져 버렸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 시기를 회상하면 전쟁과 전후의 곤란에 대한 많은 기억들 속에 전염병의 기억이 흐려졌다는 것이다. 특히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수가 극도로 높았던 유럽에서 인플루엔자는 독립적으로 심각한 심리적 충격을 주기 어려웠거나 전쟁의 비극중 ‘일부’가 되었을 수도 있다.
또, 1차대전은 처음에는 누구나 금방 끝이 날것이라 생각했던 전쟁이 몇 년이나 지속되었던데 비해 전염병은 일부 지역에서는 1개월 정도만 창궐하고 금방 사라져 버릴 정도로 기간이 짧았다는 점도 하나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대에는 장티푸스, 황열병, 디프테리아, 콜레라 등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독감이 대중들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지 못했다는 설명도 있다.
의학자, 병리학자, 생물학자 그 누구도 이 병원체의 존재를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겐 바이러스를 발견할 전자현미경도 없었고, 바이러스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흑사병을 일으킨 것과 비슷한 세균일 것이라는 추측만 할 수 있었다.
조류독감의 위협이 현실화된 것은 스페인 독감 유행 당시 알래스카의 얼음 속에서 죽었던 에스키모 여인의 허파가 실마리가 됐다.
알래스카의 동토 지역인 브레비그에서는 1918년에 성인 51명 중 46명이 사망하였다. 이들은 모두 차디찬 얼음 속에 묻혔는데, 그중 한 여인의 시체만이 썩지 않고, 그녀를 죽인 병원체와 같이 80년을 견뎌냈다.
시체가 냉동 상태에서 썩지 않고 있었던 까닭에 허파에 붙은 바이러스의 유전자 배열이 그대로 유지되어버려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허파에서 바이러스 조직을 떼어낸 주인공은 미국의 요한 V 훌틴이라고 하는 병리학자였다.
그는 이미 1951년 한 차례 그녀의 허파에서 바이러스 조직을 떼냈지만 당시 과학의 한계로 정체를 밝히는 데 실패하였다. 이는 곧 그만이 아는 비밀이 됐다.
그 후 47년이 흐른 1998년 그는 미 국립질병 통제예방센터(CDC) 산하 미군병리학연구소 연구원이자,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던 제프리 토벤버거 박사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자신이 스페인 독감의 바이러스를 찾아주겠노라고. 일흔두 살의 훌틴 박사는 끝내 그 약속을 지켰다.
그는 알래스카까지 직접 가 에스키모 여인의 허파 조직을 다시 떼어낸 것.
그리고 이는 당장 토벤버거 박사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87년 동안 냉동돼 있던 바이러스의 복원 작업은 그리 쉽지 않았다. 오랜 작업 끝에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8개 유전자 배열을 재구성하게 되는 데 성공한 토벤버거 박사는 이를 뉴욕의 마운트시나이대학 의대 피터 팔레스 박사팀에게 넘겼고, 그는 이를 토대로 유전자를 다시 만들어 CDC로 보냈다.
CDC는 새로 만들어지게 되는 유전자를 인간 신장세포에 넣어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생명을 얻은 바이러스는 실험에서 생쥐들을 3~6일 만에 죽이는 괴력을 발휘했다.
87년 만에 깨어난 바이러스는 4일 만에 3만9000배로 늘어나 버려며 그 존재를 일깨웠다.
이 바이러스는 닭도 죽였다.
스페인 독감이 조류와 인간을 동시에 죽일 수 있는 인수공통 전염병이었으며, 이는 조류독감과 아예 유사한 성질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CDC는 이러한 사실을 10월7일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발표하였다.
87년 동안 정체를 감추고 지냈던 ‘대량 학살자’의 정체가 드디어 밝혀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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