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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1)
시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1-6 / [여호와는 나의 목자; 다윗의 노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그 무엇이 부족하리오. 2) 편히 쉬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고 고이 쉬라 시원한 시냇가로 데려가시네. 3) 내게 생기 불어넣으시고 똑바른 길로만 이끌어 주시니 주님이 아니고서야 주님의 이름 아니고서야 어찌 그러리. 4) 나 죽음 그늘 드리운 깊은 골짜기 지난다 해도 아무런 두려움없이 가리라. 주께서 내 곁에 함께 계시니 목자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와 막대기처럼 인도하여 주시니 하고 많은 시름 사라져 버리고 이 마음 이렇듯 든든하여라. 5) 원수들 두 눈 뜨고 쳐다보는데 보란듯 이것 앞에 잔칫상 차려 주시고 귀한 손님 대접하듯 기름 발라주시며 잔이 흘러 넘치라 하고 부어 주시네. 6) 아, 그 누가 이렇듯 행복하리오. 이처럼 포근하리오. 주님의 손길 살아 생전 끊이지 않으리니 이 목숨 살아 숨쉴 동안에 주님의 전에 오래도록 살으리이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목자와 양의 관점에서 회상합니다.
나의 목자(1-2)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부터 “영원히 살리로다”까지 이 시의 모든 서술어들은 독자에게 편안함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어리석고 연약한 양이 어떻게 이런 조건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이 시의 필수조건입니다. 양이 누우려면 네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째, 두렵지 않아야 하고, 둘째, 그들 가운데 갈등이 없어야 하고, 셋째, 파리나 기생충의 괴롭힘이 없어야 하고, 넷째, 배고프지 않아야 합니다. 연약한 우리 인생들이 세상의 온갖 풍파 속에서도 평생 편안하게 살아가려면 우리가 아니라 전능하신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인도하시는 목자(3-4) 목자는 양의 인도자입니다. 양은 길을 찾을 필요가 없고, 다만 목자의 위치를 알면 됩니다. 선하신 목자께서 양을 소생시킵니다. 소생은 회복의 개념입니다. 양이 방황할 때 목자께서 바른 길로 돌이키시며, 이는 오늘날 우리의 회개를 암시합니다. 선한 목자는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데, 이 길은 순종과 거룩의 길입니다. 또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적은 목자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입니다. 성도가 의의 길을 갈 때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습니다. 4절의 “음침한”은 그림자가 드리운 것을 의미합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닙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사망의 실체를 이기셨습니다(히 13:20). 따라서 믿는 우리를 덮는 것은 사망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스펄전의 말처럼 “개의 그림자가 물 수 없고, 칼의 그림자가 죽일 수 없는 것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를 파멸시킬 수 없습니다.”
축복하시는 목자(5-6) 목자는 언제나 양을 먹이십니다. 그것도 원수의 목전에서 먹이십니다. 원수로 인해 우리가 고난을 겪을지라도 하나님의 상차림은 언제나 계속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풍성한 잔치를 뜻하는 시어입니다. 다윗은 단순히 먹고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풍성한 잔치를 누렸습니다. 다윗은 결론적으로 선한 목자의 성품을 찬양합니다. 곧 선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여기서 선하심은 창세기 1장에 반복된 “좋았더라”와 같은 단어입니다. 즉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시는 목자의 마음이며, 인자하심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영원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적용: 돈이나 쾌락 등 다른 것이 여호와를 대체한다면 이 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혹시 여호와 대신 다른 것을 의지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세요.
어떤 목사가 지방 형무소에서 설교할 수 있는 허가를 얻어 남부 지방을 순회하였습니다. 하루는 그가 묵게 된 여관집의 아들을 데리고 형무소를 방문했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기독교인이 아닌 그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죄수들 중에 열 명은 깊은 감명을 받았을 거예요! 목사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였겠지요?”, “내 설교가 너에게는 유익했니?” 그러자 젊은이는 놀라는 투로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그 설교는 죄수들에게 하신 거였잖아요.” 이에 목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에 관해 설교했을 뿐이다. 그분은 죄수들에게만이 아니라 너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분이란다.”
< 설 교 >
거룩한 목자
시 23:1-6 / 메튜 헨리 주석
다윗은 이 시편에서 세 가지의 매우 위안을 주는 전제로부터 세 가지의 매우 즐거운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으며,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소망에 의해 구원을 얻으며 그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소망은 굳건한 토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주 하나님 안에서 격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와 우리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관계에 따라 우리가 체험한 그의 선하심 속에서 위로를 얻도록 지시 받고 있다.
Ⅰ.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이시므로 그에게 유익한 어느 것도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추론하고 있다(1절).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라.
1.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크게 돌보신다. 그는 그들의 목자이시며, 그들은 그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 다윗 자신이 목자였던 때가 있었다. 그는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택함을 받았었다(78:70, 71). 그러므로 선한 목자가 그의 양떼들에게 갖는 자상한 관심과 돌보심을 경험으로써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얼마나 목자가 필요한가 그리고 노련하고 성실한 목자가 그들에게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를 회고했다. 그 목자는 한때 한 마리의 양을 구하기 위해 그의 생명을 내건 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의해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돌보심을 예증하고 있다. 우리 구세주께서 "나는 양들의 선한 목자라"(요 10:11) 하고 말씀하신 것은 이것을 언급하는 것 같다. 이스라엘의 목자이신(80:1), 보편적으로 온 교회의 목자이신 그는 믿는 자들 개개인의 목사이시다. 그는 가장 보잘것 없는 자라도 경히 여기지 않으신다(사 40:11). 그는 그들을 품에 안으시고, 양떼를 지키는 목자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주의 깊고 꾸준하게 돌보시고 보호하시며 공급해 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목자와 같으시다면 우리는 양들처럼 순종하고 온순해야 한다. 양털깎는 사람 앞에서처럼 조용해야 하며, 또 도살자 앞에서처럼 유순하고 잘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를 따라야 한다.
2.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커다란 신뢰를 갖고 있다. "만일 주님이 나의 목자, 나를 먹이시는 자라면 나는 내게 정말 필요하고 유익한 것은 그 어느 것도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단정할 수 있다." 만일 다윗이 이 시편을 그가 면류관을 얻기 전에 지었다면, 비록 그것이 그에게 예정되어 있었을지라도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부족함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를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한때 그는 나발에게 청을 하러 그의 사람을 보냈었고 또 어느 때는 그 자신이 직접 아히멜렉에게 다시 요청을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목자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자기들을 먹이시는 자로 삼는 자들은 굶어죽을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표현에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라"라는 뜻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뜻도 내포되어 있다. "나는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공급받을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나는 그것이 내게 합당치 않거나 유익하지 않다고 또는 합당한 때에 그것을 갖게 되리라고 단정할 수 있다."
Ⅱ.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선한 목자로서의 직책을 이행하신 것으로부터 그는 그가 당하게 될 큰 위험이나 어려움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느낄 필요가 없음을 추론하고 있다(2-4절).
그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어 돌보아 주시는 이로움을 체험하고 있으므로, 그가 그 유익을 매우 필요로 할 때 그것을 또한 얻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살아 있는 성도들이 얻는 위로, 하나님은 그의 목자이시며 하나님은 모든 의도와 목적을 충족히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러하심을 발견했으며 우리도 그래야 한다. 하나님의 초장에 있는 양들과 같은 성도들의 행복을 보라.
(1) 그들은 좋은 곳에 안치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손으로부터 이 생애의 도움과 위로를 받고, 우리 아버지 되시는 그로부터 매일의 양식을 얻는다. 그 충만함이 악인에게는 메마른 초장에 지나지 않는다. 악인은 오직 관능적인 즐거움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즐거움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비록 세상에 속한 것은 거의 갖고 있지 않을지라도 믿음으로써 그것을 즐기는 자들에게는 푸른 초장이 된다(37:16; 잠 15:16, 17). 하나님의 명령은 곧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푸른 초장이다.
하나님은 그의 성도들로 눕게 하신다. 즉 그들의 운명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들 아음에 평안함과 만족함을 주신다. 그들의 영혼은 그의 안에서 편히 거하며 모든 초장을 푸르게 만든다. 우리는 명령의 푸른 초장으로 축복받고 있는가 그곳을 지나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말고 그 위에 눕고 거기에 거하도록 하자. 이것은 영원한 나의 안식이다. 영혼이 살찌는 것은 꾸준한 은혜에 의한 것이다.
(2) 그들은 잘 안내받고, 인도된다. 이스라엘의 목자는 요셉을 양과 같이 인도하신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들은 그와 같이 인도아래 있다. "그가 나를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먹고 사는 자들은 그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그는 그들을 그의 섭리로써, 그의 말씀, 그의 성령으로써 인도하신다. 그의 뜻대로 가장 선하게 그들의 일을 처리하시며, 그의 명령대로 그들의 감정과 행동을 주관하시고, 그들의 눈과 길과 마음을 그의 사랑 안에 두도록 지시하신다. 그가 그들을 인도하시는 쉴 만한 물가는 유쾌한 전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목마르고 피곤할 때 풍성한 청량제와 활력제를 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음식과 휴식뿐만 아니라 원기회복과 즐거움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 성령의 기쁨은 곧 이 쉴만한 물가이며, 성도들은 살아 있는 물의 근원에서 흘러나오고 우리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만드는 시냇물가로 인도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부패하고 더러운 물이 고여 있는 물가나 사나운 바다, 급히 흐르는 강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잔잔하게 졸졸 흐르는 물가로 인도하신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은 하나님을 향해 조용히 흐르는 그들이 심령과 가장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베풀어진 거룩한 인도하심은 이것에 대한 은유를 벗겨 주고 있다(3절). 즉 그가 나를 "의의길로," 의무의 길로"인도하시도다." 그 속에서 나를 그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양심과 섭리로 지시하시는도다. 이 길은 모든 성도들이 인도받고 지키기를 원하며, 결코 거기서 빗나가지 않기를 원하는 길이다. 이렇게 의의 길을 행하는 자만이 위로의 잔잔한 물가로 인도받는다. 의무의 길은 진실로 즐거운 길이다. 화평한 것은 의의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길로 그리고 이 길에서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3) 어떤 것이 그들을 괴롭힐 때 그들은 충분히 도움을 받는다. 그가'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도다".
[1] "내가 방황할 때 나를 소생시키신다. "양처럼 쉽게 한눈을 파는 짐승은 없을 정도로 양들은 길을 잃어버리기 쉽고 또 길을 찾아 되돌아 오기가 어렵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도 "잃은 양같이 유리하는" 자기들의 성향을 깨닫는다(119:176). 그들은 길을 잃고 샛길로 접어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보여 주시고 회개케 하시고 다시 그들의 의무로 돌아 오게 하심으로써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끝없이 유리하여 파멸했을 것이다. 한 가지 죄를 범했을 때 다윗의 마음이 그를 징계했고, 또 다른 죄를 범했을 때는 나단이 보내어져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그에게 말해줌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소생시키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죄에 빠지게 하실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계속 그 속에 누워있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2] "그는 내가 병들 때 나를 회복시키시고, 내가 기진할 때 활력 있게 해 주시며 내가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그는 우리를 치료하시는 우리 주 하나님이시다(출 15:26). 우리가 믿지 않았다면 여러 번 활기를 잃었을 것이며, 우리를 기절하지 않게 하시는 것은 선한 목자이시다.
2. 죽어가는 성도들의 용기를 보라(4절). 지금까지 여섯 번, 일곱 번 환난을 겪을 때에 "나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했으므로 나는 결코, 마지막 극한 상황에서도 그를 불신하지 않으리라. 여지껏 나를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은 나의 어떤 업적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의 이름을 위해 그의 말씀을 준행하고 그의 약속을 이행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의 특성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계속 나의 강한 성이 될 것이며, 나를 일생 동안 인도하시고 먹이시는 그가 끝까지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확신케 해 주실 것이다. 여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절박한 위험이 가정되어 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즉 죽음의 위험 속에 놓일지라도, 골짜기처럼 깊고 그림자처럼 어두우며 죽음 그 자체처럼 두려운 위험 가운데 처할지라도," 또는 오히려"내가 죽음에 사로 잡히고 나 자신 안에 죽음의 판결을 닫으며 모든 면에서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자로 여길 수밖에 없을지라도, 나는 평안하리라." 병든 자들과 연로한 자들은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에 정말 끔찍스럽게 여겨지는 한 마디 말이 있다. 그것은 "사망"이라는 말로서.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하는 문제다. "이 전쟁에서 벗어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망에 대한 가정 속에서도 두려움을 약화시키는 네 가지 단어가 있다. 즉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정말로 사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1] 사망의 "음침함"(그림자)이다. 그 속에는 본질적인 해는 없다. 뱀의 그림자가 독을 뿜을 수 없으며 칼의 그림자가 죽일 수는 없는 일이다.
[2] 정말 깊고, 어둡고 더러운, 음침한 "골짜기"이다. 그러나 골짜기는 비옥하므로 죽음 자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비옥한 위로가 된다.
[3] 이 골짜기를 "다니는"것에, 한가하고 즐겁게 걷는 것에 불과하다.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쫓겨나며 그들의 영혼은 요구 당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세상을 떠날 때처럼 즐겁게 저 세상으로 간다.
[4] 골짜기로 통과해(trough) 다니는 것이다. 그들은 이 골짜기에서 잃어버리지 않고 저편에 있는 향기의 산에 안전하게 다다를 것이다.
(2) 이 위험은 훌륭한 근거에 의해 경하게 될 것이고, 또 극복될 것이다. 사망은 두려움의 왕이나 그리스도의 양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도살당할 양이 그러한 것처럼 사망에 대해 떨지 않는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이 어느 것도 나를 요동케 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자녀는 마음의 거룩한 안심과 평정을 갖고서 죽음의 사자를 맞이하고 그 소환에 응할 수 있을 것이다. 젖먹는 아이는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할 수 있다.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떠나는 어린 아이는 "사망아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는가"라고 바울처럼 죽음에 거룩한 도전을 하면서 뱀의 굴에 손을 넣을 수 있다. 이러한 확신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1]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악이 없기 때문이다. 사망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없다. 그것은 몸을 죽이나 영혼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이처럼 해로운 것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왜 두려워해야 하겠는가?
[2] 성도들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를 얻기 때문이다. 그때에 그는 그들의 우편에 계신다. 그런데 왜 그들이 요동하겠는가? 선한 목자께서 그의 양들을 먹이를 노리는 짐승들이나 으르렁거리는 이리들에 의해 공격당할 위험이 있는 이 골짜기에서 지휘하고 호송하신다. 그는 그들을 호위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위로를 매우 필요로 할 때 그들을 안위하실 것이다.
그의 임재는 그들을 안위해 줄 것이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의 칼과 성령이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그들을 안위하실 것이다. 이것은 목자의 지팡이나 양들을 세기 위해 그 아래로 통과하게 했던 막대기(레 27:32), 양들을 흩어지게 하거나 못살게 구는 개들을 쫓아내기 위해 목자가 썼던 장대를 언급하고 있다. 성도들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지하시고("그는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아신다"), 그 원수를 꾸짖으시며, 그들을 그의 막대기로 안내하시고 그의 지팡이로 떠받치시리라는 것은 그들을 안위해 준다. "복음은 주의 권능의 홀"이라 불리우고 있으며(110:2), 그 속에는 성도들이 죽게 될 때 그들을 위로 하기에 충분한 것들이 있다. 그들 "아래"에는 "영원하신 팔"이 계신 것이다.
Ⅲ. 하나님이 그에게 하사하신 좋은 선물에서 그는 그의 인자하심이 견고하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추론해 내고 있다(5,6절).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롭게 베풀어 주신 것을 매우 높이 찬양하고 있다(5절). "주께서 내게 상을 베푸시나이다. 주께서 나를 위해 생명과 경건함를 모두 지킬 수 있는 것들을, 현세와 내세에서 육신과 영혼 모두에 필요 불가결한 것들을 모두 마련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모든 백성들에게 관대한 은인이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의 선하심을 크게 표명하도록 만든다. 다윗은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좋은 음식을 갖고 계셨다. 베풀어진 상과 가득 채워진 잔, 그의 굶주림을 채울 고기, 갈증을 채울 음료를 갖고 계셨다.
(2) 하나님은 그를 위해 그것을 배려 깊게 쾌히 마련해 주셨다. 그의 상이 펼쳐진 후에 어떤 음식이 그 위에 놓여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앞에 베풀어져 있었다.
(3) 그는 절약하거나 궁핍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풍족히 갖고 있었다. "나 자신과 내 친구들에게도 충분할 정도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4) 그는 필수품뿐만 아니라 장식과 즐거움을 위한 것도 갖고 있었다. "주께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나이다." 사무엘이 그를 안으로 기름 부었고, 그것은 더 큰 은총에 대한 확실한 담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풍족하도록 축복하셨다는 일례이거나 또는 특별한 친구들의 머리에 감람유를 붓는(눅 7:46) 독특한 환대를 언급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아직도 그 자신을 양으로서, 주인의 음식을 먹고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눕는 그러한 "가난한 자의 작은 암양"(삼하 12:3)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귀하게 뿐만 아니라 이처럼 자상하게 돌보심을 받는다. 그들의 풍족한 양식이 그들의 몸과 영혼을 위해, 현재와 미래의 생명을 위해 마련된다. 만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을 위해 이처럼 풍성한 것들을 베풀지 않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영적인 축복으로 보상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이다.
2. 그는 하나님의 은총이 계속될 것을 매우 확신하고 있다(6절). 그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했었다(1절). 그러나 이제 그는 더욱 긍정적으로, 더욱 알기 쉽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로다." 시련 당함에 따라 그의 소망이 자라나고 그의 믿음이 강해지고 있다. 다음을 주목하라.
(1) 그가 그 자신에게 약속하고 있는 것은, 선하심과 인자하심,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인자하심의 모든 시냇물, 용서하시는 긍휼, 보호하시는 긍휼, 부축해 주시는 긍휼, 마련해 주시는 긍휼이다.
(2) 그것이 전달되는 방법, 그것은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의 출정군을 따르던 바위의 물처럼 나를 "따를"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곳이나 상황에도 따라올 것이며 항상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3) 그것의 지속. 그것은 "나의 평생에," 마지막 날까지도 나를 따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4) 그것의 불변함. "나의 평생에," 새날이 오듯이 어김없이 온다. 그것은 매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려진 만나와도 같이 "아침마다 새로울"것이다(애 3:22, 23).
(5) 그것의 확고함. "정녕"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진리의 하나님이 하신 약속처럼 확실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누구를 믿어 왔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6) 미래의 상태에는 축복의 온전함이 있으리라는 전망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이 세상에서 평생토록 나를 따랐으므로, 내 생명이 끝날 때에도 나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기 위해 더 나은 세상으로, 거할 곳이 많은 위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 갈 것이다. 내가 지금 가진 것으로 충만히 기뻐할 것이며, 내가 바라는 것으로 더욱 충만히 즐거워할 것이다". 이 모든 것, 그리고 또한 천국을 즐거워하리라! 그때 우리는 선한 주인을 섬기게 된다.
3. 그는 하나님과 그의 의무에 집념하기로 매우 단호하게 결심하고 있다. 우리는 마지막 절을 다윗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내가 살아 있는 한) 거하리로다. 그리고 내가 존재 하고 있는 한 그를 찬미하리로다." 우리는 영원히 그를 섬기기 위해 문기둥에 귀를 대고 구멍을 뚫은 종처럼 그의 집에 거해야 한다. 만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찬란한 대낮을 위해 점점 더 빛나는 아침 햇살 같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곧 사라질 아침 구름이나 아침 이슬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충족함으로 만족을 얻으려는 자들은 그 의무를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시 23:1-6 / 김홍도목사
등산 간 사람이 산꼭대기가 아무리 아름답고 공기 좋고 신선해도 반드시 산밑으로 내려와야지 산꼭대기에 머물러 살 수는 없습니다. 산밑에 골짜기에는 공기가 탁하고 불쾌한 것이 많지만 내려와야 하는 것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신선한 산꼭대기와 같은 인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평안과 기쁨과 행복만이 있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가끔 슬픔과 고난과 죽음이 있는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환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릴 때, 불안하고 초조하고 죽고 싶을 정도로 앞길이 막막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마치 기차를 타고 여행하다가 갑자기 캄캄한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을 때가 있습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도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없이 많이 통과한 경험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다윗 왕,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정을 받은 다윗 왕은 누구보다 더 많은 환난 고통을 당하며 캄캄한 죽음의 골짜기를 많이 통과했던 것을 그가 쓴 시편 전체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마 다윗처럼 핍박과 비난과 원수의 공격을 많이 받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절망에 빠져서 "아! 내가 전에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했더니 이제 하나님이 나에게 저주하시고 벌하시나보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보다."하고 절망하고 자포자기하고 말았을 터인데 23장 6절에 보면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 고난과 고통 중에서도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을수록 형제들의 시기와 미움을 더 많이 받고 억울한 고통을 더 많이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많이 받을수록,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사람일수록 남달리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많이 받고 더 많은 사탄의 공격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시시하게 믿는 신자는 그런 고통과 시련을 안 받습니다. 더욱 마귀 편에 든 사람은 핍박도 하지 않습니다.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사랑을 의심해선 안됩니다.
당대의 의인이라고 했던 욥도 이런 무시무시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산이 불타고 도적 맞아서 다 날아갔습니다. 10자녀가 집이 무너지면서 다 죽었습니다. 온 몸에 악창이 나서 구더기가 바글바글하고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아침이 되면 빨리 밤이 왔으면 좋겠다하고 밤이 되면 빨리 날이 밝았으면 좋겠다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욥에게 그것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욥 13:15). 또 말하기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하는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한 굉장한 계시도 받았습니다.
사도 요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했습니다. 그는 밧모섬에 귀양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고독과 불안과 슬픔 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요한에게 영원의 커튼을 열어서 하늘의 빛을 보여주셨고 천국과 천국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자기를 기다리고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 굉장한 장면을 보고 기쁨에 차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어떤 믿음으로 무장해야 되겠습니까?
1. 지금도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극심한 고통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거나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 계셔서 지켜보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신앙을 피력했습니다. 어떤 주님이 함께 하시는가 하면,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진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지팡이"는 목자들이 양들의 앞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막대기"는 사자나 곰이나 악한 짐승이 나타날 때 때려잡고 쫓아 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캄캄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찌라도 대 목자장 되시는 주님이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주시고, 원수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주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8-20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절대로 주님이 우리를 고아처럼 외롭게 홀로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해선 안됩니다. 히브리서 13장 5-6절에 ".....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고난을 견디지 못하여 불평하기를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코 사망의 골짜기로 통과할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의심해선 안됩니다.
2. 원수 앞에 차려준 잔치상을 보아야 합니다.
23편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서 "상을 베푸셨나이다"하는 것은 금메달, 은메달 같은 상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잘 차려 놓았다는 뜻입니다(Thou preparest a table before me in presence of my enemies). 즉 원수들 보는 앞에서 잔치상을 베풀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탄의 공격을 받고 원수들에게 고통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시기 위해서 맛있는 잔치상을 베풀어주시면서 "자! 너희들 보아라"고 할 때가 있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과 환난을 당할 때에는 좌절하지 말고 "주여, 이 환난 후에는 무슨 상을 베풀어주시려고 합니까? 감사합니다" 해야 합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열 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해서 백성들을 절망에 빠뜨리고 울부짖게 만들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들은 다 그들의 칼날에 죽게 되었고, 살아 남은 사람은 노예로 잡혀가게 되었고, 기골이 장대해서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 같습니다. 그 성벽은 철옹성벽이라 도저히 난공불락입니다."라고 절망적인 보고를 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문제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다 정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기골이 장대한 장수라서 우리가 메뚜기 같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들이 메뚜기 새끼만도 못하고 여리고 성이 아무리 견고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종잇장만도 못하다는 믿음의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얼마나 무서운 환난을 당했습니까? 부정적인 눈으로 본 사람들은 금란교회는 건축도 못하고 풍비박산 당해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주셨습니까? 얼마나 교회가 부흥됩니까? 제가 얼마나 건강합니까? 교인들이 근래에 와서는 설교가 더 능력 있고 은혜가 넘친다고들 합니다. 하나님이 원수의 목전에서 큰상을 베풀어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원수의 비난과 공격을 당해도 결코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해서는 안됩니다. 원수의 비난과 공격을 받을 때 금방 망할 것 같고 죽을 것 같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이사야 51장 7절에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로다"고 했습니다. 즉, 비난하고 훼방하는 원수들은 좀이 옷을 먹어 없애듯이, 양털을 벌레가 먹어 버리듯이 다 없어지는 날이 오지만 너희는 영원히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3. 원수 앞에 설 때, 성령을 부어 주심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23편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셨는데, "기름을 부으셨다"는 것은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을 때 성령충만 해졌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3절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즉 기름 부을 때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 마귀와 싸우러 나갈 때 사탄의 공격을 받을 때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평안할 때는 성령의 능력이 안 나타납니다. 제가 믿기는 삼손이 그렇게 능력의 은사를 받았지만 보통 때는 평범한 사람과 같았을 것으로 봅니다. 블레셋과 마주섰을 때 힘이 솟구쳐 올랐을 것이고, 원수와 싸우기 시작할 때 힘이 솟아올랐다고 봅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을 때 성령께서 담대한 믿음을 주시고 물멧돌 던질 때 힘을 주시고 명중시킬 수 있게 해 주셨다고 봅니다.
저는 부흥회 인도할 때마다 수 백 번 느끼는 것은 도무지 은혜 끼칠 것 같은 느낌이 안 들고 강단에 설 자신도 없는데 성령께 의지하고 강단에 올라서면 능력이 임하는 것을 수백 번 체험합니다. 설교 준비할 때 성령의 역사를 많이 체험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이 감당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그때마다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1절에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잡은 이와 권세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그때 필요한 지혜와 담력과 능력을 주십니다. 시편 92편 10절에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들소의 뿔은 사자도 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난과 고통을 제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은 하신 일이 없지만 그 고통과 환난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극심한 고통을 많이 당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몸에 사탄의 찌르는 가시까지 있는데 그것을 뽑아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고난을 다 알고 있다. 네 육체에 찌르는 가시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고통과 환난을 제거해 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주시겠다는 말씀이고 또 그것이 지나놓고 보면 크게 유익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시험 당할 즈음에" 고통, 환난이 올 때 그때 그때 원수의 목전에 설 때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1-32절에 "....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늘 밝고 평안한 생활만 할 수 없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지금도 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② 원수 앞에 차려준 잔칫상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③ 캄캄한 골짜기를 지날 때 이길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 231:6 / 이동원목사
인간이 물어왔던 모든 질문 가운데 가장 진지한 것은 인간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하여 가장 통찰력있는 대답을 시도한 사람은 1600년대를 살았던 불란서의 천재 철학자 파스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단편적인 대답들이었지만 너무나 유명한 저서 팡세에서 우리는 그의 빛나는 성찰들을 대할수 있습니다. 몇가지만 들어 보십시오. 아마도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이런 설명일 것입니다. "인간은 한 줄기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실로 자연 가운데서도 가장 연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인간을 분쇄하기 위해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을 가지고도 넉넉히 그를 죽일수 있다. 그러나 우주가 인간을 분쇄한다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우주보다 더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런 진술을 들어 보십시오. "인간이 더 밝은 빛에 거하면 거할수록 인간은 자신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진실로 비참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실제로 비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동시에 지극히 위대한 존재이다." 또 이런 진술을 들어보십시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만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 또 이런 진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천사를 흉내내야 할 인간이 짐승을 흉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파스칼의 성찰은 대부분 성경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을 설명하는 가장 진지한 통찰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실존에 관한 한 가장 통찰력있는 예증이 이사야53:6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길로 갔거늘" 여기 성경은 죄인된 인간의 실존을 길을 잃은 양의 실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유명한 시편 시23편 시편의 진주로 불리우는 이 시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목자시라면 인간은 양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양과 같은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이 목자로서 해답이 되신다는 선언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시는가를 이해하기에 앞서 문제속에 있는 인간의 실존을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양과 같은 인간 그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1. 인간은 방향을 잃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떠나 죄속에 살고 있는 인간의 실존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 그릇 행하여 가지 말아야 할 길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수의사이어서 수원 근교의 목장(화산 목장/지금은 그곳이 축산 기술 연구소)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한동안 저의 이름은 목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머리속에는 늘 목장의 아련한 향수가 있습니다. 당시 양은 흔하지 않았지만 양들과 뒹굴던 추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양이 소나 말 등 다른 짐승과 차별화되는 다른 현저한 특성이 무엇이냐 하면 방향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조금만 떨어지면 집을 찾지 못합니다. 소도 말도 고양이도 반드시 집을 찾아오지만 양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는 다 양과 같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이 말한 대로 인간에게는 생각할 줄 아는 위대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위대성의 근거는 인간이 하나님을 닮도록 지음받은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서 알고 느끼고 판단할 줄 아는 유일하게 생각할 줄 아는 인격적인 피조물인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생각의 기능을 통해 오늘날의 현대문명을 건설한 것입니다. 오늘의 현대 문명의 가장 놀라운 특성은 속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인간이 발달시켜온 교통 수단이나 통신 정보수단은 한 세기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실존의 절박한 문제는 아직도 방향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빨리 전 세계를 오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여기 위대하지만 비참한 인간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이 에피소드는 현대 한국인의 모습일 뿐 아니라 바로 인간 모두의 보편적인 실존의 비유인 것입니다.
어떤 회사 직원이 뉴욕으로 출장을 가서 공항택시를 탔다고 합니다. 제일성이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빨리 빨리 갑시다" 였습니다. 그런데 한참 가다 보니까, 목적지 방향으로 안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운전자에게 물었습니다-"어디로 가느냐?"고. 기사가 정중하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손님, 손님은 빨리 가시고자만 했지 어디로 가자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이야기가운데 최근 이런 유머가 떴습니다. 한국 국회의원들의 성적표입니다. 유일하게 수를 받은 과목은 수학이라고 합니다. 워낙 월급과 들어오는 비자금 계산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를 받은 과목은 국어인데 말하기 쓰기 읽기 다 잘했는데 듣기가 잘 안 된다고 합니다. 미를 받은 과목은 외국어인데 외국여행은 잘하는데 외교 실력이 미미하기 때문이랍니다. 양을 받은 과목은 사회인데 워낙 사회 봉사를 안 하다가 명절에 한번 나타나기 때문이랍니다. 가를 받은 과목은 윤리인데 그 원인은 거짓말, 싸움, 욕설에 능하기 때문이랍니다. 아예 점수가 안나온 과목이 있는데 체육이라고 합니다. 특히 달리기 과목에서 힘은 넘쳐나는데 엉뚱한 다른 방향으로 달린 까닭에 점수가 안나왔다고 합니다. 방향을 잃은 정치와 국회를 풍자하는 유머이겠지요.
그렇습니다. 빨리 서둘러 일하고 많이 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잘못된 방향을 향해 열심히 뛰고 있는 경주자를 다시 연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혹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일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방향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오늘 방향을 잃은채로 새해를 맞이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 인간은 자구책이 없이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생물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자구책을 갖고 있습니다. 신체의 한 부분을 무기로 사용하는 존재가 있는가하면, 자신의 신체의 색갈과 유사한 자기 주변의 환경에 은거함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합니다. 보호색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양은 별로 이런 자구책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은 오늘날의 눈부신 문명을 발전시켜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스스로 만든 그 문명에 의해 위협받고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핵무기를 만든것이 누구였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 핵무기를 규제해야 한다고 소리치며 서로를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나라가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우리는 얼마나 자부심을 가질수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 자동차 덕분에 우리는 교통사고율 세계 제1위의 국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자동차 운전을 시작하면 부모들의 초조함과 두려움은 절정에 달합니다.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다가 모종의 종양이라도 발견되었다 싶으면 갑자기 힘이 빠져 불안하고 두려워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다 양 같아서"라고 말합니다.
이런 인간의 두려움의 심리를 이용하여 발달한 현대적인 산업이 보험업입니다. 우리는 자동차 사고가 두려워 자동차 보험에 가입합니다. 집이나 건물에 화재가 날 것을 두려워하여 화재 보험에 듭니다. 중동지방 건물들은 모두 예외없이 지진 보험에 든다고 합니다. 건강상실을 두려워하여 의료보험에 가입합니다. 비행기 탈때 어떻게 될것을 두려워하여 항공보험에, 배를 타며 어떻게 되지는 않을까 하여 선박보험에 듭니다. 은퇴이후를 두려워 하여 은퇴보험에 듭니다. 축구선수들은 발보험에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피아니스트들은 손가락 보험에 든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저에게 가장 필요한 보험은 주둥이보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각종 보험에 들고도 아직도 안심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면서도 가장 연약한 피조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지닌 이런 실존적인 두려움이 바로 인간 타락의 결과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이 범죄 하자마자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고백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새해를 출발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붙드는 두려움은 무엇인지요?
3. 인간은 너무나 쉽게 오염되는 존재입니다.
양은 일견 멀리서 겉으로 보면 깨끗해 보이나 가까이 있으면 냄새나고 너무 쉽게 환경에 오염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깨끗케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다 양같아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경은 예외없이 우리가 다 그렇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보편적 타락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했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스스로를 의롭다할 육체가 하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우리 모두 오늘 근사한 모습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왔지만 우리 안에는 죄책의 어두운 갈등이 있습니다. 방황의 상처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구원하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하는 무력감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의 실존인 것입니다.
이것이 양과 같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런 양과 같은 죄인의 실존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복음이 있습니다. 완벽한 해답이 있습니다. 그 완벽한 해답은 목자입니다. 목자만 곁에 있으면 됩니다. 목자가 길 잃은 양의 방향을 인도하십니다. 양을 보호하고 양의 필요를 공급합니다. 그리고 더럽혀진 양을 깨끗이 씻겨 줍니다.
오늘의 본문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구약성경에 무려 7,000번이나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 뜻은 "스스로 있는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존재할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길잃은 인간의 목자가 될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십니다. 그는 어느날 잃어버린 양을 찾아 사망의 음침한 계곡을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예수(예수아)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어느날 당신의 제자들에게 선한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면서 그는 99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분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한 사람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방황하는 양들을 찾기위해 우리의 큰 목자이신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작은 목자가 되어 함께 잃은 양들을 찾자고 초청하십니다.
그것이 10년전 우리 교회가 탄생한 이유입니다. 10년전 우리 교회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창립비전을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지구촌 교회는 철저한 성서교육, 복음 전도훈련, 그리고 선교훈련을 통하여 구원받는 이들을 날마다 더해가며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지속적으로 세워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에 헌신한다--"였습니다. 그리고 3년전 우리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효율적으로 섬기기 위해 우리는 목장교회(셀 교회)에로의 전환을 선포했습니다. 어떻게 밀려오는 수 많은 영혼들에게 소수의 사역자들이 일일히 모든 성도들의 영적인 필요를 공급할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꼭 한가지 가능한 전략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모범으로 보여주신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마태 복음 9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예수께서는 그 시대의 민중들이 목자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모습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12제자를 부르시고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12제자를 세우시는 모범을 보여주신 다음 그 제자들이 또 다시 각각 12명 내외의 영혼들을 책임지게 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것을 우리는 목장교회 비전 혹은 12제자 비전으로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내에 성숙한 모든 성도들(평신도 목자들)이 평생에 12명씩만 책임지고 돌볼수 있다면 그리고 12명 내외로 구성된 목장 즉 셀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배가를 계속함으로 마침내 세상 모든 영혼들에게 우리의 큰 목자요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는 것--이것을 우리교회의 존재이유요, 사명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들의 목장을 통해서 그 가능성을 조금씩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3년전 400여목장은 900여개 이상의 목장으로 배가되어 곧 1,000개의 목장을 바라보게 되었고, 여기 저기서 목장교회의 좋은 간증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저는 이 사역에 헌신하는 목자 동역자 여러분에게 저의 목회의 모든 기대와 소망을 걸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자라온 것도 전적으로 이런 목자들의 헌신때문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담임목사로서 오늘의 우리 교회 목회를 감당할 만한 자격이나 역량이 전적으로 결핍되어 있다고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목장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주님, 주께서 우리 교회의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또한 우리 목자들의 목자가 되어 주시고 그래서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의 영적 필요가 저들을 통해 공급되게 하시고, 우리들의 큰 목자이신 주님의 사랑을 친히 경험하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제가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서 날마다 듣고 싶은 간증이 있다면 지구촌 교회 예찬이 아닙니다. 담임 목사 자랑도 아닙니다. 그것은 저나 여러분의 에고의식이나 자아만족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성도 여러분의 삶의 승리를 위해서는 아무 도움도 될수 없습니다. 진실로 여러분의 삶의 승리를 위해서는 이 고백이 가능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입니다. 그렇다면 이 새해 벽두에 묻고 싶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셨습니까? 예수로 오신 여호와 창조자요 섭리자요 구원자이신 그분을 나의 인생의 목자로 내 마음속에 영접하신 일이 있으신지요?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1-6 / 최응희목사(안디옥교회)
오늘 시편 23편 속에는 목동으로 광야와 골짜기로 양을 몰던 다윗의 경험과 믿음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다윗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기만 하면, 안전하고, 평안하며, 풍성해지는 양들의 모습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생각해 내었습니다. 목자의 인도와 돌봄 속에서 누리는 은혜와 기쁨을 다윗은 한 마디로 요약하여 노래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오늘 다윗의 이 노래가 우리도 함께 부르는 기쁨의 노래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1.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잔을 채워주십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영혼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신만의 안전과 편함으로 참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영혼이 채워져야 참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을 채우시는 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 은혜 안에서 내 영혼이 쉽을 얻고, 소생함을 얻습니다. 이렇게 내 영혼의 잔을 채워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체험과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양이 가장 미련한 동물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양은 지독한 근시여서 바로 코앞의 물체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한 번 벌렁 넘어지면 제 힘으로는 절대로 못 일어난다고 합니다. 더구나 유대라고 하는 땅은 아주 척박한 땅일 뿐 아니라 험준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서 조금만 방심하면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는 위험한 곳이 많은 곳입니다. 비도 별로 오지 않기 때문에 물도 흔치가 않은 지역입니다. 이런 곳에서 위험한 지형을 미리 알아 잘 인도해 주고, 좋은 꼴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 배불리 먹게 해주고, 목이 마를 때 맑고 얕은 물로 인도해 마시게 해주는 목자는 양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밤에는 잠자지 않고 눈을 부릅떠 울부짖는 짐승들에게서 지켜 줌으로서 양들이 편안히 잠들 수 있고, 쉴 수 있게 해주는 목자의 역할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목자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먹이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인생의 목자와 같은 분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자신을 인도하실 때에야 자신의 빈 잔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외롭고, 힘든 인생길에서 오직 주님 만이 자신의 목자가 되셨고, 그 음성을 듣고 따를 때에만 자신의 인생의 잔이 기쁨과 만족과 감사로 차고 넘치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목자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은혜를 체험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하기를 축복합니다.
‘필립 켈러’ 는 원래 호주에서 양을 치는 목자였는데 목사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목사가 된 후 「목자의 눈으로 본 시편 23편」이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양은 네가지 경우에만 풀밭에 드러눕는다고 했습니다. ❶ 주변에 맹수가 없어야 편안한 마음으로 풀밭에 눕는다는 것입니다. ❷ 양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화목해야 눕는다는 것입니다. ❸ 몸에 빈대 벼룩이 있을 때는 절대로 풀밭에 눕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❹ 충분히 꼴을 먹고 배가 불러야 풀밭에 드러눕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문제들을 없애 주시고 우리 영혼이 충만하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평안함과 풍성함과 충만함이 넘쳐나서 은혜의 푸른 풀밭에 눕는 기쁨이 늘 있기를 축복합니다.
2.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잔을 채워주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영혼뿐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인도해 주시고, 지켜주시고, 물리쳐 주시는 것에 대한 고백입니다. 실제로는 다윗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부모님에게도, 형제들에게도,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처럼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외치게 된 것을 보십시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고백을 하게 했을까요? 그 대답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인생의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고통을 능가하는 하늘의 위로가 그의 영혼 속에 넘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부요함이 자신의 삶에 상처를 주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쓰라림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온 영혼으로, 온 마음으로, 온 인격으로, 온 삶으로 몸소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에게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형제에게서도, 가족에게서도, 자식에게서도, 그 화려한 물질적 환경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그 만족과 기쁨을 하나님에게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담아서 그가 하는 노래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나이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주님의 은혜가 내게 크고 놀라우십니다!’ ‘제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하시는지요!’
♬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놀랍고 놀랍다 놀라우시도다! ♬
인생은 언제나 좋기만 하고 평탄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는 험준한 산과 깊은 골짜기도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들도 고난과 고통을 겪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시험으로 고통이 오기도 하고, 때로는 죄로 인하여 매를 맞는 경우도 없지 않고, 실수함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믿을 때 언제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믿음의 지팡이를 의지하고, 능력의 막대기로 길을 헤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을 믿으십시오. 비록 고통과 고난의 시간 속에 있을 때에도, 사망의 음침한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십시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함께 하심을 믿으십시오.
3. 목자이신 하나님은 내 수고의 잔을 채워주십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目前)에서 내게 상(床)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원수의 눈앞에서라는 말은 꼭 무슨 원수 맺은 사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어려운 문제 앞에서, 그 힘든 과정 가운데서, 그 외로운 시간 속에서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 문제 속에 있을 때는 그 시간이 영원할 것 같았고, 그 힘든 시간 속에 있을 때에는 나만 외로이 이 어려움을 짊어진 것 같았는데,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고, 하나님께서 알고 계셨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셔서 그 수고와 그 어려움과 그 외로움을 위로해 주시고, 알아주시고, 갚아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 어찌 내 잔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주의 사랑으로 넘치고, 주의 은혜로 넘치고, 그리고 나의 감사로 넘치고 감격으로 넘치고, 기쁨으로 내 잔이 넘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수고를 기억하십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건 몰라주건, 사람들이 알건 모르건 하나님은 아십니다. 내 깊은 속과, 내 남모르는 눈물을 아십니다. 마찬가지로 내 남모르는 하나님 사랑을 받아 주십니다. 남모르는 충성을 받아주십니다. 내 속 깊은 진심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6:9
‘내 원수의 目前에서 床을 차려주신다’는 말씀은 사람들이 몰라주었지만 하나님은 알아주시고, 채워주시고, 갚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끝까지 충성하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좀 힘들어도, 지금 좀 답답해도, 지금 좀 어려워도, 지금 좀 부족해도, 때가 될 때 하나님께서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시는’ 은혜와 복으로 여러분의 잔을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의 믿음의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목자이십니다. 양은 지독한 근시여서 한치 앞도 잘 못 보지만 귀는 밝아서 목자의 음성을 잘 구별합니다. 아무리 옷을 바꾸어 입어도 자신의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눈은 잘 안보이지만 소리는 잘 듣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한복음10:27
여러분 모두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를 받아 험한 세상에서 늘 평안하고 안전하고 풍성한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여러분의 입에서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이 고백이 노래처럼 흘러나오기를 축복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 23:1-6 / 김광일목사(벧엘교회)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캐나다에서 토양학 박사학위를 받은 필립 켈러(W. Phillip Keller) 박사는 ‘양과 목자’라는 저서에서 8년 동안 목장을 운영하면서 양을 쳤던 경험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목자는 여름동안에 양떼들을 멀리 방목장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곳은 고지대인데 양들은 거기서 지내면서 풍부한 목초를 뜯어 먹습니다. 그러다가 눈발이 날리게 되면 목자는 양떼를 이끌고 목장이 있는 낮은 지대로 돌아옵니다. 이때 내려오는 과정에서 지나게 되는 곳이 골짜기입니다. 양들의 입장에서는 ‘목자가 겨울에 잘 지낼 수 있게 할 것이면 왜 골짜기로 이끌어 가는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골짜기는 산과 산 사이에 있는 계곡이라 위험한 곳이고 하루 중 햇볕도 얼마 들지 않는 음침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높은 절벽위에서 골짜기로 바위나 흙더미가 쏟아져 내릴 위험성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목자는 골짜기를 지날 때 더욱 양들에게 가까이 있으며 신경을 곤두세워 돌보게 됩니다. 푸르고 넓은 초장에서 지낼 때는 목자가 양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지만 골짜기를 지날 때는 양떼를 지켜주고 돌보아야 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양 떼와 목자가 가까워지는 때가 바로 골짜기를 지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언제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됩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즉 인생에서 가장 외롭고 두렵고 험하고 힘든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더 가까이 모시게 됩니다. 평탄하고 형통한 길을 걸을 때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즉 목자이신 여호와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시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시입니다. 3천여년을 두고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편을 애송해 왔습니다. 몇 줄 안 되는 시편 23편이 인간에게 준 위로와 소망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외로운 사람들, 위태한 중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임종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시편 23편은 놀라운 은혜를 끼쳤습니다. 이 아름다운 시편 때문에, 다윗은 모두에게 사랑받는 인물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벌벌 떨 때에도 소년 다윗은 그 상황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 는 단 하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바로‘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의 믿음이었습니다.
복음성가로 만들어진 시편 23편이 있습니다. 다같이 부릅니다.
❶ 여호와 나의 목자 내게 부족 없네 푸르른 초장 위에 나의 몸 누이시네
❷ 내 영혼 소생하며 자기 이름 위해 의의 길 인도하니 골짜기 두렴 없네
❸ 주님의 지팡이가 안위하네 나를 주께서 원수 앞에 상으로 베푸시네
❹ 기름을 머리 위에 바르시는 주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함 따르리니
(후렴) 선한 목자 오 나의 목자여 생수가 넘치는 곳 날 인도 하시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와 사이를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다윗과 하나님의 사이는 양과 목자의 사이입니다. 여기의 관계는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목자 되심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작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의 믿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인도하시나이다
‘희망의 오페라’의 저자이며, 동양의 파바로티라고 불리는 성악가 조용갑 집사는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술과 도박, 폭력으로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신문배달, 우유배달, 군고구마 장사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철공소에 취직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이 없는 그의 인생에 목자가 되시어 인도자가 되어주셨습니다. 출석하던 교회의 담임목사 권유로 성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레슨 받을 돈이 없어서 성악가들의 음반 테이프를 들으면서 혼자 연습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음악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14년간의 유학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20여 차례의 국제 콩쿠르에 입상하고, 300회가 넘는 유럽 오페라 무대의 주인공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고백합니다.“하나님은 거친 파도 앞에 선 저에게 희망의 등대가 되어 주셨습니다. 드라마틱한 인생의 무대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앞으로 저의 꿈은 희망을 잃은 채 절망 속에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오페라를 전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도전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니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우리가 드릴 가장 좋은 기도는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입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선하게 인도하여 주십니다. 목자는 양을 설득하지 않습니다. 양에게 무슨 설명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목자가 앞서 가면 양은 뒤를 따를 뿐입니다. 목적지도 목자가 알고 목표도 목자가 알고 방향도 목자가 알고 양을 인도합니다. 양들은 묵묵히 목자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판단을 해서 인생길을 살아간다면 피곤합니다. 쉽게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긴장하고 스트레스에 눌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자로 인정하고 인도를 받으면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지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길을 찾으면 잘못 찾아 방황할 수밖에 없고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의의 길로 가게 됩니다. 안심할 수 있습니다. 최선의 길로만 가게 됩니다. "
둘째로 안위하시나이다
바실레아 슐링크((M.Basilea Schlink)는‘사랑의 승리’라는 글에서 중국의 문화혁명 때 엄청난 핍박은 받은 기독교인들을 소개하였습니다. 지하 교회를 섬기던 장로가 끌려가서 죽도록 매를 맞고 풀려난 뒤에 간증한 내용입니다. 장로는 감옥에 끌려가 240대의 매를 맞았습니다. 살라고 때리는 게 아니라 죽으라고 때리는 것이라 죽도록 아팠습니다. 매일같이 맞고, 쉬었다가 또 맞고, 쉬었다가 또 맞고, 그렇게 계속해서 240대를 맞았는데, 맞던 중에 장로는 스데반을 생각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천사의 얼굴 같았고 눈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에게도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가까이 오셔서 품에 안으시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안으시고 상처를 어루만져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도 아프지가 않았습니다. 아무리 때려도 안 아프더랍니다. 그뿐 아니라 맞을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모진 고난과 십자가 형벌로 인해 상처로 뒤덮인 주께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를 껴안으시는 것이 여호와의 안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뜻하지 않은 사고나 질병이 고통스럽게 할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때, 바로 그때 안위하시는 목자이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안위’의 사전적인 의미는‘마음을 위로하고 몸을 편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은‘위로(comfort)’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목자 되신 하나님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신과 함께 하셨으며 그 덕에 자신이 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순간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과 지팡이와 막대기로 자신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순간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혹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느라고 피곤하고 지친 삶은 아니십니까? 두렵고 막막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순간 하나님이 우리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목자이셨던 여호와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축복하시나이다
경상남도 시골에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6.25때 군에 입대했고, 월남 전쟁에도 참전했습니다. 27살의 나이에 별을 달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 어머니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경찰서장을 대동하고 어머니 앞에 큰절을 올리고 별이 달린 모자를 그 앞에 놓고 “어머니, 어머니 곁을 떠났던 그 자식이 별을 달고 어머니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시큰둥해 하셨습니다. “그 별은 언젠가는 떨어질 똥별이다. 나는 네가 하늘의 별을 달기를 원한다. 네가 어느 지역에 가서 어떤 위치에 있든지 거기서 복음 전하는 일, 성전세우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아니될 게야.” 그는 그때부터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4성 장군이 되었고 국방부장관이 되었습니다. 바로 김성은(金聖恩) 장관입니다. 그는 가는 곳곳마다 복음을 전했고, 군부대에 수많은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그가 전역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땅을 팔아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예배당 사진을 찍어서 어머니 앞에 찾아갔습니다. “어머니 예배당을 지어서 하나님 앞에 봉헌했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나는 네가 목사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했다. 그런데 네가 목사는 되지 못했지만 이제야 네가 하늘의 별을 달았구나. 그 예배당을 통하여 뭇 심령들이 하늘의 별이 되어 오르게 될 것이다. 이제야 네가 땅에서 썩고 떨어질 별이 아니라 하늘의 별을 달았구나”라며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김성은 국방장관은 ‘나의 잔은 넘치나이다’라는 회고록을 통해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통해 영원히 빛나는 별의 축복을 얻었노라 간증하였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대 중동지역의 풍습에 의하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인들에게 왕이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포로들도 잔치에 함께 참석하여 승리한 군인들이 잔치상을 받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다윗에게 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상을 베푸심을 기억하십시오. 축복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목자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다윗이 부족함이 없으며 언제나 잔이 넘치는 축복의 삶을 살게 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여호와가 목자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호와를 목자로 삼고 하나님만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해가 되던 이해가 되지 않던 목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고집하며 살았습니다.
■ 영국의 연극배우가 명예훈장을 받았습니다. 사회자가 그에게 청중들을 위해 대사를 암송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쾌히 승낙하면서 무엇이든 신청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연로한 목사가 제의합니다. “시편 23편을 암송해 주시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마친 후 목사님께서도 읊어 주셔야 합니다.” 이윽고 배우는 감정을 잡으면서 시편 23편을 암송했습니다. 넋을 잃고 듣던 청중들은 암송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잠시 후 나이드신 목사도 암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는 숙연해져 갔고 암송이 끝났을 때 한 사람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배우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귀를 울렸지만, 목사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저는 단지 시편 23편을 알고 있었지만, 목사님은 목자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호와가 목자이심을 아십니까? 목자이신 하나님만으로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목자를 따르는 양은 행복합니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배부르고, 가장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모시는 사람 또한 행복합니다. 부디 여호와를 목자로 삼아 좋은 곳으로 인도받으시기 바랍니다. 안위하심으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축복을 받음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언제나 잔이 넘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다
시 23:1-6 / 조용기목사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1-6)
<서 론>
오늘 저는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오래 살지 못해 짐승들에게 잡혀서 찢깁니다. 다른 모든 짐승들은 자기 방어 수단이 있어요. 이빨이 무섭다든지, 뿔이 사납다든지, 잘 달린다든지 그런 것인데 양은 그런 것이 없어요. 뿔도 튼튼하지 못하고 이빨도 강하지 못하고 발톱도 없고 멀리 달려갈 수도 없고 십미터 앞은 캄캄하게 안보이고 목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양입니다. 그러나 목자가 있으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강한 목자가 양을 지키면 양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강한 목자가 지키므로 안전하게 살고 푸른 풀밭으로 이끌어 주셔서 푸른 풀밭에서 누이신다고 말했습니다. 양은 배가 부르지 않으면 절대로 안 누워요. 밤새도록 풀을 뜯습니다. 그러나 배가 불러야 눕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니까 양은 목자의 인도를 쫓아서 푸른 초장에 누인다고 했습니다. 나는 행복하다. 만족하다. I''m happy. 그리고 쉴만한 물가에 가서 호수에 물을 마시고 쉴 수 있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그 구절을 참 좋아해서 어려울 때 그 구절을 늘 사용합니다. 내가 곤란한 가운데 부족함이 많이 다가오고 어려운 시련이 있을 때 주여,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다고 하셨으니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부족한 것은 다 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만족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역사를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뭡니까? 하나님 주신 약속을 마음속에 꽉잡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아무리 역경이 다가와도 말씀대로 된다고 말씀에 매달리고 말씀을 주장하면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이룰 수밖에 없는 것은 거짓이 없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영혼이 생기에 충만하고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하고 의롭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같이 계셔서 나에게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을 우리의 목자로 삼으면 모든 삶에 플러스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플러스인생, 삶에 환경이 다가와서 보탬이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왜 플러스인생이 될 수 있느냐. 예수님이 목자가 되어서 언제나 우리가 있으면 플러스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플러스 인생과 같이 사니까 우리는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어요. 빌립은 광야에 나가서도 예수님을 계산에 안 넣고 자기 혼자만 계산하니까 실패했지요. 안드레는 광야에 나갔을 때 예수님을 플러스 하니까 문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사는데 여러분 혼자 살려고 하지 말고 플러스 예수님, 예수님과 함께 생각해보고 의논하고 기도하고 믿으면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항상 너와 같이 하느니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으니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된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러면 여러분 주님 나와 함께 갑시다. 플러스로 인생을 사십시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붙잡아 주세요. 거짓이 없으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로 삼고 플러스 인생을 살게 될 때 언제나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부족하다.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플러스 인생으로 예수님이 강한 능력으로 같이 계시기 때문에 긍정적인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왜 그렇게 유명하냐. 그는 17살쯤 되는 초립동이었지만 어른들보다도 적군의 장수보다 더 위대한 것은 예수님을 플러스로 보태어서 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본 론>
1. 예수님은 나의 목자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의 목자뿐 아니라 나의 목자.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3)
늘 같이 하지 않습니까? 푸른 초장에 눕도록 풀을 뜯어먹게 해주시고 쉴만한 물가에 가서 쉬게 해주시고 마음을 소생시켜서 행복하고 만족하게 해주시고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플러스 인생 예수님만큼 플러스 인생으로 좋은 것이 없습니다. 저는 가만히 살아온 길을 요사이 종종 생각해 봅니다. 옛날에는 죽는데 대해서 별로 깊이 생각 안했는데 요사이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필연적으로 인생은 죽는데 사는 것보다 죽는 날이 가깝다 말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면서 어떻게 살아왔나 생각하니 예수님이 플러스해서 산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시험과 환난은 많이 당했지만 부족함은 없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예수님이 함께 계시니 플러스 삶을 살았다. 예수님이 없었을 때는 마이너스가 많았습니다. 피투성이가 되고 고통을 당하고 절망적일 때도 많았는데 예수님이 계시고 난 다음부터는 어느 곳에나 주님이 플러스 인생을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신 것처럼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내게 다가와 있을지라도 나의 가슴위에 날개를 퍼덕 거리면서 나는 독수리같이 덮어주시는 이가 계시는데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철학이 아닙니다. 학문이 아닌 것입니다.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족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로 11절에도 보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내가 온 목적이 내 양을 이끌어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고 왔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주님이 우리 위해서 목숨을 버릴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플러스 인생을 살도록 해주겠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 말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의 죄와 허물, 질병과 가난과 저주와 죽음을 대신 짊어졌습니다. 정말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 깨닫고 보면 왔다입니다. 왔다에요. 보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플러스인생을 살도록 해주시니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살아서 운행하고 역사하시는데... 제가 언제나 서양에서 우리 교회를 연구하러 온 목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그 말을 합니다. 그 사람들은 꼭 묻습니다. 어떻게 교인들이 교회를 저렇게 꾸역꾸역 찾아오나. 우리 미국이나 구라파에서는 안 오는데... 교회 나오는 수가 날로 줄어들고.. 저렇게 많은 교인이 안 나오는데 어떻게 한국은 그렇게 나오느냐고 내가 하는 말은 좀 자세히 보세요. 저 사람들이 교회를 다 찾아올 때 기쁨이 충만하고 활기차게 들어오는 것을 보면 누가 같이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같이 오느냐. 예수님이 같이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함께 인생을 살아주기 위해서 오면 우리에게 의롭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의 홍수에 휘말려가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어떻게 의롭게 삽니까? 죄가 만연한데... 그런데 예수님을 플러스 인생으로 모시고 들어오면 예수님은 은혜로 공짜로 우리에게 의롭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의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부끄럼 없이 나갈 수 있는 깨끗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격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지요. 그리고 또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거룩한 삶을 절대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허물이 많은 사람이라 나쁜 일 생각하고 나쁜 말하고 나쁜 일하고 나쁜 습관이 있고 이 나쁘다는 것을 재낄 수 있는 힘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같이 계시면 우리에게 나쁜 삶을 다 제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거룩한 삶으로 덧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이 우리를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해주시면 그 다음에 성령이 우리를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물로 씻어 깨끗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의롭다함을 얻고 거룩하게 되고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의 약한 것을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친히 담당해 주시고 그리고 우리 병을 대신 짊어져 주시는 것입니다. 한평생 병 없이 온전히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분들이 좀처럼 있지 않아요. 다 크고 적은 병을 앓게 돼요. 그런데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병을 대신 짊어져 주겠다. 이게 또 플러스 알파입니다. 병이 들면 예수께로 더 의지하게 되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병을 대신 짊어지게 되므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하는 것은 만족하지 못하지요. 복 받은 삶을 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만나면 인사할 때 복을 받으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God bless you.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진짜로 믿고 말합니까? 안 믿고 말합니까? 믿고 말하는 사람은 진짜 가까운 사람이고 그냥 말하는 사람은 습관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왜 습관적으로 말하느냐. 할 말이 없으니까 그 말이라도 하고 헤어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우리 보고 내가 네게 복을 준다는 것은 진짜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 우리 다 같이 소리 내어 함께 읽어 보십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을 보고도 주님이 우리에게 복을 안준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보고도 예수 믿는 생활은 복 받은 생활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 알고 있어요? 잘못 알고 있었지. 예수 믿는다고 뭐 부자가 되겠노. 저는 핍박 많이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예수 믿고 하나님께서 복 준다는 말을 하다가 기복신앙을 전한다고 이단 삼단이라고 욕을 많이 얻어 먹었는데 참말을 가르치니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러니 사람들이 용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고 있거니와 예수님이 너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심은 자기가 가난해서 우리로 부요케 하게 하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요 하나님 아들로써 남의 집에서 늘 셋방살이로 살고 들과 산에서 잠을 주무시고 얻어먹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은 너희들 잘살게 하기 위해서 전셋집에 돈 주고 가는 것과 한가지입니다. 미리 너희를 위해서 부요의 축복을 예금해 놓고 가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뒤에는 예수님이 예금해 놓은 것이 많습니다. 여러분 찾아서 먹으라구요. 자세히 찾아보세요. 여러분 앞에 예금 통장이 있을 것입니다. 많이 저금되어 있어요. 발견하거든 여러분만 잡수지 않고 저도 좀 보내 주십시오. 우리는 플러스 인생으로 예수님과 함께 살면 예수님이 복을 우리가 누리며 살고 그 다음에는 가장 놀라운 것은 죽음이 다가와도 겁낼 것 없는 것은 천국 영생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사는 삶이 보장이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7장 17절에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눈물을 흘리면서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다시는 눈물이 없도록 만들어 주시겠다. 울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해주신다. 사람들이 가난하고 헐벗고 못살게 되면 마음도 약해져서 원망 잘나오고 눈물도 잘 흐릅니다.
2.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고 했는데 여러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생활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사는 이 생활 자체가 천당이 아닙니다. 여러분 집이 천당인 사람 한번 손들어 봐 주세요. 나도 좀 가서 배우려고... 천당이 없지 않습니까? 모두 다 우리가 사는 자체가 적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큰 죽음의 골짜기가 우리 삶인 것입니다. 삶 자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담대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역시 플러스 알파로 주님이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님이 함께 하시면 주님의 손에 있는 막대기와 지팡이가 같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막대기는 뭡니까? 막대기는 짐승이 오면 치는 무기요, 지팡이는 뭐냐, 길을 찾아가는데 필요한 지팡이인 것입니다. 목자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짐승들이 오면 막대기로써 치고 보통 때는 지팡이로 가지고서 양들이 가는 길을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십자가 몽둥이와 십자가 지팡이로 함께 계신 것입니다. 짐승이 오면 마귀를 지팡이로 막대기로 치고 어려운 골짜기를 지날 때는 지팡이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는 우리와 같이 계신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 그날에는 너가 내 안에 내가 너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 성경만큼 우리와 같이 있겠다고 보장하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사망의 골짜기인데 그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우리에게 주님이 오셔서 죄와 허물을 책임져 주신다. 우리가 죄를 짓고 허물 많은 인생들의 죄와 허물을 친히 책임져 주신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올 때 자기들이 무화과 잎사귀로써 앞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니 서로 부끄러우니까 앞치마를 해 입었는데 사람이 무화과나무잎으로 앞치마를 만들어 입으니까 햇빛이 나면 그만 쪼글쪼글해져요. 햇빛이 나면 쪼글쪼글 해져서 영원한 옷이 될 수가 없어요. 그와 같이 오늘날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쪼글쪼글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앞치마 해서 입고 나가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가죽을 벗겨서 가죽옷을 만들어서 입혔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고 나가는 사람에게도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가죽으로써 옷을 만들어 입혀서 반영구적인 옷을 입혀서 내보낸 것입니다. 상징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히기 위해서 상징적으로 이번에는 짐승을 잡은 것이 아니라 아들을 잡았습니다. 그 아들을 잡아서 그 의로운 옷을 벗겨서 여러분과 나에게 입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의로운 옷을 받아 입고 보혈로써 씻고 의롭게 되어서 나갈 수 있으니 주님께서 죄와 허물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로 3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하나님이 오셔서 죄와 허물을 사하시고 마귀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졌다는 것입니다. 공중에 마귀가 권세를 쥐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권세를 쥐고 있으면서 이 세상에 그 영향력을 미쳐서 모든 세상 사람들이 세속을 따라 살고 하나님을 따라 살지 않도록 악을 퍼부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따라서 사는데 예수를 믿으면 보혈로 씻어버리고 주님의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시고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망의 권세에서 건저내사 그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겼습니다. 여러분과 나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말하는 것이 다르고 행하는 것이 달라져서 두 종류의 사람이 세상에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만 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질병과 저주의 삶도 예수님은 철저히 제하여 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주를 받아서 쫓겨났기 때문에 저주란 무섭습니다. 아무리 일을 해도 살게 되지 않습니다. 늘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실패하고 낭패에 부딪히는 것입니다. 이 저주의 삶을 축복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무에 매달렸습니다. 저주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하여 나무에 못박혀서 매달려서 저주를 청산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11절에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질병과 저주의 삶을 주님께서 대신 살아주었기 때문에 병들어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고침을 받아 건강해질 수 있고 저주도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것은 저주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주 트레이드마크가 붙었습니다. 너는 나 때문에 영혼이 잘된다. 범사가 저주에서 해방되어서 잘된다. 강건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흑암 가운데 살고 고난 중에 허덕이고 저주의 병이 날뛰어도 이 말씀 속에 서서 기록되었으되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내 영혼이 잘된다고 하기 때문에 나는 영혼이 잘된다. 범사에 잘된다고 하므로 나는 범사에 잘된다. 강건하다니까 나는 강건하다. 그 외에 다른 것하고 나는 타협하지 않는다. 나는 절대로 너를 따라가지 않는다. 여러분이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영혼이 잘되는 것으로 생각이 점령당하게 하십시오. 범사가 형통하고 잘된다고 늘 생각하고 그것이 마음을 점령하게 하십시오. 언제나 나는 강건하고 건강하다는 것을 시인하십시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하늘나라 문화가 마음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성령이 와 계시므로 하늘나라 문화가 여러분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하고 틀린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혼이 잘 안됩니다. 범사가 고통스럽습니다. 여러 가지 질병에 걸려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우리하고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가 다가와서 고통이 다가와도 언제나 여러분은 밝고 맑고 환하고 소망찬 인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세상 사람들은 탄식합니다만은 우리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광풍을 피하는 것 같이 될 것이요 폭우를 가리우는 분같이 될 것이요 마른 땅에 냇물같이 될 것이요.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과 같다. 야~ 광풍이 불어 닥칩니다. 경제적인 광풍, 가정에 문제가 광풍처럼 생활의 문제가 광풍처럼 불어올 때 광풍을 피하는 곳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께 부르짖으면 예수님이 여러분을 피하게 해주셔서 광풍을 피하는 것, 폭우를 가리우는 것, 폭우가 쏟아지면 도시가 물에 다 떠내려가고 물에 잠기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그러한 세상환난이 다가와도 우리에게는 폭우를 가리우리는 것이 될 것이요. 마른 땅에 모든 것이 말라 비틀어지고 죽는데 마른 땅에 시냇물 같은 분이 있다.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아주 초목, 곤충이 다 못사는 곤비한 땅에 바위 그늘이 되어서 우리를 피하게 해 주신다. 그러므로 여러분 플러스 알파 되어 가면 이러한 예수님이 곁에 따라 다니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광풍이 불어와도 겁나지 않고 폭우가 내려도 떠내려가지 않고 마른 시냇물이 없는 곳에도 시냇물이 흐르게 해주시고 곤비한 삶속에 쉴 수 있는 바위가 되어 주신다. 공짜다. 값없이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것입니다. 좋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알파로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죄와 허물도 겁나지 아니하고 질병과 저주도 겁나지 아니하고 사망과 음부의 삶도 겁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갈보리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주님은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해 주시고 바라봄의 법칙이 승리하는 것같이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광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불뱀을 보내어서 불뱀이 사람들을 물매 여기저기에서 수없이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그때 잘못했다고 모세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불뱀이 떠나게 해달라고 하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불뱀을 만들어가지고서 장대에 매달아라. 쳐다보는 사람마다 생명을 얻는다. 빨리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머리에 못으로 박아서 머리를 저기 쳐다보라. 저기를 쳐다보면 죽지 않는다. 뱀에 물려서 독이 올라 얼굴이 시뻘개진 사람도 얼굴을 들어서 그 뱀을 쳐다보면 다 살아났었습니다. 끝까지 뱀을 안 쳐다본 사람은 죽었습니다. 니고데모 보고 주님 하신 말씀이 그것인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만든 뱀을 쳐다본 사람마다 독이 다 나가고 살아난 것처럼 이 세상에서 나를 쳐다본 사람마다 다 살아난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우리를 보시고서 나를 보라. 다 이루었다. 내가 너희 죄도 다 값아 버렸다. 불의도 다 씻어버렸다. 너희 병도 내가 책임졌다. 너희 저주도 내가 갚았다. 너 죽음도 내가 짊어졌다. 다 이루었다. 사는 것만 남았다. 안 믿고 죽지 말고 믿고 살아라.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주여, 믿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으니까 어려울 때도 바라보고 슬플 때도 바라보고 외로울 때도 바라보고 고통스러울 때도 바라보고 좋을 때는 바라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슬플 때는 바라보고 위로를 받고 답답할 때는 바라보고 승리를 얻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에 이런 생활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놀라운 비결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3. 원수의 목전에서 차려 주시는 밥상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살면 원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생은 생존경쟁으로 네가 사느냐. 내가 사느냐의 투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경쟁자가 생기고 원수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발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꿔라. 인간의 생각으로써는 원수가 오면 저 원수를 그냥 죽여 버릴까. 저 원수 때문에 내가 통곡을 할까. 어떻게 할꼬? 어떻게 할까요? 나를 물고 찢고 손가락질하는 원수를 어떻게 할까요? 나에게 물건 갖다 주고 난 다음에 물건 값을 다 뽑아가 버리고 나에게 안 갚는 것 어떻게 할까요?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쥐어박아버리고 고소하고 강제로라도 보복을 하기를 원치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생각을 달리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가 오면 그것을 미끼로 삼아서 진수성찬을 차려주마. 그러므로 원수는 오히려 우리에게 밥상 가져오는 심부름꾼에 불과한 것입니다. 원수가 오면 밥상도 차려오거니와 원수가 안 오는데 밥상도 없습니다. 원수가 오면 그 원수가 여러분에게 고통을 갖다준 만큼 하나님은 밥상을 차려다주는 것입니다. 손해 안나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일을 잘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공하게 만들어 주신다. 그러므로 원수의 공격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원수가 공격하면 하나님이 원수 보는 앞에서 우리를 더 성공하게 만들어 주셔서 원수가 기절초풍을 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5절에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환난이 오면 환난 때 주님께서 그것을 미끼로 삼아서 건져내고 오히려 여러분 영화롭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과거를 돌이켜 보십시오. 고통당할 때 좋은 일도 많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고난은 좋은 일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좋은 일이 있기 전에 반드시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갑자기 좋은 일이 생겨나면 그 대가로 고통을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일만 있으면 좋은 일을 누릴 수가 없어요. 고통을 통해서 좋은 일이 생겨나면 그 좋은 일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고 그 좋은 일을 누릴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날도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 부르시면 아바 아버지라고 불러라. 그렇게 말합니다.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굉장히 친밀하게 하루 종일 그림자가 몸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같이 계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버림 안 받으니까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
요한복음 14장 16절로 18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또 다른 보혜사, 왜 또를 붙였습니까? 예수님이 내가 처음 보혜사고 그 다음에 성령은 또 보내시는 다른 보혜사다. 보혜사는 무엇이냐. 보혜사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보내신 우리의 도우미가 보혜사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성령 도우미가 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첫 도우미로써 우리에게 와서 도와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부활해서 승천하고 난 다음에는 성령으로 보혜사로 오셔서 여러분과 나에게 예수님과 똑같은 도우심을 베풀어 주시면서 떠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헬라어로 프뉴마라고 합니다. 프뉴마는 바람으로 해석하고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휴~ 제가 숨을 쉬었습니다. 프뉴마를 쉬었습니다. 여러분도 숨을 한번 쉬어 보십시오. 휴~ 그 숨을 쉴 때 여러분 보통 공기를 느낍니까? 안 느끼지요? 자동적으로 숨을 쉬고 있지요? 건강할 때는 자동적으로 숨을 쉬고 숨이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성령은 프뉴마이기 때문에 성령이 여러분 속에 계시면서도 여러분이 모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성령님께 의지하십시오. 인격자이기 때문에 우리와 대화를 하면 대화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성령님 함께 갑시다. Dear, Holy spirit Let''s go! Let''s go! 함께 가십시다! 그 말 꼭 해요. 오늘도 저 자리에서 일어나서 강단에 나올 때 Dear, Holy spirit Let''s go! 함께 갑시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니까요.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여러분이 도와달라면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해서 보혜사가 오고 보혜사 뒤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삼위일체로 와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리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세상은 성령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세상에 같이 있느냐. 마귀가 세상 사람들하고 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못 받는 이유는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데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님 나와 함께 계시지요? 우리 형제, 자매하고도 같이 있지 않아요? 아멘! 성령은 고요하고 잠잠하게 그를 바라보면 우리 생각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 속에 플러스 알파로 다른 생각이 떠오릅니다. 성령이 생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거라구요. 제가 설교할 때 더욱 느끼는 것은 한참 설교를 하는데 내가 계획도 아니하고 연구도 아니했는데 생각이 마음속에 숨소리처럼 싹 지나갑니다. 생각이.. 아, 성령이 이 말씀을 하라고 하시는구나. 그럼 내가 그 말을 해요. 하고나면 다시는 그런 생각이 안나요. 다른 생각이 떠올라와요. 그리고 중요한 논쟁을 할 때 성령님 나 논쟁을 하는데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논쟁을 하는데 내가 생각지 않은 말도 생각도 자꾸 떠올라와요. 그럼 그 생각을 붙잡아 내 논쟁하는데 사용을 하면 나중에 보면 기가 막힌 대답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들리는 목소리로 말하지만 성령은 우리 생각을 통해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해놓으면 생각이 안정되고 잠잠하고 조용한 가운데 성령이 생각을 집어넣어 주면 우리가 잘 알아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해주세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로다. 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것이 버림받는 것입니다.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 생활하는 사람 중에 60이 넘은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십시오.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40대, 50대에는 한참 사회생활을 하다가 60대가 되면 은퇴하고 나오면 이제는 지위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지위를 따라서 찾아오던 사람들, 돈 보고 따라오던 사람들 다 떠나갑니다.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외로워짐이 제일 무섭습니다. 고독이 제일 무서운 거에요. 그런데 성령은 고독한 사람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예수님께 오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여러분 외로울 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버리지 않고 천당 갈 때까지 손잡고서 가주시는 것입니다. 외롭지 않고 마지막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4.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마지막에는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짧게 하겠습니다. 성찬 떼야 되니까.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내가 죽어도 천당에 가서 영원히 살 것이니까 마지막 인생을 절대 긍정적인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슬프다. 고통스럽다. 외롭다. 죽으면 절망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여러분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기쁘다. 좋다. 행복하다. 나는 천국집이 만들어져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28,32)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와 같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해주실 것이다.
<결 론>
그러므로 오늘 예수를 믿는 사람들, 인본주의자는 패망하고 말 것이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곳에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된 것을 늘 마음에 기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나를 버리지 않고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교회, 하나님이 목자이신 양 무리
시편 23:1-6 / 이수영목사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비유는 아버지와 자녀의 비유이겠지만 그에 못지않은 비유가 신랑과 신부의 비유이며 또한 목자와 양의 비유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의 백성은 양 무리 같은 존재이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목자 같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 치는 목자가 양들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아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목자의 목양하는 모습을 오늘 본문인 시편 23편보다 더 잘 보여주는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시편 23편의 저자로 알려진 다윗은 바로 양 치는 목동이었고 그는 자기 자신의 목양의 경험을 통해서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본문 2절에 보면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합니다. 양에게 있어서 목자는 푸른 풀밭에 누울 수 있게 해주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들을 푸른 풀밭에 눕게 해주고 물가에서 쉴 수 있게 해주는 일은 목자에게 있어서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목자가 많은 수고와 자기희생을 치러야 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양이란 동물이 풀밭에 편안히 눕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양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가 주변에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양은 아주 겁이 많고 의심이 많은 동물이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체가 시야에 들어온다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가 들리면 불안해서 누워있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마리 양이 놀라서 뛰기 시작하면 다른 모든 양들도 덩달아 뛰는 바람에 삽시간에 혼란이 일어나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들을 편히 누워 쉬게 하기 위해서는 목자는 쉬지 않고 부지런히 주위를 살피며 양들을 불안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둘째, 양들이 풀밭에 편안히 눕기 위해서는 양들을 귀찮게 하는 요소들이 없어야 합니다. 양은 아주 신경질적인 짐승이어서 하루살이 같은 것이 눈앞에서 어른거리기만 해도 그걸 참지 못하고 그래서 눕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양들을 편히 누워 쉬게 하기 위해서는 목자는 양들을 귀찮게 하고 짜증나게 하는 벌레나 곤충들을 열심히 쫓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셋째, 양들이 풀밭에 편안히 눕기 위해서는 배가 고프지 않아야 합니다. 양들은 만족스러울 만큼 배불리 꼴을 먹기 전에는 절대로 눕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목자들은 양들이 편히 누워 쉴 수 있도록 좋은 꼴을 풍성히 먹이기 위해서 늘 많은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넷째, 양들이 풀밭에 편안히 눕기 위해서는 양들 자체 안에서 평화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양을 양순하고 평화의 상징인 짐승인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양들끼리만 내버려두면 힘없고 어린양들은 힘세고 못된 양들 때문에 늘 시달리며 좋은 자리는 언제나 빼앗기기 때문에 잠시도 편안히 누워 쉴 틈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양들이 골고루 편히 누워 쉬게 해주기 위해서 목자는 특별히 신경 써서 양들 사이를 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물을 먹이러 갈 때에도 먼저 그 물이 양들에게 안심하고 먹일 수 있는 깨끗한 물인지, 물가에 양들을 귀찮게 하거나 양들에게 해로운 벌레들이라도 없는지 세심히 살펴본 후에야 양들을 데려갑니다. 또 양들에게 가장 좋은 물은 새벽 동트기 전에 풀잎에 맺히는 이슬이라고 하는데 좋은 목자들은 양들에게 그 물을 먹이기 위하여 새벽잠을 설치면서 양들을 일일이 깨워 풀밭으로 이끌고 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양들이 만족하며 “우리가 쉴만한 물가로 인도되었구나”라고 여기게 되는 것은 목자의 지극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합니다. 이 말 속에는 은혜 넘치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양은 몸이 둥글고 다리가 짧아서 그런지 나뒹굴기 잘한다고 합니다. 평평한 곳인 줄 알고 누우려다가 조금만 웅덩이진 곳이면 쉽게 나뒹굴게 되는데 한번 배를 하늘로 향하고 나뒹굴게 되면 제 발로 다시 서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스스로 일어서려고 발버둥 치다보면 체내에서 기포가 형성되어서 혈액순환을 막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라도 좀 불 때에는 3일 정도 버틸 수 있지만 뙤약볕이 내려 쬐는 때에는 단 세 시간 만에도 질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이 양을 치면서 가장 신경을 써야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어느 구석인가에 한 마리라도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나뒹굴어 있는 양이 없는지 살피는 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말씀 중에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나서는 목자의 비유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양 한 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 목자가 제일 먼저 생각에 떠올리는 것은 그 양이 어딘가에서 배를 하늘로 향하고 나뒹굴어 있지나 않나 하는 것이며, 그것은 1분 1초가 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양을 발견했을 때 목자는 그 양을 얼른 바로 세워 가슴에 안고 전신을 잘 마사지 해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하면 질식해 가던 양이 정신을 차리며 되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말은 내가 어디서 무슨 변을 당해 죽어 가는 일이 있을지라도 곧바로 내게 달려와 나를 살려 줄 목자 같은 분이 바로 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3절 뒷부분에는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는데 이 말 속에도 참으로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양은 습관성 동물이어서 자기들끼리만 다니게 내버려두면 한 번 가본 길로만 계속해서 다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풀이란 풀은 다 뜯어먹고, 더 이상 풀이 없으면 뿌리까지 다 캐먹으며, 또 다니면서 싸놓는 배설물로 땅을 산성화시켜 다시는 회복이 불가능한 땅으로까지 만들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풀밭이라 할지라도 목양이 불가능한 땅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그것이 곧 불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자가 목양에 성공하려면 무엇보다도 유의해야 하는 일의 하나가 양들을 여러 목초지로 차례로 번갈아가며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좋은 목자에 의해 인도되기만 하면 양들은 목초지를 버려놓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적당히 남겨놓는 배설물은 오히려 목초지가 잘 유지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불의를 행할 수밖에 없는 양들을 의를 행할 수 있게 해주는 목자처럼 하나님은 불의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의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합니다. 낮은 평지에서 양들을 치다가 더 이상 꼴을 먹일 목초지가 없어지면 높은 산지대로 새로운 목초들을 찾아 양들을 이끌고 가는데 그 길이 종종 험하고 가파르기도 하며 또 사나운 산짐승들이 나타날 수도 있고 해서 양들에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들은 양 손에 각각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고 가는 목자가 눈에 보이는 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발을 잘못 디뎌 골짜기나 가시덤불에 떨어지게 되면 끝이 둥글게 휜 지팡이로 목이나 다리를 걸어 끌어올려 줄 것이고, 맹수가 나타나면 막대기로 물리쳐 줄 것이라고 철저히 믿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목양관습에 따르면 목동이 처음 양치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인근 숲에 가서 튼튼한 나무에서 싱싱한 가지를 하나 꺾어 그 나뭇가지를 자기의 체격과 팔 길이에 맞게 적당히 자르고 잘 다듬어 막대기를 만든 다음 그것을 휘두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맹렬한 훈련 끝에 어떤 짐승이나 적수가 나타나도 그 막대기로 능히 물리칠 수 있을 만큼 완전한 무기를 갖춘 후에야 아버지나 형님에게서 양 몇 마리를 물려받아 목자의 일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들에게서 목자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와 막대기는 그들이 절대로 안전할 수 있다는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백성을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목자와도 같은 존재시라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하는데 그것은 아무리 양들을 노리는 위험요소들이 널려져 있는 가운데서도 목자는 양들이 마음 놓고 꼴을 먹을 수 있도록 밥상을 차려준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한편으로는 아무리 험준하고 위험한 고지대에서도 목자는 밥상처럼 평평한 목초지를 찾아 양들을 인도해줌을 뜻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양들이 뜯어먹을 풀들 사이에 양에게 치명적인 독초들이 섞여 있다 하드라도 목자들은 미리 그것들을 다 솎아낸 뒤에야 양들을 데리고 가기 때문에 양들은 마음 놓고 뜯어먹을 수 있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양들을 위해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그러하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하는데 이것 또한 양들을 돌보는 목자의 세심한 주의와 책임감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양의 콧구멍 입구는 늘 물기가 촉촉해서 종종 거기에 벌레가 기생하는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 벌레는 양의 콧구멍에다 알을 까기도 하고 또 거기서 애벌레가 나와 콧구멍 속으로 파고 들어가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양에게 통증도 일으키고 때로는 실명하게도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성마른 짐승인 양은 그것을 참지 못해서 땅바닥이나 나무 등걸이나 바위에다가도 머리를 찧고 코를 비비대다 보면 상처가 나거나 깨져서 피를 흘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면 목자는 상비약처럼 지니고 다니는 올리브기름을 곧바로 그 상처에 발라주어 낫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라는 말 또한 양을 기르는 목자의 지극한 정성과 배려를 엿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치고 상처받고 깨지고 피 흘리는 일이 있어도 어김없이 찾아와 고쳐주고 살려주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분에 넘칠 정도로 감사하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그 말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숨어있는 표현입니다. 목자들은 밤에 들판에서 양들을 지킬 때가 많으므로 추위나 오한이 날 때에 대비해서 물병에 술을 약간 탄 물을 늘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들도 오한이 날 때에는 목자가 그 술 탄 물을 따라 마시우곤 하는데 양들에게는 목자의 품에 안겨 그가 따라주는 물 한 잔 받아 마실 때보다 더 행복해할 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의 그 행복감의 표현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의 백성에게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목자로 둔 양 같은 백성이라면 부족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시편의 저자가 본문 첫 절에서 먼저 한 말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한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23편의 모든 구절 뒤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양을 치는 목자의 사랑과 정성과 돌봄이 어떤 것이며 양들을 위한 목자의 책임감과 수고와 희생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기 자식들에게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 목숨의 위험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당신의 백성에게 그러한 목자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본문 6절에서 결론을 내리기를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합니다. 왜냐하면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런 목자처럼 하나님께서는 평생토록 오직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셨고 그 선언이 진실임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확증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목자 되신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 하나님하고만 일생을 함께 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걸으라 하시는 길이 따르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자기 목자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가는 양 같이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종종 얻는 것 없고 손해만 볼 것 같으며, 배부름도 시원함도 편히 쉼도 재미도 없고, 피곤과 오해와 조롱과 실패와 위험밖에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그야말로 물 한 방울, 풀 한 포기, 구름 한 점 없는 광야를 걷는 것과 같이 여겨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당장에 안 보여도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만 따라가면 거기에 진정한 기쁨과 만족과 성공과 평안과 행복이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악하고 험한 세상에서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것 같이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손에 지팡이와 막대기를 드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는 불의의 길밖에 갈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이 의의 길을 가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따르는 것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양 무리인 우리들이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믿음의 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것이 오늘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과 삶의 다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따르는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며 참된 만족과 평안, 치유와 회복, 그리고 구원과 부족함이 전혀 없는 영원히 복된 삶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양 무리를 교회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 최초로 창립 126주년을 맞은 이 교회에 귀빈으로 초청되어 오신 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나님이 목자이신 양 무리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플러스 인생
시 23:!-6 / 조용기목사
<서론>
“플러스 인생”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오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이너스 인생을 사는 것은 참으로 괴롭습니다. 없다는 것, 모자란다는 것은 마음속에 만족할 수 없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6.25사변을 통해 본 세대는 없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를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집이 없다. 밥이 없다. 잠자리가 없다. 없는 것은 마음에 불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어느 전쟁고아들이 그때 미국 병사들이 도와주고 있는데 애들이 잠을 안 자요. 낮에 내내 몰려다니다가 저녁에 잠을 자야 되는데 잠을 안 잡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을 불러다가 왜 어린 아이들이 잠을 안 자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잠을 안 자므로 낮에 이동할 수가 없고 상당히 취급이 곤란한데 잠을 좀 자게 해 달라. 그래서 전문가들이 쭉 살펴보니까 병든 것도 아니고 밥맛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마음의 불안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먹었는데 내일은 뭘 먹고 사나. 먹는데 대한 불안감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잠자는 비결을 알려 주었습니다. 잠자는 시간에 다 자리에 눕혀 놓고 애들 손에 빵을 하나씩 들려주었습니다. 빵을 얻어서 손에 쥔 애들은 다 잠을 잘 자요. 빵을 손에 쥐지 못한 어린애들은 잠을 못자요. 왜, 마이너스가 되면 마음에 평화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마음에 평안하고 좋지 아무것도 없다고 할 때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오늘 저녁에 먹을거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늘 예배에 오셨어도 설교가 귀에 잘 안 들어 올 것입니다. 오늘 저녁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평안한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강단이 있다고 생각할 때 마음이 평안하지 강단이 없어지면 여의도광장에 가서 설교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불안해질 것입니다.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플러스 인생이란 모자란 것을 채워주고 마음에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시편 23편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 말씀이 참 좋아서 매일 그 말씀을 한 번씩 기억하는 것입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있도다. 그러면 마이너스 인생이 되면 기쁘지 않아요. 부족함이 없도다. 그래서 저에게 타이르는 것입니다. 너 두려워하지 말아라. 부족함이 없다. 야훼께서 너의 목자가 되시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확신을 시켜 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 어떻게 되었든 부족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이 창조하신 완전한 세계
하나님이 처음 세계를 지으셨을 때 하나님은 완전하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모자람이 없이 부족함이 없이 완전한 세계를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천지를 지으시고 난 다음에 보기에 좋았더라고 했던 것입니다. 좋다. 나쁜 것을 보고 좋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제가 이 강단에 늘 서보면 옷을 참 좋게 입고 온 사람이 있습니다. 야~ 잘 입었구나. 좋다. 아무렇게나 입고 온 사람이 있습니다. 히피 같구나. 별로 안 좋다. 그런 평가를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볼 때 마음이 좋습니다. 좋지 않은 것을 볼 때 마음이 찌부둥 합니다. 모자란 것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을 지어 놓으시고 좋다. 바다를 지어 놓으시고 좋다. 땅과 식물을 지어놓고도 좋다. 해와 달과 별을 지어 놓고도 좋다. 물고기와 새들을 지어 놓고도 좋다. 동물을 짓고 사람을 마지막에 짓고 난 다음에도 좋다. 본인이 좋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보니 심히 좋더라. 그러므로 이 좋은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신 우리들은 좋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쁜 것을 보고 좋다고 말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시고 이 세상을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1절에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이 여러분 보시고도 참 좋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히 좋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나쁘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솜씨를 탓하는 것이 되니까 좋지 않지요. 에덴동산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살게 했는데 에덴이란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즐겁다. 기쁘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즐겁고 기쁜 동산에 살게끔 해주신 것입니다. 그 말은 24시간 즐겁고 기쁨이 그 생활에 따라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에 대한 뜻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기쁘고 즐겁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슬프고 괴롭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야훼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창 2:8~10) 과일도 그 나무가 보기도 좋고 열매가 먹기도 좋다. 좌우간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좋은 거에요. 하나님이 지으신 중에 제일 정성을 들여서 멋있게 지은 것이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과 함께 친교를 나누기 위해서 지은 사람은 보기에도 좋고 같이 살기에도 좋은 분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서 여러분을 보니 참 좋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했을 때 불광동에서 제일 먼저 외친 것이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제가 늘 걱정을 했어요. 신학교 졸업하고 목회를 시작할 때 하나님이 나쁜 하나님이면 내 인생이 나쁜 인생이 되지 않을 것인가.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불안이 있었는데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오랄 로버트 목사님이 설교하는 설교를 들으니까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다. God is good God. 하나님께 좋은 것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라. 그 설교 말씀이 내 마음속에 확 부딪혀 오는 거에요. 어~ 나를 지으시고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마땅히 좋은 하나님을 섬기고 좋은 하나님이 좋은 것 주시기를 기대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하나님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내게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기대하고 난 다음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구요. 그 다음부터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달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설교할 때 큰 소리치지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다. 한번 모셔보라. 좋은 일이 생겨난다. 그런게 아닌게 아니라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살아보니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마음속에 나쁜 일은 다 쫓아내버리고 좋은 일만 다가온다고 가득히 다가온다고 생각하십시오. 진짜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2. 마이너스 인생을 가져온 마귀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에게 좋은 일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나 우리에게 마이너스 인생을 가져오는 마귀가 있어서 언제나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을 시키는 것입니다. 도둑이 들어와서 여러분에게 좋은 일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구역예배를 조직을 해서 아주 구역이 잘되어 갔습니다. 우리 자매님들이 빨간 가방을 들고 설치면 천지가 다 빨갛게 보여요. 구역장들이 정말 수고해서 교회가 성장했는데 열심히 구역 일을 보는 우리 자매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그 남편이 하는 말이 당신 집 비우고 빨간 가방만 들고 설치다가 일 다하면 어떻게 하나?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데 왜 일을 당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은 부인은 집안 소제해 놓고 난 다음 빨간 가방을 들고 저녁에 해가 질 때까지 빨간 가방을 들고 설칩니다. 그런데 그날은 빨간 가방을 들고 막 설치고 다녔는데 마음이 불안해요.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겨날 것 같아요. 그래서 시간만 있으면 자꾸 방언기도를 했습니다. 한국기도는 해도 무엇이 좋지 않은 것이 생겼는지 모르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를 자꾸 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저녁이 되어서 집에 돌아와서 문을 열자마자 기겁을 했습니다. 응접실에 의복가지가 전부 흐트러져 던져 놓았어요. 도적이 들어왔는데 도적이 들어와서 귀중품을 찾는다고 옷을 전부 다 흩어 놓았어요. 그래서 아이구 이제는 쫓겨났다. 도적이 쫓겨난 것이 아니라 내가 쫓겨났다. 이제 신랑이 들어오면 무슨 말을 하겠느냐. 더구나 신랑이 월급 타서 준 월급을 은행에 갔다가 예금을 하라는 것을 심방을 하고 난 다음 시간 있을 때 가겠다고 옷 밑에 서랍에다가 넣어 놓았어요. 그러니 도둑놈이 유유히 그 돈을 가져갔을 것이다. 그래서 서랍을 열라고 하니까 손이 떨려서 서랍을 열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막 방언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 그 마음속에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신데 좋게 해주실 것이지 나쁘게 해주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하고 서랍을 싹 당기니까 다른 서랍은 다 열었는데 그 서랍은 안 열었어요. 돈이 고스란히 옷 밑에 놓여 있어요.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우리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라고 고함을 치고 춤을 덩실덩실 추고 주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라고... 저는 처음 알았냐구 하니까 처음 안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 집에 강도가 들어왔는데 옷을 다 흩어 놓고도 옷 밑에 있는 돈은 못가지고 갔습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아 놓으면 열 자가 없습니다. 좋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좋은 일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말했으니까 기왕 믿을 바에야 좋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마귀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좋다 나쁘다를 결정하는 것처럼 우리도 좋다 나쁘다를 결정해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대립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립한 인간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선악과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은 내가 아~ 이 세상 살면서 이것은 좋다. 나쁘다를 결정하는데 하나님이 아니야. 그것은 좋지 않다. 아니요, 내가 좋으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은 나쁘다. 아니요, 이것은 좋습니다. 하나님하고 대결이 되어요. 경쟁이 되어요. 이 우주에 경쟁자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로써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쁘다면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과 경쟁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그것을 따먹은 사람이 하나님과 동등된 인본주의에 서서 하나님과 경쟁하므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입니다. 원래 마귀가 천사장으로써 노래를 담당하는 루시퍼라는 천사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높여서 하나님을 위해서 찬양을 부르게 했는데 교만이 들어가서 하나님과 동등되게 했다가 쫓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도 자기처럼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코너에 몰아넣고 자기들이 우주를 점령하겠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대립한 인간 주체적 삶을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선언하고 만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
반드시 죽는다. 죽는다는 것은 생명을 빼앗아간다는 것입니다. 흑암 속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 결과로 죄와 사망이 그의 생애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므로 죄와 사망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마이너스 인생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100% 플러스 인생을 주셨는데 하나님과 동등되고 대립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신 것이 다 빼앗긴 것입니다. 영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인데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영이 죽어서 하나님과 만나서 직접 대화를 하고 사랑을 나눌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에 따라서 허물진 삶이 그들 인생을 끌고나간 것입니다. 모든 일에 허물진 인생이 많습니다. 술주정뱅이는 술 마시는 것이 허물 아닙니까? 거짓말쟁이는 거짓말 하는 것이 허물이고 도둑질하는 사람은 도둑질하는 것이 허물이고 하나님을 반역한 죄에다가 허물이 많습니다. 이 허물진 죄악을 없앨 수가 없어요. 영이 죽고 마귀의 유혹에 따라 허물진 삶을 살아서 마음이 고통스럽고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사는 것입니다. 평안하게 살지 못해요. 그리고 여성들은 어린 아기를 가져서 낳아서 기르는데 큰 고통을 당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병들고 고달프다가 결국은 죽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질적인 존재는 비참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훌륭하게 자랐다할지라도 죄책의 절망은 벗을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자기가 살아온 동안에 정의롭게 살지 않았다는 죄책이 항상 있습니다. 마음에 죄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허무와 무의미가 마음을 습격해 올 때 감당하지 못합니다. 보통 때는 인생이 재밌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인생을 살아보면 갑자기 허무와 무의미가 마음을 습격해 오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뭐냐.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느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하지만 좋을 때는 좋은데 조금이라도 어려움을 당하면 저는 저고 나는 나고... 역시 외로운 자리인 것입니다. 그 외로운 자리를 채울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인간은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에 처했으며 죽음과 무의 절망도 또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보고 저녁에 잘 때 혼자 자느냐. 같이 자느냐. 그래서 나이가 늙으면 귀찮기 때문에 혼자 자는 게 좋다. 그러면 근처에 누가 같이 자느냐. 귀찮아서 아무도 자는 사람 없다. 왜 자꾸 묻느냐고 하니까 나이가 늙으면 침대에 내려오다가 자빠져가지고서 머리를 부딪쳐서 죽는 사람도 많고 목욕탕에서 목욕하다가 미끄러져 넘어져서 죽고 난 다음에 일주일이 되어도 시체를 찾아본 적이 없고 그리고 밤에 갑자기 심장마비가 걸리든지 뇌경색이 되면 누가 병원으로 업고 가야 되겠는데 그런 사람도 없고 위험하니까 혼자 있지 말라고... 그런데 혼자 있는 것이 참 편하고 좋거든요. 옆에 누가 있으면 오히려 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눈을 감자마자 졸음이 안 오면 나는 틀림없이 죽을 것인데 올해 죽을 것인지 명년에 죽을 것인지 모르는데 죽을 준비가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몸이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진짜로 죽음이 오는구나. 일어나 앉아서 생각하면 인생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어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하루 아침에 태어났다가 하루 아침이나 저녁에 죽는구나. 생각하니 허무하기 짝이 없지요.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도 그런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데 안 믿는 사람이 어떻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도 열심히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하면서 갑자기 몸이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진짜 천당이 있을까? 헛수고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질문이 꼭 옵니다. 나만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와요. 그러면 사탄아 물러가라! 물리치고 성경구절 좀 읽고 기도하면 또 마음에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책의 절망이 있고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이 있고 죽음과 무의 절망이 있습니다. 성경에 사도바울 선생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는데 우리가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3. 희망을 플러스하는 복음
희망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돼요.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고 빼앗기지 아니하고 영원히 바라볼 수 있는 빛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의 빛이 되어서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있으면 어떠한 절망 가운데도 빛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나고 소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희망은 마이너스 당한 인간에게 반드시 주어야 되는것인데 이 희망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가 희망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플러스인생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플러스인생을 갖다 주느냐.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4장 18절로 19절에 보면 그가 요단강에서 세례 받고 난 다음 성령이 충만하여 금식기도를 하고 나와서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선언을 했습니다. 유대인의 강단에 들어가서 복음선언을 할 때 왜 내가 왔느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 그 다음에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에게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소망을 주고 행복을 주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우리보고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도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마음에 희망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더 많이 도덕과 수양을 닦아라. 율법을 지켜라.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그러한 명령을 하지 않으시고 주님은 너희들에게 내가 희망을 주기 위해서 왔다. 기쁨을 주기 위해서 왔다. 꿈을 주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이 뭡니까? 여러분, 가난한데 제가 여러분에게 복된 소식을 주러 와서 안녕하십니까? 왜 왔어요? 다음주일부터 교회 나오십시오. 교회는 왜 나가요? 밥을 줍니까? 옷을 줍니까? 떡을 줍니까? 그런 것 안 주지만 천당 가기 위해서... 천당, 천당 좋아하네? 가난한 생활에 천당을 전하려거든 천당의 부스러기라도 갖다 주고 그런 말 하시오. 당신이나 가시오.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이란 뭡니까? 연탄이라도 한 장 갖다 준다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지요. 교회가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 전하면서 연탄 한 장도 안 주는 처지에 무슨 복음을 전합니까? 말로 복음이 전하는 것입니까? 반드시 교회가 서면 교회에서는 있는 힘을 다해서 양식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연탄도 나누어 주고 옷도 나눠주고 할 수 있는 없는 자에게 있는 것을 주어야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 잊지 말아야 돼요. 예수 믿은 사람들은 천당에 갈 소식만 전해주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천당은 이 지상에서 나눠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발장에 구두 많지요? 그것 안 신는 구두 왜 거기에 두고 있습니까? 나누자구요. 더구나 우리 자매님들 이제 여름옷 간수하고 겨울옷 내놓을 때인데 옷장 열어보면 그 동안에 많이 쌓아 놓았어요. 별로 옷 안 산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옷장 열어보면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느냐. 나도 알 길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말은 하지 말아야 돼요. 그러나 저 자신 옷장을 열어보면 내 입던 옷이 너무 많아요. 그것 나누어야 돼요. 밥도 옛날에는 밥풀까지 다 주워 먹었는데 지금은 많이 남겨놓고 그냥 숟가락 놓잖아요. 옛날에 비교하면 우리 얼마나 잘 삽니까? 복된 소식이라는 것은 있는 것을 나누어 플러스인생을 만들어 줄 때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도 똑같이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기 때문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무슨 수양이나 닦고 도덕이나 행하고 율법이나 지키고 꾸중이나 듣고 그렇게 하라면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면 빼앗아갑니까? 줍니까? 주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독생자를 주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천국가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냥 네가 노력하고 수양, 도덕을 닦아서 천당에 오라 그 말은 아닌 것입니다. 너를 대신 해줄 독생자를 주셔서 예수님이 몸 찢고 피 흘려서 여러분과 나를 값 주고 사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성령을 받는 것도 여러분께서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고 간구하면 우리를 돕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1절로 6절이 얼마나 우리에게 복음의 근본을 잘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좌우간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 부족함이 많은데 왜 그런 소리하느냐 그러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없다니까 없는 줄 믿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있어집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살아온 과거사를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참으로 하나님이 도와주셨지요. 저는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천막교회에서 지금까지 목회에서 은퇴한 이 세월을 살펴보니까 팔자가 늘어졌어요. 정말 8자가 9자가 될 정도로 늘어졌어요.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것을 입으로 늘 노래처럼 부르고 다니십시오. 나는 집이 없다. 옷이 없다. 돈이 없다. 양식이 없다. 친구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 없다는 말을 노래하고 다니면 좋은 일이 생길 리가 없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나는 예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니 부족함이 없다. 먹을 것도 있고 입을 것도 있고 친구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모두 다 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 더 주시옵소서.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영혼이 우울하게 되면 참 기가 막힙니다. 나이를 먹은 사람은 꼭 한 두 번 체험합니다. 마음이 텅 비고 우울하고 버림받은 마음과 슬픈 마음이 마음에 생깁니다. 그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마음을 쾌활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을 소생시켜 주는 것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위험을 안 당한다고 볼 수 없어요. 위험한 인생길을 걸어갈 때 마음속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인도하고 지켜 주시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 어떤 굴에 들어갈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그 굴을 통해 터널을 만들어서 나가게 해주신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원수가 오면 원수 앞에 하나님이 진수성찬 차려 주시고 나를 안 버렸다는 증거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성찬 차려 주시고 하나님 성령의 기름 부음을 주셔서 일에 성공하게 만들어 주신다. 그러므로 원수가 꼭 나에게 나쁜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원수가 오면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진수성찬 차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풍성히 얻게 하려 왔으니까 무엇이든지 좋게 해주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해주시고 풍성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으로써 포로된 자에게는 해방을 준다고 했는데 뭐가 포로입니까? 죄와 세속에 포로된 사람, 질병과 저주에 포로된 사람, 죽음에 포로된 사람이 예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해방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를 흘릴 때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냄새는 짙은 향기였습니다. 죄가 없는 피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피는 다 죄로 얼룩진 피인데 예수님은 죄를 한 번도 지은 적이 없습니다. 죄가 전혀 얼룩지지 않은 주님의 짙은 그 피가 흐르면서 그 피가 나에게 핏 값을 내놓으라고 마귀에게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마귀는 그것을 볼모로 삼아서 우리를 포로로 잡고 끌고 다니는데 예수님이 놔라. 그 밧줄을 놔라. 내 핏 값을 내놓아라. 너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다 흘렸으니 값없이 흘린 피가 없다. 핏 값을 내놓아라. 예수님은 당신의 핏 값으로 여러분을 해방시킨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시키고 질병과 죽음에서 해방시킨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의 법은 마귀가 가지고 있던 법인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성령을 주셔서 해방시켜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해방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죄가 허물이 붙잡지 못합니다. 고독이 붙잡지 못합니다. 외로움이 붙잡지 못합니다. 다가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에 의지하면 예수의 피가 여러분을 자유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자유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술을 먹어보고 마약을 먹어보고 온갖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마음에 기쁨을 가져와 보려고 해도 기쁨이 오지 않습니다. 마음에 슬픔이 중심을 잡아버리면 고통스럽기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나가서 엎드려 기도하면서 마라의 쓴물을 달게 하신 주님, 맹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신 주님, 이 마음에 섭섭하고 외롭고 안타까운 마음에 소망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구하면 마음에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 이것 꼭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없으면 인생에 고통이 참 심합니다. 저는 옛날에는 일한다고 바빠서 그것을 못 느껴보았지만 이제는 그래도 나이 꾀나 먹었다고 그런지 약간은 마음에 공허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공허가 다가오고 섭섭하고 눈물이 나고 그럴 때마다 십자가를 향해서 나가서 부르짖으면 신기하게 십자가에서 생기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데리고 큰 골짜기에 갔는데 뼈가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백골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까 골짜기에 백골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거기 가서 보니 기가 막힙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하기를 인자야, 이 뼈들이 살아나겠느냐. 어떻게 그 뼈들이 살아납니까? 고개를 흔들면서 하나님이 아시지 나는 모릅니다. 사는지 안 사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면 이 뼈들을 향하여 생기가 들어와서 이 뼈 속에 들어가라 외쳐라.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왜 에스겔 보고 하라고 합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하실 일을 우리보고 하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생기를 향해서 생기는 성령 아닙니까? 생기야 이 뼛속에 들어가라! 뼈가 뚝딱뚝딱 소리가 나더니만 서로 뼈가 연결되고 좌우로 갖다 붙어서 나중에는 해골 질서와 조화가 된 해골들이 꽉 들어찼어요. 머리는 머리대로 붙고 팔다리는 팔다리로 붙고 붙을 데 다 붙어 조화와 질서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생기를 향해서 생기야 살아 일어나게 하라. 그 뼈다귀들이 다 살아 일어나더니 큰 군대가 된 것입니다. 이것 상징적인 이야기이지만 무엇을 의미 하느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여러분과 우리들은 마른 뼈다귀들인 것입니다. 마른 뼈다귀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좋게 보여도 마른 뼈다귀에요. 그런데 거기에다가 늘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하고 살면 마른 뼈다귀가 그렇지 않아도 마른 뼈다귀인데 불평, 원망, 탄식이 나오면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오늘날 이 세상에서 가정이 파괴된 사람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 자살한 사람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어찌 이것을 감당할지 몰라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 성령이 와 계시므로 성령이 명하여서 이 해골아 살아나라. 뼈다귀야 살아나라. 그렇게 하면 생기가 들어오면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목마른 자는 나에게 와서 마셔라. 그리하면 너희 뱃속에서 생수가 강같이 흐르리라. 뼈다귀만 남은 우리가 주님께 목말라 부르짖으면 생기가 생수가 되어 들어와서 우리가 살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의 생수가 들어와서 살아나면 그렇게 마음이 평안하고 기쁠 수가 없어요. 기분이 좋아요.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 예수 믿는 여러분에게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령을 가득히 부어주신 것인데 말을 해야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입 딱 다물고 있으면 안돼요.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성령이여 내 마음에 불어오시옵소서. 생기야 마른 뼈다귀 같은 내 가슴에 불어올지어다. 그러면 생기가 불어오는 것입니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생기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이 대낮에 물 길러 오는데 그 사마리아 여인을 보고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 그냥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진짜로 여러분 목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상을 초월한 생수가 넘쳐 흐르고 생기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돼요. 기쁘게 돼요. 강제로 하늘나라에서 내려오는 행복이 마음을 점령하고 기쁨이 마음을 점령하고 소망이 있어야 돼요.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고 나가는데 아무런 소망을 얻지 못하고 기쁨도 얻지 못하고 어깨가 축 늘어져서 들어왔다가 가면 나도 답답하고 너도 답답하고 하나님도 답답하고 괴로울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제가 그랬어요. 갑자기 마음속에 펑하니 구멍이 뚫린 것 같아요. 왜 그런지 몰라요. 외롭고 괴롭고 슬프고 빈 손든 것 같고 그럴 때 주님께서 이 말씀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너 마음에 외롭고 괴롭고 슬픔이 있는 것은 내가 그런 사람이 많이 이 세상에 있고 교회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할까를 가르쳐 주마. 생기를 명령하라. 그래서 에스겔서 37장을 펴서 읽고 난 다음에 생기야 조용기 마음속에 들어가라. 생기야 조용기 가슴속에 들어가서 불어서 뼈다귀를 살아 일어나게 하라. 하나님이여 생수를 주시옵소서. 그러니까 기분이 좋아지더라구요. 마음이 기뻐지고 소망이 차지고 즐거움이 생겨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큰소리 하는 것은 여러분도 저처럼 그런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몰라 주어도 하나님은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 값진 생수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른 땅에 시냇물 같습니다.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습니다. 여러분과 나를 어찌하든지 희망차고 꿈을 갖고 행복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다시는 메지마라. 죄악의 종, 슬픔의 종, 고통의 종, 질병의 종,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의 종,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 나에게 부르짖어서 나의 보혈의 능력으로 늘 자유와 해방과 기쁨을 누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눈을 열어서 내일을 바라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를 상속 받아서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눈에 안 보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무신론적으로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고 유물론적으로 물질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해답을 하나님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면 성령께서 우리 영안을 열어서 하나님을 알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깨달아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마음에 즐거움이 가득차지는 것입니다. 영적 시력을 잃은 자에게 거듭남의 은혜로 눈을 열어 거듭남의 은혜로 영적세계를 보게 하시고 영적 생각과 꿈, 믿음과 말로써 마음을 위로할 수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로 5절에 보면 “예수께서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어떻게 물과 성령으로 나느냐. 물은 회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무슨 회개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더니 이제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됩니다. 도와주십시오. 그게 회개입니다.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라는 것은 여러분 안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돌아서는 것을 말하는데 성령으로는 어떻게 나는 것입니까? 성령을 우리가 불러다가 내 마음대로 나를 거듭나게 하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광야에 불평하다가 뱀에게 물려서 이스라엘 백성이 죽어갈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서 달아라. 그것 쳐다보면 나을 것이다. 그가 빨리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고 뱀에 물려서 죽어가는 사람 쳐다보라고 하니까 쳐다보는 사람 다 나았어요. 오늘날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의 뱀에 물려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독이 들어서 죽어가고 있어요. 어떻게 해서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우리의 죄악과 질병과 고통을 다 해소했으므로 예수님을 쳐다보면 낫습니다. 그때 성령이 거듭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거듭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돌아서서 십자가 밑에 나와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으면 성령께서 임하여서 여러분을 거듭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거듭나서 이제는 사망의 나라, 마귀의 나라에서 하나님 아들의 나라로 옮겼습니다. 여러분은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로 14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여러분은 지금 영적으로 국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귀의 나라 국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므로 죽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페스포트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패스포트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나라에 국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어서 여러분이 패스포트가 있는데 그 패스포트가 뭔 줄 압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패스포트입니다. 세상 사람보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면은 부릅니까? 안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천국 패스포트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서 기쁘고 즐겁게 성령을 역사하여 주시고 도와주시므로 생기가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누구를 막론하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흑암에 권세의 공격을 받아서 외롭고 괴롭고 슬프고 탄식스럽고 사는 것이 무언가 고통을 당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패스포트를 사용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성령이 들어와서 생기로써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뼈다귀가 살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행복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역사하지 않습니다. 입을 열어서 성령님께 부탁하면 성령이 여러분에게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성령으로 우리 성도들의 마음속에 생기가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쁨을 주시옵소서. 평안을 주시옵소서. 즐거움을 주시옵소서. 용기와 희망을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 주신 줄 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 동안 눌린 자가 자유케 되는 은총을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눌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스트레스입니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습니까? 집안 식구들이 스트레스가 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스트레스가 될 수 있고 아내가 스트레스가 될 수 있고 자녀들이 스트레스가 될 수 있고 세상에 나가서 경쟁자들이 스트레스가 될 수 있고 우리는 어디에 가나 스트레스가 꽉 차 있습니다. 스테레스를 통해서 마음에 병이 걸리고 육체에 병이 걸리고 생활에 병이 걸리는 것입니다. 스트레스에서 해방될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마귀에게 눌린 사람을, 스트레스 당하는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주님이 스트레스를 고치는 의사선생인 것입니다. 주님은 다니면서 스트레스에 걸린 사람을 놓아 주어서 마음에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초등학교 다닐 때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보면 돌맹이 사이로 조그마한 풀이 얼굴을 약간 내놓는 것을 보고 돌에 눌렸구나 돌을 옮겨놓고 학교갔는데 돌을 옮겨놓고 학교갔다 올 때 보면 새파랗게 되어서 살아 일어났습니다. 돌을 옮겨버리니까 스트레스도 옮겨 버리니까 생명이 넘쳐난다 말이에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는 것 간단한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옮겨 버려요. 특별히 다른 것도 없는데도 주님이 이 스트레스를 옮겨 버리면 여러분 마음속에 생기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왼쪽 우리 장로님들을 보니까 얼굴에 스트레스가 많이 걸려 있어요. 우리 평신도 보다도 스트레스가 많네요. 나중에 주님께 스트레스 옮겨 달라고 하세요. 스트레스 옮겨달라고 하는 것 부끄러운 것 없습니다. 스트레스에 눌려 있으면 고통스럽고 괴로우니까 나보다 신앙이 좋고 기도 잘하는 사람에게 손 한번 얹어서 스트레스에서 놓여나도록 기도해달라고 하면 간단한 기도를 받고도 마음에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과 능력을 주신 것도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들에게 해방시켜 주어서 행복을 갖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아이구 나 같은 사람이 무슨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모자른 점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마귀를 멸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시행 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마귀가 들끓는데 그것을 내쫓지 못하고 그냥 말만 살아서 왔다갔다만 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보고 벌벌 떠는 존재인 것입니다. 권세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권세를 꼭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시대는 은혜의 시대인데요.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 있을 때 천진난만한 시대에 살았고 그 다음 아브라함 때는 양심시대에 살았고 그 다음 이스라엘 4천년 동안은 율법시대에 살았고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는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값없이 우리가 공짜로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리 하나님 앞에 구원받는 것이 은혜의 선물로 공짜로 받은 것입니다. 은혜, 얼마나 좋은 말인지 모릅니다. 내가 아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공짜로 주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선물입니다. 은혜의 선물. 구원은 주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데 내가 나를 보더라도 이 죗덩어리야 이 원수 같은 놈아 네가 무엇 하겠노? 그렇게 생각할 것인데 주님은 은혜의 해를 전파하러 왔다. 내가 온 것은 너희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너는 값없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죄와 허물을 예수님이 대신 다 짊어져서 몸 찢고 피 흘려서 그 대가를 지불해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주님은 구원을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 이 구절은 외워 놓으면 참 좋은데 못 외우면 나와 같이 읽어 보십시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에게 난 것도 아니고 행위에서 난 것도 아니고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셨으니 얼마 안 있으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 크리스마스 선물은 여기에 비교도 못하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6절로 7절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늘나라 상속을 얻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하나도 안돼요. 성령을 부어 주셔서 성령이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시고 기도도 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끝까지 믿게 해주셔서 하늘나라 상속자가 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결 론>
주님은 부족함이 없이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처럼 하셔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역사하신 것은 주님이 몸을 찢고 피를 흘리셔서 여러분에게 은혜의 선물을 가득히 채워 주시고 가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 이루어서 천국가신 주님께서는 주님의 자리에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령은 다른 보혜사로써 예수님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일을 행하시고 계시면서 여러분과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영광을 취하고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그 정면에 성령이 여러분을 품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의 보혜사가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항상 곁에 계신 분이 보혜사인 것입니다. 성령 보혜사가 있으므로 성령의 도우심을 항상 구하십시오. 성령은 여러분 마음을 가득히 채워 놓고 여러분 마음에 생기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마른 뼈다귀가 되어 있지 마십시오. 마른 뼈다귀 골짜기에 살지도 마십시오. 목마르지도 마십시오. 성령의 생명의 은혜가 차고 넘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사망의 골짜기와 원수의 공격 같은 마이너스 사건이 연속되는 세계에서 마이너스는 당하고 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마이너스 인생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끝없이 플러스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플러스 여러분 생활에 플러스를 해서 조금이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좋아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플러스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이너스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마귀가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므로 마이너스를 가져오지만 예수님은 플러스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이너스 원수 마귀는 물러갈지어다. 어제 저녁에 그렇게 기도하고 잤지요? 아마 3분의 1은 기도했을 것이고 3분의 2는 잊어버렸을 것이라. 저도 잊어버리려다가 기도하고 잤어요. 원수 귀신아 나를 억압하지 말고 물러가라! 나에게 마이너스 인생을 가져오지 못한다 . 성령 플러스 하나님이 와 계시니 너는 물러가라! 우리가 말로 해야 순종을 합니다. 가만 내버려 놓으면 마귀가 안 쫓겨 나가요. 쫓겨나가라고 명령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말을 해야 성령이 오셔요. 성령님 내 마음에 생기를 채워 주십시오. 생수를 채워 주십시오 하면 오냐 오냐. 플러스 생수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입술의 말로 묶이고 입술의 말로 사로잡힌 바 되는 것입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우고 하늘에서 풀면 땅에서 풀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이 효과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입술을 통해서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술을 통해서 마귀를 물리치고 입술을 통해서 주님을 청해드리고 입술을 통해서 흑암의 세력을 내어 쫓고 입술을 통해서 여러분의 모든 광명한 것을 받아들이십시오. 내 입의 말이 살리고 죽이는 역사를 베풀도록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쉴만한 물가로
시 23:1-6 / 한태완목사
헬라 피루스 왕의 친구이자 철학자인 시네아스가 피루스 왕에게 질문했습니다.
“로마를 침공해 승리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이탈리아 전체를 지배하게 됩니다”
시네아스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이탈리아 전체를 지배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왕은 다시 대답했습니다.
“시실리도 침공하고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도 침공해 마케도냐 전역을 지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게 됩니까?”
“그 후에는 집에 가서 목욕하고 잠자며 즐겁게 쉴 것입니다”
시네아스는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지금 목욕하고 잠자며 쉬면 안됩니까.지금도 얼마든지 쉬고 즐겁게 지내실 수 있는데 왜 그 많은 전쟁을 벌인 후 쉬시려 합니까?”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인생이 너무나 피곤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예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그 분께서 주시는 쉼을 누리십시오.
인생의 쉼표. 사람에겐 일이 필요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휴식도 필요합니다. 기계도 쉬지 않고 쓰기만 하면 쉬 마모가 되어 고장이 나게 됩니다. 기계를 오랫동안 잘 쓰는 비결은 적당히 사용한 후 적당히 쉬게 하고 때 맞춰 기름도 쳐주는 것입니다.
자동차로 말하자면, 가장 위험한 차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입니다.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하면 사고가 납니다. 인생의 쉼표는 인생의 브레이크입니다.
경제 성장과 향락산업의 발달로 도처에 사치성 레저가 붐을 이루고 대형호텔과 음식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지만 그런 곳은 잠깐 쉴 곳은 될지 모르나 내 영혼이 영원히 쉴 곳은 못됩니다.
현대인의 참 쉼터! 그것은 이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우리가 참으로 쉴 곳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마11:28- 29)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 37- 38)는 주님의 초청입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 때 선교사들을 다 내쫓고 성경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덩샤오핑은 중국에서 기독교를 장사 지냈다고 선언했지만, 성령까지 그 땅에서 내쫓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중국 땅에 지하 교회를 남겨 두셨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 보면 1982년 둥이라는 한 자매가 여자 죄수들만 600여 명 갇힌 감옥을 천국처럼 변화시킨 간증이 나옵니다. 감옥에서 새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성경을 원하자 성경을 몰래 갖고 있는 자매들은 낮에 무려 10시간이나 힘들게 노동한 후에도 밤에 다른 죄수들이 다 잠든 틈을 타 이불 속에서 전등 빛을 비춰 필사적으로 성경을 노트에 베끼고 또 베껴서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이렇게 손으로 베낀 성경이 한 권 한 권씩 각 호실로 전해지면서 자매들은 목마른 사슴처럼 밤에 이불 속에서나 화장실에 가는 짧은 시간을 이용해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해 감옥은 성령의 역사로 점차 놀랍게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지금도 말씀과 기도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은혜의 단비를 쏟아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배부른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에 굶주린 자들을 찾으십니다. 기도에 목마른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부으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굶주림과 목마름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와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포도와 젖을 사라”(사55:1)
힘든 일을 하면서 앞을 향해 계속해서 가다보니 어느 새 지쳐버린 내가 있었습니다. 조용하고 편안한 쉼이 너무나 그리웠습니다. 세상어디에도 그런 쉴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곳, 내가 있는 그대로 내 모습 이대로 맞아주는 쉴만한 물가를 찾았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시던 주님이 함께하시는 곳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세상은 슬픔, 어려움, 근심, 걱정, 두려움으로 가득차고 안식과 평안이 없지만 주님의 사랑과 날개 아래에서 우리는 편안히 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늘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찬송가419장, (통) 478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1.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불어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 거기서 편안히 쉬리로다
2. 주 날개 밑 나의 피난처 되니 거기서 쉬기를 원하노라 세상이 나를 못 위로해주나 거기서 평화를 누리리라
3. 주 날개 밑 참된 기쁨이 있네 고달픈 세상 길 가는 동안 나 거기 숨어 돌보심을 받고 영원한 안식을 얻으리라
<후렴> 주 날개 밑 평안하다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겨버리고 주님께 나아가 그분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빌2:5)만 있어야 합니다. 근심과 고통, 무거운 짐은 다 벗어버리고 예수님 마음에 들어가 참된 안식을 누리고 이 땅에서 놀라운 평강을 누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 23:1-6 / 정용섭목사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23편 1절에서 6절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러한 내용이죠. 시편 23편 1절에서 6절까지 아주 짤막한 내용입니다. 일단 제가 먼저 읽을테니까 여러분은 따라서 눈으로 보십시오.
[1]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2]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5]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잘 아는 거죠. 같은 목소리로 내용을 생각하면서 읽겠습니다.
[1]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2]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5]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아마 시편 전체 150편 중에서 가장 많이 애독되는 시편이 바로 이 23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유대인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분명히 23편을 가장 많이 읽는다고 볼 수 있어요. 찬송가도 그러고 어린이들도 많이 외울 정도로 아주 익숙한 그러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23편이 우리들에게 가장 친근하게 가장 많이 읽혀지는 이유는 보기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두 가지예요.
하나는 23편의 언어가 친근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시편 그 단어들을 보면 조금 울적하기도 하고 아주 힘들다고 하는 자기 하소연이기도 하구요. 또 어떤때는 심지어 자기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는, 다 없이 해달라고 하는 그런 단어들이 있고 그러한 부담스런 부분들이, 내용들로 들어가면 거기에도 깊은 영성이 있습니다만 일단 이 단어들이 풍겨주는 느낌으로만 본다면 이 시편 23편은 앞에 있는 시편들하고는 전혀 다르게 따뜻하고 평안해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두 번째 23편의 내용이 종교의 진수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예요. 뭐 시편 전체가 성서신앙을 바르게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는 있습니다만 여기에는 조금 더 진수에 가깝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내용은 우리가 차츰 공부하겠습니다만 그냥 1절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아쉬울것 없는 참된 만족을 이야기하잖아요. 늘 아쉬움가운데 있는데 종교적 깊이에 들어가게 되면 아쉬울 것 없는 정말 만족스러운 실질적인 그런 삶이 아쉬울 것 없는 어떤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의 진수라고 할 수 있구요.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런 것들이 1절에서 6절까지 아주 여기에 중요하게 그리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또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어요. 내용이 종교의 참맛을 우리들에게 전달해준다. 두가지를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시편 23편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깝게 읽혀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는 이거는 어린이들도 외우고 가깝게 하기 때문에 천진난만한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어떤 감수성 이런 데 있는 신앙을 표현한 거다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착각입니다. 이거는 청소년들의 감수성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살이를 다 거친, 인생의 여러 가지 풍파를 다 거진 나이가 들어서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관조한다고도 볼 수 있고, 그리고 이건 전체적인 것을 조망한다고 볼 수 있고, 그런 관점인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어린이들 청소년들 신앙이 아닌, 원숙한 삶의 우여곡절을 다 거친 노련한, 어떤 면에서 표현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나온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6절까지 한 절씩 내용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편 23편1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제목을 이렇게 붙이면 좋아요. 주님은 나의 목자, 야훼는 나의 목자,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하는 이 목자. 독일어로 히르케,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부르면서 이 시편을 인제 쓰고 있습니다. 이 목자라고 할 때는 어떤 개인적인 관계라고 보다도 공동체 전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양의 무리잖아요. 목자가 양 한 마리 키우는 것 봤어요? 수 백마리, 수천마리 무리되어 있는 것처럼 이 목자라고 단어를 통해서 이스라엘 전체 무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이런 것들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호칭을 하면서 하는 말이 아쉬울 것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 어떠세요. 이러한 신앙이 실질적인 어떤 것이었을까? 아니면 아니었을까 하는 것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을 것 입을 것 부족했다고 하는 것 다 알죠? 또 양도 사실은 이스라엘 땅이 척박하기 때문에 물과 풀이 늘 부족해요. 사실 이거는 신앙적인 문제입니다. 그 당시는 목마르고 배고픈데 지나놓고 주욱 보면 부족한 것 없었다 이러한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은 현재 당장 목마르고 좀 배가 고파도 이미 지나간 것으로 생각해서 이 삶을 돌아보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 너무 크게 확대되어서 여기 있는 진을 다 빼는데 신앙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노래를 하듯이 이미 다음 시간에 가버리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것은 어쩌면 인생의 노하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80살 되었다고 생각해 보아요. 여러분들이. 난 그렇게 생각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 내가 5년후에 몇 년후에 죽을때가 된 나이가 되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을 어떻게 회고할 것인가 그런 생각을 종종 합니다. 현실적으로 이렇게 살기는 하겠지만 이거는 현실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사람을 비디오로 돌려보듯이 하는 그러한 삶이다라고 하는 거죠. 만일 그렇게 된다면 실질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렇게 돌아볼 수 있다면 힘을 뺄 수 있죠. 이것 때문에 아등바등 하지 않을거 아니겠어요. 이미 지나간 필름을 돌아보는 건데. 이런 눈을 어떻게 갖겠어요. 이건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돌아볼때만 가능한 거예요. 이것이 말 장난은 아닌거예요. 이런 현실 삶이 고되니까 이걸 모면하기 위해서 그냥 일부러 생각만 그렇게 하자 아니라 세상살이 정말 그런거거든요. 그걸 우리가 뚫어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주 작은 어려운 어려움 때문에 우리 영혼까지 손상되는 우리 삶 자체가 헝클어지는 그러한 일들이 부지기수죠.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그렇게 삽니다. 아쉬울 것 없다 이런 영적인 상태가 필요합니다. 사실은 곰곰이 따지고 보면 아쉬울 것 없죠. 아주 절대적인 궁핍, 그러니까 북한 주민들, 정말 힘든 주민들, 우리 바로 육이오 직후라든지 이럴때 말고 지금과 같은 세대에서는 사실은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프지만 않다면 최소한도로 건강하기만 한다면 노동을 해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아쉬울 게 없다. 풍족하다. 실질적인 삶인데 상대적인 빈곤함에 너무 많이 휘둘려 있는 것 같습니다.
1절 후반절과 2절에 굉장히 그림과 같은 장면이 묘사되고 있어요. 푸른 풀밭에 놀게 하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한다. 구약 성서학자 제가 참고한 시편을 주석한 사람의 말을 빌리니까 여기에 히브리어의 고유한 뉘앙스가 있다고 하네요. 그런 것들을 독일어나 다른 말로는 번역해 낼 수 없다고 합니다. 히브리어만이 요 구절에서 말하는 게 있는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곳으로 집중된다고 해요. 이게 무슨 말인지 설명이 더 필요하기는 한데요. 시간에 대한 이해가 히브리인들에게는 독특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늘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넓혀서 생각하잖아요. 따로 따로 다른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히브리 언어 구조속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안에서 하나로 결합된 어떤 그러한 세계를 내다본다는 것입니다. 시간에 대한 이해가 그들에게는 독특한 거예요.
이렇게 상상하는 것이 좋아요. 제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 하고 연계되는 건데 나중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혹은 하나님품에 안겨서 혹은 다른 말로 하자면 궁극적 생명에 참여해서, 또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한다면, 예수의 부활생명에 참여해서 우리가 지금 몸을 갖고 살았던 이 지구안에서 살았던 삶을 다시한번 되돌아 본다면 결국 과거로 된 게 아니라 하나님안에서 현재가 된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안에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히브리인들이 볼 때 영원한 현재라고 하는거예요. 이게 확 와닿지 않을거예요. 우리는 늘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요. 과거가 바로 현재, 영원한 현재, 하나님안에서 미래 완성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흘러간 시간들이 과거가 아니라 그냥 어떠한 방식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 안에서 융해가 되어서 영원한 현재가 된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제가 칼국수 먹었는데요 국수안에 밀가루도 있고 고춧가루도 있고 멸치 국물 이런 것이 다 포함되었지만 위속에 들어가서 다 소화되어서 영양소가 되어서 하나가 되버리잖아요. 영양분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았던 살고 있는 시간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라면 융해가 되어서, 위속에서 소화가 되어 하나가 되듯이 영원한 시간속에 들어간다고 하는겁니다. 그러한 뉘앙스가 이 히브리어 안에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늘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주신다고 하는 미래이지만 동시에 현재인, 미래가 현재 안에 들어오는 그런거죠.
3절, 3절 후반절에 보면 목자 자신인데 그 분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 분은 바로 우리의 길이다. 인도하시는 길이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요. 요건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하나님앞에서 새로운 시간이해와 더불어서 시간의 신비인데 우리가 살아왔던 삶도, 먼 미래에 혹은 과거인 동시에 현재인데, 미래와 현재를 하나로 생각해야 되어요. 하나님의 시간에 들어가게 되면 오늘 우리가 살아왔던 모든 삶의 것들이 하나님이 인도 하는 길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거는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요. 다시 한번 제가 이렇게 표현해야 되겠네요. 먼훗날, 제가 먼훗날이라고 하는 것은 종말론적인 시간입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시간입니다. 그 훗날에 우리의 삶을 회상하면서 우리는 결국 이렇게 이해하게 될 거예요. 주님께서 나의 인생 길을 인도하셨다. 그러한 것들을 시인들을 미리 경험한 것이죠. 얼마나 놀라워요. 우리는 그러한 것을 모르고 매일 아등바등하면서 살잖아요. 왜 이럴까 왜 저럴까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안되면 불편하구요. 모든 것을 자기 주관성에 다 두드려 맞추려고 하니까 세상이 헝클어져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길을 생각해야 된다니까요. 그러면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이예요. 지금 당장 돌맹이에 넘어지는 것 같아도 그러한 것들도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들로 오게 됩니다.
이러한 영성이 우리들에게 필요한데요. 이게 잘 안되요. 사실은 잘 안되요. 왜 안되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아실 겁니다.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건데 자기가 너무 중요합니다. 제가 자주 쓰는 단어로 나르시시즘, 자기연민이예요. 자기 속에 딱 갇혀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달걀처럼, 새가 알속에 숨어 있잖아요. 안에만 있으면 따뜻해요. 그러나 완전한 생명이 아니거든요. 우리는 알안에 갇혀있는 상태로 모든 세계를 판단하려고 하니까 이거는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거예요. 모두가 자기를 힘들게 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거예요. 그냥 좀 힘빼고 내버려두고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는 길이다 맡겨야 되고 그걸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신경성 병도 걸리고 인간 관계도 정말 나빠지고요. 인간을 이용하려고 그러잖아요. 자꾸만. 그리고 자기의 생명도 손상당하고 이게 악순환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이었다. 그러한 영적인 성숙한 자세를 조금 유지해야 되겠습니다.
그 문제를 시편기자는 4절에서 자기가 젊었을 때 경험한 것을 다시 한 번 회상하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이 계시오니 무서울 것이 없어라.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 여러분 이거 우리 인생에 찾아와요. 이거는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어요.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뭐 시집장가 잘가서 사회적인 직분도 갖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여러 가지 면에서 그런데 불치의 병에서 걸린다거나 사업이 망한다거나 그런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좋은 쪽으로만 살게 되면 어느 순간엔가 큰 허무에 휩싸이게 될 거예요. 인간은 생활환경이 좋은 것만 갖고는 인간은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이 영적인 동물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이거는 아주 실질적인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회피하거나 자극적인 무엇을 산다거나 취미 생활에 아주 집착한다거나 아니면 권력을 얻기 위해서 비인간적인 행동을 한다거나 그렇게 하긴 하거든요. 그건 인제 악순환이죠.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가 오게 되는데 이 시편기자가 그런 경험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요거는 다윗의 시에 좀 가깝기는 해요. 다윗이 직접 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다윗의 삶에 이런게 많이 있었잖아요. 다윗의 삶을 반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막대기와 지팡이. 하나님의 막대기와 하나님의 지팡이가 우리의 삶에 활동하는 거거든요. 문제는 그것을 우리가 못보는 거지요. 하나님의 막대기과 지팡이를 못 보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가 못 볼까요? 이게 여러분 우리가 잘 생각을 해야되요. 불치병에 걸렸다고 하면 삶이 완전히 정말적인 것 같죠. 그렇지 않아요. 정말 자기의 생명을 포기하면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불치병에 걸렸다 진단받으면 정말 이 땅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게 되면 놀라운 평화를 얻게 됩니다. 나도 개인적으로 그러한 불치병 진단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처음에는 좀 힘들겠지만 난 괜찮을 거라고 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길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평화를 얻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이 땅에서 50년 더 사는 거나 아니면 조금 적게 사는거나 시간적인 계산은 차이가 없는 거니까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있다 그걸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못보는 이유는 지금 우리앞에 놓여있는 것이 너무 크게 부각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게 다르게 보일 수 가 없는 거죠. 이게 참 비극인거에요. 예. 이 시편기자가 아무 걱정 할 것 없다. 1절에서는 아쉬울 것 없다 이야기하구 4절에서는 걱정할 것없다 이야기하구요.
여기서 한단계 더 나가서 5절에 보면 놀라운 표현을 합니다. 원수들 보라는 듯. 원수들은 누구일까요? 니까짓게 잘되나 보자. 원스들은 늘 많죠. 어쩌면 우리의 친구가 원수가 될 수 있어요. 겉으로는 뭐 좋다 좋다 하면서도 흥 그래봐야 너가 어떻게 되겠냐? 사람들은 늘 경쟁하니까 그런 옆에서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을 뜻하겠죠. 그걸 내가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요.
여기서 시편 기자가 놀라운 단어들을 세 가지 이야기합니다. 보이죠. 상, 기름, 잔 요 세가지 단어만 갖고도 우리가 묵상을 하기 시작하면 많은 내용들이 들어올 수 있겠네요.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네요. 상 기름 잔 상을 차려주셨다. 무슨 뜻인가요? 잔치상 같은거죠. 하나님이 우리를 중요한 손님으로 초대하셔서 많은 먹을 거리를 올려놓은 상을 차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빈 말이 아니죠. 독일어로 성서주석한 사람이 써 놓았던데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손님으로 초대해주시는 가스트게버, 영어로는 아마 host라고 하나요. 초청해 주는 주인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하나요. 하나님은 이 땅위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풍성한 것을 상에 차려 주시고, 잔치상을 베풀어 주셨고, 그리고 기름을 머리에 발라주셨다. 여성들이 좋아하는 향수를 뿌려주는 거예요. 그리고 잔. 포도주잔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당시에는 포도주가 모든 면에서 중요한 요소였는데요. 전체적으로 풍요로운 향수 냄새를 풍기면서 먹을게 많은 상다리,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음식과 그리고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포도주잔, 이게 아주 문학적인 용어들을 통해서 시편기자가 하나님이 우리를 손님으로 초대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보여요? 이게 안보이면 우리는 불평하면서 살게 되는 거죠. 우리가 손님이라는 사실을 놓쳐 버리는 거죠. 늘 주인처럼 생각해서 주인대접 안해주나. 금만 안해줘도 불평하죠. 나만 이렇게 손해보나. 이게 반복되지 않습니까? 손님이라고 하는 것과 더불어서 이미 우리 주인은 너무나도 풍성한 것을 우리들에게 준비해주셨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뭔지는 제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되겠죠. 그거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없는 사람이예요. 오늘 저녁에 먹은 한 그릇 먹은 밥, 혹은 국수 이게 얼마나 놀라운 우주론적인 사건인지. 이거는 우주에서 우리만이 이렇게 먹을 수 있는 아주 놀라운 먹을거리고 그러한 감격이거든요. 이것이 너무 지천으로 널려 있으니까 우리는 그게 얼마나 값진, 우리 주인이 베풀어주신 상인지, 상에 올려진 음식인지 그걸 모르고 살아가요. 이렇게 좋은 믿음의 식구들끼리 만나서 예배드리고 대화하고 가족을 꾸리고 하는 이러한 모든 생명현상들, 이런 모든 순간순간들까지 이런 것들이 다 놀라운 하나님의 상이며 기름이고 잔이다.
마지막으로 6절에 시편기자가 모든 것을 결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은총과 복에 겨워산다. 은총과 복 이거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여기서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 팔자 늘어졌다 그 차원이 아니라는 것 알죠.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와 같은 순간들이 많이 있었어도 인생을 다 뒤돌아보니 이게 다 하나님의 은총과 복이었다. 그게 다 하나님의 시간안에서 그 은총으로 융해가 되버린거죠.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마지막 구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영원히 주님집에 거하리로다. 이것이 매일 예배에 참석한다. 교회당에 와서 산다 그런 뜻은 분명히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죠. 생명의 신비와 환희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과 일치되어서 살아가는 삶, 그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죠. 이게 얼마나 시편 23편이 중요한지. 이거를 제발 그냥 좋으니까 그러려니 그런 사람이나 그렇겠지 나는 지금 힘든 일이 많아서 안된다 이렇게 하면 그건 참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이미 우리들 앞에 하나님이 많은 거를 차려주셨는데도, 준비해주셨는데도 다 그런 것을 전혀 은총과 복으로 여기지 못하고 온통 자신의 개인적인 불안과 불만, 힘든 것 그런 것에만 우리의 삶이 소진된다면 우리는 진주를 받은 돼지와 같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제목이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했어요. 오늘 저도 새롭게 말씀을 준비하면서 늘 듣고 외우고 찬송으로도 많이 부르기도 했는데 새롭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 이게 보통시가 아니구나. 하는 그러한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시편 23편 기자의 영적인 깊이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는 아주 오래전 어떤 시인의 놀라운 신앙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바로 우리 삶의 목자이십니다.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인줄로 믿습니다. 비록 우리의 삶 앞에 이런 저런 해결해야 될 문제들, 크고 작은 문제들, 혹은 음산한 골짜기와 같은 일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모든 길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인줄을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지팡이와 막대기가 되어주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우리가 걱정하겠습니까? 오늘 시편 기자처럼 아쉬울 것 없다는 그리고 걱정할 것 없다는 그러한 신앙을 저희들에게 허락해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나의 목자 나의 하나님
시편 23:1-6 / 윤영택목사(옥스포드교회)
시편을 읽는 중입니다. 150편의 노래로 이루어진 시편은 개인의 신앙을 고백하는 시로부터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경험한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 사랑과 공의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시는 읽어지는 것이 아니라 운율에 맞춰 불러지는 노래입니다. 구약의 옛성도들은 이 시편을 낭낭한 목소리로 혹은 각종 악기를 반주하며 노래하였습니다. 어떤 노래는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감사하며 그 거룩하신 이름을 높이는 웅장한 찬송시입니다. 우리가 예배 중에 부르는 찬송의 많은 곡들이 시편에 나오는 가사에 현대인의 가락을 붙인 노래들입니다.
또 어떤 시는 노래하는 사람의 안타까운 심정을 쏟아내는 애절한 호소입니다. 시인이 만난 위급함과 구원의 요청이 그 속에 담겼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정의가 속히 실현되기를 간절히 구하는 외침이 있는가 하면, 죄로 말미암아 겪는 고통이 너무 두렵고 괴로워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죄를 토설하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고통스런 몸부림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는 운율에 따라 읽으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가 됩니다. 이런 기도의 시를 가장 많이 쓴 사람은 역시 다윗입니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자주 가졌고 기쁠 때나 슬플 때,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 그 모든 어느 상황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살았던 성도였습니다.
전체 150편 중에 다윗의 이름으로 지어진 시가 73편이니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읽은 시편들은 대부분 다윗이 노래한 곡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읽은 23편은 시편 중의 시편으로 모든 시편들 중에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노래입니다. 우리 나라 기독교인들만 애송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성도들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부르는 대표적인 찬양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가리켜‘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 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한번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블레셋과 싸우는 전쟁터에 형님들이 먹을 음식을 싸들고 갔다가 때마침 이스라엘 군대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며 위협하던 골리앗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 중에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을 본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겠다고 용감히 나섰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보고 실망하여 ‘너는 어린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인데 네가 어찌 그와 맞싸우겠느냐 안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때 소년 다윗은 사울 왕에게 고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의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습니다. 사자나 곰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습니다. 그러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저 블레셋 사람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나를 건져내셨으니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삼상17:33-37) 하고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사울이 보기에 아직 어린 소년이었지만 아버지의 양떼를 치면서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여러 번 체험했던 다윗은 믿음과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목자의 책임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아버지의 양을 잘 돌보았던 성실한 목자였습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 달려가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새끼 양들을 구한 것처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골리앗의 손에서 나를 건져주시리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같은 목동도 이만큼 양들을 사랑하는데 우리 하나님은 나와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실까 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자신감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여러 시편에서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반석, 나의 요새와 산성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험한 인생길에서 때마다 일마다 함께 하시며 지켜주셨던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시편들 중에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비유하는 23편은 모든 노래들 중에 하나님께 대한 고백과 감사를 가장 적절하고 확실하게 표현하는 노래로 손꼽히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의 양들은 영국의 드넓은 초원에서 한가롭고 자유롭게 풀을 뜯는 양들이 아닙니다. 목자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언제나 곁에 있어 길을 인도하고 안전을 지켜줘야만 하는 양들입니다. 목자가 이른 아침에 우리의 문을 열고 양들을 불러내면 밤새 편히 쉬고 힘을 얻은 양들이 늙은 양으로부터 새끼 양까지 기지개를 펴고 목자 앞으로 모여듭니다. 밤새 이상이 없는지 양들의 건강상태를 확인한 목자가 앞장 서서 길을 떠나면 양들은 오늘의 양식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 목자의 뒤를 따라 나섭니다.
그날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양들은 잘 모르지만 목자는 그곳을 알고 길을 떠납니다. 자기 양들을 배불리 먹이고 안전하게 쉬게 할 좋은 장소를 마음에 두고 앞장서 갑니다. 양들은 잘 모르지만 목자는 어디에 푸른 풀밭이 있고 편안하게 물을 마실 수 있는 개울이 있는지 압니다. 양들 중에 나이 많은 양, 목자와 오래 지낸 노련한 양들은 목자의 마음을 짐작하고 목자보다 한발 앞서 늘 다니던 길로 가기도 합니다. 그러면 다른 양들도 앞선 양들의 꼬리를 보고 묵묵히 따라갑니다. 목자와 양들의 마음이 통하기 때문에 그날의 목적지를 향해 잘 가면 그대로 앞서 가게 놔누고 좀 천천히 가라는 신호를 보내면 됩니다.
그러나 만일 목자가 정한 길과 다른 방향으로 가면 목자는 양들이 추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뒤따르라고 신호하며 성급한 양들을 제지하기도 합니다. 양이라고 모두 순한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양들은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잘 따르지만 간혹 떼를 쓰고 고집 부리는 양도 있습니다. 목자가 잠간 방심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사이에 동료 양들을 부추겨 이상한 길로 이끌어 가는 양도 있습니다. 그런 날에는 이탈한 양들을 단속하느라 큰소리가 나기도 하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비하느라 길에서 시간을 허비해야만 합니다. 몸이 약하고 고단한 양들이 한낮의 더위를 피할 시간도 그만큼 부족해집니다.
한눈을 팔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홀로 길을 잃는 양들도 있고 끝내는 사나운 짐승에게 물려가는 양들도 있어 목자가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경험이 부족하고 아직 어린 양들은 엄마 양을 졸졸 따라다니기 때문에 엄마 양이나 어른 양들이 엉뚱한 길로 가지 않는 한 사고를 잘 치지 않습니다. 문제는 주로 머리가 좀 굵어진 양들입니다. 경험이 좀 있다고 자신하고 교만하여 목자의 인도를 거부하고 뿔이 달려 단단해진 머리를 흔들며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목자가 애를 먹기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양들도 있지만 때때로 걱정을 끼치는 문제 양들도 나옵니다.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했으니 나는 하나님의 양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이 목동 출신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한 마리의 양이었다는 말이지요. 다윗이 지나온 삶을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매일마다 나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셨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일생을 보면 알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던 시절도 있었고 목자의 뜻을 어기고 어그러진 길로 들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힘들게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이 죽음의 길에 빠진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엄하게 꾸중하시면서라도 다윗을 바른 길로 이끌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영혼을 사랑하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하신 목자의 이름과 명예를 위해 끝까지 바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목자는 목자의 명예가 있습니다. 이것이 삯군과 목자의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예순님이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삯군은 목자가 아닙니다. 양들의 안전과 건강보다는 품삯에 마음이 더 있어 하루 일당을 위해 대충 시간을 떼우고 해지는 시간만 기다리는 일군일 뿐입니다. 선한 목자는 삯군과 다릅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가 맡은 양들이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 번성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을 목자의 명예로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삯군은 늑대가 나타나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나지만 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을 위해 달려가 목숨을 걸고 싸우며 사자와 곰의 발톱으로부터 건져냅니다. 자기 양들을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내는 것처럼 목자의 이름이 빛나는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다윗은 목자의 자존심과 명예를 귀하게 여겼던 성실한 목동이었습니다. 몇마리 안되는 아버지의 양들을 기르는 나도 양들을 위해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데 나를 기르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얼마나 대단한 목자이신가? 나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완전하고 든든한 목자의 양이 되어 그분의 보호와 돌보심 아래 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하고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이런 확신과 감사로부터 나오는 고백입니다 .
다윗이 하나님의 양이라면 우리들 역시 그분의 양입니다.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들 중에는 목사 양, 장로 양, 집사 양도 있고 평신도 양과 어린양들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다로 찾아오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돌봄과 양육이 필요한 한 마리의 양이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맡겨주신 양들을 먹이고 치는 목자입니다.
하나님의 양들 중에는 베드로처럼 목자에게 위임을 받아 양들을 돌보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들이 그 사명을 받아 하나님의 양들을 말씀으로 먹이고 돌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목사도 교회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장에서 참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양입니다. 어떤 때는 신앙경험이 조금 있고 길을 좀 안다는 목사 양이 목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동료 양들을 엉뚱한 길로 이끌 때도 있습니다. 교회의 목사도 소그룹을 맡은 목장의 목자도 피곤하여 지치고 무기력하여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다른 양들이 잘못된 길로 따라가다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완전한 목자, 참 목자는 목사도 아니고 목장의 목자도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목동 출신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목자의 심정을 더 잘 이해하고 신뢰했던 사람입니다. 저 역시 주님의 돌보심을 받는 양이지만 주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돌보는 목사로서 목자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편안하게 지낼 때보다는 걱정거리가 생기고 일이 순탄하지 못할 때 우리를 기르시며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래서 저도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시니 나에게 부족함이 없다’했던 다윗의 고백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어 주시니 여러분은 언제나 푸른 초장에만 누워 지냅니까? 팔레스틴 들판이 블랜하임 팔래스 초장처럼 넓고 평평한 곳이 아닙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가려면 어떤 날은 험한 골짜기도 지나고 메마른 광야도 지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양들도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죄의 유혹이 찾아오고 사람들에게 억울한 오해를 받고 비난도 받으며 외롭고 험한 길을 나홀로 걷는 것 같은 아픔도 통과합니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파 밤잠을 설치고 괴로와 하는 시간을 지나기도 합니다. 이러다 죽을 것만 같고 모든 것이 허무하며 슬프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양들이 지나야만 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들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 골짜기 길에 목자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제 힘으로 싸울 능력이나 사망의 길을 벗어날 재주가 없습니다. 길을 함께 걷는 목자가 그때마다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들을 보호하고 지시합니다. 양들은 목자의 인도를 따르기만 하면 언젠가 사망의 길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어린양 다윗이 걸었던 인생길이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고 망할 것처럼 느껴지던 사망의 길을 벗어나면 곧 하나님이 준비하신 잔치상이 나를 기다립니다. 그것도 나를 해치려고 달려들던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식탁을 멋지게 차려놓으시고 나를 주인공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그리고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시며 내 잔이 철철 흘러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의 평생토록 나와 함께 할 것이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어찌 즐겁지 않을까요? 이런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니 어찌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인도하는 목자입니까? 여러분의 인생길을 이끄는 목자가 누구입니까? 혹시 여러분 자신은 아닙니까? 아니면 친구로 가장하여 은밀히 다가와 감언이설로 미혹하는 유력한 권력자나 영향력 있는 재벌가는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그 사람들로 인하여 부족함 없이 풍성하던가요? 그 사람이 여러분의 생명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이라도 함께 가던가요? 여러분의 인생을 그들에게 맡길 자신이 있습니까? 나의 친구인 줄 알았는데 오늘은 얼굴을 바꾸고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거짓으로 자신을 감추고 속이며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나를 이용하는 사람은 목자가 아니라 삯군일 뿐입니다.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요10:11)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즐겁게 따르는 행복한 양들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분들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조금만 더 견디며 목자의 뒤를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선한 목자 우리 주께서 여러분의 곁에 계시며 여러분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걷고 있는 험한 길, 외로운 길, 고단한 길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지레 겁먹고 뒤로 물러서거나 주저 앉지만 마시기 바랍니다.
선하신 목자 나의 하나님을 의심없이 신뢰하신다면 그 목자의 손에 들린 지팡이와 막대기의 인도를 잘 따라가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에 마련된 풍성한 식탁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은혜를 주 안에서 마음껏 누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