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년을 보내며
김여정
오후 5시가 되면 어김없이 나는 장구봉에 오른다 건강을 위한 유일한 운동이
요, 자연과 동화되어 마음을 다스리는 유일한 수양의 방편이기도하다.
서산으로 넘어가는 석양의 아름다움과 계절 따라 피고 지는 이름 모를 풀꽃향기 그리
고 산새들의 지저귐은 하얀 쌀밥에 볼그스레 물든 팥 맛처럼 감칠맛 나는 감미로운 보너
스다.
갑신년을 보내는 마지막 날에도 나는 장구봉에 오르고 있다.
이 산에 오른 지도 벌써 10년이 훨씬 넘었나 보다. 그 세월 속에 묻어버린 내 삶의 애
환의 그림자가 저 서산의 그림자처럼 길게 내 가슴에 드리우는 건 오늘이 한해의 마지막
날이어서 일까?
그 동안 희비가 엇갈렸던 크고 작은 지난 일들이 스크린에 그림자처럼 지나간다.
막내딸을 시집보내고 그 딸이 학부모가 되었고, 큰손자가 엊그제 초등학교 입학한 것
같은데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 한편 반평생을 모시고 살아온 어머님이 노환으
로 고생하시다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님의 빈자리가 너무도 허허로움에 세상사가 허망
하기만 하였는데 벌써 2주기 기일을 그제 지냈다.
10년도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었다. 기쁜 일 궂은일로 다사다난했던 지난날이 바람에
흔들리는 저 갈대처럼 힘들게 살아왔던 세월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는 세상을 떠
난다. 그러나 모두 내일을 모르는 오늘을 살고 있지 않은가.
또 10년 후에 내 주변의 모든 환경이 어떻게 바뀌고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도 이
자리에 앉아 지난날을 돌아볼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29
이산의 경치가 사계절마다 다르듯이 내 생활에도 많은 변화 속에서 살아왔다. 꽃 몽
우리 벙그는 화창한 봄날처럼 희망이 부풀던 날 가슴 뜀이 있는가하면, 축복의 여린 연
두 잎이 무성했던 계절, 희망을 달성하려는 열정을 다하며 용기를 잃지 않았던 세월도
있다 노력의 결과는 무능력함과 마음의 빈곤으로 미치지 못하고 시행착오를 일으켜 좌
절하며 한탄도 했었다.
가슴이 시리도록 파고드는 을씨년스런 바람이 휘몰아쳐 낙엽이 이리저리 난무한다.
나목으로 서있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새 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어라 지저귀더니 둥
지를 찾아 가버리고, 고독의 의자에 홀로 남아 지난날의 고난과 아픔으로 채워진 내 삶
에 앙금을 해넘이에 실어 털어 버리고 한해를 버리려한다. 하루가 저물어가고 한해를
마무리하는 노을빛에 물들어 가는 내 모습이 안타까워 눈앞이 흐려진다. 한해의 끝자락
이기 때문이 아닌, 내 인생이 저물어가고 있음이리라. 우리인생도 크게 보면 자연의 일
부가 아닌가.
구름사이사이로 금싸라기처럼 부서져 내리는 갑신년의 마지막 햇살을 폐 속으로 깊
숙이 빨아들여 깊은 곳에 쌓으며 이제 내일 아침에 떠오를 을유년의 햇살을 심호홉할 빈
공간을 마련해둔다 송구영신(送舊迎新)! 갑신년의 아쉬움에 미련을 두기보다는 을유
년의 기대와 각오를 새로이 한다. 그것이 일신일신(日新日新) 우일신(又日新)이다.
2005/23집
첫댓글 지난날의 고난과 아픔으로 채워진 내 삶
에 앙금을 해넘이에 실어 털어 버리고 한해를 버리려한다. 하루가 저물어가고 한해를
마무리하는 노을빛에 물들어 가는 내 모습이 안타까워 눈앞이 흐려진다. 한해의 끝자락
이기 때문이 아닌, 내 인생이 저물어가고 있음이리라. 우리인생도 크게 보면 자연의 일
부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