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PC에서 작성하였습니다. 폰에서는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자료 수집 및 편집 : 권오신>
아래 이야기는 KBS FM에서 5일 동안 시리즈로 방송한 내용을 편집자가 녹취한 것입니다. 약간의 편집을 하였으며 ( ) 안에 참고 사항을 삽입하였습니다.

20세기의 프리마 돈나(Prima Donna : 오페라의 제1여자가수를 말함. 제1남자가수는 프리모 우오모<Primo Uomo>)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1977), ‘100년에 한 번 날까 말까한 목소리’라는 찬사를 듣는 소프라노이다. 20세기 최고의 화려함을 구가했던 오페라의 여왕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의) 연인이었던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Aristotle Sokrates Onasis, 1906∼1975)가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인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하는 등 불행과 배신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사람이기도 하다. 마리아 칼라스(이후 ‘그녀’)는 그리스계 이민 가정의 딸로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그녀는 우리가 아는 화려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녀의 전기인 《마리아 칼라스, 내밀한 열정의 고백》에서는 어린 그녀가 이렇게 그려져 있다.
‘마리아는 외로운 아이로 자라났다. 언니가 학교에 가고 어머니가 우울증 발작이 날 때면 하루에도 몇 시간씩 혼자 방치되었다. 학교생활도 행복하지 않았다. 안경을 끼고도 약한 시력은 골칫거리였다. 게다가 그녀는 상당한 과체중이었고 성격도 내성적이었다. 친구들도 거의 없었거니와 집에 돌아가면 변덕스러운 어머니의 히스테리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에게 가장 큰 기쁨은 조용히 앉아서 몇 개 안 되는 레코드판을 축음기에 걸고 음악을 듣는 것이었다.
아이에게는 힘들었을 그 모든 조건 속에서도 빛나는 게 있었다. 바로 그녀의 재능이었다. 어린 그녀는 7살 때부터 음악 듣기를 좋아했고 노래와 청음 실력도 남달랐다. 그녀의 엄마 또한 가난과 심한 우울증 속에서도 어린 딸을 위한 음악 수업에는 적극적이었다. 언니(큰딸)의 피아노 선생님을 졸라서 그녀에게도 음악 수업을 받게 하였다. 나중에는 더 좋은 음악 교육을 시키겠다는 생각으로 자매를 데리고 그리스로 돌아간다. 그리스에서도 엄마는 당시 가장 유명한 발성 코치인 엘비라 데 이달고(Elvira de Hidalgo)를 찾아가서 그녀를 맡긴다. 덕분에 그녀는 아테네 국립음악원에 입학한 후 정식으로 성악 공부를 시작했고 스승으로부터 혹독한 가르침을 받으며 학생으로 오페라 무대에 서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꿈은 그리스의 오페라 무대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무대에 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오디션에서는 자꾸 탈락했고 부모님은 늘 싸우다 이혼했다. 그녀 자신은 식탐과 비만을 주체하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가난이 그녀를 크게 괴롭혔다. 20대 초반의 마리아 칼라스, 그녀는 그 나이 또래의 여성들이 관심을 갖게 마련인 연애나 친구 등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오직 노래와 무대와 간식이 관심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오페라 ‘나비부인(Madam Butterfly, 푸치니 작곡)’의 주인공 역을 제의받았을 때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배역을 포기했다. 80kg이 넘는 몸으로 15살의 게이샤(藝者, 조선시대의 기생과 유사) 역을 맡는 건 오히려 웃음거리만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토록 원하던 무대이고 주인공이었으니 자신의 상태가 어떻든 일단 받아들일 것 같은데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결단한 것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기회가 찾아든다. 1948년 그녀 나이 스물여섯,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의 도시)의 오페라(벨리니 작곡 ‘노르마’를 지칭) 무대에서 (주인공인) 노르마(Norma)를 노래하게 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피렌체에서, '그녀가 불속으로 뛰어드는 노르마를 노래한 순간부터 오페라의 역사는 다시 씌어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소프라노의 음역을 다시 규정지었으며 현실과 극을 혼동 시킬 만큼 몰입된 연기는 오페라의 드라마틱한 매력을 새로 창조했다.’ 이런 극찬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런데다 그녀에게는 연인이자 후원자도 찾아든다. 바로 사업가 바티스타 메네기니(Battista Meneghini)였다.
그녀는 후에 그와의 만남에 대해서 ‘만난 지 5분 안에 바로 이 사람’이라는 고백을 했었다고 한다. 당시 메네기니는 25살의 그녀보다 거의 서른 살이 많은 50대의 신사였다. 여자들의 호감을 살 외모는 아니었지만 음악과 예술 분야에 탁월한 안목과 세련된 감각을 지닌 사업가였다. 베로나(Verona,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원형극장(Ampitheater)의 재정적인 후원을 할 만큼 부유한 사업가였고 그녀의 노래를 듣고는 바로 그녀에게 반한다.
하지만 그는 그때까지 여자를 제대로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 그 감정을 달리 표현하지 못한 채 오직 그녀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데만 마음을 썼다. 그러자 둘 사이를 위해서 그녀의 엄마와 언니가 나선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극성에 가까울 정도로 그녀의 음악 수업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엄마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커지자 그녀에게 음악을 그만 두고 점원으로 취직하라고까지 할 정도였으니 부유한 사업가이자 후원자인 메네기니를 놓칠 수 없었다. 그들은 앞장서서 메네기니를 만났고 다음날 메네기니는 그녀에게 드디어 청혼을 한다. 남편보다 서른 살이 적은 스물여섯 살의 새 신부인 그녀를 메네기니 집안에서는 반기지 않았다. 그녀를 젊고 자랑스러운 소프라노 가수로가 아니라 오직 그들 집안의 상속 재산을 가로챌 지도 모르는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메네기니 집안이 이제 거의 파산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결혼 후 일 년 만에 알게 된다. 남편 메네기니의 사업도 적자 상태여서 그는 오히려 그녀의 메니저 역할로 사업상의 적자도 메꾸고 자신의 다른 가족들까지 돕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메네기니 집안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모욕한다는 것을 안 그녀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메네기니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후에 거의 모든 힘을 걸다시피 다이어트에 몰입해서 자그마치 34kg의 몸무게를 줄인다. 최고의 목소리에 최고의 외모까지 갖춘 그녀는 밀라노(Milano,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주의 도시) 라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 /위 사진)에서 네 개의 오페라를 소화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는 오페라 무대만이 아니라 모든 대중들로부터 사랑받는 20세기 최고의 디바(Diva, ‘여신’의 뜻. 오페라에서는 '최고 인기를 누리는 소프라노 가수'를 지칭)가 된다. 그때 그녀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당대 최고의 부호가 있었다. 바로 그리스의 선박왕으로 불렸던 오나시스였다. 그녀의 전기를 쓴 앤 애드워드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오나시스 인생 대부분은 거래로 점철되었었다. 어떤 때는 나라 전체가 거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가 거느리는 거대한 그룹은 선박 뿐만 아니라 부동산, 항공, 정유 그 밖에도 인상적인 투자 목록들을 망라하고 있었다. 한 여자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개념은 그가 보기에는 대단히 그리스인답지 못한 덕목이었다.’ 오나시스는 그녀만을 위한 화려한 파티를 열어준다. 공연 때마다 빨간 장미꽃바구니를 선물로 보냈고 자기 소유의 초호화 요트 크리스티나(Cristina)호로 그녀를 초대한다. 그곳은 윈스턴 처칠이며 모나코의 국왕 부부를 초대해서 식사와 휴식을 즐기는 장소였고 존 F. 케네디 부부가 첫아이를 잃고 상심에 젖어 있을 때 재클린 케네디에게 자유롭게 드나들게 해준 세계적인 유람선이었다. 그녀는 오나시스와의 사랑을 위해 드디어 메네기니와 헤어지고 만다. 그녀는 새로운 연인 오나시스를 위해서라면 노래도 화려한 경력도 다 포기하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오나시스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 그 다음 콘서트 일정을 취소하고 싶어 할 정도였다. 오나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동안 오나시스는 너무나 쉽게 사랑에 빠졌다가 너무나 쉽게 여자를 떠났었지만 그녀에게는 달랐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이번에는 진짜 사랑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오나시스는 웬일인지 그녀에게 청혼하지 않았다. 그녀도 오나시스도 모두 그 전의 결혼생활을 정리한 상태였고 법적으로 정식으로 청혼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한편으로 불안하고 답답했지만 언젠가는 청혼하겠지 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의 사랑이 어느덧 10여년이 다 되어가던 1968년 어느 날, 그녀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오나시스가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아내였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한다는 소식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잔인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분노하고 절규했다. 그런 그녀에게 오나시스는 이 결혼은 재클린 케네디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업상 필요해서 하는 거라고 마음만은 여전히 그녀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해 10월 20일, 오나시스는 마침내 미국에서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식을 올린다. 재클린 케네디는 결혼식 내내 밝고 환하게 웃고 오나시스는 긴장한 듯 다소 근엄한 표정이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각, 파리에 살고 있던 그녀는 늘 그와 함께하던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늘 함께 돌아가던 집으로 혼자 돌아간다. 그 처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하려고 애썼다. 유명한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Pier Paolo Pasolini, 이탈리아)의 영화 '메데아(Medea)'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했고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Giuseppe di Stefano)와 세계 공연 투어를 갖기도 했다. 그 투어의 마지막이 1974년 우리나라와 일본의 공연들이었다. 세계적인 사업가 오나시스에 대해서는 10년 동안 연인이었다가 배신당한 그녀만이 아니라 미국인의 실망과 반대도 컸다. 자신들의 사랑을 받던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그리스의 부호와 결혼한다는 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오나시스가 미국 사업에서 암초에 부딪치자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미국의 명문가인 케네디가의 재클린과 결혼하려 한다는 비난도 컸다. 실제로 두 사람은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불화설에 시달린다. 사람들은 재클린의 지나친 사치 때문이라고도 또 오나시스가 케네디 가문에 걸맞지 않아서라고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 혼자 남은 마리아 칼라스는 음악과도 결별한 채 파리에서 혼자 은둔하다시피 지낸다. 그러다가 오나시스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2년 후인 1977년에는 그녀 또한 심장마비로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나의 쉰 셋, 너무나 이른 죽음이었다.
마리아 칼라스, 그녀는 자신의 생애 동안 소프라노로서 최고의 찬사와 명예를 누렸다. 프리마 돈나로서 디바로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준 노래들은 단연 지상 최고였다. 그녀의 간절한 열정과 재능의 결과였다. 하지만 음악 못지않게 그녀의 내면이 간절히 갈구했던 것은 열렬한 사랑과 안정된 결혼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어머니와는 나중에 의절할 정도까지 사이가 나빴다. 메네기니와의 결혼에서도 그의 사업과 집안 사람들을 돕는 경제적인 가장 역할만 떠맡다시피 했다. 오나시스를 만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사랑을 받는다는 생각이었는데 그 사랑이야말로 엄청난 배신으로 끝난다. 한 공연에서는 열아홉 번의 커튼콜(cuatain call)을 받을 만큼 무대 위에서는 열렬한 사랑을 받았지만 막상 자신의 생애에서는 사랑받지 못한 채 쓸쓸한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녹취 내용은 여기까지)
<‘Casta Diva(정결한 여신이여)’ / 데뷔 콘서트, 파리 국립오페라극장, 195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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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반갑네 우리 까페가 오늘 내일 하더니 자네 글로 다시 소생하는 듯 하네 ! 앞으로 카페에 힘과 활력을 불어넣어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