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니가 좋았다
울산박물관 산업사관에 전시된 포니자동차를 만나자 30년 넘게 잊고 지냈던 나의 애마가 떠올랐다.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에 성공신화를 기록한 포니를 끌고 다녔던 날들의 추억이다. 사는 곳 부산과 근무지 울산을 오가기 위해 중고차 포니Ⅱ를 구입한 건 당시 형편으로선 사치라면 사치였다. 통근버스를 두고 굳이 돈을 들여 승용차를 구입했으니. 그랬던 첫 애마가 환생이라도 한 듯 전시관 중앙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포니는 현대자동차가 개발한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모델 자동차로 1975년 처음 생산되었다. 당시까지 해외기술에 매달리며 완성차 조립단계에 머물던 자동차산업에 포니는 큰 변화를 일으켰다. 1990년까지 다양한 시리즈로 생산된 포니는 연비와 내구성이 좋아 해외에서도 인기를 끄는 바람에 수출효자상품으로 국가경제에도 기여했다. 포니Ⅱ는 1982년 출시되었고 전시품은 5도어 해치백모델로 1986년 생산되었다.
일부 부품만 교체했을 뿐 신차 때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했다고 박물관 근무자는 밝혔다. 오래 전 호주와 뉴질랜드를 여행하면서 그 나라 사람들은 차를 사면 보통 삼십 년은 기본으로 탄다는 말을 듣고 놀란 적이 있었다. 섬나라에서 철재로 만든 자동차는 해풍의 영향으로 부식도 그만큼 빠를 텐데 국민들의 근검절약정신이 높다는 걸 알 수 있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에서는 곧 마이카시대가 열릴 거라는 홍보를 해댔다.
하지만 난 삶에 지친 국민들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그냥 해보는 소린 줄 알았다. 그러나 마이카시대는 빈말이 아니었다. 포니가 나오자 직장 내 사람들도 술렁거렸고 우리 부산지역에서만 두 명의 마이카 족이 단박에 생겼다. 얼마나 차를 몰고 달리는 게 꿈이었으면 그리도 빠르게 차를 구입할 수 있었을까. 난 마음속으로 그 선배들에게 축하를 보냈는데 싸늘한 시선도 없지 않았다. 무슨 돈으로 샀느냐고 본사에서 특명감사까지 들이닥쳤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나.
지금 생각하면 보통 난센스가 아닐 수 없었다. 울산 근무 당시 우리 사무실에 자주 출입하던 업체 대표가 들려주던 에피소드도 떠오른다. 석유화학단지 내 대기업에 입찰이 있어 찾아가노라면 정문 근무자는 고급승용차에겐 깍듯이 경례를 붙이면서 바로 통과시키지만 중형차 밑으로는 일일이 세워서 꼬치꼬치 묻고 신분증까지 받아서 보관하더라는 것. 그 바람에 그는 빚을 내서 비싼 차를 샀다기에 난 그에게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그때로부터 30년 세월이 흐른 요즘도 겉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폐습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다른 나라에 비해 고급외제차가 많이 굴러다니는 걸 목격하게 된다. 박물관은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도 알려주고 있었다. ‘글로벌 자동차의 문을 연 포니’란 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1967년 현대자동차가 설립되어 코티나를 조립 생산했다. 그러나 코티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류파동으로 포드와의 공동투자계획이 무산되는 위기를 맞았다.
1974년 정부는 장기 자동차산업 육성계획을 발표하지만 당시 원천기술이 없었던 현대자동차는 오히려 위기였다. 그런데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이러한 난관은 우리나라 고유 독자모델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였고 이는 포니 탄생으로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고 특히 회사 내에서의 반대가 컸던 포니의 개발은 한마디로 도박이었다. 현대자동차의 기업정신은 이처럼 무모한 도전이었다.
막대한 투자비용은 물론 경쟁업체의 비아냥거림을 극복하고 노력한 결과 독자모델의 꿈을 이루었다. 아름다운 디자인과 성능이 좋은 자동차 포니가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포니 디자인은 ‘이탈디자인’의 수장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맡았다. 그는 폴크스바겐과 알파로메오 로터스 포드 머스탱뿐 아니라 니콘의 F4카메라까지 디자인했던 디자인계의 거장이었다.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120만 달러를 디자인료로 지불했다.
그의 디자인은 직선적 느낌의 박스형태 구조와 선적인 느낌의 조화가 특징이다. 간결하면서 단순한 디자인으로 화려함보다는 기능과 실용적 측면을 디자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결과 포니의 간결하면서도 기하학적인 디자인은 당시 국제적인 자동차 디자인 흐름에 한 획을 긋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받았다. 국내 최초 독자모델 포니는 첫해 만대 넘게 판매하며 당시 중형차가 대부분이던 국내 자동차시장에서 사십 퍼센트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그야말로 포니가 우리나라 소형차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포니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외국모델을 부품으로 들여와 조립생산 판매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을는지 모른다. 포니는 현대자동차 최초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모델이었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은 두 번째, 세계적으론 16번째로 만들어진 고유모델이었다. 뿐만 아니라 포니는 엄청난 추진력으로 개발을 시작한 지 겨우 1년 만인 1974년 10월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 첫 선을 보였다.
그러곤 1975년 12월 울산에 연간 12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세운 뒤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포니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해치백 스타일에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다른 자동차회사 제품에 비해 뛰어난 성능과 디자인을 자랑했던 포니는 1976년 7월 한국 최초로 에콰도르에 수출하면서 국내시장 점유율도 60%를 기록했다. 기존의 포니Ⅰ보다 곡선을 강조한 형태의 디자인으로 생산된 포니Ⅱ가 1982년 히트했다.
그러면서 1984년 캐나다로 수출했고 이후 후속모델 엑셀은 북미시장에 진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포니는 이후 1990년 단종 될 때까지 66만여 대가 판매된 기념비적인 모델이었다. 당시의 산업역군들은 처자식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었다. 비록 내손에선 일찍 떠나갔지만 전시장 포니를 대하니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살아났다. 세계자동차 역사를 뒤져봐도 포니처럼 이렇게 단기간에 뛰어난 디자인과 성능의 자동차를 찾을 수는 없었다.
포니는 당시 세대들의 열정과 의지로 만들어진 기적 같은 차량이었다. 쉼 없이 가족들을 위해 달려온 우리 세대들처럼 포니도 칠팔십 년대 경제개발시대의 아이콘으로 함께 뛰었다. 다부진 외모처럼 뚝심 하나로 시대의 모진 풍파를 이겨낸 포니는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모델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33년 전 나를 떠난 포니를 회상하노라니 기업 설립자의 두둑한 배짱과 도전정신이 떠오른다. 그의 어록은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안 되면 되게 해야지. 해보기나 했어?”