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메타스퀘어
마산은 한때지만 70년대 전국 7대 도시 반열이었다. 수도 서울은 당연히 특별시고 부산은 직할시였다. 이후 도시화로 이촌향도가 되면서 대구와 대전에 이어 광주와 인천이 광역시가 되었다. 내가 청소년기를 지나는 무렵이었다. 박대통령 고향에는 전국 인재를 모으는 공업계 고등학교가 생겼다. 국비로 학비는 물론 생활비를 제공받던 특수목적 학교였다. 나도 진학해볼까 머뭇거렸다.
그 당시 마산은 섬유산업 기지였다. 여성의 손길에 직조되는 노동집약형 산업이라 팔도에서 주경야독하는 여중생들이 모여든 실업계 고등학교가 있었다. 섬유공장과 함께 수출자유지역 공단으로 산업 인력이 급속히 팽창했다. 울산이나 창원에 본격적인 공단이 들어서기 전이었다. 이후 우리나라는 반도체나 자동차나 조선업으로 주력 산업이 바뀌면서 마산은 침체기에 들게 되었다.
앞서 마산을 언급함은 그 시절 손위 두 형님이 마산으로 고등학교 유학을 나가 있어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았다. 북마산 회원동 거리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떠오른다. 플라타너스는 내가 다녔던 시골 초등학교 교정에서 봤던 나무였다. 넓은 잎사귀에 수세가 좋아 매년 낙엽이 지면 가지를 잘라주었다. 겨울을 날 때는 가지가 잘린 채 몽글몽글한 모습으로 이듬해 새순이 나고 새잎이 났다.
세월이 흘러 내가 마산과 가까운 곳에 이십여 년째 살고 있다. 마산은 진해와 함께 창원으로 통합되어 광역시에 준할 만큼 도시 규모가 커졌다. 일부 지역은 낡은 주택들이 재개발되어 고층아파트가 들어섰다. 차도가 확장되면서 플라타너스 가로수도 사라졌다. 진해는 예전 명성 그대로 벚나무 가로수야 변함이 없다. 신도시로 출범했던 창원에도 벚나무 가로수는 화사한 꽃을 피웠다.
도시 거리 가로수는 미관과 함께 여름이면 녹음으로 보행자에게 그늘을 드리워주는 기능이 있다. 차량이 다니니 공해에도 강한 수종이어야 한다. 요즘은 어느 도시에서도 플라타너스를 볼 수 없다. 플라타너스가 가로수에서 퇴출된 데는 봄날에 피는 꽃에서 꽃가루가 날리면 알레르기를 일으켜서다. 여름에 넓은 잎사귀로 드리운 그늘은 좋으나 낙엽이 지면 환경미화원이 치우기도 버겁다.
요즘 가로수는 다양해졌다. 김해 장유 신도시에는 늦은 봄날 하얀 꽃을 피우는 이팝나무 가로수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사는 창원에는 거리마다 특화된 가로수들이 심겨져 세월 따라 나이테를 더해가고 있다. 진해 못지않게 벚나무가 많다. 양곡 일대와 공단 배후도로를 비롯해 창원대로다. 교육단지 벚꽃도 널리 알려졌다. 창이대로는 은행나무가 많고 원이대로에는 느티나무가 우거졌다.
창원을 대표하는 가로수에는 메타스퀘어도 뺄 수 없다. 광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24호 국도가 담양을 지날 때 보던 미끈한 메타스퀘어다. 남이섬에도 메타스퀘어 거목들이 있다던데 거기는 아직 가보질 못했다. 창원의 메타스퀘어도 수령이 오래 되었다. 메타스퀘어는 가로수 가운데 키가 가장 높이 자라는 나무다. 대부분 가로수는 낙엽활엽수인데 메타스퀘어는 침엽수로 바늘잎나무다.
메타스퀘어는 사림동 주택지에서 사격장으로 오르는 길에 높이 솟아 우뚝하다. 도청 앞에서도 볼 수 있다. 용호동 도지사 관사 근처도 우람하게 자란다.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 외동반림로에도 볼 수 있다. 종합운동장과 문성대학 인근도 높이 자란다. 충혼탑 사거리 일대도 마찬가지다. 메타스퀘어는 다른 가로수보다 월등이 높이 자라 쉽게 눈에 띄었다. 창원은 가히 메타스퀘어 도시다.
메타스퀘어는 잎이 늦게 돋는 편이다. 늦은 봄 연두색으로 물드는 잎이 나왔다. 청청한 잎으로 여름을 넘기고 늦가을 서리가 내려야 단풍이 물들었다. 겨울에 든 섣달 초순이다. 은행나무가 느티나무와 같은 가로수들은 나목이 되었다. 그럼에도 메타스퀘어는 갈색 바늘잎을 달고 있었다. 거제에 머물다 스무날 만에 창원으로 복귀했더니 메타스퀘어 나무에서 계절감을 느낄 수 있었다. 20.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